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서 빚어낸 서정의 상찬 -손택수 시집《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중심으로 생을 다했으니 풀썩 무너질 것 같지만 연탄이 광목의 깡을 모를 리 없다 연탄은 재가 되어서도 버틴다 -<연탄경經> 부분 사물에서 파동이 발생한다면 우린 심리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 파동이 사회적 의미로 치환될 때 의식의 변화를 유발한다. 절제와 내면화된 손택수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 번져 나오는 파동은 작은 미동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경험하거나 보았던 만큼이 축적되어 고유한 그 사람의 몫이 된다. 그것은 미래이면서 현재를 거슬러보면 과거가 된다. 당도하는 과정은 매우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수 있다. 시간을 통해 흘러간 과거를 헤아려볼 때 과거 속의 지층이 매우 광범위하거나 아니면 단순한 부분일 수 있다. 시집으로 묶인 시편을 사사로운 가족 이야기로 특정해버릴 수 있지만, 사회적 관계 의지가 녹록지 않고 충분한 이유가 있다면 문학의 위의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확장해본다면 70년대 이후 성장 일변도의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시대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면 말이다. 손택수 시인의 시 세계를 통해 드러나는 과거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농촌의 붕괴로 인해 탈 고향으로 빚어진 타향살이의 고단함이 적나라하다. 또한 타향살이에서 서서히 익숙해져 가는 능동적인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마디처럼 나눠 또 다른 세계로 틈입할 수 있다면 그만한 다행이 없다. 흔히들 진부해진 시어의 남용 시대에서 시적 위의 보다 그것을 폄하하려는 경향도 크다. 그것은 시가 갖는 상징성이 그만큼 훼손되고 시가 살아남지 못할 위기의 시대임을 말해준다. 반전은 어느 때에나 일어날 수 있다. 상처가 되지 않는 타격은 되레 감각을 예민하게 하여 경계를 극명하게 한다. 슬픔으로 존재하는 아픈 과거의 체험적인 흔적을 상투성으로 포장하지 않아 차별화에 성공한 손택수 시인을 시 세계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시집이 나오기까지 삼 년 여의 시간은 적지 않은 세월이다. 이번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을 일별하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간 여행은 따듯한 과거이고 욱신거리는 통증은 시편마다 감내해야 할 우리의 몫이다. 우선 시집명 부터가 구체적인 입자에 불과한 먼지들이 빛난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만 봐도 그 근저에 자리하고 있는 삶 이전의 진솔한 것까지도 드러내려는 의도라고 본다. 과거를 소비하지 않고 진정하게 안고 가려는 고통은 시 전반에서 한국인의 정서가 삶의 질곡을 노래한 아리랑으로 대표하듯 차마 잊어질 수 없는 시대 사회상으로 진경을 보여주고자 한다. 애써 겸손한 시인의 의지를 밝힌 맨 뒷장에 실린 <시인의 말>은 시를 쓰는 진정한 의미는 인간애에 바탕한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독방을 얻었다. 삼년 시묘살이는 못 할망정 가끔씩 찾아가 혼자 있어나 보자고. 쪽창으로 들어 온 빛이 젖은 손수건처럼 바닥에 깔려 있는 방이었다. 거기 서 몇해 동안 끊고 지낸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얼치기 시묘(侍墓)살이가 시(詩)살이가 된 셈이다. 무덤 옆에 지은 시의 초막을 걷고 십년 동안 머물던 일터를 떠났다. 돌이켜 보니 애면글면하던 시절이 다 애틋하다. 곱씹고 곱씹은 아 버지의 유언 한줄로 시집을 묶는다. -<시인의 말> 전문
굳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시인에게 아버지는 관념 바깥에 존재하지만, 이제는 관념 속 아버지를 닮아간다. 어느 것 하나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어느 사람도 스스로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근본을 순간 잊으려 노력한다. 도시의 현란함 속에서 아니면 도시 바깥의 허름한 구석처럼 스스로 몰락해가면서 자신과 인연되어온 많은 시간과 사람들의 관계를 망각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려야만 살 수 있는 상실의 시대를 산다 해도 어색하지 않은 현시대를 살고 있다. 인본이 배제된 욕망의 언어만이 상업주의 언어로 가치 받는 사회다.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은 시대, 불편할 때마다 인공지능처럼 필요한 만큼의 거래된 사고만으로도 충분한 현실을 산다. 그런 현실에 적응해온 변화의 시간은 빠르거나 늦거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속도 조절이 불가하다. 그런 흐름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변화 속도를 따로 구분 지으려 노력하며 고민하게 된다. 그렇게 발화된 시적 기반과 기존의 정서와 변별되는 시라면 동일한 사회적 시선으로 예단해선 안 된다. 그 경계 지대에 손택수 시인까지 포함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기존의 방식에서 진전된 낯선 시에 있었을 것이고, 막연한 시 속에 은둔해있는 시인의 삶을 알지 못한 경우에서 가능했다. 낯설지만 읽어갈수록 낯설지 않아 다가서게 하는 시를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우선 시 속에 내장되어있는 성장 시대의 아픈 정서를 들 수 있다. 고통스런 성장기 체험은 건강한 시의 정서로 성장하여 시적 자아로 발아된다. 우리가 대물림해온 서정적 정서를 가볍게 여기지 않은 시편을 들추면 풀풀 나는 사람 냄새가 오히려 눈과 마음을 편하게 자극한다. 시 한 편을 위해 살아온 고단한 시인의 삶이 현대인의 먹고사는 일상으로 가볍게 결코 묻힐 수 없다. 그래서 사소하거나 개인적일 수 없는 손택수 시의 출발점은 <시인의 말> “돌이켜보니 애면글면하던 시절이 다 애틋하다”는 현대인의 속내를 파헤친 전체상全體像이라고 봐도 타당할 것이다. 살아생전까지 <전라도 하와이> “전라도 하와이, 세상에 없는 섬/이 땅에만 있는 섬/아버지는 하와이였다.”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고독이 소멸될 수 없듯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 시인의 시 세계는 눈물을 닦는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야구공 실밥은 왜 백팔개인가> 대상화된 시의 세계는 소소하게 매듭되는 법이 없다. 야구공은 타력에 의해 회전력을 갖는다. 전 지구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은 야구 게임에서 야구공은 필수다. 그 공을 꿰맨 실밥에서 숨겨진 자본주의의 착취를 들춰낸다. “메이저리거 류현진의 공이 계산된 제구력에 따라 회전을 할 때/ 아이티나 코스타리카의 어느 시골 마을/ 일당벌이 바느질을 한 소년의 빈혈을 앓는 하늘도 따라 같이” 돌 때 관중의 환호에 묻힐 수 없는 착취가 과거 이 땅에도 재봉틀을 철야로 돌리는 어린 이모 같은 소녀들이 있었다. 그것은 곧 우리의 부끄럽고 가슴 아픈 가족사다. 그래서 손택수 시인의 시는 소소한 가족사에 그치지 않는다. 안과 바깥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적인 부당한 노동과 인권까지 함의한다. 착지한 땅을 뒤로 밀어젖히는 힘으로 맹렬히 질주하다 강물 속의 물고기라도 찍듯 한점을 향해 전속력으로 장대를 내리꽂는 순간, 그는 자신을 쏘아올린 지상과도 깨끗이 결별한다 허공으로 들어올려져 둥글게 만 몸을 펴 올려 바를 넘을 때, 목숨처럼 그러쥐고 있던 장대까지 저만치 밀어낸다 결별은 그가 하늘을 만나는 방식이다 그러나 바 위에 펼쳐진 하늘과의 만남도 잠시, 그의 기록을 돋보이게 하는 건 차라리 추락이다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 부분 고독한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현실의 벽이다. 불편한 현실을 마냥 부정만 해선 안 되듯 <장대높이뛰기 선수의 고독>한 자화상 같은 의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손택수 시인은 현실을 벗어나려는 시발점이 곧 자신이 딛고 있는 바닥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고난 바닥을 갖고 있다. 좋든 나쁘든 그것은 운명이고 그곳을 통해서만 자신이 꿈꾸는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나아지려는 의지는 매우 “맹렬”하고 “전속력”으로 질주해야 가능하고 어설프게 노력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렇게 해도 스스로 내려와야 하는 운명까지도 예감하고 있다면 시인은 도통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바라보고 있다. 매사 유연함에 바탕을 삼고 있으니 말이다. “폭발하는 한점 한점,/ 딱딱하게 굳은 바닥에 물수제비 물결이 인다”는 이 지점에서 장자의 나풀거린 옷자락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물수제비를 뜨는 돌이 물과 부딪히는 순간만큼은 물보다 더 유연해져야 한다. 돌 즉 자신보다 더 유연한 물을 딛는 순간 비상해야만 앞으로 날아갈 수 있다. 추락의 유혹을 견뎌야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고, 고독의 시간 속에 갇힌 절대적인 고뇌와 결별할 수 있다. 따라서 고독의 크기는 물과 부딪히는 충격보다 클 수 없다. 물처럼 풀어지는 시간은 또 다른 사유 속 물상을 준비하는 것으로 헛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 중 왕희지의 사당 앞에서 보았음직한 <물로 쓰는 왕희지체>에서도 소멸과 생성을 보여준다.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지만 강한 붓털과 만나 또 한 번 눈부신 비상을 꿈꾼다. 그것은 생과 소멸이 다르지 않고 물수제비의 비상과 닮았다. “노인은 그저 그어내리는 순간들에만/ 집중”한다. 그것은 혼신을 다한 진정성에서 가능하다. 누구나 그렇게 살다 죽음을 맞이한다. 시인은 그 죽음의 경계를 일상에서 수시로 들여다본다.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 쓰는 글이 있다면/사라지지 않는 것이 두려워서 쓰는 글”은 죽음 직전의 깊은 침묵 속 고독이고 또 다른 내면의 정전이다. 정전 속에 꽂힌 비밀스러운 추억의 장서를 한 부 뽑아 들었다. 여울돌에 낀 이끼를 뜯어 먹더라도 나는 한때 그 강으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등을 뚫는 아픔 없이 어찌 풍경이 될까 절집 처마 끝에 올라 풍경소리 들려줄 수 있을까 다독이며 다독이며 참으로 멀리도 흘러왔는데 나뭇잎은 땀에 전 바닥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내 몸 어디에 아직 떠나온 강물소리 출렁이고 있을까만 그 옛날 영산강 배꼽다리 대숲 마을 고무신 속 각시붕어처럼 젖은 구두 벌어진 어항 속을 유영하고 있다 -<구두 속의 물고기> 부분 책갈피마다 잔잔한 물소리가 삶 속에서 끊이지 않고 물 흐르듯 흘러가는 시편 중 하나다. 어찌 보면 매번 시인은 고단한 현실과 부딪힐 때마다 탯줄처럼 이어져 오는 “그 옛날 영산강 배꼽다리 대숲 마을” 고향의 언저리를 찾아간다. 그럴 때마다 무심한 강가에서 눈빛으로 물수제비를 뜨고 있는지 모르겠다. 힘에 부친 도시의 일상에서 위안으로 다가오는 아슴한 유년기의 추억은 곱씹어도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손택수 시인의 시는 추억의 꺼풀을 벗겨낼 때마다 오래도록 아파온 듯 통증이 흉터처럼 굳어 기어이 멍이 된다. 현대인의 고독과 절망은 어디까지 망가져야 끝이 나는 것인가. 도시의 숲을 헤매다 꼼짝없이 유년 시절 고무신 안에 갇혀버린 물고기 신세가 되어버린다. 출판사 신간 홍보를 위해 돌아다니다 지쳐 나무 아래에서 구두를 벗어놓고 쉴 때, 구두 속으로 떨어진 나뭇잎 하나가 시의 사유로 흘러 강가로 스며든다. <구두 속의 물고기>가 되어 살아 숨을 쉬기 시작하는 시인이다. 결코 낭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그곳에서 멈추지 않는 사유의 강은 길고 깊어 스스로 한계에 갇히지 않는다. 비록 고독한 삶이 주는 고통이 크다 해도 소시민의 정신적 해방은 그리움이라는 연민이며 추억을 통해 치유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건강한 사유 안 그리움이어서 고독을 견인해주는 동안만 가능하다. <쇠똥구리별>은 상상 속 현대인들의 고단한 모습을 담담하게 이야기로 풀어간다. 신화 같은 아득한 시절에서 추방된 곧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다. <구두 속의 물고기>처럼 쇠똥구리별로 상징된 인간의 고단한 삶의 묘사가 눈물겹다. 결코 허투루 눈물을 흘릴 수 없는 “똥을 굴리면서도 별과 별 사이로 난 지도를 읽으며 집으로 돌아간대// 똥구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려봤지 몸에서 나는 악취에 진절머리/ 똥이 될 밥을 따라 수모를 견뎌도 봤지”라며 주절주절 거리는 행간 속 주인공은 시인이자 곧 우리의 자화상이다. 그 모든 고통의 시간을 시원하게 풀어놓고 싶어도 누구 하나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시인은 몫으로 남은 고독을 무병처럼 떠안고 살아야 한다. 천형天刑같은 <어느 하루>마저 시인에게는 놓칠 수 없는 시간이다. 아침 널었던 빨래가 포슬포슬하게 마르는 동안 빨래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흙을 뭉쳤다 푸는 동안 -<어느 하루> 부분 일상이 자기 수행이 되어버린 사유는 과거에 대한 회억을 유발하며 시작된다. 시작과 끝의 알림도 없는 시지푸스의 고행보다 더 지독한 천형이다. 고행을 다시 시작할 때마다 묵묵히 받아들이는 시지푸스의 웃음을 머금은 일상이 그러하듯 천형이라 해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인이 되어버린 뒤 묘연해진 아버지를 그 속에서 만날 수 있고 어머니를 떠올리는 세밀한 스케치를 통해 주름진 삶이 구체적으로 도드라진다. 자신을 표현하지 못했던 시간을 비로소 한 꺼풀씩 벗겨가며 고독에 갇힌 상처를 치유해가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도 서술에 그칠 수 없는 하루하루가 평범하지 않다. 백일 동안 핀다는 백일홍도 생애의 소중한 시기를 저울질해 꽃을 피웠을 것이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의 시간 앞에서 붉게 핀 백일홍도 최소한의 생애를 가늠해보며 아홉 번의 부침을 거듭하다 생애를 마칠 것이다. 생과 죽음의 분리 직전 “백일홍 꽃망울에/ 눈을 주길 잘했다”는 자기 위안은 변명이 아닌 주체적 시론이기 때문이다. 매사에 허투루 보지 않고 순간을 회복하는 기제로 활용하려는 건강한 정신적 사유는 면면히 흘러가며 치유해가는 영산강 물줄기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것의 출발이 그렇게 시작되어 생애가 되었다. 그 강의 발원지도 이슬 한 방울로부터 시작되었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 출렁임으로 떨어지며 강물이 되었듯이 <풀잎 지게>의 “풀잎이 등을/ 꺼꾸러뜨렸다”는 풍경 묘사는 아버지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학교에 불려온 아비의 등짝 같다/ 공손해 보이는 대신/ 더러는 비굴해 보이던 등// 가늘디가는 등허리에 그냥 부릴 만도 하건만,/ 어떤 짐은 여울을 건널 때 중심을 잡아주기도 하더구나// 평생 시장 지게꾼으로 살다간 아비/ 뼈를 묻은 나무 밑둥이다// 숙이고 숙여,/ 땅바닥 아래까지 꺼져/ 마른 등짝을 뚫고 솟아오른 풀잎// 아비가 새로/장만한 지게다/ 뚜두둑, 등뼈를 펴며/ 일어서고 있다”는 사물에 대한 관찰에서 멈추지 않고 성찰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 다가가려는 근본임을 알기 때문이다. 곤궁한 시대와 타협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등뼈로 상징된 풀잎 지게는 특별하지 않으면서도 특별한 시대 정신을 사유 깊게 천착하게 하는 소중한 시편이다. 결코 사라지지 않아 고통으로 침전된 사유는 생기로 치환되고 더 나아지려는 보통 사람들의 친근한 삶의 수용 방식을 보여준다. 그런 아버지의 삶이 스러져가는 남루로 사라지지 않았고 세상에서 가장 슬프도록 아름다운 시인의 추억 속에서 한편의 서정으로 피어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인의 아버지가 애시 당초부터 보통 사람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예 국가의 국민으로 살기를 거부했던 적이 있었고, 그 아들인 시인도 숙명적으로 따를 때가 있었다. <바람과 구름의 호적부>에 적힌 그대로가 이력이고 그 징표다. “게을러터진 아버지는 내 출생 신고를 이태나 미뤘”고 그 이후 시인도 국가의 국민임을 거부하려는 반골을 드러낸다.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어도 “어머니 등에 업혀 바라보던 꽃들, 별들/ 순간순간들이 나의 든든한 정부요, 국가였”던 것처럼 아버지의 사망신고를 이태나 미루면서 유골을 품고 다닌다는 시인이다. 출생과 죽음의 이력을 관리하는 무용한 국가보다 고된 세상 살아가는데 되레 아버지가 살아왔던 험로 속 추억들로 위안받는 것이 국가보다 낫다는 것이다. 자의식으로 바라본 이미지 <꽃벼랑>에서는 삶의 무게로 억눌린 현실이 얼마나 험난했을까를 상상한다. 그 벼랑 끝에서 하루 매 순간을 바로 서기 위해 “구겨진 옷 주름을 몇번 더 구기면서 ,/ 착지 못한 나머지 발을 올려놓으려/ 틈을 노리는 출근버스 창밖”을 응시하다 풍경과 닮은 한 때의 남루한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렇게 내면으로 더 단단해진 욕망을 마냥 슬픔처럼 억누를 수는 없다. 어차피 벼랑 같은 세상살이도 하늘 아래 일상일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두발을 착지하고 살아내려는 <하늘 골목>이 있다. “다섯살 겁 많은 시골 아이를 받아준 문현동 옛집/상처투성이 보르크 벽과 벽 사이로 빨랫줄이 내걸리던 골목”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골목과 맞닿아 있어 하늘의 별을 헤아리며 어머니를 기다릴 수 있었고, 좁은 골목 안 처마와 처마가 맞닿을 듯한 골목으로 “빈 도시락통을 딸랑거리며 돌아오시던 어머니,”를 기다리던 시간으로 잉태한 고독이 있다. 다섯 살 아이였어도 기형도의 <엄마 걱정>에서처럼 보이는 나약한 눈물은 어디에도 없다. 소쿠리 팔러 다니던 할미와 어린 손주 아이가 부은 발을 어루만지며 기다리던 음식이다 먼 항구로 일 나간 내 아비와 어미가 두고 온 아이를 생각하며 먹던 국수 팔려가는 어미를 따라온 송아지 젖꼭지를 물고 울던 천변엔 그치지 않는 물소리가 있다 뚝, 막을 수 없는 설움까지 뚝딱 관방제림 그늘진 식도 따라 빨려들어간다 -<뚝방국수> 부분 아버지 등에 박혀 있던 못이 풀렸다고 한다 평생 빠질 것 같지 않던 손바닥 못도 풀려 있었다고 한다 못도 산 자에게 박히는 것, 허리가 굽었던 사람도 죽으면 몸이 곧게 펴진다고 하더니 평생 지게꾼으로 산 양반 아들도 해드리지 못한 안마를 죽음이 해드린 것인가 -<마지막 목욕_죽음의 형식1> 부분 국수 가락처럼 술술 넘어가는 시다. 눈으로도 목으로도 몸 안에서도 다 삭혀지는 손택수 시인의 시다. 너무 슬퍼 우울하지 않고 아슴한 추억으로 싸구려 눈물을 자극하지 않는 시다. 멸치 육수 우려 말아준 <뚝방국수> 한 그릇 앞에서 누구도 싫어할 사람은 없다. 시는 그래야 한다. 그냥 목 넘김만 좋아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목까지 잠긴 고독으로 묵힌 아픔 속 침묵을 “뚝, 막을 수 없는 설움까지 뚝딱/ 관방제림 그늘진 식도 따라 빨려들어간다”는 사람에게 더는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정서가 우리의 인지상정이다. 그런 서정성의 보편적 가치를 충분히 담지해낼 때 참신한 합의를 이뤄내는 것이다. 손택수 시詩 안에는 비상과 추락을 통해 죽음이 곧 소멸이 아닌 생성으로 긍정되고 끊임없이 전화轉化된다. 단단한 내면에서 발효되어 고단한 과거마저 긍정적인 인식으로 대물림된다. 세대를 건너가는 세습이 죽음의 형식이지만, 고독의 절차라는 의식을 거쳐 이뤄진다.“‘잘 살고 간다, 화장 뿌려, 안녕.’” 아버지가 죽음을 기다리던 고독의 시간만큼은 아버지 당신만의 고독의 시간은 아니었다. 산자나 죽은 자에게 공통되는 위안의 심리적 의식 공간이자 궁극은 산자를 위한 마지막 배려다. 불공평하게도 그런 공간은 살아생전 못 가진자만이 가질 수 있는 보상인지 모른다. <명효릉_죽음의 형식2>의 “아직도 땅을 찌르는 도굴꾼의 쇠꼬챙이를/ 자신이 휘두른 칼끝처럼 두려워하며 떨고 있을/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주원장의 명효릉”은 망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누구에게도 위안을 줄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할 차례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일들이 다반사로 반복되고 있다. <꽃들이 우리를 체포하던 날>에서는 철거용역을 동원해 쌍용차 희생자들을 분향하는 덕수궁 대한문 앞 분향소를 강제 철거하고 화단을 만들어 꽃을 심었단다. 꽃보다 무가치한 희생자들의 존엄 받아야 할 인권은 없고 오히려 화단 속 꽃의 경계는 매우 삼엄하다. 주변을 지키는 철거용역들도 돈에 매수된 우리의 아들들이라는 아이러니다. 하기야 <물속의 히말라야>처럼 사람 사는 것 자체가 “쥐어뜯긴 얼굴로 숨죽인 물속의 히말라야/ 해발을 삼킨 수면이 광기로 번득인다”는 현실이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고통스런 일상과 맞닥뜨려야 한다. 그것을 마냥 아프다고만 할 수 없다. 받아들이면서 삭힐 것은 삭히거나 불편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면 된다. 그것이 손택수 시인의 삶의 방식이고 건강한 시론이다. -《시와문화》2018년 겨울 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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