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19코스
양상태
놀멍, 쉬멍, 걸으멍. 천천히 제주도를 즐기자는 말이다. 매형과 함께 삼 형제가 만만하게 생각하고 제주 올레길 19코스 완주 길에 나섰다. 제주도의 그 어느 곳보다 물빛이 아름다운 함덕 해수욕장에서 출발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겨우내 마른 풀잎 사이로 얼굴을 내민 파르스름한 풀 포기들의 환영을 받으며 걷기를 시작하였다. 시작부터 ‘서우봉’ 둘레 길은 경사가 45도 정도라서 숨이 가쁘기 시작했다. 과연 19.4㎞를 완주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맑은 마음과 함께 건강한 미래를 약속하자는 다짐으로 둘레길 도보를 시작했다.
가다 쉬다 하다 보니 북촌포구에 도달하였다. 이곳에는 옛날 조업을 하던 어선들이, 불빛을 보고 포구로 찾아오는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하던 ‘등명대’가 남아 있었다. 한적하기 짝이 없는 마을에는 4.3사건이라는 아픈 역사가 묻혀있었다. 때가 되어 먹을 만한 곳을 찾아보았으나 식당들이 모두 문을 닫았었다. 하는 수 없이 바다 둘레를 벗어나 동북리 쪽으로 향하였다. 앞서가는 동생 발뒤꿈치만을 쳐다보며 걸음을 계속하였다. 시작할 때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으나 갈수록 입이 다물어지기 시작했다.
배가 고파오고, 다리가 무게를 느낄 즈음하여 동북 마을 운동장에 도착하였다. 이런 곳에 축구장이 있다니 나름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더 이상 연연하지 않았다. 한쪽에 올레길의 상징인 조랑말(간세) 표지가 있었다. 기념으로 스탬프를 찍고 사진 촬영도 했다. 마침 교회가 있어서 무어라도 먹을 것을 구하려 했으나 불러 봐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아 수도꼭지를 틀고 물로 배를 채웠다.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인가는 없고, 산길만이 우리를 기다렸다. 올레길 다른 코스도 다녀 보았으나 사람 한 명 볼 수 없었다. 첫길인지라 무엇이 잘못되어 가는지 두려움이 들기까지 했었다. 허기는 져오고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는 윙윙거리며 신경을 자극하여 짜증을 키웠다. 흐르는 계곡도 없고 돌과 나무만이 있는 이곳은 사막이나 다름없었다. 길을 잃었나 하고 걱정도 해보았으나 나무와 전봇대에 걸린 리본과 화살표가 길을 안내를 해주어 그나마 걱정을 덜어 주었다.
준비가 소홀한 나들이가 이렇게 고통을 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군대 시절 유격 훈련 때 ‘도피 및 탈출’이라는 훈련과정이 있었는데 불은 피우지 못하고 생식해야만 했다. 스치는 그때를 생각하며 당장 앞일을 헤쳐 나가자니 꿈만 같았다.
길을 잃지 않았기에 중 산간 숲길을 빠져나올 수는 있었다. 농로가 보이고 멀리 끝자락의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약속하지 않았어도 똑같이 함성이 터졌다. 타는 목의 갈증이라도 풀려고 마늘밭에 들어가 한 뿌리를 뽑아 보았으나 먹지는 못하였다.
감귤 비닐하우스가 있고 돌담에 싸여진 밭길을 걸으니 갑자기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이 떠올라 긴장이 해소되어선지 어쭙잖게 어깨춤이 나왔다. 비닐하우스 앞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귤이 담겨 있어서 허겁지겁 먹기 시작하였다. 반대편 담장 밑을 보니 버려진 귤이 보였다. 동생이 가져와 먹어보니 이전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귤밭 주인이 수확 후에 흠집이 있는 것들을 버린 것으로 보였다. 서로 얼굴을 보다가 크게 웃고 말았다. 그때 사진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성산 일출봉 쪽으로 가는 해안 도로인 아스팔트 길이 나오자, 모든 힘이 일시에 빠져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번 코스의 마지막 김녕 포구에서는 점만 찍고 나오며 내일 가기로 한 20코스를 걱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