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실일기(白華室日記) 김구용(金丘庸)
1973년 4월 14일
완당(阮堂)의 가필(加筆)은 서예사(書藝史)에 없었던 새로운 예술(藝術)이다. 자고(自古)로 가필은 금기(禁忌)되어 왔다. 소위 개칠이라는 것과 가필(加筆)을 혼동(混同)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완당 글씨에는 개칠이 없다. 가필(加筆)의 예술성(藝術性)은 동양에서 기(忌)하는 반면 서구(西歐)에서 발달했다.
오늘날에서 볼 때 완당은 동서(東西)의 예술 교류를 앞당긴 면도 없지 않다. 완당이 성달생(成達生) 등을 추키는 동시 <석봉(石峯)으로는 따를 수 없다. 석봉은 송설체(松雪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하고, 어째서 석봉(石峯)을 깎아내렸는지 모르겠다. 석봉이 어떤 영향을 받았건 간에 그 글씨는 동국화(東國化)한 것이다. 말하자면 우아(優雅)한 신라 곡옥(曲玉)같은 우리나라 고유미(固有美)의 일면을 글씨로 제시한 명필이다. 완당(阮堂)은 또 <이원교(李員嶠)가 평생 익힌것은 왕희지(王羲之)의 위본(僞本)인 유교경(遺敎經) 따위였다. 실은 당(唐)나라 때 경생(經生)들이 쓴 것이다. 진체(晋體)가 어찌 그 모양이겠는가> 하고 단정했다.
그러니 이원교(李員嶠)는 수 백년 동안 내려온 송설체(松雪體)의 타성(惰性)에서 벗어나려고 의식적으로 고심(苦心) 노력(努力)한 최초의 분이다. 그의 광초(狂草)는 남,북 39년간의 귀양살이에 갇힌 준마(駿馬)의 울분이 보인다. 그런가하면 세서(細書)는 일변하여(완당이 위본(僞本) 유교경(遺敎經)을 썼다고 말한것이 이런 것을 지적한 것인지 모른다.) 간곡한 정성(精誠)을 기울인다.
어떤 간필(簡筆)에서는 천리강풍(千里江風)을 헤치며 쾌주(快走)하고, 해(楷)는 구투(舊套)의 권위(權威)에서 벗어나려고 뜻을 모은다. 그러나 원교(員嶠)가 평생 시도한데 비해서 그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완당(阮堂)은 원교(員嶠)의 시대(時代) 위치와 그 선각자(先覺者)로서의 실패를 높이 평가(評價)했어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완당이 북쪽의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을 인정한 것은 마땅한 일이나 창암(蒼巖)만을 촌부시(村夫視)할 것은 없지 않은다. 창암(蒼巖)은 김생(金生)처럼 긴 평생동안 적공(積功)하여 중후고기(重厚古奇)한 대자(大字)(계룡산 갑사에 붙어있는 주련들과 동학사 현판은 대표적인 걸작이다.)와 약동(躍動)하는 초서(草書)와 격조 높은 해서(楷書)로써 하나의 성격을 제시한 명필이다. 완당(阮堂)이 그처럼 묵살(黙殺)할 수 있었을까. 자기 아류(亞流)인 이재(彛齋), 소치(小癡), 우봉(又峰), 석파(石坡), 노천(老泉)등에 대해서는 수차 언급(言及)하였으면서도 말이다.(서통 창간호 1973. 9. 10)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1970년대 서통이란 잡지에 김구용 선생의 추사서에 대한 이야기가 있어 전재해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태 공부하고 또 무림선생님의 강의록을 펼치니 에구 머리속에 잘 들어오지 않아 두번씩이나 읽었슴다. 머리가 나쁘면 노력이라도 해야....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까? 소설가이자 시인이셨던 김구용 선생의 추사선생에 대한 평이랄까요? 조선시대 서예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글이 될것 같아서 올렸습니다.
무림선생님 수고 감사합니다. 편안히 쉬세요. 오늘은 너무 늦에 제대로 못읽고 갑니다.
차근차근 새겨 읽어보셔요. 열국지를 쓴 김구용 선생은 서예에도 독특한 세계를 가지신 분이었지요.
잘 읽었습니다만 이해하는데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
원래 김구용 선생의 글이 좀 어렵더군요... 가필과 개칠의 구분도 그렇고...완당이 석봉, 원교의 글씨를 폄하해 평가하고 창암의 글씨를 촌로의 글씨로 백안시한것을 비판적으로 표현한것 같습니다.
이왕 제삼자들에 익힘을 위한 단1%의 맘씀이 이었다면 좀 풀어서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램이 크네요.앎이 일천한 저로썬 이해하는데 시간이 많이걸리네요~~~잘 보았고 감사합니다.
김구용 선생은 전통적인 한학을 많이 하신분으로 글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것입니다. 탐구해 보십시오. 상정님.ㅎㅎㅎ...
잙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