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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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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바빙크 성도의 견인도 성화와 마찬가지로 선물이자 임무이다
장코뱅 추천 4 조회 401 25.11.26 07:54 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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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5.11.26 08:05

    첫댓글 본문 안에 성구가 아주 많습니다. 다는 못하고 몇 개만 해설을 올리겠습니다.

  • 25.11.26 09:52

    네, 너무 많네요 😂

  • 25.11.26 16:07

    네, 필요한 부분만 읽겠습니다^^

  • 작성자 25.11.26 08:08

    요15:1-5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작성자 25.11.26 08:10

    <호크마 주석: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거짓에지는 그 농부라 - 여기 "참"이란 말의 헬라 원어 대조되는 "참"이 아니고, 불완전에 대조된 "완전", 그림자에 대조된 "실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포도나무는 구약에서 이스라엘(택한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이다(시 80:8-15; 겔 15:1-8, 19:10-14). 그러므로 랍비 문학에서도 말하기를, "실물 중에 가장 낮은 것(포도나무)이 식물계의 왕인 것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 보여도 장차 메시야 시대에는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점령한다"고 하였다(Lev.R. 36:2 참조). 예수님이 이런 랍비 문학에서 이 비유를 인용하신 것은 아니지만 참고할 만한 말이다. 예수님은 참된 이스라엘, 곧, 하나님의 백성을 성립시키신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는 본래 참 포도나무가 아니며,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실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와 같으시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포도나무)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이 되어서만 비로소 진정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포도나무 비유의 말씀은,

  • 작성자 25.11.26 08:11

    또한 예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중보자(中保者)되신 관계를 보여준다. 그들은 그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여야 된다. 예수님에게 대한 신자의 의뢰심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과 일체 될 정도까지 깊어져야 한다. 그에게는, 독자적 의지가 없고 오직 예수님의 의지가 있을 뿐이다.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이런 이상적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이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 본문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포도원의 농부라고 하였으며, 그가 가지들을 깨끗하게 하신다고도 하였다(2 절 끝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다. 그러나 인간 편의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도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성경은 많이 말씀한다. 마 11:12; 빌 2:12 참조. 그러나 위에 말한 일체 관계는 범신론적(汎神論的) 일체를 말함이 아니니, 인격과 인격의 관계이면서 다만 신자 편에서 그리스도에게 종속하여 순종하는 관계를 말함이다. 2세기의 이단자 몬타누스(Montanus)는 말하기를, "나는 아버지(하나님 아버지)요, 말씀(그리스도)이요,

  • 작성자 25.11.26 08:11

    성령이다"라고 하였다(Epiphanius, Haereses . . ). 이런 그릇된 사상에서는 신자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구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15: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여기 이른바 "내가 일러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예수님의 전도의 말씀, 곧, 복음이며,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어떠한 작용으로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이 신자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은혜의 방편(方便)이라는 교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하나님 말씀을 행각해 보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바 성경에 기록된 말슴 곧, 복음과 율법을 의미한다. 성경이란 책은 완전히 하나님의 말슴을 기록한 것이다. 이 말슴은 언어, 혹은 문자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는 것이, 그것의 하나님 말씀 자격과 효능(效能)을 상실시키지 않는다. 헬만 바빙크(Herman Bavinck)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작성자 25.11.26 08:12

    곧, "사람의 말은, ... 그 사람과 그 말과의 시간적, 혹은 장소적 거리에 따라서 효력의 다소가 좌우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언제자 그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말씀과 함께 현림(現臨)하시어 계시다. 그는, 언제나 그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을 가지시고 그 말씀과 함께 임하신다....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에게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그리스도나 성령에게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영감되었고, 계속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보관되며, 능력 있게 되는 것 만큼, 거기서 섭취하여 전파되는 부분적 말씀도 역시 그러하다"라고 하였다(Gereformeerde Dogmatiek . Kmpen, J. H. Koke 1911, pp. 502-503). 바빙크(Bavinck)는, 또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 있는 역사에 대하여, 성경이 말한 것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곧, (1)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라고 함(롬 1:16; 고전 1:18, 2:4, 5, 15:2; 엡 1:13). (2) 생명 있고 영존하는 말씀이라고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 작성자 25.11.26 08:12

    함(밸전 1:25). (3)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고 함(히 4:12). (4) 영이며 또 살리라는 것이라고 함(요 6:63). (5) 어두운데 비취는 빛이라고 함(벧후 1:19). (6) 마음에 심는 씨(생명 있는)라고 함(마 13:3). (7) 좌우에 날 선 예리한 검이라고 함(히 4:12), (8) 믿는 자들 속에 역사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살전 2:13).(Gereformeerde Dogmatiek. , pp. 501-504).

    =====15:4-6
    이 부분에 사용된 어귀들중, "거하라"는 말(* )은 "머물라"는 뜻이니,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이다. 5절의 "있으면"이란 말도 헬라원어에서는 꼭 같이 "머물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여기 "머물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택하여(16절) 은혜 주신 그 자리에서 그들이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가까에서 그를 믿으려고 자율적으로 찾아 가는 자가 아니고 벌써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인도된 자니, 그는 거기 멀물러 있으려고 순종의 걸음을 걸을 자이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6:44).

  • 작성자 25.11.26 08:13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는데, 우리는 그저 순종 할 뿐이다. 순종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의 말씀을 지킴이다.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나의 구원을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인 만큼 나는 순종 할 것 없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무생물 혹은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오착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으나, 우리로서 할 일은 그에게 순종함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하시므로 구속(救贖)의 큰 사업을 완성하셨다(히 5:8-9).

  • 25.11.26 10:07

    상세한 설명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25.11.26 16:06

    자세한 설명을 읽고 공부합니다!

  • 작성자 25.11.26 08:37

    성도의 견인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획이 취소되지 않기 때문이다(시 33:11)

    https://cafe.daum.net/1107/YlDw/12

  • 작성자 25.11.26 08:36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강령(TULIP)은 도르트 신조(The Canons of Dort)를 요약한 것입니다. 영어 앞 문자만을 따서 TULIP이 된 것이지요. 한글로 튤립이라고 부르는 분도 많습니다.

    Total Depravity (전적 타락)
    Unconditional Election (무조건 선택)
    Limited Atonement (제한 속죄)
    Irresistible grace (불가항력적 은총)
    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

  • 작성자 25.11.26 08:37

    "요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38.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39.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위 말씀에 해당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시지 않고 다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입장에서는 성도의 견인(堅忍)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TULIP의 P(Perseverance of Saints, 성도의 견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우여곡절과 평지풍파를 거칠지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황금사슬이라고도 불리우는 구원의 서정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위로와 소망 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 25.11.26 17:08

    다시 읽어보고 지식과 은혜를 나누어 받습니다.

  • 작성자 25.11.26 08:40

    구원하는 믿음은 실패하지 않는다

    참 신앙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선택하고, 수용하고, 인정하며,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시고, 그것이 그분의 성품에 어울린다는 점을 의식하는 한, 영혼은 온갖 시련 속에서도 충분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영혼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죄와 가장 비참한 갈등을 빚는 상황과 온갖 유혹 속에서도 믿음의 진정성과 진실성이 유지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 그런 믿음은 내면에서 일어나는 죄의 권세와 당혹스런 공격을 능히 물리칠 수 있다. 그런 신앙은 결코 패배해 물러나는 법이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구원하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존 오웬, 『구원하는 믿음의 증거』(생명의말씀사, 전자책), p.18.

    https://cafe.daum.net/1107/YY6J/4

  • 25.11.26 17:12

    제목과 내용에 아멘! 입니다.

  • 작성자 25.11.26 08:44

    계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 작성자 25.11.26 08:45

    <호크마 주석: 요한계시록>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 서머나 교회에 대한 서신에서는 책망과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고 곧바로 권면 즉,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며 두려워 말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당시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 본문은 장차 서머나 교인들이 받게 될 핍박의 내용이다. 서머나 교인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당시 정부이든 간에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었다. 한편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이라스데테'(* )는 '유혹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는 뜻으로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난과 핍박을 그리스도인들은 감수해야 하며 심지어 순교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 본문은 환난의 기간을 나타낸다. '십일 동안'의 헬라어 '헤메론 데카'(* )에 대한

  • 작성자 25.11.26 08:45

    해석은 두 가지이다. (1)혹자는 십일은 짧은 기간을 가리키거나 실제로 열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창24:55; 민11:19; 단1:12,14; 행25:6, Alford, Charles, Plummer, Johnson, Kiddle, Beasley-Murray, Ladd). (2)혹자는 십일은 극단적이면서도 완전한 환난을 상징하고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민14:22; 욥19:3, Mounce, Summers). 두 가지 견해 중 전자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십일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Johnson, Moffatt)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 )에서 '기누'는 '기노마이'(* , '되다')의 현재 중간태 명령형으로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한다. 이것은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다. 한편 '생명의 면류관'은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 작성자 25.11.26 08:45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이다. '면류관'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 (1)'디아데마'(* )로 '왕관'을 의미한다. (2)'스테파노스'(* )로 운동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관'을 의미한다. 두 가지 중 본문에 사용된 면류관은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끝까지 싸워 승리하듯이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가리킨다. 성경은 '생명의 면류관'(약1:12) 외에도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 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등을 그리스도인이 받을 상급으로 진술하고 있다.

  • 작성자 25.11.26 08:47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작성자 25.11.26 08:48

    <호크마 주석>

    =====10:12
    그런즉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스테'(* )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바울이 앞에서 열거한 예증을 근거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충고하려는 의도를 나타내는접속사이다.
    선 줄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헤스타나이'(* )는 현재 서있는 모습을표현하는 말로, 신앙이 아무런 흠없이 온전하다는 뜻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지식과 생활이 흠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넘어질까 조심하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민족이며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이방의 침략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었다(겔 12:22). 이와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 중에도 자신들이 이미예수의 피로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우상의 제사에 참석하고 그 제물을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고 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형벌로 죽은 사실을 지적하면서(5, 8절) 믿음 가운데 있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 작성자 25.11.26 08:50

    마13:20-21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 작성자 25.11.26 08:50

    <호크마 주석>

    =====13:20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 '씨가 뿌리워진 돌밭'과 같은 사람이라 함은 흙이 얇은 관계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는 싹과 비유하여 '심지가 굳지 못하며 경박한 마음의 청중'(the shallow hearer), 또는 철저히 감정적인 청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말씀을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진리를 듣는 순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즉시 신앙 생활을 시작하지만 성장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시련들(태양)에 대해서 인내로써 대처하지 못하고 그 시련에 의해 넘어지는 자이다.
    기쁨으로 받되 - 말씀을 들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지고서 귀기울이거나 또는 말씀을 기쁨의 대상, 즉 은혜나 복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인류 구원을 위한 참된 진리로 알게 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러한 절대적 가치를 인정(agree)하면서도 그들은 확신(assurance)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13:21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 여기서 뿌리가 없다는 것은 결국 복음에 대한 그 개인의 인격적 확신이 결여(缺如)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 작성자 25.11.26 08:51

    이에 대해 누가는 '잠깐 믿다가'라는 연결구를 덧붙임으로써(눅 8:13) 복음에 대한 즉각적 수용 뿐만 아니라 인격적 확신에 근거한 지속적인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환난이나 핍박 - 환난을 뜻하는 말인 '들리프시스'(* )는 '밀어대다, 몰려대다, 답답하게 하다'의 뜻인 '들리보'(* )에서 나온 말로서, 삶의 여러 조건들을 통해서 억압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핍박을 뜻하는 말인 '디오그모스'(* )는 도망가는 노예를 잡기 위해서 개를 보내 추격하게 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디오코'(* )에서 나온 말로서, 본문에서는 종교상의 '박해'를 가리킨다. 결국 이 두 낱말은 한 개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만날 수 있는 모든 고난과 거침돌을 의미한다.
    넘어지는(* , 스칸달리조) - 함정, 올가미, 덫 또는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뜻하는 '스칸달론'(* )에서 나온 말로서, 여기서는 죄에 빠지다, 배반, 배교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또한 환난이나 핍박으로 인해서 생겨난 갈등으로 어리둥절하거나 휘청거리는(stumble)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 작성자 25.11.26 08:54

    요일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작성자 25.11.26 08:54

    <호크마 주석>

    =====2:19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 본문은 앞절에 언급된 '적그리스도'가 다른 종교를 가진 자가 아니라 수신자 공동체 일원으로 있다가 거짓 교리에 빠진 자임을 나타낸다. 여기서 '나갔으나'는 수신자 공동체에서 강제로 출교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수신자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스스로 나간 것을 보고 요한이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진술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수신자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었지만 사실상은 전혀 공동체에 일원이라 할 수 없었음을 암시한다.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것은 스스로 그 공동체의 일원이 아님을 증명하는 행위였다(Barker).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리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 개역성경 본문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 '가르'는 본문이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들이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주장하는 수신자 공동체의 교리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 작성자 25.11.26 08:55

    그들은 스스로 공동체를 떠났다. 그들의 이탈은 자신들이 거짓 교리를 전파하는 적그리스도임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티 우크 에이신 판테스 여스 헤몬'(* )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서이 가능하다. (1) '에이신'의 주어를 '적그리스도'로 볼 때 본문은 '적그리스도 모두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 한다'(that they all are not of us, RSV)의 뜻이다. 이 경우에 '모두'를 의미하는 '판테스'(* )는 강조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2) '에이신'의 주어를 '수신자 공동체'로 볼 때 본문은 '공동체 회원들 모두가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that not all in our company truly belong to it, NEB)라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에 본문은 수신자 공동체 내에 사이비 일원들이 있음을 나타내다. 두 가지 해석 중 전자가 더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후자의 경우 이제까지의 문맥과는 달리 주어가 바뀌기 때문이다(Smalley).

  • 작성자 25.11.26 08:58

    히6:19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 작성자 25.11.26 08:58

    <호크마 주석>

    =====6: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 본절에서 닻의비유가 사용되는 것과 같이 '삶'을 '항해'에 비유하는 것은 고대 문학에 있어서 흔히볼 수 있는 표현이었다(Hilgert).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와같은 비유는 오직 본절에서만 나타난다. 이 '닻'의 비유는 헬라문학에서도 그러했듯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Lane). 저자는 소망이 '영혼의 닻'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표현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소망하는 종말론적 구원의 성취가 확고한 것임을 시사한다.한편 본절의 '영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스'(* )는 인간을 '육'과 '영혼'으로 분리하는 헬라 철학의 이원론적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인 생명을 나타낸다(Morris).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 '휘장'은 구약 시대의 성막 안에 있던 두 개의 방 즉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가리킨다. 이 휘장 너머 즉 안쪽은 지성소를 의미한다(출26:31-35;레16:2,12,15;21:23;24:3). 지성소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레16:2).

  • 작성자 25.11.26 08: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들어가심으로(20절) 휘장은 찢어졌고(마27:51;막15:38)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모든 자들이 자유롭게 지성소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종말론적구원의 성취를 통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한편 '들어가나니'의 헬라어 '에이세르코메넨'(* )은 '에이세르코마이'(* , '들어가다')의 현재분사로서 '닻'(* , 앙퀴란)을 수식한다. 따라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닻'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 '닻'과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시한다(Windisch, Kasemann, Grasser, Koster, Schroger). 그러나 이 '닻'은 다시 소망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결국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망'이다(Lane, Kuss, Michel, Spicq). 휘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소망'이라는 사실은 7:19의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는 말씀으로 더욱 확증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지닌 소망은 닻과 같이 튼튼하고 안전하여 세상의 어떠한 시련이나 유혹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Morris).

  • 25.11.26 16:19

    이 성구와 설명이 큰 안도와 확신이 됩니다.

  • 25.11.26 16:20

    성도의 견인이 선물과 임무이지만, 주도권은 선물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과 확신을 합니다.

  • 작성자 25.11.26 16:29

    아멘!

  • 25.11.26 17:10

    좋은 내용에 매우 공감합니다. 성도의 견인을 성령께서 인도, 보증하시지만 성도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고 실행하는 임무가 됨을 믿습니다.

  • 25.11.27 17:21

    아멘!

  • 25.11.27 00:20

    헤르만 바빙크가 개혁주의 입장에서 성도의 견인을 풍부하고 설득력 있게 잘 설명해주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아 좋습니다.
    '성경은 배교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고 많은 전통들도 받은 은혜를 완전히 상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데, 개혁파만이 성도의 견인 교리를 지지했고 그것을 믿음의 확신과 연결했다'고 설명하고 있군요.
    '문제는 신자들 스스로가 믿음을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시작하신 은혜의 역사를 지속하고 완수하시느냐 아니면 죄의 능력이 그것을 완전히 망가뜨리도록 허락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이 설명이 잘 와닿네요.
    참 신자의 배교 가능성에 무게를 두지 말고,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으심을 알아야만 한다는 논지, 인간의 의지로 구원이 바뀌거나 하는 그런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며, 그의 은사와 부르심은 번복될 수 없음을 확신해야 한다는 설명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25.11.27 17:20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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