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황룡에서 중앙군과 맞닥뜨리다
전봉준이 중심이 된 군민들은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를 견디지 못해 봉기,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내쫓고 아전들을 징벌한다. 고종 31년(1894) 1월이었다. 이를 고부 농민봉기라 부른다.
고부 농민봉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의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회유하여 자진 해산했는데, 사건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 참여자와 주모자를 색출해 가혹하게 처벌한다. 민심과 동떨어진 수습책이었다. 이에 분노한 4천여 농민들이 3월, 무장에서 봉기한 후 백산에 집결하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한 농민군 지휘부를 구성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탄생한 것이다.
태인·부안 관아가 농민군의 손에 연이어 함락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전라감영군을 이끌고 출동, 4월 7일 정읍 황토현에서 농민군과 대적했지만 크게 패한다. 농민군이 승리한 것이다. 농민군이 싸워 이긴 최초의 전투, 황토현 전투다.
무장에서의 봉기 후 전봉준을 대장으로 한 농민군이 편성되자, 당황한 조정은 홍계훈에게 800여 명의 병력을 주고 양호초토사로 임명한다. 홍계훈의 중앙군은 4월 2일, 서울을 출발하여 4월 5일 전주에 입성한다. 이들은 서양의 야포와 회전식 기관총, 소총으로 무장한, 당대 조선 최정예부대였다. 전주에 도착한 이틀 후 전라도 감영군이 패배했다는 황토현의 비보가 날아든다.
홍계훈의 중앙군이 전주에 입성하자, 농민군은 전주성 공략을 뒤로 미룬 채 정읍, 무장, 영광, 함평으로 이동하면서 세력을 확대한다. 그리고 4월 23일, 농민군을 추격하던 중앙군과 맞닥뜨린 곳이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였다.
농민군, 중앙군을 격퇴하다
장성에 도착한 농민군은 월평촌 삼봉에 진을 쳤다. 그리고 이틀 후인 23일, 이학승의 중앙군 선봉대가 장성에 도착한다. 황토현 전투 이후 전봉준은 중앙군과의 일대 접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략적 장소인 어떤 곳에서 중앙군에게 일대 타격을 입힌 후 전주를 점령하여 중앙군의 기세를 꺾는 작전을 쓴다. 그 전략적 장소가 전주로 통하는 지름길인 장성 황룡이었다.
먼저 도착한 농민군은 삼봉을 중심으로 주요 거점에 농민군을 배치했다. 뿐만이 아니었다. 서양의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을 막기 위해 수십 개의 대형 장태도 만들었다. 주력은 이틀 전 도착했지만, 전봉준은 별동대를 장성에 먼저 파견하여 농민군 배치를 위한 지형정찰, 장태 제작 등 치밀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장성 농민군이 합세하여 준비했음은 물론이다.
중앙군 선봉장 이학승은 삼봉과 마주하고 있는 황룡강 근처에 진을 치고, 농민군을 회유하는 서신을 보낸다. 그런데 이학승은 답신이 오기도 전에 월평 장터(지금의 황룡 장터)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농민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전봉준 공초에는 이때 농민군 40~50여 명이 사망했다고 나온다.
선제공격을 당해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농민군은 곧바로 삼봉에 올라 전투태세를 갖춘다. 관군의 수가 수백 명 뿐이었고, 지원부대가 없는 것을 확인한 전봉준은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린다. 장성 황룡강의 지형을 환하게 익혀 둔 1만여 명의 농민군들은 장태를 굴리고 함성을 지르며 관군을 공격한다. 관군의 쏟아지는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은 농민군의 신무기 장태가 무력화시킨다. 기관총과 소총 사격에도 물러나지 않고 장태를 굴리며 진격해 오자, 인해전술에 당황한 관군은 퇴각명령을 내린다.
중앙군이 영광 쪽으로 퇴각하면서 마지막 접전이 이루어진 장소가 지금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이 서 있는 신호리 뒷산 까치골 능선이다. 이곳 까치골에서 농민군은 선봉장 이학승을 비롯 5명을 죽인다. 농민군이 중앙군을 이긴 것이다. 대포 2문과, 소총 100여 정, 수많은 탄환은 농민군이 얻은 전리품이었다.
장성 황룡 전투에서 중앙군을 격파한 농민군은 사기충천하여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로 진격한다. 갈재를 넘는 농민군의 발걸음이 신바람을 낸 이유다.
동학 농민군의 신무기, 장태
동학 농민군이 장성 황룡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적의 탄환을 막아 준 '장태'라는 신무기 때문이었다. 장성의 동학 접주였던 이춘영도 "월평 접전의 승전은 오로지 장태를 사용함으로써 가져온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황룡 전투에 장태가 사용되었음은 황현의 '매천야록', 오지영의 '동학사', 이병수의 '금성정의록', 이춘영의 '동학약사' 등 여러 기록에 나온다. 그러나 어떤 모습인지, 크기는 어느 정도였는지, 제작자는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서술이 조금씩 다르다.
장태의 모습에 대해 황현은 "두 개의 바퀴를 달았으며 밖으로 창과 칼을 삐쭉하게 꼽아 마치 고슴도치 같다"고 했고, 오지영은 "청죽(靑竹)으로 얽어 만들고 밑에 바퀴를 달았는데 그 안에 농민군이 들어가 총을 쏘았다"고 했다. 이병수와 이춘영은 "크고 둥글게 만들어 그 안에 짚을 넣어 탄환을 막게 하여 농민군들이 굴리면서 그에 의지하여 총을 쏘며 돌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바퀴가 달렸는지, 농민군이 장태 안에 들어가 총을 쏘았는지, 둥글게 만들고 안에 짚을 넣었는지, 서술이 다소 다르다.
매천야록을 남긴 황현과 동학사를 남긴 오지영은 현장에 있지 않았다. 이에 반해 장성 동학 접주였던 이춘영은 자신이 직접 장태를 고안한 인물이다. 직접 제작하였고, 현장에 있었던 이춘영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장태는 바퀴가 달리지 않았으며, 안은 농민군 대신 짚을 넣어 만든 방어용 신무기였다.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크기에 대해서는 이춘영이 쓴 동학약사에 높이가 5척, 길이가 15척으로 나온다. 1척이 30.3센티미터이니, 높이는 1.5미터 정도이고, 좌우 길이는 4.5미터 정도 된다. 4.5미터 길이는 장태 뒤에 10여명의 농민들이 몸을 의지하기에 충분한 크기다.
황룡 전투에 사용된 장태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장태에 관한 기록을 남긴 황현과 오지영은 개수를 언급하지 않고 있는 반면, 이병수는 '여러 개'라고 했고, 이춘영은 7개라고 했다.
그럼 장태의 제작자는 누구일까? 오지영은 장흥 접주로 장흥 석대들 전투를 이끈 이방언이라고 했다. 이방언이 지금껏 '장태 장군'으로 불린 이유다. 이에 반해 이춘영은 자신의 지시에 의해 장성 사람인 최경호가 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장태는 예부터 닭이 잠자는 둥지로, 둥그렇게 만들어 처마 끝에 매다는 닭집이다. 그것을 보고 착안하여 크게 만들어 전쟁에 활용한 신무기다. 따라서 장태를 누가 제작했는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동학 농민군이 장태를 신무기로 고안하여 최정예 중앙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이다.
닭장을 신식무기인 기관총과 소총의 탄환을 막는 신무기로 바꾼 아이디어가 놀라울 뿐이다.
장성 황룡, 현장을 가다
동학 농민군이 홍계훈의 중앙군을 격파한 현장은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신호리 일대다. 농민군이 점심을 먹었던 월평장은 지금도 5일장이 선다. 이름만 황룡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당시 농민군이 점심을 먹었던 장터는 조금 더 황룡강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는 우시장 국밥집 밑 우시장 부근이었다고 한다. 우시장 국밥집의 국밥, 당시 농민군들이 점심으로 먹던 그 국밥은 아닐까? 장터의 흔적도, 국밥집도 당시 농민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1894년 4월 23일 중앙군의 대포 공격을 받은 농민군들이 잠시 후퇴한 곳은 삼봉이었다. 후퇴 후 적정을 살핀 전봉준은 중앙군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자 공격 명령을 내렸고, 월평장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황룡면사무소 근처에서 첫 전투가 시작된다.
농민군의 본진인 삼봉은 어디일까? 오늘 월평리 일대에 삼봉(산)이란 지명은 없다. 첫 전투지였던 황룡면사무소와 가까운 월선봉 자락 혹은 그 앞의 조그만 둔덕은 아닌지 추정만 해 볼 뿐이다.
장성 황룡중학교 앞 산자락에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이 서 있고, 가까이에 중앙군 선봉장이었던 이학승을 기린 순의비(殉義碑)가 서 있다. 중앙군은 영광 쪽으로 퇴각하면서 신호리 뒷산 까치골 능선에서 마지막 접전을 벌인다. 이곳에서 이학승을 비롯한 중앙군 5명이 전사했고, 그 가까운 곳에 선봉장 이학승 순의비가 세워진다. 한때 순의비를 찾아가는 일은 힘이 들었다. 감나무밭 안에 있었고, 여름이면 풀과 감잎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입구에 안내판이 서 있고 가는 길은 잘 닦여 있다. 장성의 유력 문중에서 돈을 염출하여 1897년 건립했는데, 당대의 유생 면암 최익현이 비문을 쓴다. 이학승은 전사한 후 좌승지를 제수받는다. 순의비 이름이 '증좌승지이공학승순의비'가 된 이유다.
이학승 순의비는 100여 년 동안 황룡 전투의 주인 노릇을 했다. 전투의 승리자였던 농민군 대신 이학승이 주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이 땅의 주인이 가진자였던 양반들이었기 때문이다. 장성 유림이 돈을 대고, 최익현이 글을 쓴 이유다.
1994년, 100주년을 맞아 동학농민운동은 역사적으로 재조명된다. 이제까지 반란으로 취급되던 동학농민운동은 대한민국 근대의 시작이며, 민족·민주 운동의 원동력으로 재 평가받는다.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전남도와 장성군의 지원을 받고 뜻있는 분들의 협찬을 얻어 1996년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을 건립하고, 동학농민군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한다. 기념전시관은 아직도 미완성이다.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은 농민군의 주 무기였던 죽창(竹槍)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탑신의 높이가 30미터, 지름이 2.5미터나 되는 기념탑이다. 탑신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장태를 굴리는 농민들이 조각되어 있는데, 장태 한가운데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탑의 전면에는 황룡 전투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청동 부조물이 있고, 탑의 좌·우 면에는 동학 농민군의 4대 강령과 곽재구 시인의 시 '조선의 눈동자'가, 후면에는 장성 황룡 전투의 역사적 의의가 새겨져 있다.
동학 농민군이 역사의 승리자가 되면서 이학승 순의비는 땅속에 처박히는 수모를 당했지만, 농민군들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순의비도 왼쪽 감나무밭에 다시 세워진다.
30미터 높이의 동학농민군승전기념탑과 1.6미터 크기의 이학승 순의비는 오늘 웅장함과 초라함의 모습으로 함께 서 있다. 동학 농민군 후손들은 이학승 순의비를 일으켜 세워 농민군을 죽인 중앙군을 용서했지만, 농민군 승전기념탑과 이학승 순의비의 대조적인 모습은 오늘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반영하고 있다.
농민군이 중앙군을 격퇴한 현장, 장성 황룡전적지는 1998년 사적 제406호로 지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