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입신(立身)
구봉서(具鳳瑞) 공(公)은 서기 1596년 8월 29일에 경기도 장단면 석곳리 낙하(洛河)에서 태어 나,
1644년에 별세한 인조(仁祖) 때의 인물이다. 자(字)는 경휘(景輝), 호(號)는 낙주(洛洲)라 하며,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13세에 당대의 유명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던 석주(石洲) 권필(權鞸) 선생에게서 시를 배웠고, 19세에
사마시에 합격한 뒤에, 28세(인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급제 이후, 승문원 · 성균관 · 사간원 · 사헌부
· 홍문관 · 춘추관 등의 여러 기관에서 청요직(淸要職)의 직책을 맡아 일하였다.
임금의 지척에서 일하는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를 두루 역임하면서
왕명을 받들어 일하였고, 이조와 병조 그리고 공조와 호조에서도 여러 직책을 맡아 보았다.
1636년 봄에 병조참의로 일하며 승승장구하던 중에, 대간의 탄핵을 받아서 좌천의 쓴 맛을 보았으니, 그게
바로 서천군수로의 임명이었다. 공은 조정의 임명을 겸허히 수용하여, 그해 8월에 서천으로 부임하였으니
이것이 서천군과의 첫 인연이 되었다. 이 때, 한문학 4대가의 한 분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선생은 아래와
같이 격려하는 시를 지어 공을 전송했다. (낙주선생문집, 계곡집)
題 : 扇送具景輝出守舒川 (선송구경휘출수서천) / 장 유(張 維)
- 서천군수로 나가는 구경휘에게 부채를 보내며
1)
가을에는 이별이 더욱 더 서글픈 법 搖 落 翻 添 愴 別 情 (요락번첨창별정)
일휘 출수(出守)로 춘명문을 나선다 一 麾 今 日 出 春 明 (일미금일출춘명)
누가 양 임하를 전송해 주려고 하리 無 人 肯 送 楊 臨 賀 (무인긍송양리하)
하늘 위 기러기만 길손 뒤를 따르네 唯 有 征 鴻 趁 客 行 (유유정홍진객행)
2)
만나고 헤어짐에 연연하지 아니하나 交 情 別 恨 任 悠 悠 (교정별한임유유)
꿈속에 노닐었던 추억들이 기억나리 夢 裏 唯 應 憶 舊 遊 (몽리유응억구유)
부채에다 써드린 시는 잘못된 듯 해 錯 把 新 詩 題 扇 面 (착파신시제선면)
가을바람에 궤짝 속에 들어 갈 테니 秋 風 已 作 篋 中 愁 (추풍이작협중수)
어제까지 인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던 공이 정 3품에서 종 4품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어 부임하는 길이 자못 쓸쓸하였음을 장유 선생의 시를 통해 그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다.
서천군수 구봉서
서천군에 부임한 공은 군정을 살피며 여러 시책을 펼쳤다. 먼저, 관내 시장기능의 활성화를 추진하였다.
시장을 열어 상품 거래와 교환을 촉진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고, 군민들의 재산 증식에 노력하였다.
다음으로, 백성들이 부담하는 세금과 부역을 낮추어서 이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공의 군수로서의 직무 수행에 대해 조정과 주변에서의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공의 군수로서의 직무 평가에 대해 '성이성(成以性)' 이라는 분이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호를 계서(溪西)라고 하는 이 분은 ‘계서일고(溪西逸稿)’라는 문집을 남겼는데, 충청도 암행어사의
직책을 부여받아 자신이 살펴 본 각 고을의 형편과 지방관의 능력에 대해 평가한 내용을 서계(書啓) 형식으로
조정에 보고한 기록물이다. 이 기록에 전하는 서천군수 구봉서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자.
“舒川郡守具鳳瑞以才爲治 (서천군수구봉서이재위치)
一應徭役(일응요역) 皆自貿販以應 (개자무판이응)
故民不知有賦斂 (고민부지유부렴) 及其移換(급기이환)
閤境之民 (합경지민) 莫不缺然失望 (막불결연실망)
隣近之民 (인근지민) 亦皆稱道不已 (역개칭도불이)”
“서천군수 구봉서는 지방관으로서의 재능이 있어서, 부역을 경감하고 시장을 발전시켜서 백성들이 부역의
고통을 알지 못했다. 또한, 관내의 백성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니, 인근의 백성들까지도 모두가 공에 대해서
칭송을 하였다.”
또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공의 신도비문(神道碑文)에서 공의 서천군수로서의 임무 수행에 대해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有臺劾出爲舒川郡守 (유대핵출위서천군수)
公律已如氷檗愛民如嬰孩 (공율기여빙벽애민여영해)
又敏於事爲廢墜悉擧 (우민어사위폐타실거)
人爲文藝固其所長不料吏事之至此也 (인위문예고기소장불료이사지지차야)“
“대간들의 탄핵으로 서천군수로 부임하여, 공은 자신을 다스리기를 빙벽(氷檗)같이하고, 백성을 사랑하기를 어린
아이같이 하며, 또한 정사에 민첩하여 이제껏 폐추(廢墜)되었던 좋은 일들을 다시 드러내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문예(文藝)는 본디 그의 장점인 줄 알았지만 관리들에 대한 식견이 이렇게 밝은 줄은 미처 몰랐다”라고 하였다. "
이처럼 서천군수라는 최초의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펼친 공(功)을 인정받아 부임 1년 후에 나주목사(羅州牧使)
로 영전하게 된다. 공의 선정에 감사하는 서천군의 백성들이 힘을 모아 1637년 8월에 세운 것이 바로 현재의 군청
앞에 오래도록 자리를 지켜 온 ‘군수구후봉서청덕인정비’ 이다.
서천군수 그 이후
나주목사로 임지를 옮긴 공은, 다시 1년 만에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여 계속해서 선정을 펼쳤다. 나주와 호남의
방백으로 각각 재임하면서 지방관으로서의 명성을 높여가던 중에 중앙 조정의 부름을 받아 1639년 여름에 공조
참의로 영전하게 된다.
후에 승정원에서 승지의 직책으로 일하던 중에, 남한산성에 양곡을 비축하고 포대를 설치한 것을 두고 청나라에서
시비를 걸어 와, 즉각 산성을 헐어버리라는 무리한 요구를 받은 조정에서는 곤혹스러워 하던 중에, 공께서 포악한
청의 사신을 맞아 외교활동을 슬기롭게 전개하여 포대의 일부를 조정하는 선에서 타결함으로써 남한산성을 보존
하게 하는 등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듬 해(1640년) 7월에 당시 영남지방에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다는 어려운 실정이 조정에 보고되자,
임금 인조는 공을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게 하였다. 공은 완곡하게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자, 왕명
을 받들어 경상도 감영으로 부임하여 임기 1년을 채우고, 관내 도민들의 간곡한 연임 요청을 조정에서 받아들이자
한 해를 더 연임하였다.
경상도관찰사로 재임 중에는 청나라로부터 국내로 도망쳐 온 우리 백성들을 잡아서 다시 청(淸)으로 보내라는 강압
적인 명령을 청나라로부터 받았지만, "영남 관내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는 버티기로 일관하여 해당 백성들을 보호
하게 되자, 청음(淸陰) 김상헌 선생으로부터 찬사를 듣기도 하였다.
다시, 평안도로 그리고 별세
1642년 7월에, 중앙 조정에 돌아 온 공은 호조참의와 비변사(備邊司) 제조(提調)의 중책을 맡아 본격적으로 나라의
군국대사를 담당하여 뜻을 펼쳐가려던 중에, 서북지방에서는 청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이 심각한 사태로 흘러갔다.
이에, 인조께서는 이 난국을 수습하여 타개할 적임자로 공을 평안도관찰사로 임명하고 그 부임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공은 신병(身病)을 이유로 다시 간곡하게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또 다시 반려되어, 공은 평안도관찰사로 부임
하였고 일단 부임 후에는 당면 외교 현안 타결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에 청나라는 아직도 조선이 명(明)나라 잔여 세력과 결탁하여 청의 배후를 위협하려 한다는 불신과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보이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던 시절이었다.
이때도 조선이 명과 밀무역을 하면서 결국은 청을 위협하려 한다는 조선 측의 내부자 고발을 빌미로, 조선의 여러
대신들을 구금하고 소현세자까지 위협하여 임금과 조정이 매우 곤혹스럽고도 난처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공은 소현세자와 임금과의 사이에서 기민하게 대처하여 결국은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임금께서는 공의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공에 대한 신임이 더욱 두터워갔다.
서북방면 행정과 국방의 책임자로서, 공은 서북 국경에 대한 철저한 경계는 물론, 관내 도민들의 생활 편의 증진과
국경 무역 활성화를 통한 국부의 증진, 요동지방에서 면화 재배 기술을 습득하여 관내 면화 재배 독려를 통한 산업
진흥 등의 정사를 돌보느라 공의 건강은 나날이 쇠약하여 갔다.
이에 공은 누차 병(病)으로 인한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께서는 어의(御醫)를 직접 선발하여 평안도로 보내어
공의 병세를 치료하게 하면서, 공의 유임을 간곡히 당부하였다. 이리하여, 일시적으로 호전되었던 병세는 1644년
1월 27일부터 급속히 악화되다가, 사흘후인 30일에 공은 마침내 평안도 감영에서 별세하였다.
임금을 비롯하여 조정에서도 공의 부음을 듣고 애통해 하였으며, 공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선영에
안장되었다. 서천군수로 부임하여 최초의 지방관으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키웠던 공은, 병자호란 직후의
피폐하고 어려운 나라의 실정 하에서, 전라 · 경상 · 평안도의 3도의 관찰사의 중요한 직임을 성실하고 지혜롭게
감당하여 조정은 물론, 백성들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3도의 백성들이 각기 여러 곳에 송덕비(頌德碑)
를 세워 공을 기린 것으로써 잘 입증이 된다고 하겠다.
전라도의 나주와 군산 등을 비롯하여 경상도에서는 경주와 대구 등지에 아직도 기념비가 세워져 있어서 해당
지자체들이 돌보고 있다. 평안도에서도 평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공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고, 특히 ‘생사
(生祠)’라 하여 생존한 인물을 기리는 사당까지도 세워졌다고 한다.
이제 공이 별세하신 지 어언 360여년에 이르고, 비록 현존하는 비석들은 오랜 세월에 풍우에 시달려 비문은
점차 인멸(湮滅)되어 가고 있지만 각종 기록을 통해 전하는 공의 발자취는 오래 오래 그 향기를 이어갈 것이다.
끝으로, 인조 실록에 전하는 공의 졸기 (卒記, 해당 인물의 별세에 즈음하여 그 생애를 요약한 사관의 논평)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봉서는 명민(明敏)하고 문재(文才)를 지녀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으며 양남(兩南)의
감사로 나가 다 칭송과 치적이 있었고, 관서(關西)의 감사(監司)가 되어서는 공무(公務)를 물
흐르듯이 처결하여 사람들이 그 능력에 감탄하였다.... ”. (서천사랑 제2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