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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완성_웹진 같이가는 기분_정훈 평론가
정신의 편력, 시의 지평을 향하는 말의 도정(道程)
그때와 지금, 나와 너, 혹은 우리와 그대들이라 생각하거나 말을 할 때면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묵직한 것들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숨겨진 것들, 아니면 또다시 떠오르면서 누추해지거나 쓸쓸해진 자신과 교감하면서 주고받는 상대는 어디에 있을까. 말을 하게 되면 말이 끄집어내는 풍경과 기억들이 두루마리처럼 펼쳐진다. 그런데도 단단하게, 그리고 너무나 두터워 깊이조차 가늠하기 힘든 시간의 지층이 있다.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모든 것들의 질량이 우리 모두를 지면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다. 시인의 생각은 하염없는 무정형이어서 다만 흐를 뿐이거나 뒷걸음을 칠뿐이다. 풍경처럼 눈자위에 스며드는 너, 아픔을 주고 울음마저 메말라버린 채로 눈 밖 사방에 회칠한 투명한 점들처럼 너는 나를 시간의 군함 위로 밀어 넣는다. 소리들이 잦아들며 찾아오는 적요 속으로 빠져들어 간 적이 있는가. 거기에는 무음(無音)의 소란들이 정신을 괴롭히거나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몸 사위를 보게 된다. 청록의 저녁이다. 말은 스스로 몸속 깊이 말려 들어가고, 이때쯤이면 오랫동안 쟁여 있던 기억 속의 말들이 한낮의 허기진, 말려 들어와 태아처럼 움츠린 말들을 대신하여 고개를 쳐들게 되어 있다. 시의 말, 쉰 기억들이 컥컥거리며 탄생하는 때가 있다.
그때 너와 내가 처음으로 흘러들던 그 浦口, 고요는 짙었다 갈등 후의 평화는 砲口가 식어간다는 메타포, 멀미를 견딘 나는 차츰 생경한 바닷새 그림자에 익숙해져 갔다 다가올 시험이 의식을 가늠했고 파도는 제 몸끼리 부딪치며 멍들었다 나는 갈매기의 고도만큼 외로웠고 너는 자꾸만 매혹적이어서 불안했다
그 후 언제였을까 네 하얀 스커트에 얼룩이 번졌을 때
나는 다시 또 포구를 떠다녔다 네 아닌 k와 함께였다
= 안민, 「Noiva 건너편의 그녀」 부분(웹진, 『같이 가는 기분』, 2021. 7. 5.)
“그때”와 지금, 그리고 기억 속 일들과 시를 쓸 때의 시인 손가락에 흐르는 말들 사이에는 무수한 시간의 결락과 망각, 혹은 넘쳐흘러 어디로 빠져들어 갔는지도 모를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하게 되면 촘촘했던 그물망까지 통과한 기억마저 영락없이 생각의 벽으로 호출당하고야 마는 법이다. 그럴 때 시인은 혼곤한 말의 돛단배를 밀치기 시작한다. 그랬다, 그랬다, 그랬다 도장을 찍듯 말들의 인장을 찍는다. 당연한 말이다. 한편, 시인이 보여주는 한때의 서사는 구겨진 청춘의 심장을 들추는 것처럼 녹슬어 있다. 녹슬어 버짐처럼 문드러진 시간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바 아니나, 현재 지면에서 부는 바람으로 들춰진 옛 기억들로 하여금 위 시는 창백하다 못해 초조함을 안겨다 준다. 이 초조함은 말이 빚어낸 무늬요, 말이 긷거나 길어 올린 시간의 옆면이다. 시인은 한때 이야기 속 등장인물처럼 세계의 표면에 놓여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세계의 표면에 놓인 존재는 시간 속에서 건조해지거나 얇아간다. 착상은 늘 기억 속에서 지워진 듯, 메마른 이야기의 결말이 남긴 희미한 증표를 통해서 일어난다. 그래서 여리다. 여린 것들은 말들의 잔등에 올라타서 거대하고 강렬한 서사로 거듭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리면서 강렬한 이미지가 선사하는 비극이나 희극, 혹은 맹숭맹숭한 존재들 사이의 교감일지라도 마냥 흘려보낼 수 없는 것이다. 들여다본다. 그러면 거기에 시인의 말이 향하는 지점에서 피어오르는 의미의 질감이 있다. 이 질감이란 게 사실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지만, 더러 읽을수록 생각과 감성에 배게 하는 물질성을 품고 있다. 착상이 착상을 부르는 게 아니라, 착상이 독자의 의식 표면을 마른 땅 위를 적시는 봄비처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기능일까. 이렇게 본다면 시는 전혀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시’로써 무엇을 캐낸다면 필경 실패하고 만다. 읊조리는 말들의 음색과 이미지는 독자들로 하여금 세계의 표면과 형식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그 세계는 현실에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환기를 통해서 상기할 수 있을 뿐인 세계다. 이 세계를 시인은 끄집어낸다.
눈앞에 호수가 있고
나는 시민과 조경이 익숙한 듯이
벤치에 앉아서
방금 점심을 먹고 식당에서 나오다가
묶여 있는 개를 바라보는 회사원처럼
호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게 마음이 들었다
내가 배가 부르다는 게
큰 개가 묶여 있다는 게
누가 길을 물어서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호수만 보이는데
남현지, 「호수공원」 부분(『창작과 비평』, 2021년 가을)
「호수공원」의 경우 현상 이면의 세계가 지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시의 진술이 현상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호수공원’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과, 이를 바라보는 화자의 객관적인 시선만이 존재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배부른 듯이, “나는 그게 마음이 들었다”라 말하는 화자의 마음이 주고받는 이 ‘평화로운’ 상태를 시적 메시지로 읽어도 사실 무방하다. 그런데 시인이 작품에서 진술하듯 평화롭고 안락하고 소박하게 받아들이는 이 세계가, 말 그대로 텍스트를 전부 채울 만큼의 시적 전망을 망각하지는 않았을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마음 한편까지 무시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시인은 이 세계가 ‘이만하면 되었다’로만 놓여있다는 ‘고백’과 함께 한편으로 ‘이만하면 되지 않는 세계’를 역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 위 시는 안락한 세계와 안락하지 않은 세계를 염두에 둔 메시지일 수도 있고, 만약 안락하지 않은 세계가 있다면 기꺼이 그 세계조차 시 세계로 끌어들일 가능성마저 던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억측일까. 그렇지 않다. ‘공원’이 주는 보통의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해 거울처럼 발화하는 시인의 내면은, 한 곳에 고정된 그림 액자처럼 모든 사물들이 묶여있는 이 세계와 이를 응시하고 관조하는 인간 내면의 ‘동결성’을 들여다본다. 이른바 ‘안주(安住)’나 ‘만족’의 상태는 동요나 불안이 제거되었거나, 동요나 불안을 아직 맞이하지 않은 상태의 낙관적 수용성이다. 그러므로 호수공원 벤치에 앉아 한가하고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는 화자의 모습에서, 뒤집어 말해 시가 숨기고 있는 불안의 내습과 폭풍과도 같은 세계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위 시가 진술한 대로 “호수만 보이는데”, 그래서 화자가 호수만 바라보는 풍경을 시로 택할 리 없기 때문이다. 시는 숨기고 있다. 그리고 시는 표현한다. 표현함으로써 숨기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시인은 정신의 표상자이기도 하면서 내면의 치열한 고투와 행적을 행간에 촘촘히 박아놓는 자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하루와 바꾼 몇 장의 지폐를 안주머니에 품고
슬몃 빈방을 들여다보는 이 적막한 귀가는
어느 날 부장된 외로움과 함께 발견될
자신에게 가는 조문
듬성하게 잡풀이 자라는 지붕 아래
상석처럼 놓인 양은 밥상
매일 같은 문을 열고 닫지만 그와 죽음이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비켜 지나는 여기, 쪽방에
흩어져 있는 냄비며 라면봉지는
훗날 또 다른 부장품으로 발견될지도 모를 일
쪽창에 형광등 불빛을 내건다
매일 저녁 약속처럼 펼쳐지는 점등 점호는
이 골목만의 오래된 의식
불빛들이 서로 손을 뻗어 골목이 완성되면
듬성듬성 창을 넘는 숟가락 소리
오늘은 큰맘 먹고 더운밥에 생선도 한 마리 올렸지만
따라둔 소주잔만 겨우 비워내고
이내 입맛 없는 귀신처럼 신문지를 덮고
세상을 돌아눕는다
권상진, 「골목의 완성」(『주변인과 문학』, 2021년 가을)
세계 속에 주어진 인간존재는 삶의 형식으로 존재의 근거와 정당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정신과 의식의 조밀함이 삶의 형식을 뒷받침한다고 믿고 있다. 틀리지 않다. 하지만 정신이든 겉으로 드러난 삶의 그림이든, 시간의 굴레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삶의 궤도를 생각해볼 때 끝내 세계가 던지는 실존의 음영이 마냥 밝지만은 않다. 「골목의 완성」에서 펼치는 삶의 주기적인 형식과 그 삶을 잇게 하는 공간으로서 집과 골목의 장소성은 시인에게 영원히 지속되는 풍경이기보다는 순환하는 삶의 양식에서 변전하는 존재들의 배경에 가깝다. 삶과 죽음, 이 멈출 수 없는 존재의 회전을 늘 기억하는 자에게는 현실 세계의 형식은 한낱 거추장스러운 물질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다. “하루와 바꾼 몇 장의 지폐를 안주머니에 품고/ 슬몃 빈방을 들여다보는 이 적막한 귀가는/ 어느 날 부장된 외로움과 함께 발견될/ 자신에게 가는 조문”이라는 진술을 생각한다. 다음 날의 일상을 위해 묵는, 아니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인 집이 곧 상가(喪家)가 되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역설이 아니라 사실이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 세계의 실상을 시인은 그대로 받아 적을 뿐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쪽방과, 그리고 들쭉날쭉하면서 거기서 거기인 집과 방들이 뭉쳐서 만들어 낸 골목이 이루는 그림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삶이다. 우리가 이런 삶 속에서도 희로애락과 온갖 경험들로 마침내 맞이하게 되는 삶의 의미도 필경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예비단계임을 위 시를 보며 깨달을 수가 있다. 아침에 깨어 저녁을 지나 밤에 누우면 하루가 완성되듯, 시인은 “매일 저녁 약속처럼 펼쳐지는 점등 점호”가 골목이 완성되는 신호라 했다. 사람과 집, 그리고 골목이 어우러지는 풍경 속에서 생명의 남과 이지러짐이 교차하고 영혼이 들락거리며 탄생과 죽음이 서로를 부르면서 떠밀쳐낸다. 가난한 이든 많이 가진 이든 이러한 생명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는 말한다. 시인의 정신이 맴도는, 끝이 없는 시공간의 궤도 위에서 펼치는 말과 기억들의 흔적을 밟다 보면 이 세계가 얼마나 어질어질한 질서 속에서, 그 신비로운 질서의 중심을 향해 꾸역꾸역 다가서는 황홀한 진실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또한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지평의 빛깔이며 빛나는 윤곽선이 아닐 것인가.
문학평론가 정 훈
2003년 『부산일보신춘문예』 등단
평론집 「사랑의 미메시스」을 펴냈다.
[출처] 정훈 - 시 읽는 중|작성자 webzinese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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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진 시인 : 1972년 경북 경주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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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에 못이 박힐수록 의자는 점점 바른 자세가 된다 생각이 무거우면 부처도 자세를 고쳐 앉는데 의자라고 다리 한번 꼬고 싶은 순간이 없었겠는가 못은 헐거워진 생각을 관통하고 너머의 삶을 다시 붙잡는다 돌아눕고 싶은 밤이 있었고 돌아서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온몸에 박혀올 때마다 나는 자세를 고치며 다시 살아볼 궁리를 한다 하늘도 긴 날을 삐걱거렸는지 밤이면 못대가리들로 촘촘하게 빛난다 젖무덤 여자를 벗고, 집 앞 골목을 나오는 사람 얇고 하얀 모시런닝 속 중력 쪽으로 기운 가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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