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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시인 김삿갓 (71회)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 밤(상)
다음날 조반을 얻어 먹은 김삿갓은
곽호산 훈장에게 금천의 산천을 두루 돌아 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곡산에 가 있었다.
그의 발길은 곡산을 향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곡산을 가기 위해서는 신계를 거쳐야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걷던 김삿갓의 눈에, 신계를 앞둔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臍生堂藥局" 제생당약국 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삿갓은 그 간판을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니, 틀림없는 "臍生堂藥局"이었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음을 웃었다.
간판 글자가 터무니 없는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약국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약국은 '생명을 건져'준단 뜻에서 흔히 "濟生堂" 이라고 써온다.
그런데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간판은 건널 제濟가 아닌
배꼽 제臍자를 약국 이름으로 쓰지 않았나?
(저 약국 주인은 한문에 어지간히 무식한 모양이군.)
빈수레 소리가 사뭇 요란하고.
못생긴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는 법이다.
그러려니 돌팔이 의원이라고 별다른 일이 있을손가
생각 된 김삿갓이 의원 앞으로 가보니,
의원 집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지붕위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간판은 지붕 보다 더 커보였다.
김삿갓은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을 그냥 보아 넘길수 없었다.
(간판이 잘못된 것도 알려 줄 겸,
오늘 저녁은 저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자!)
김삿갓은 약국문을 열고 주인을 찾았다.
약국 주인은 나이가 60가량 되었을까
구렛나루를 허옇고 탐스럽게 기른 것이 풍채가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무슨 병으로 왔는고?
"저는 환자는 아니옵고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이 무슨 일로 약국에 들렀는가? "
"이 댁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생당의 "제"자는 , 건널 제濟자를 써야할 것을
배꼽 제臍자로 잘못 쓰셨기에 그것을 알고 계신가 하여 여쭤봅니다."
약국 주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김삿갓의 예상대로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을
주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약국 주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내가 워낙 눈이 어두워 간판을 친구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글자를 잘못 쓴 모양이구먼.
그러나 어쨌건간에
"제생당"이라고 읽히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약국 주인은 되지도 않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일장 훈계조의 말을 늘어 놓았다.
"무슨 일이나 귀공처럼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네.
그러니 귀공도 오래 살고 싶거든 매사를 둥글둥글하게 보아 넘기게."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어졌다.
그런 김삿갓의 모습을 본 약국 주인은
아래와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통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귀공은 의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데는 배꼽처럼 중요한 것이 없네.
어린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도 배꼽줄을 잘라 주어야 살게 되거든!
어찌 그뿐인가? '배꼽에 어루쇠 붙인 것 같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명의는 환자의 배꼽만 보아도 그 사람의 뱃속에 어떤 병이 들었는지 환히 안다는 소릴세.
그런 뜻에서 본다면 제생당의 제 자는 건널 제 보다,
배꼽 제를 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될것 이야 ! "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 주인의 변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판 글자가 잘못 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승강이는 이제 그만 접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날이 저물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 하고 화제를 얼른 바꿔 버렸다.
주인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김삿갓을 위 아래로 훝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귀공은 학식이 많은 모양이니 오늘 밤은 예서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가 있으니 그 책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 한 권을 내놓으며 첫장부터 자세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컨데 주인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이고 ,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이라면 통달했어야 할
'동의보감'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성 싶었다.
김삿갓이 정좌세로 앉아 동의보감을 읽자,
마주 앉아 이를 듣던 주인 늙은이는 점점 자세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뻣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허준(許俊)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란 칭호는 치료과정에서 실수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칭호밖에 안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 말 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주인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성 싶었다.
그때 마침,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었을까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 처럼 생겨 먹은 장년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 "
제생당 주인은 부랴부랴 책상다리로 꼬고 앉으며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자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 합니다. 선생께 진맥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어디,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은 환자의 팔을 잡아당겨 맥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 보시죠!)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은 진맥을 하고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럼,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뱃속이 까닭없이 평소보다 불룩해 오고,
잠시 뒤에는 달걀만한 덩어리가 뱃속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뱃속에서 달걀만한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 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때 ,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 봅니다."
"음 ...."
제생당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을 하는 현상일쎄.
자네 얼굴이 볼기짝 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 지어 줄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길을 알아차려서, 병이 깨끗히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김삿갓은 조위승기탕이라는 약이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뱃속에 방귀를 몰아 내는데 약을 쓴다는 말조차, 들어 본 바가 없었다.
환자가 약 세 첩을 지어 가지고 인사를 하며 돌아가자,
김삿갓이 제생당 의원에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한약에는
뱃속에 가득찬 방귀를 몰아내는 약도 있습니까?"
"있지! 있구 말구!
조금 전에 환자가 그렇다네.
사람의 몸이란 신비롭기 짝이 없어서,
병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낫게 되어 있는 것이네.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만 불편하면
부랴부랴 의원을 찾아 오거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약이란 것은
병자의 마음만 안심시켜 줄 뿐이고,
약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일세.
죽을 병에 걸린다면 세상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야.
만고의 명의였던 화타나 편작, 허준같은 사람도
처방문이 없어서 죽었겠나?"
"어때?
귀공은 내 말 뜻을 알아 듣겠나 ?"
김삿갓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공이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다니
고맙네. 그렇다고 노상, 의원을 멀리 하라는
말은 아닐세.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지팡이가 필요하 듯,
병자에게는 의원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야.
그러니 나 같은 엉터리 의원도 먹고 살아가게
되는 것 아닌가.,
안그래 하하하... !" 하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바로 그 때 문 밖에서,
"의원님 계세요?"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30중반으로 보이는 가난한 가정부인이 들어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환자일까 하고
김삿갓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병으로 왔는고?"
제생당 주인은 여자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쓰고 있었다.
60이라는 나이 탓도 있지만, 어쩌면 환자에게
반말을 써야만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대소사에 긴박한 일을 맞아 굿을 하는 사람이나
길흉 화복을 점치는 무당들이나 처사들은
자신의 고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내밷는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긴박과 곤궁에 처한 고객의 우위에 서서,
자신의 허술한 처방이나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의 정당성을 역설
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김삿갓은 잘 알고 있었다.
환자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꺼리는 듯
김삿갓을 힐끗힐끗 바라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의원님, 혼자 여쭤 볼 말씀이 있어 찾아 왔습니다."
" 그래? 그러면 아랫방으로 내려 가세 그려!"
주인 영감은 여자 환자를 데리고 아랫방으로
내려 갔다.
그러나 아랫방이라야 장지문 하나로 가로 막혀
있을 뿐 숨소리 조차 송두리째 다 들린다.
찾아 온 여자 환자가 윗도리를 활짝 벗어 부치고,
의원에게 진찰을 정확히 받아 보려는 것이라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아랫방에서 주고 받는 대화를
들어 보면 그건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러는고?"
의원이 그렇게 묻자 여인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저는 병이 있어 온 것은 아니옵고,
실상은 태기가 있어서..."
"태기가 있어서 왔다고.... ?"
주인 영감은 약간 실망하는 어조로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
"남편이 있으면 젊은 나이에 태기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 왔는가?"
제생당 의원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혹시 남편이 없는데 태기가 있어서 걱정이란
말인가., ?" 하며 서슴없이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펄쩍 뛸듯이 놀라 말을 하는데..
"의원님!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남편도 없이 제가 어떻게 애가 생기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렇다면 내가 안 할
말을 했구먼.
남편이 있고 태기가 있다면 그런 경사가
어디 있는가 ?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 왔단 말인가 ?"
여인은 또다시 한동안 말을 주저하는 듯 싶더니.
"실상인즉 저는 이미 아이가 열 이나 있사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한번 째의 태기가 있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제가 선생님을 찾아 온 것은 그 때문 이옵니다."
"자식이 열명이나 되는데
그중에 머슴아이는 몇명이나 되는고?"
"열 아이 모두가 머슴아이 뿐이옵니다."
"저런 ! 저런 ! 이제 알고 보니 자식 복을 무던히나
타고 났네 그려.
게다가 또 태기가 있다니 이번에도 또 아들을
낳을 것은 분명하지 않겠나?"
여인은 딴생각이 있어 찾아온 모양인데,
제생당 의원은 눈치도 없이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용기를 낸듯이 말을 하였다.
"의원님! 없는 살림에 머슴아이가 연년생으로
열 명명이나 있으니.. 먹이기는 무엇을 먹이며..
입히기는 무엇을 입히옵니까?
그래서 이번 애기만은 숫제 떼어 버리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제생당 의원은 천부당 만부당하다는 어조로
대답한다.
"허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애기는 삼신 할미가 점지해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마음대로 떼어 버린단 말인가?
행행여 그런 생각말고 집에 돌아가 몸 간수나
잘하게."
"아니옵니다.
이번 아이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떼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도 굶다시피 살아가고 있는데다가
또 하나 낳게되면 무엇을 먹이옵니까?"
"모르는 소리 그만하게.
사람은 제 먹을 것은 타고 나는 법이야,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네."
"어르신네들은 흔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다섯 아이가 있을 때와 열 아이가 있을 때와는
먹고 살아 가기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옵니다.
제 몫을 타고 난다는 어른들 말씀을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저의 집 식구들을 살려 주시는 셈 치고,
이번 아이만은 꼭 떼어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선생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사옵니다."
살림살이가 어지간히 궁색했던지
여인의 부탁은 간곡하기 이를데 없었다.
"허어... 이런 변고가 있나. 이 사람아..
약국이라는 데는 애기를 못 낳는 여인에게
약을 써서 애기가 생기게 하는 곳이지,
뱃속에 들어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는 곳은
아닐쎄. 그런 것도 모르는가?"
"제가 그런 것을 왜 모르겠사옵니까.
그러나 저의 집 사정은 남 다르오니
뱃속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아이들 만은 살려 내야 하겠습니다.
그런줄 아시고 제발 부탁합니다."
여인이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의원 영감도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이다.
"에허, 그것 참 ! 세상에 이런 악질이 있나."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만,
온 식구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의원님께서 저의 집 식구들을 꼭 좀 살려 주십시요."
제생당 의원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문득 어떤 결심을 했는지,
"이번 애기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떼어
버리고 싶단 말이지 ? 하고 단호하게 따져 묻는다
제생당 주인이 이렇게 단호하게 따지듯이
묻는 말투로 보아서는, 임신부가 그렇게
소원한다면 뱃속의 애기를 낙태시켜 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 왔다.
왜냐하면 뱃속의 애기를 섣불리 낙태 시키다가는
모태조차 희생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돌팔이 의원인 저 늙은이가, 어쩌자고 무모한
짓을 하려 하는가 !)
김삿갓은 제생당 늙은이가 괘씸하게 여겨지기
까지 하였다.
"선생님 꼭 좀 부탁합니다 !
이번 애기만은 꼭 좀 없애 주십시요."
임신부의 태도는 시종 일관 확고 부동 하였다.
"잘 알았네.
소원이 그렇다면 자네 소원대로 해줄 수 밖에
없지 않은가 ?"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임신부는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이는
모양이더니 이번에는 약 값 걱정을 한다.
"약은 몇 첩이나 쓰면 되겠습니까 ?
그리고 약 값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대해 제생당 의원은 태연 자약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먹을 것도 없다면서 약 값은 무슨 약 값인가?
약을 먹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내는 방도가 있으니,
그 방법을 쓰기로 하세."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약을 쓰지 않고도 뱃속의 애기를 어떻게
떼어낸 단 말인가?
혹시 저 엉터리 의원이 몽둥이로 임신부의
배를 두드려 패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초차 가득 들어 차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다음 대화에 귓날이 쫑긋해졌다.
방랑시인 김삿갓 (72회)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 밤(하)"
여인은, "약을 먹지 않고도 뱃속에 애기를 떼어 버릴 방도가
있기는 있사옵니까?"하고 다시 물어본다.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자신 만만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약을 쓰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 버릴 비방이 있지!
그런 비방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를 걸세."
"의원님! 그렇다면 저한테만은 그 비방을 꼭 좀 알려주시옵소서."
"자네는 약 값을 낼 형편도 못 된다니까,
내가 싫든 좋든 그 방법을 쓸수 밖에 없지 않은가?"
김삿갓도 그 비방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어
옆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잔뜩 기울이고 있었다.
만약 제생당 의원이 남이 모르고 있는 그런 비방을 알고 있다면 ,
그야말로 이곳 제생당 의원이야 말로 천하의 명의임이 틀림없다고 생각 되었던 것이다.
제생당 의원이 임신부에게 다시 말한다.
"그러면 자네한테만 특별히 그 비방을 쓰기로 하겠네.
지금 자네는 임신한 지 몇 달째 되는가?"
임신부가 대답하는데, "석 달전에 경도가 있고 나서 그쳤으니,
달 수로 치면 석 달째 되는 셈이옵니다."
"석 달이라 ... 그러면 묻겠는데
요즘 소변은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임신을 한 탓인지 소변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럴테지. 하루에 몇 번이나 보는가 ? "
"일일이 헤아려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아마도 하루에 열 번 정도는 되지 않는가 싶사옵니다."
"그럼 됬네.
약을 쓰지 않고도 애기를 간단히 떼어 버릴수 있는
비결을 말해 줄테니 꼭 그대로하게."
"의원님! 그런 좋은 방법이 정말 있사옵니까 ? "
"있구 말구! 아주 간단한 방법이네.
오늘부터 열흘 동안 소변을 일체 누지 말도록 하게.
그러면 뱃속의 아기가 아직 헤엄을 칠 줄 모를 테니까,
물에 빠져서 절로 죽어 나오게 될 걸세."
옆방에서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옅듣고 있던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고
소리를 내지않고 대굴대굴 굴렀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
김삿갓은 설마하니 제생당 늙은이가
그와같은 엉터리 비방을 말할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임신부는 자신에게는 그 말이 엉터리로 들리지 않았던지
"의윈님! 소변을 참는 데도 한도가 있지
어떻게 열흘 씩이나, 참고 견디옵니까?"하며 심각한 어조로 반문한다.
"제생당 의원의 대답은 또 한번 걸작이었다.
"열흘을 못 참겠거든 닷새 동안 만이라도 참아 보게나.
뱃속의 애기가 아직 활동력이 미약해
닷새 동안만 오줌을 참아도 효력이 나타날지 모르네."
어디까지나 자신만만해 보이는 대답이었다.
"소변을 닷새 동안만 참아내면 애기가 정말 떨어지게 됩니까 ? "
"물론이지. 늙은이가 왜 거짓말을 하겠나?
내 말을 철썩같이 믿고 어서 집에 돌아가 그렇게 해보게."
제생당 의원은 이렇게 뱃속에 아이를 떼는 방법을 설명하고 임신부를 밀어내다시피 쫒아냈다.
그리고 옆방으로 옮겨 오더니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음 ... 내가 오늘은 진땀 뺐는걸."
김삿갓은 제생당 노인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
참고 있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하 ...."
"이 사람아! 웃기는 왜 웃는가? 허파에 바람이 들었는가?"
"의원님! 오줌을 닷새간 참고 견디면
뱃속의 아기가 절로 떨어져 나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김삿갓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물어 보았다.
그러나 제생당 의원의 얼굴은 어디까지나 태연스러웠다.
"자네는 내가 환자에게 들려준 말을 죄다 들은 모양일세그려 ? "
"그렇습니다.
사람이 과연 오줌을 닷새 동안이나 참고 견딜수 있을까요?"
김삿갓은 이 돌팔이 의원을 단단히 혼내 주려고
엄숙한 표정으로 따지고 물었다.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김삿갓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혀를 차며 말을 하는데,
"자네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내가 자네에게 먼저 하나 물어보세.
자네는 사람이 닷새 동안이나 오줌을 참을 수 있다고 생각 하는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순간 , 김삿갓은 허虛를 찔린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기로
닷새 동안이나 오줌을 참을 수는 없겠지요."
제생당 노인은 그 대답을 듣자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구만 그래.
그 처럼 잘 알고 있으면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물어 보는가?"
김삿갓은 농락을 당하는 것만 같아 울화가 "욱"하고 치밀었다.
"선생은 조금 전에 찾아왔던 여인에게
오줌을 닷새 동안만 참으면 애기가 절로 떨어져 나올 테니,
닷새 동안만 참아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소?
환자에게 불가능한 처방을 알준다는 것은 혹세 무민惑世誣民이 아닙니까?"
김삿갓은 홧김에 혹세 무민이라는 말까지 들고 나왔다.
"혹세 무민? 하하하...."
제생당 노인은 별안간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자네는 알만한 사람이 왜 그런 어리석은 소리만 하는가?
나는 의원의 본분으로서 뱃속의 생명을 죽게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럼에도 그 여인은 자꾸만 낙태를 시켜 달라고 끈질기게 졸라대지않던가?
그래 할수 없이 결코 가능하지 않은 단서를 달아,
뱃속의 생명도 살리고 무식한 여인도 쫒아 보내려고
그럴듯한 허툰수작을 부린것 뿐인데,
그런 내막도 모르고 나더러 혹세 무민을 저지르고 있다고 ?
이사람이 보기보단 어리숙한 사람이네! 하하하."
그 말을 듣는 순간 , 김삿갓은 "아차!" 싶었다.
제생당 의원은 여인을 쫓아 버리려고
지금까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왔는데
그런 사정도 모르고 자신이 핏대를 올려가며 나선 일이
무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의원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제 잘못을 용서하십시오."
"그렇다고 사과 까지 할 건 없네.
많은 환자들을 만나다 보면 별의별 사람이 다 있거든,
멀쩡한 건강체이면서도 아프다고 꾀병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픈 곳도 많은데 돈과 가족을 걱정 하느라고
아프지 않는척 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의원이란 사람은 병자의 병을 고쳐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자의 심리상태를 정확히 꿰뚫어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 웅변으로 다뤄 나가야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해!
그래서 조금전 처럼 환자를 잘 다루는 일도
의술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김삿갓은 돌팔이 의원인 줄만 알았던 제생당 노인의 입에서
그와 같은 명언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의자의야醫者意也"라는 말이 있다.
의술은 환자에 따라 방문方文을 달리 하는
오묘한 이치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보면 제생당 의원이야말로 진정한 명의가 아니던가 ?
이렇게 생각이 된 김삿갓, 고개를 수그려 제생당 노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보탬 : 그렇다. 의사는 단순히 육체적인 병만을 다루는 기술자가 아니다.
환자의 마음까지 들여다 볼 줄 알아야 진정한 의사이라라.
요즘 젊은 의사들의 의료 기술자적,
장사 이치적인 사고와 태도 때문에
병을 치료하러 갔던 환자들이 오히려 마음을 다쳐서
우울증에 빠지고 병원에 가기를 꺼리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한다.
인간교육의 포기와
의사로서의 본분과 자세에 관한 교육이 잘못된 것이리라.
의사들 가운데는 참으로 훌륭한 진정한 의료인
이국종 외상전문의 같은 분도 적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를 보면
이국종 박사와 같은 경륜이면 후학들이나 가르치면서
힘들고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의료 현장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있기 마련이지만
그는 지금도 중증외상환자들의 생존골든타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휴식시간도 가질 수 없는 치료 일선에서
너무 힘이 들어 포기를 생각하게 되는 후학들을 다독이며
그들과 함께 외롭고 힘든 길을 가고 있다.
그 길에는 돈도 명예도 없다.
다만 스스로 다짐한 의무와 그 의무를 다하는 속에서 보람을 찾을 뿐이다
사회와 국가는 그런 분들을 존경하고 예우해야 한다.
그리고 돈과 명예와 권력 지상주의에 빠진 이들은 우리 사회로부터 배척 격리되어야 마땅하다. ]
방랑시인 김삿갓 (73회)
고향 가는 길 "오애청산 도수래吾愛靑山 倒水來"
신계에서 곡산까지는 높고 가파른 산길로 백여리를 가야 한다.
김삿갓이 어린 시절을 보낸 천동 마을은 곡산 읍내에서도
다시 산속으로 60여리를 더 들어가야 하는
첩첩산중 감둔산甘屯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곡산으로 가는 길 조차 산이 높고 길이 험해,
고개 하나를 넘는데도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길이 천동 마을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니
지루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김삿갓은 눈 앞에 펼쳐지는 산천을 정답게 바라보며 걸어가다가
문득 구양수의 시를 떠 올렸다.
[산빛은 멀고 가까움에 다름이 없어
하루 종일 산만 보며 걸어 가노라
보이는 봉우리 모양은 제각기 다르고
그 이름조차 나그네는 알 길 없어라.]
고향이 가까워져가자 김삿갓은 험한 산길을 걸어가면서
30여 년전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철부지 시절 해 지는줄 모르고 장난을 치며
즐겁게 뛰놀던 불알 친구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천방 지축으로 까불대던 까불이는 지금은 철이 들었겠지..
머리통이 유난히 컷던 대갈장군은 아직도 천동 마을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또, 합죽이, 막동이와 땡굴이, 땅꼬마는 지금은 애 아버지가 되어 있겠지..
옥수수 처럼 얼굴이 길쭉해서 불렸던 옥쇄기는
지금 보게 되더라도 금방 알아 볼 것 같고 ,
조조와 참새, 제제는?
계집애들 꽁무니를 아직도 쫒아 다니고 있을까?
예쁘장 했던 곱단이는 애 엄마가 되어 있겠지.
얼굴이 넙적해서 세숫대야로 불리던 계집애는 애는 몇이나 낳고 살고 있는지?
말을 할때 마다 고개를 살랑살랑 젖던, 부채는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갔겠지 ..
본명은 잊어버렸지만 아명(兒名)만으로도 그들의 얼굴과 뛰놀던 모습이
눈 앞에 떠올라서 김삿갓은 흐뭇하기 그지없는 고향가는 길이었다.
산길은 가도가도 끝이없이 이어졌다.
곡산이 심심 산골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정작 찾아와 보니 너무도 깊은 산골이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을 마냥 걸어가며, 문득 영월에 계실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철없는 자식들을 죽음에서 구해 내려고 첩첩 산중으로 둘려싸인 곡산으로 도망을 오셨던 것이 아니었던가!
철없는 우리 형제를 곡산까지 데리고 오시느라고,
어머니는 고생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그 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숙연해 왔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지사를 회상해 본들 무슨 소용이랴?
김삿갓은 오늘날 어머니 슬하를 떠나 방랑길을 떠도는것 조차도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업보이고 숙명이라고 체념 하고 있었다.
산속으로 깊이 들어 갈수록 주위가 죽은 듯이 고요하다.
간간히 새소리가 들려오긴 했으나 그 때문에 오히려 적막감은 깊어만 갔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며 한없이 걸어가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이제는 잠자리를 구해야 할 판이건만
도데체 인가는 어느 곳 에서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얼마를 더 가다 보니,
저 멀리 나무 그늘에 말 한 마리가 한가롭게 누워 있었다.
말이 있다는 것은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김삿갓은 안심하고 다가갔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가자 누워 있던 말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몸을 부르르 떨면서 먼지를 털어 낸다.
찬찬히 살펴 보니 어지간히 늙어빠진 말이었다.
그래도 산중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생활하는 말을 보니 정다운 마음이 앞섰다.
그리하여 가까이 다가가 말의 콧등을 두두려 주니,
말은 사람의 정을 알아보았는지 발굽질을 하며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김삿갓은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말의 등허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늙은 말老馬이라는 옛 시가 한 수 기억 났다.
[노마침송근 老馬枕松根
늙은 말이 소나무 그늘에 누워 있네
몽행천리로 夢行千里路
천 리를 달리던 옛 꿈을 꾸고 있는가
추풍낙엽성 秋風落葉聲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 바람소리에
경기사양모 驚起斜陽暮
놀라 일어나니 석양이 저물고 있네.]
이렇게 말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김삿갓,
산 머리에 초승달이 떠오르기 시작했는데도 말 주인은 좀체 나타나지 않았다.
깊은 산중에서 갑갑했던 김삿갓은 시 한수를 읊어댓다.
[오두막집 저녁 연기는 사라지고
해는 저물어 새는 깃으로 돌아가네
나무꾼은 하늘에 걸린 초승달을 바라보고
어디쯤에서 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겠지.]
바로 그때, 오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나무꾼이
나무를 짊어지고 말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김삿갓은 나무꾼에게 말을 걸었다.
"늦게까지 수고가 많으시오."
나무꾼은 김삿갓을 보자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산중에 웬 사람이오 ? "
"나는 지나가던 과객이오.
천동 마을에 가다가 길이 저물었는데 어디 하룻밤쯤 자고 갈 데가 없을까요?"
"천동마을? 천동 마을이라면 옛날 나의 외갓집이 있었는데
그런 깊은 산골에는 뭣하러 가시오?"
나무꾼은 김삿갓에게 천동마을과 자신의 연관을 말하면서 경계심을 감춘다.
"나도 어렸을 때에는 천동 마을에서 자랐지요.
그래서 지금 천동 마을을 찾아 가다가 날이 저물었군요."
"그래요? 타향살이를 하다 보면 고향이 그리운 것이지요."
"외가는 아직 천동 마을에 계신가요?"
"웬걸요. 외조부님 돌아가신 뒤
외가 식구들은 모두 해주海州로 살림을 옮겨버려서
지금은 아무도 없다오."
"그러시군요."
"그나 저나 반갑소이다.
나의 옛날 외가집 마을이 고향이라니
그리고 이 산골에는 인가라고는 우리 집 밖에 없어요.
날도 많이 저물어서 길을 갈 수도 없을 것이니 우리 집으로 내려 갑시다."
인심이 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나무꾼은 무거운 지게를 짊어진 채로 말은 맨몸으로 끌고 내려가기 시작 하는데 김삿갓이 옆에서 보기에는 여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짐을 말에게 실을 일이지,
무슨 고생을 못 해 직접 짊어지고 내려가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기를 변 서방이라고 말을 한 나무꾼은 웃으며 대답한다.
"우리 집 말은 너무 늙어서 나는 부려먹을 수가 없다오."
김삿갓은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 하였다.
"아니, 부려먹을 수가 없도록 늙어 버린 말이라면
아예 팔아 버리거나 없앨 일이지, 무엇 때문에 고생스럽게 키운단 말이오?"
"그건 노형 생각이지, 나는 그럴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단 말이오 ? "
"말이 동물이기는 하지만, 사람과 동물 사이에도 의리라는 것이 있어요.
저 말로 이를것 같으면 할아버지 때부터 함께 살아오고 있는
우리 집 식구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많아 밭도 갈지 못하고 짐도 나르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리 집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이 말에게 은혜를 너무도 많이 져왔다오."
"말에게 은혜를 졌다구요 ? "
"물론이지요. 이 말이 어린시절 부터 젊었던 동안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아주 잘 도와 주어서
오늘날까지 우리 집이 생활을 할수 있게 해줬지요.
이렇게 저 말로 하여금 조상 때 부터 오랫동안 은혜를 입어왔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나라도 갚아야 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어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하도록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느꼈다.
아울러 말 못하는 미물인 동물과 인간의 교감과 신뢰가
어떻게 대를 이어 전해질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보탬 : 이는 요즘 사람들이 애완용 동물에 빠져 인수 구분을 못하는 이들이 하는 동물 공경 3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배려이고 보은이고 사랑이다.
동물은 아무리 훌륭해도 인간의 존엄성과는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다.
다만 충성에 대한 보답으로
사람과 같을 수는 없지만 사람에게 주는 고마움도 적지 않으니
애완용 동물일지라도 그저 개인적으로는 보통의 동물보다는 더 사랑하고
제 가족의 반열 가까이에 까지 그것들의 가치를 올려놓을 수는 있을 것이다.
자식이 없거나, 있어도 다 떠나 홀로 사는 외로운 노인들, 자폐아들,
또는 장애인들의 반려견 같은 동물들은 그 친밀성, 유용성은 가족이상이리라.
그러나 그것은 남들과는 관계없이 단순히 개인적 차원이어야 하지 않을까?
도시 주택의 구조가 인수의 공간 구별하기는 어려운 지경이라
집안에서 애완용 동물을 기르는 것까지는
좋다고 치자.. 그렇게 한들 어찌 개가 사람이 되고,
사람의 자식이 될 수 있으랴?
애완동물을 기르고 사랑하는 이들이
이 점을 잊는다면 그것들이 사람에게 주는
정서적인 좋은 점보다는 잃는 점이 더 클 것이며,
또 그것들에게 너무 깊이 빠지다 보면
남들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 사회에서
스스로를 한정 또는 소원시키고..
단절된 삶을 살게 될 위험도 없지 않다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아들 내외가 휴가를 얻어 외국 여행을 떠나면서
시골에 홀로 살던 어머니를 불러 올려서
기르던 개를 모시도록 부탁( ?.. 지시)하는
아들 내외의 처신에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어
서운하긴 했어도
처음에는 "그것도 살아있는 목숨이니 누군가
돌봐줘야겠지"하며 그러마고 했는데
개 관리 요령서(지시 내용을 적은 개 공경지시서)
를 보고 울화통이 터졌다는 어느 시골 노인의
하소연이 현실로 되어 가는 애완동물 공경족들의
처신들을 결코 보기좋은 동물사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인 즉...
좋을 때는 빠져도 너무 빠졌다가
실증나면 아무데나 버려 버리는 무책임성,
장애를 가지고 태어 났다고
비닐봉지에 싸 쓰레기통에 버리는 잔인성,
내가 좋아하니 남들도 다 당연히
좋아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치착각증...
이런 이들은 대개 스스로를 개아빠 개엄마
개언니 개형이라 말한다 허허~~
(진정으로 모든 동물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인간의 한부분을 채워주는 보조적
존재로 보는 진정한 동물 애호가들은 제외)
한참만에 산을 내려와서 들어간 변서방네
집은 절간처럼 조용하였다.
변서방은 나무짐을 내려놓고.
말을 외양간에 들여매며 말한다.
"공교롭게도 마누라가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고 없어서, 오늘 밤은 나 혼자예요.
말에게 먹이를 주고 저녁을 지어 올테니,
방에 들어가서 잠시 기다리구려."
변서방은 김삿갓을 방으로 안내하고
등진불을 켜주었다.
살림살이라고 방 한복판에 화로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는데.. 그나마도 마누라가 없는 탓인지
화로는 불이 싸늘하게 꺼져 있었다.
한참만에 변서방은 삶은 감자 한 소쿠리와,
네 다리 소반위에 죽그릇을 놓아 가지고
들여왔다.
"많이 시장하셨지요?"
"괜찮습니다. 말에게도 먹이를 주셨나요?"
"그럼요, 말도 우리 집 식구인데
식구인 말에게 먹이를 주지않고 나만 혼자
먹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변서방이 들고 온
소반 위에는 죽이 한 그릇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사람은 둘인데 죽은 왜 한 그릇만
가져 오셨소 ?"
변서방은 계면스레 웃을을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한다.
"나는 평소에도 감자만 먹고 살아요.
그러나 손님에게는 감자만 대접하기 미안스러워
오늘은 쌀독 밑바닥을 긁어 가지고 죽을
한 그릇 쑤워 왔지요.
그런데 쌀이 몇 알밖에 없어서 죽이란 것 조차도
맹물에 조갯돌 삶은 것 처럼 되어 버렸군요.
그러니 죽을 자시고 나서 감자를 더 잡수세요."
김삿갓은 주인 양반의 성의가 너무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오가다 만난 사람에게 이처럼 따뜻한 정성을
베풀어 줄 이가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 것인가?
아닌게 아니라 죽그릇을 들여다 보니,
죽이란 것이 맹물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주인 양반의 성의를 생각해서
"그럼, 미안하게도 죽을 혼자만 먹겠소이다"
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죽그릇을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쌀알이라고는 몇 알갱이 밖에 보이지 않았다.
"죽을 자시고 나거든 감자를 더 드세요."
변서방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인다.
"고맙습니다. 죽을 다 먹고 나거든 감자를
더 먹지요."
김삿갓이 죽을 몇 숟갈 떠먹다 보니
맑은 물과 같아서 죽그릇 속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었다.
"허어, 정성은 고맙지만 기가 막히는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김삿갓은 변서방이 쑤워 온 죽을 한 숟갈
한 숟갈 떠 먹으면서
운치있는 즉흥시를 한 수 읊었다.
사각송반 죽일기 四脚松盤 粥一器
네다리 소반에는 죽 한그릇 뿐인데
천광운영 공배회 天光雲影 共徘徊
하늘과 구름이 같이 비치는구나
오애청산 도수래 吾愛靑山 倒水來
나는 본래 물에 비친 산을 사랑 한다오.
방랑시인 김삿갓 (74회)
드디어 도착한 천동마을(상)
다음날 아침, 김삿갓은 아침을 얻어 먹기 미안해서
변서방의 집을 일찍 나섰다.
밤사이 첫 눈이 내려 발을 뗄 때 마다 뽀드득 소리가 연이어 난다.
(오늘은 드디어, 오랜 세월을 두고 그리워했던 천동 마을에 가게 되었구나!)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 김삿갓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흥분이 일었다.
그러다보니 눈으로 얼어버린 길도,
제법 쌀쌀해진 산 속의 추위도 관심 밖의 일이었다.
한참을 걸어가자 까맣게 잊어 가던 기억속의 희미한,
눈에 익은 산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장난꾸러기 친구들과 어울려
50리가 넘는 곡산 장거리에 몇 차례 다녀 본 길이 아니던가!
이렇게 눈에 덮힌 험한 산 굽이를 돌아 갈때 마다
옛날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김삿갓이 산길을 정신없이 걷다보니,
문득 눈 앞에 장승 한 쌍이 우뚝 마주 보였다.
얼굴과 몸뚱이가 시뻘건 천하 대장군과,
얼굴과 몸뚱이가 새파랗게 색칠된 지하 여장군이었다.
(아 ! 장승이 아직도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구나 ! )
김삿갓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던 장승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 하도 기뻐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 배례를 하였다.
"장승님들! 안녕하시오?
옛날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가 천동 마을을 다시 찾아 왔소이다."
장승!
우리네 조상들은 통일 신라때 부터 고려조와 조선 왕조에 이르기까지
절에 가는 길목이나 촌락 어귀에 사람들의 우상인 장승을 세워 놓았다.
장승은 시대를 통 틀어
사찰과 마을의 경계를 가르는 이정표 역활을 해왔고,
동구 앞에 세워 놓은 장승은 모든
악귀와 질병의 침입을 막아주는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때로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
천하대장군의 코를 베어다 달여 먹기도 하였고,
남몰래 찾아와 간절한 소망을 빌기도 하는 우상인 것이다.
장승 앞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돌아보며 합장 배례를 하고 있노라니
마침 저 만치서 사십쯤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지게위에 봇짐을 하나 얹고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면서 장승앞에 서 있던
김삿갓의 초라한 행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김삿갓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들고
다가오는 사내에게 목례를 해보이며 물었다.
"말씀 좀 물어 봅시다.
이 동구 안이 천동 마을이 틀림없습니까?"
그러자 사내는 김삿갓의 얼굴이 눈에 익은지,
대답은 안 하고 빤히 쳐다만 보았다.
김삿갓도 사내의 얼굴이 어디선가 많이 보아 온 느낌이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서로의 얼굴을 한참 말끄러미 마주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김삿갓은
별안간 사내의 두 손을 와락 움켜 잡으며 소리쳤다.
"여보게! 자네는 조조라고 부르던 친구 아닌가!
나는 밤나무집 둘 째일세, 자네 나를 모르겠나?"
사내는 그제야 생각이 나는지,
김삿갓의 두 손을 힘차게 흔들며 큰소리로 외친다.
"맞다 맞다! 자네는 밤나무집 둘째가 틀림없으렸다?
이게 얼마만인가! 그동안 어디로 다니다가 이제야 돌아오는가?"
만나는 첫 순간부터 어린 시절로 돌아간 그들이었다.
3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도 죽마 고우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삿갓은 조조와 함께 마을로 들어오며,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친구들의 소식을 하나 하나 물어 보았다.
그중에는 이미 죽은 친구도 둘 씩이나 있었지만
대부분 천동 마을에 그냥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자네는 지금 아이를 몇이나 두었는가?"
"나는 할 일이 없어서 아이만 만들었네.
머슴아와 계집아이를 모두 합해 자그마치 일곱이나 두었다네."
"이 친구, 어릴 때도 계집 아이 꽁무니를 어지간히 쫒아 다니더니,
결국은 자식 복이 넉넉하군 그래,
아이를 일곱이나 만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는걸 , 하하하."
"이 사람아! 만들고 싶어 만든 것은 아닐세.
여편네 궁둥이를 두드려 주다보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야.
하하하 ... 자네는 아이가 몇이나 되는가?"
"나? 나는 오나가나 내 몸 하나 뿐인걸.
마누라도 없고, 자식도 없는 외톨박이야.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놓고 떠돌아 다니는 덕분에,
자네를 만나게 된 것 아니겠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자면 길어질 것 같아,
김삿갓은 적당히 거짓말을 꾸며 대었다.
"그래 ...? 자네는 어렸을 때 글 읽기를 좋아했기에,
지금쯤은 커다란 감투라도 쓰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가?"
"글쎄, 운이 닿지 않아서인지, 팔자 소관인지?
여간, 내게는 등용문登龍門이 열리지 않는구먼."
김삿갓은 이것조차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윽고 30년 만에 천동마을로 들어서는 김삿갓은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 옛날 고작해야 열 채가 될까 말까 하던 집이
지금은 얼핏 보아도 20채가 넘어 보였다.
"그동안 집이 많이 늘었네 그려."
"그래 ... 자네가 살 때 보다는 많이 늘었지?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디 묵을 작정인가?"
김삿갓의 잠자리를 걱정하는 소리였다.
김삿갓은 어렸을 때 자라던 고향 산천이 그리워
천동마을을 찾아오기는 했으나,
천동마을에 일가붙이가 있는것도 아니고,
각별히 기댈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답을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글쎄 ... 나는 어차피 떠돌이 신세니까, 잠이야 아무데서나 자면 어떤가?"
조조는 김삿갓의 말을 듣고나서 대뜸 이렇게 말을 한다.
"그래? 그러면
밥은 우리 집에서 먹기로 하고 잠은 모임방에서 자면 되겠네."
"모임방이라니? 이 마을에는 그런 것도 있는가?"
"그래! 동네 사람들이 저녁마다 모여서 미투리도 삼고,
새끼도 꼬는 공동 사랑방이 하나 있지,
거기 가면 옛 친구들을 많이 만날수 있을게야."
"그거 참 잘됐네 그려.
나는 옛날 친구들을 만나 보고 싶어 왔거든!"
"자네 심정을 내가 왜 모르겠나.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에는 마을 사람들을 모임방에 오도록,
우리 집 아이를 시켜 사발 통문을 돌려 놓겠네."
조조의 우정이 눈물겹도록 지극 하였다.
이윽고 조조네 집에 당도해 보니, 그의 집은 옛날과 다름없이 초라하였다.
"자네 집은 아직도 옛날 그대로 일쎄,
이제는 아이들이 많아서 집도 늘려야 하겠구먼."
"허긴 그래, 아이가 하나 씩 생길 때마다 늘려야지 늘려야지 하면서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먼."
"여보 마누라! 이리 와서 인사드려요.
이 친구가 옛날에 나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던
"밤나무집 둘 째"라는 친구야."
조조가 자기 마누라를 불러 내 김삿갓에게 인사를 시킨다.
"애기 아버지한테서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애기 아버지에게 조조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시아버님한테 호되게 꾸지람을 당하셨다구요? 호호호
김삿갓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현듯 조조의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다.
"참, 자네 어르신께 인사를 올려야지, 어르신 어디 계신가?"
그러자 조조는 얼굴빛이 별안간 숙연해지며,
"아버지는 이미 십 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자네가 찾아 온 것은 30년 만이 아닌가?"
"뭐야? 어르신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구?
그래,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구먼 ...."
김삿갓은 일순 , 삭막한 기분이 들었다.
김삿갓이 저녁밥을 먹은 뒤
조조와 함께 모임방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그곳에는 이미 20여명의 마을 사람들이
"급히 모이라"는 사발 통문을 받고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조가 김삿갓을 모임방 가운데 내세워 놓고 말한다.
"여보게들! 자네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겠나?
이 사람은 지금부터 삼십 년 전에 우리들의 불알 친구였던
밤나무집 둘째라네!"하고 소개하자
방안에 모인 사람들은 너무도 뜻밖의 일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야 알겠네.
내가 땡굴인데, 내 얼굴을 알아보겠나?"
"그럼, 그럼! 저기 앉아 있는 친구는
대갈장군과 옥쇄기가 아닌가?"
김삿갓이, 생긴 모습이 남달라
한 눈에 띄는 대갈장군과 옥쇄기를 가르키자,
좌중에는 "와하" 웃음꽃이 피었다.
이렇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소개하며
제각기 손을 움켜 잡으며 알아보는 통에 김삿갓은
눈물겨운 감격을 느끼면서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개중에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김삿갓의 손을 움켜잡으며,
"나는 초면이기는 하오만, 노형의 말씀을 많이
들었소.
또래 친구들에게 조조니, 참새니 하는 엉뚱한
별명을 지어 주었다가 어른들에게 몰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면서요?" 하고 말하는 바람에
좌중에는 일시에 폭소가 터지기도 하였다.
김삿갓은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린시절 친구들이
이렇게 자기를 기억하고 열렬히 환영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리하여 자리에 앉으며,
"나는 죽지않고 살아 있다는 게 오늘처럼 기쁘고
행복하게 느껴 보기는 처음일세.
우리들 모두가 죽지 않고 다시 만났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네.
우리네 인간살이에서 우정보다 더 소중한 것이
뭐가 있겠나? 나는 자네들과의 깊은 재회를
함께 나누고 싶어 술이라도 한 잔 사기로 하겠네."
그러면서 개풍군수 강호동이 몰래 넣어 주었던
전별금중 그동안 쓰고 남았던 스무 냥을
송두리째 내놓았다.
그러자 제제가 성큼 앞으로 나앉으며,
김삿갓을 호되게 꾸짖는다.
"내일부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너는 고향을 찾아온 손님이고 우리들은 주인
아니냐? 그러니 손님이 술을 산다면,
주인인 우리 꼴이 뭐가 된단 말이냐?
너를 환영하는 술은 우리가 살테니..
그 돈일랑 썩 집어 넣어라!"
그 바람에 모두들 "옳소 옳소" 하며 박수를 보낸다.
천동 마을에는 대동계가 있어서 경조사를
맞았을 때 서로 도와주는 제도가 있었고
그 계장은 제제였다.
제제는 김삿갓이 내놓은 술값을 억지로
집어 넣어주고 나서 계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늘은 삼십 년 동안이나 헤어져 지내던
죽마고우가 돌아와서..
환영주가 한 잔 없을 수가 없는데,
오늘 밤 술값은 곗돈으로 쓰면 어떨까?"
그러자 계원들은 모두가 쌍수를 들어 찬성한다.
"물론 그래야지, 그건 계장이 알아서 하게,
그리고 술만 많이 먹게해 주게."
"막걸리 두 말쯤 사오면 되겠지?"
"아따, 이 사람아! 두 말이고 서 말이고 어서
가져오도록 시키기나 하게."
"그래.. 그래. 그러면 재무 막둥이가 막걸리
서 말하고, 북어 두 쾌만 사오너라.
그리고 합죽이네 김치가 매우 맛이 좋으니
합죽아! 오늘은 자네집 김치 좀 꺼내다
맛 좀 보여줘라."
재무 막둥이는 술을 사오려고,
합죽이는 김치를 가지러 문 밖으로 나서려다
둘이서 거의 동시에 소리를 지른다.
"어이구! 눈이 오시네! 어느 새 제법 많이
쌓였는걸...."
그러자 모두들 문 앞으로 우르르 몰려와
밖을 내다 보았다.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펄펄 내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은세계로 바뀌고 있었다.
"야아! 눈 한번 탐스럽게 온다. 명년 농사는
풍년이 들겠구나!
옛날 친구가 눈까지 몰고 와서 오늘 밤 술맛은
기막히겠다."
이윽고 막걸리 서 말이 왔고
김삿갓을 맞는 환영연이 성대하게 시작되었다.
제제가 대동계 계장으로 첫 잔을 김삿갓에게
따라주며 말했다.
"여기 친구들은 모두가 호주가들이라네
자네 술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그래.,
나는 지고는 못 가도 마시고는 가는 사람이니
오늘 밤은 마음대로 따라주게?"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모두가 웃음을 터트리며 박수 갈채를 보낸다.
"그렇다면 오늘 밤 멋지게 어울려 보세.
술 없는 인생이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이렇게 술자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술자리가 어울려 오자, 옛 친구들은
앞을 다투어 김삿갓에게 술을 권하였다.
이렇게 취흥이 도도해져 오자 땅꼬마가
큰 소리로 외친다.
"술이 있는데 가락이 없을 수 있는가.
까불아 너 나무타령 한 곡조 뽑거라?"
"그래,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까불아! 퍼떡 일어나서 나무타령 하거라."
모두가 박수를 치며 까불이에게 시선이 모아지자,
까불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 나더니
머리에는 일자 수건을 질끈 동동여매고,
바지춤을 일부러 비틀어 당겨 입더니.
허리를 반쯤 꼬부려 병신 시늉을 하면서
나무타령을 부른다.
[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천 냥 주고 배운 소리
한 두 푼에 팔린다
얼시구 좋다 엄나무
한다리 절뚝 전나무
이 산 저 산 소나무
오다가다 오동나무
가다오다 가다나무
임의 손목 쥐염나무
칼로 푹 찔러 피나무
달 가운데 계수나무
방귀 뀌었다 뽕나무
십 리 절반 오리나무
열아홉에 스무나무
돈이 많아 은행나무
돈 없으면 박달나무
방긋 웃는 복사나무
배를 타라네 배나무
휘휘청청 버드나무
물고 늘어지는 물구나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