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는다는 것은 영원한 지옥과도 같은 느낌이예요. 그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고통, 분노, 혼란, 상처, 그리고 다음 순간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지 알지 못하죠. 내가 상처 받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줘요.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껴져요. 아무 것도 내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곤 없어요.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지나치게 행복하다’고 느낄 때가 있죠.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불안해져요. 그리고는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달래요. 술 취한 채 나를 다치게 하지요. 그리고는 바로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껴요. 수치스럽죠. 죽고 싶지만,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에게 너무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에 자살을 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그 사실에 화가 나서 내 손목을 그어요. 온통 스트레스 투성이일 뿐이에요…….”
어느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의 고백입니다. 인격 장애라는 말을 듣게 되면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저 사람 인격은 돼먹지 못했어.” 혹은 그 반대로 “굉장히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야.” 식의 말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정신과에서 생각하는 인격과 인격 장애는 이와 좀 다릅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인격장애는‘문제 해결이나 스트레스 해소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부적절하게 대응하는 비적응적 행동양식’입니다.
잠깐 그랬다가 또 안 그랬다가 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 양상 때문에 현실 적응에 어려움 겪는 것을 인격 장애라고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자기 스스로 힘들게 느껴지는 수도 있지만, 자신은 힘들게 느끼지 않는 경우에도 사회적으로 부적응 양상을 나타냄으로 간접적으로 어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DSM-IV(정신과 진단 및 통계 편람)에 따르면 경계성 인격 장애를 진단하는 기준은 대인 관계와 자아상, 감정적인 측면에서 나타나는 전반적인 불안정성과 충동성으로 구성됩니다. 자세한 진단 기준에는 버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극단적인 이상화와 평가 절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불안정한 강렬한 대인 관계, 자아상의 혼란, 자신에게 해를 미칠 수 있는 영역(낭비나 성관계, 약물 남용, 폭식 등)에서 보이는 충동성, 반복적인 자살 행동이나 자해 행동, 감정적인 불안정성, 만성적 공허감, 반복적으로 싸우거나 벌컥 화를 내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부적절하고 강렬한 분노, 일시적인 피해 사고나 해리 장애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증상들을 쭉 읽다보면 누구나 한번 쯤은 경험해본 것입니다. 십대의 경우라면 더욱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단 기준에서는 이러한 양상이 초기 성인기로부터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경계성(borderline)이라는 명칭은 신경증(neurosis)과 정신증(psychosis)의 경계(border)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계성 인격 장애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들의 세계는 어린아이와 같이 영웅과 악당으로 분리(splitting)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모순을 견뎌 내지 못합니다. 분리는 경계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람이 느끼는 모순적인 감정과 불안을 지키기 위해 사용되지만, 결국에는 이 때문에 더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의 대인 관계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순간 그 사람을 불신하게 됩니다. 데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 상대가 조만간에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자신을 떠나갈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와 사이가 틀어지면 그보다 나은 누군가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내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요. 헤어진 상대는 그 즉시 내 인생에서 최악의 등장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지영 씨는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더운 날씨에도 얇은 긴 팔 옷을 입고 있었지만 워낙 잘 어울리는 옷을 선택할 줄 아는 사람이라 이상하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상담을 시작하면서 그녀는 옷소매를 걷어 올려 자기 팔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구 그어진 상처가 손목에 있었습니다.
그보다 더 깊이 베어진 마음까지 보이는 듯 했습니다. 아직 20대 중반이었지만 그녀는 두 번째 이혼하고 난 직후에 상담실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서요…. 도무지 희망이 없어요. 미래란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지영 씨는 정말 우울하다기 보다는 텅 빈 느낌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았습니다. “두 번째는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너무 어렸을 때 멋모르고 첫 결혼을 했다가, 무능한데다가 난폭하기까지 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 몸 고생 톡톡히 했었으니까.
그런데 두 번째 만났던 남편은 달랐어요. 내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듬어 준다고 느꼈어요. 이 사람이라면 내 인생의 외로움도 위로 받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만난 지 몇 달도 안 되어 결혼했죠. 그렇지만 알고 보니 그는 빈털터리더군요. 말로만 저를 위하면 뭘 해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데. 사랑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니잖아요.
결국 제가 못 견뎌서 이혼을 요구했어요. 왜 처음 만나기 시작할 땐 그렇게 완벽해 보이던 사람들이 사귀어 보면 속 빈 강정이죠? 제가 사람 보는 눈이 너무 없어서 그럴까요?” 지영 씨는 경계성 인격 장애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버림 받을까봐 두려워 지나치게 집착하고, 그러다가 스스로 버림받음을 자초하고 또 고통스러워하고.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는 자신의 고통이‘병’으로 이름 붙여질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보고자 대인 관계에 매달리기도 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아픔뿐입니다.
아프도록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경계성 인격 장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격 장애를 치료할 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치료자 측의 요소입니다. 정신과 의사도 사람인지라 인격 장애 환자를 보다보면 함께 감정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화가 날 수도 있고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경계성 인격 장애 환자만큼 치료 원칙이 뚜렷해야 하는 경우도 없을 겁니다. 치료 원칙 가운데는 치료자가 환자에게 혹은 환자를 위해서 치료해 준다는 식이어서는 안 되며 환자와 함께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수행한다는 자세여야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환자를 꾸짖거나 벌을 주어서는 안 되며, 자신의 행동 결과(주로 좋지 않은 결과)로부터 환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스스로 책임을 지게 유도해야 합니다. 위대한 치료자이신 주님만큼 우리에게 이러한 역할을 잘 해 주시는 분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니까요. 주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얘기인지 생각하며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