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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시집 해설>
짧은 시의 힘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1.들어가며
최근 시가 길어지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산문시가 유행하더니 이제는 아예 문예지 두, 세 쪽을 가득 채우는 장형의 시도 심심찮게 눈에 띄고 있다. 이렇게 시가 길어지면서 시 읽기가 힘들고 재미가 없어지고 있다. 서사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소설은 이야기의 흥미로움과 플롯의 묘미로 우리에게 읽는 재미를 준다. 소설이나 에세이와 다른 시 장르로서의 장시형 산문시는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아 둘 특별한 예술적 장치가 없다. 운율도 서사도 논리적 정합성도 갖지 않은 긴 산문을 장시간 집중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긴 장시를 쓰는 것은 생각에 생각을 잇고 연상되는 사물에 또 다른 사물들을 떠올리는 단어들의 연쇄를 즐기는 시인의 유희가 될 수는 있지만, 독자와의 소통을 통해 사유와 정서를 전달하려는 가능성을 애초에 포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시형의 산문시가 유행할수록 시와 독자들의 거리는 멀어진다.
하지만 길고 난삽한 시들이 가지는 더 큰 문제는 시어가 가질 수 있는 힘을 반감시킨다는 것이다. 시의 가장 큰 특징은 함축성이다. 이 함축성은 비유, 특히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원관념을 그것과 유사성의 관계에 있는 보조관념을 통해 한정할 때 원관념의 외연은 줄어들고 대신 그것의 내포적 의미는 확장된다. 시가 적은 언어로 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확대 과정을 통해 시는 일상어의 폐쇄적이고 상투적인 답답한 의미의 울타리를 넘어 말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우리의 굳어진 사고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준다. 이것이 바로 시어가 가지는 힘이다. 이런 힘을 복효근 시인의 이번 시집의 시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서정적 울림의 확대
흔히 서정시를 “전통 서정시” 등으로 칭하며 낡은 또는 시대착오적인 장르로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시는 기본적으로 서정에 의존한다. 다만 그 낡거나 상투적인 서정과 새롭고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서정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복효근의 시들을 읽으면 짧은 시어가 우리의 정서를 어떻게 폭넓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의 시어들이 보여주는 서정은 잔잔하면서도 멀리 퍼지는 파장을 일으킨다.
오래된 책갈피에서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편지지에 마른 꽃잎을 붙여 보내던 날이 있었다
- 「압화 혹은 아파」 전문
시인은 책갈피 사이에서 문득 떨어진 압화 하나를 발견하고 과거의 추억을 회상한다. 그런데 그 추억이 시인에게 아련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압화’와 발음이 같은 ‘아파’라는 말을 통해 꽃을 책갈피에 묻어두었을 아름다운 시간이 지금 아픔으로 소환되는 그 간극을 우리에게 짧은 시어로 전달해 주고 있다. 그 간극 속에서 수많은 정서적 울림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거기에는 헤어짐의 슬픔도 있을 것이고 젊은 시절을 추억으로만 회상해야 하는 나이 듦의 설움도 있을 것이고 모든 것을 지워 없애고 마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도 들어 있을 것이다. 시인은 이 모든 정서적 울림을 몇 개의 단어들로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울림은 몇백 마디의 자세한 설명과 서사보다도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것이 바로 짧은 서정시가 가지는 힘이다.
대체로 이러한 서정의 힘은 은유를 통해 확대된다. 원관념을 그것과 유사성의 관계에 있는 보조관념을 통해 한정할 때 원관념의 외연은 줄어들고 대신 그것의 내포적 의미는 확장된다. 시가 적은 언어로 많은 의미를 함축하게 되는 것은 이런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확대 과정을 통해 시는 일상어의 폐쇄적이고 상투적인 답답한 의미의 울타리를 넘어 말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고 우리의 굳어진 사고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준다. 다음 시는 이 은유 힘 자체를 시의 주제로 삼아 보여주고 있다.
노인요양병원 바로 앞 장례식장
그 직설화법이
해도 너무했다 싶었던지
그 사이에
꽃 핀 벚나무 두어 그루
- 「은유법」 전문
“노인요양병원 바로 앞”에 “장례식장”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너무 솔직한 직설화법이다. 노년과 죽음을 이렇게 간결하게 연결하는 설명하는 것은 분명한 진실의 전달이라고 해도 우리의 삶의 많은 구체성을 없애 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그 사이에 “꽃 핀 벚나무 두어 그루”를 둔다. 그것이 바로 추상성을 구체성으로 바꾸는 은유가 된다. 이 은유를 통해 노인들이 느끼며 살았을 삶의 희열과 기쁨 그리고 그런 것들이 소멸할 수밖에 없는 슬픔 등을 동시에 표현한다. 이렇게 은유는 서정의 폭을 확대한다. 시가 짧아도 풍부한 내용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유를 때문이다.
작은 새의 무게도
휘청
무겁게 받아주는
아닌 것처럼 살짝 휘어졌다가
그 탄력으로 새를 날려 보내주는
떠난 뒤에도
한참을 흔드는
흔들리는
- 「가느다란 나뭇가지」 전문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약하다. 하지만 그 약하기 때문에 가벼운 무게마저 “무겁게 받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녀린 휘어짐이 ”새를 날려 보내주는“ 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그 새를 떠나보내고 나서도 “한참을 흔드는”, 또한 “흔들리는” 내면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간단하게 추상화시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잉여 같은 다양한 정서적 울림의 상징적 표현이 아닐까 해석해 본다. 어쩌면 시어의 힘은 바로 이런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부를 만들어 내는 데 소용되는 효용성의 언어도 아니고 또한 권력을 만들고 행사하는 지배자의 언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원초적 힘을 새로운 활력으로 부활시키는 마술적 힘을 가지고 있다. 가녀린 나뭇가지가 새에게 힘을 주고 스스로 어떤 감흥에 부르르 몸을 떨고 있듯이 시는 정서적 반향으로 우리의 정신을 공명하게 만든다.
그것은 다음 시의 봄비 같은 것이다.
이제는 잊혀도 좋을 머릿결 냄새를 데리고 와서
지워진 전화번호를 뒤적이게 하는
기어이 소주병 모가지를 비틀고 마는
- 「봄비는 힘이 세다」 전문
봄비가 힘이 센 이유는 그것이 많은 것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을 일깨우는 봄비의 이미지와 그 내포적 의미가 우리의 감성에도 활기를 부여하여 묻어두거나 이미 지워졌거나 애써 감추고 싶은 우리 마음속의 회한과 기쁨과 슬픔 등의 다양한 정서를 환기한다. 생각 이전에 우리의 몸에 새겨진 감각을 일깨워 우리를 감흥에 취하게 만든다. 그것이 봄비가 힘이 센 이유이고 또한 짧은 시어가 힘이 센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서적 감흥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사람들 간의 사랑을 확대한다.
할머니 두 분 신호 바뀌기를 기다리다
아직 붉은 신호등인데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 옷자락을 끌며 그냥 건너자고 서두른다
한 할머니 버티고 한 할머니 당당히 건넌다
건너다가 나를 보며 하얗게 웃는다
기다리던 할머니도 나를 보며 웃는다
나도 푸르게 웃어주었다
- 「소읍」 전문
정서를 담아내지 못하는 언어는 신호일 뿐이다. 이 시에서 두 분 할머니는 신호로서 작용하는 기호일 뿐인 언어를 두고 망설인다. 사실 우리의 삶이 모두 그럴 것이다. 정해진 질서와 규칙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리고 언어는 이 규칙과 질서를 정하고 전파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그 언어로만 살면 우리의 삶은 너무도 삭막해진다. 규칙과 질서로 설명되지 않은 또 다른 언어의 풍부한 세계는 이 시의 웃음으로 표현되어 있다. 질서를 벗어난 한 할머니의 돌발적인 행동과 그것이 가져온 은근한 미소가 규칙과 질서로 설명될 수 없는 우리 삶의 풍부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규칙에의 순종이 아니라 그 너머의 삶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넉넉한 웃음의 소통이 사람들 사이의 유대와 사랑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 짧은 시가 우리에게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있다.
3. 성찰과 인식의 심화
시가 길다고 지적 인식의 깊이를 있는 것은 아니다. 복효근 시인의 짧은 시들은 간결한 언어로 결코 가볍지 않은,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벽에 뚫린 구멍을 가져오려 하면
벽을 통째로 들고 와야 하듯이
아서라
내 생을 혹은 내 죽음을 따로 가져오려 하면
이 우주를 통째로 옮겨와야 하는 것을
- 「연기설」 전문
적확한 비유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간명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우리는 생에 집착한 나머지 자신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어 내세를 생각하고 윤회를 가정하고 영생을 믿는다. 하지만 내 삶은 벽에 뚫린 구멍처럼 우주 전체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 전체의 변화시키지 않는 한 내 삶을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촌철살인의 비유로 작은 내 안에 갇혀 자신을 절대화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우리의 통념을 깨부수고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확대해 주고 있다.
다음 시는 우리를 존재론적 사고로 이끌어 준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오늘 또 하나
없는 전화번호를 지웠다
없는 누구에겐가 지워진
없는 나
구름에서 구름으로의 환승
잠시 스치거나
오래 비켜가고 있거나
-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를」 전문
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지워졌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다른 존재와 내가 소통이 단절되었다면 그 존재는 내 안에 살아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내 전화번호가 지워졌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애초에 없었는지도 모를” 그런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나를 확신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구름에서 구름으로 환승”하는 덧없는 존재거나 실체 없는 존재일 뿐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쩌면 근원적인 허무를 잊고 “잠시 스치거나 / 오래 비켜가고 있”는 그런 것이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시를 통해 우리의 삶과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다음 시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
모든 이름은 누명이다
애초 나의 이름이 꽃이었다면
나는 꽃이 되었을까
작두도 타지 못하고
굿도 모르는 무당
벌레로 불리며 벌레로 살아가야 하는
- 「무당벌레의 이름」 전문
우리는 누구나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그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을 이름으로 불리며 확인된다. 무당벌레가 “무당벌레”로 불리면서 무당벌레는 꽃일 수도 있고 무당일 수도 있지만 벌레로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모든 이름은 누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부여된 직책이나 직업으로 내가 불리게 될 때 나는 나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일종의 사회적 누명을 받게 된다. 그래서 나의 본질은 사라지고 이 누명이 나를 규정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누명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을 확인받기 위해 헛된 노력과 경쟁을 일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당벌레를 보면서 이런 사색으로 이끌어 주는 시인의 예리한 시선의 깊이가 놀라울 따름이다.
다음 시는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네 앞에선 언제나
오독이거나 난독이다
너는 채 읽기도 전에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네 앞에 서면 늘
나는 문맹이 되어
발음하기도 전에 포말로 부서지는 자음과 모음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다
너라는 바다
- 「바다」 전문
‘너’라고 부르는 타자는 항상 나에게는 독해해 낼 수 없고 도달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너는 항상 바다로 존재한다.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나 아닌 타인은 모두 이런 존재로 다가올 것이다. 그가 아무리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인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사회관계 속에 위치 지워진 너의 내밀한 삶의 “페이지”를 다 읽을 수 없다. 너는 파악될 수 없는 바다로 존재할 뿐이다. 정보통신 기기의 발달로 수많은 소통수단이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지고 우리는 군중속의 고독과 소외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다. 바다 앞에서 난독증을 경험해야 하는 이 막막함이 현대 사회 인간 간의 관계를 잘 말해주고 있다.
4. 맺으며
복효근 시인의 짧은 시들이 어떤 힘을 보여주는지 살펴보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 힘은 은유를 통한 언어의 함축에서부터 온다. 이에 비해 긴 장형의 산문시들은 대개 환유에 의해 시상이 전개된다. 원관념을 그것과 인접성의 관계에 있는 수많은 다른 단어들로 미끄러져 가듯 반복하는 것이다. 이른바 환유의 연쇄가 일어난다. 하나의 경험과 하나의 생각을 그것을 구성하거나 관련 있는 수많은 다른 단어들로 바꾸어 표현하면서 원관념의 의미를 해체해 나가는 것이 바로 환유의 전략이다. 이런 환유의 연쇄에서는 원관념의 외연은 무한하게 확장되지만, 그것이 가지는 내포적 의미는 그만큼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결국, 말의 의미는 소멸되고, 말은 수많은 다른 말들의 집적 속에서 사라져 간다. 긴 시를 읽고도 의미가 쉽게 잡히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환유의 연쇄는 인간의 욕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은 환유의 형식을 갖게 된다. 근원적인 결핍을 채울 수 없어 그 빈자리를 수많은 다른 대상으로 대체해 가는 과정이 바로 환유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욕망의 환유 속에서 욕망의 외연은 무한하게 확대되지만, 그 욕망이 가지는 본질적 힘은 점점 축소된다. 수많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으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채우고자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와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망의 내적 에너지는 점점 줄어든다. 긴 장형의 산문시가 가지는 환유의 표현법은 정확히 이런 욕망의 환유적 연쇄와 일치한다. 그것은 욕망의 확대를 강요하는 자본주의 시대 우리의 삶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황폐한 정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효과적이지만, 그것을 넘어 더 행복한 세상과 더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을 상상하는 언어의 힘을 약화시킨다. 이 시집의 짧은 시들은 바로 이런 최근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며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서정시의 반란이기도 하다.
다음의 짧은 시가 복효근 시인의 시 세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아름다울수록 깊은
- 「갓 핀 꽃에도 상처가 있다」 전문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고 껴안을 수 있을 때 나 아닌 타자의 아름다움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며 이런 사랑을 꿈꾸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서정적 언어의 힘이 아닐까 한다.
황정산 문학평론가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활동 시작.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 발표.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