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스는 권서로 출발하여 성경 번역과 교회 설립으로 사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는 한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복음에 갈급해하던 민중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면서 매우 고무적으로 일하였고 놀라운 업적을 남겼다. 오늘의 이야기는 피터스의 눈부셨던 권서 활동기를 조금 더 소개하고자 한다.
총신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박용규 교수는 피터스의 한국 사역에 대해서 연구하고 발표한 바 있다. “알렉산더 피터스: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1895-1911)”를 「신학지남」2008년 봄호(통권 294호)에 발표했었다. 박 교수는 피터스의 권서 활동과 성경 번역 사역을 비교적 소상하게 연구하였는데, 선교사들의 사역 보고지인 「The Korea Mission Field」를 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맥코믹신학교 출신 한국 선교사들에 관한 석사학위 논문(Robert Culver McCaughey, “A Survey of the Literrary Output of McCormick Alumni in Chosen.", 1940, B.D.논문)을 입수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피터스의 출생지 기록을 확인하였다. 이 논문은 피터스의 출생지에 대해서 짧게 언급하고 있다. 논문에 따르면 피터스는 러시아 에카데리노스라브(Ecsternoslav)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1900년 당시 인구 13만5천 명이 거주하는 지방 수도였다고 하는데, 현재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박용규 교수는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지역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하는 박용규 교수의 글을 주로 참조하여 요약한 피터스의 권서 활동기이다.
피터스가 1895년 5월 16일 한국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1년 전에 있었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나라 안팎이 매우 어지러워져 있었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였고 콜레라까지 창궐하였다. 피터스는 처음에 콜레라 환자를 치료하느라 여념이 없던 의료선교의 아버지 아비슨의 병원에서 일하였다. 콜레라 환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9월 2일부터 13일까지 첫 권서 활동을 위한 여행을 떠났다. 물론 아직 한국 실정에 밝지 않은 피터스가 혼자서 여행하기는 어려웠으므로 백정 선교 개척자인 사무엘 무어(S. F. Moore)의 여행에 동행하였다.
무어의 전도 여행은 서울에서 110마일 떨어진 마을에서 온 한 사람이 자신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쳐주고 교회를 설립해달라는 요청을 하여 성사된 것이었다. 무어 선교사는 그의 한국인 조사의 협력으로 사역을 확장시켜 나갔는데, 박씨로 알려진 무어의 조사는 백정들의 신분 회복과 권익 보장을 위해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는 무어와 아비슨의 도움을 받아 조정으로부터 백정들의 법적인 신분을 얻어내고, 그 사실을 각 지역의 백정들에게 알려주고 결집시키며 지방 관리들을 방문하는 일을 하였다. 무어의 사역은 이러한 박씨의 활동과 함께 이루어졌고, 피터스도 여기에 합류하였다. 첫 여행에서 22명이 결신하였는데 이들의 다수는 기독교서적을 통해 믿었고, 일부는 무어의 설교를 듣고 믿었다고 한다. 피터스는 첫 여행에서 29권의 복음서를 판매하였고 그 이전에 피터스의 어학 선생과 함께 처음 서울거리에서 39권의 복음서를 판매한 것과 합해 총68권을 판매하였다.
피터스가 한국에 도착한지 4개월 되었을 때인 9월 25일에는 무어의 조사 박씨와 함께 피터스 홀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박씨의 순회 전도에 피터스가 동행한 것이었다. 이들은 서울을 떠난 지 3일 후에 무어의 신자가 살고 있다는 Yoon Gon이라는 큰 마을에 도착하여 그들의 집에 머무르며 복음을 전하였다. 동행한 한국인 전도자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쳤고, 결신자가 나왔다. 피터스와 박씨는 여러 거리로 나가서 복음서를 판매하였다. 2주 동안 이어진 여행을 통해 10명이 결신하고, 43권의 복음서를 판매하고 3권을 기증하였다. 여주읍에서 관청을 방문하였을 때 관리들은 처음에는 박씨가 전하는 말을 무시하며 이들에게 아이러니컬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냉대를 하는 듯 했으나 점차 복음에 관심을 가지면서 들어오라고 청하고 예수의 구원하심과 생애, 고난, 죽음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 피터스는 이 여행에서 큰 기쁨과 행복이 가득 차오르는 것을 경험하였다.
피터스의 세 번째 여행은 10월 12일 무어와 함께 경기도청 소재지인 수원을 방문하였다. 경기지방 백정들의 모임에서 무어가 복음을 전하고 피터스는 책을 판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들은 백정의 집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머물렀다. 관청을 방문하여 무어가 이들에게 전도하고 7권의 복음서를 판매한 후 이어서 지방 지사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친절하게 무어 일행을 영접해주었다. 피터스는 2권의 복음서를 헌정하려 했으나 굳이 값을 지불하겠다고 하였다. 용기를 얻은 피터스는 혼자 거리로 나가서 복음서 4권을 내리 팔았다. 백정들 50명이 그들이 머무는 숙소에 모여 들었고, 무어와 박씨, 그리고 서울에서 온 크리스천 백정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무어가 이들을 다시 가르쳤으며 가져온 복음서 43권을 전량 다 판매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피터스는 10월 31일 네 번째 여행을 떠났다. 혼자 여행하기로는 두 번째였다. 무어의 조사를 동행시키고 원주를 향해 출발하였는데, 두 번째 여행 때 방문했던 여주를 들러 그들을 먼저 만나본 후에 원주를 가고자 하였다. 여주와 인근 마을에서 복음에 목말라 하던 백정들은 피터스가 가져간 성경을 다 사버렸으므로 피터스는 원주행을 미루고, 책을 가지러 서울로 되돌아갔다. 서울에서 피터스는 부평에서 백정들의 모임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우선 그곳으로 달려가서 15권의 복음서를 판매했고, 강화에서도 백정들의 모임이 있다 하여 그들에게로 가서 9권을 판매하고, 거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30권을 더 판매하였다. 그리고 송도에서도 백정들의 모임이 있어서 한국인 조사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15권의 책을 판매하였다. 거리로 나간 피터스는 책이 다 팔리기를 기도하였고, 기도가 응답되어 2시간 만에 남은 74권의 복음서를 다 팔고 책을 더 가져오기로 하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4일 만에 200권의 책을 가지고 송도시장으로 내려간 피터스는 나무시장이 열린 것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인 사람이 몇 사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거리에서 51권을 판매한 것을 필두로 일본어성경 1권과 함께 네 번째 여행에서 총400권을 판매하였다. 이 여행에서 피터스는 거의 한달 동안 약1,200리(700마일)를 걸었다고 한다. 무어와 피터스의 전도여행은 말을 이용한 도보여행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구한말 당시에 천민으로 각종 수모를 겪고 있었던 백정들은 선교사의 도움으로 신분 보장을 받게 됨으로써 누구보다도 기독교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해하던 자들로서 피터스가 이들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큰 행운이기도 하였다. 또한 어느 거리에서나 복음서가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을 보면 당시에 국민들이 얼마나 새로운 복음에 갈급하였는지 알 수가 있다. 피터스는 복음의 용광로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1895년 10월에 일본에서 루미스 총무가 방문하여 피터스의 권서 활동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였다. 그는 피터스가 모든 사람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으며, 재한 선교사들의 평판도 긍정적인 보고만 있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1895년 12월 5일부터 피터스는 루미스 목사에게 그의 권서활동 보고서를 보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루미스 목사는 “만약 이 청년의 생명을 보존하신다면, 그는 저 밤의 어두움이 깃든 땅(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아주 유능한 일꾼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는데 그의 예언대로 피터스는 한국 선교에 놀라운 발자취를 남겼다.
다음 회에 계속...
<참고문헌>
김중은, “구약국역의 선구자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被得)”, 『구약의 말씀과 현실』(서울: 도서출판 한국성서학, 1996).
박용규, “알렉산더 피터스: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1895-1911)”, 「신학지남」(신학지남사, 2008년 봄호).
박용규, [선교사 피터스2]히브리어에 능통했던 정통 유대인 피터스 <기사 및 칼럼 <부흥관련 자료/사진 <평양대부흥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907revival.com)
박용규, [선교사 피터스3]1895년 내한하여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맺다 <기사 및 칼럼 <부흥관련 자료/사진 <평양대부흥 <기사본문 - 평양대부흥 (1907revival.com)
첫댓글 이런 작은 카페에만 있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좋은 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고 한국교회사와 성경번역의 역사를 잘 알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근에는 피터스에 관한 글들이 여러 사이트에 있더군요. 대부분은 기사나 일부 내용을 발췌하거나 복제한 것이지만요. 먼저 연구한 분들의 글이 있기에 저도 참고해서 정리한 글을 올릴 수 있었어요. 피터스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저도 감동을 받았어요. 굉장히 고마운 분이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저도 한번 검색창에 검색해 보았어요. 그런데 코람데오님의 글 품질이 좋았어요. 단순히 퍼와서 짜깁기가 아니라 자신의 글로 잘 정리하신 느낌이 들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과찬이세요~ 암튼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권서, 조사 등 초신자가 보기에 어려울 만한 단어는 댓글로 설명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네. 권서는 성경 판매인인데 전도 목적이 더 컸죠. 예수를 소개하며 성경을 사볼 것을 권하며 다녔던 사람들입니다. 조사는 조력자, 협력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