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역사를 품다 15> - 《시조21》 2025. 봄호 연재
강화도, 그 천혜의 요새
김덕남
세상은 시끄러워도 내 안은 적막하다. 오글거리던 박쥐가 한꺼번에 몰려가고 뜬금없는 바이러스도 소실점을 향해 간다. 소금으로 가글하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쳐다본다. 아직은 소슬한 몸을 끌고 길을 나선다. 우리네 삶이 진창이더라도 덧난 상처의 길을 핥으며 이 밤이 더 깊어지기 전 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조상이 그래 왔듯 후손들이 걸어갈 길을 찾아간다. 숲이 팔을 벌리며 그들의 생을 영위할 때 그 속에 길을 내며 명멸하는 불빛을 찾아서 한 발씩 내디딘다. 바람이 불기도 전에 알아서 눕는 풀잎이나, 구름의 나팔수 되어 소나기를 쏟아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 없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오게 마련이고 언 땅속에서도 움은 터 온다. 어둠을 몰아내고 아침을 준비한 불꽃 같은 강화를 발로 읽는다.
우리나라 최초 국가 탄생지로서의 역사를 간직한 땅, 고려 수도 역할을 한 강화가 눈앞에 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서해로 빠져나가는 곳에 강화도가 위치한다. 해상관문으로 외국의 물자교류와 외세 침략전쟁을 몸소 겪은 격동의 역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그야말로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이다. 그 첫 역사가 이루어진 곳 강화 하점면 부근리 고인돌 앞에 섰다.
마침내 곡기 끊은/ 윤이월 아침나절
빈 그릇 함께 씻어/ 가지런히 넣어 놓고
저승도 잘 보이라고/ 돌 지붕만 세웠구나
바람은 알종아리로/ 불려간 지 오래고
덮개돌 하늘가엔/ 새들만 자유로워
하얀 똥 묻은 자리가/ 구름 꽃을 닮아 있다
- 김동인 「고인돌을 지나며」 전문
웅장하고 장엄하다. 저 큰 덮개돌 아래 조상의 숨결이 있다. 이승과 저승이 잘 통하는 곳에 누천년을 내리누르는 그리움을 부르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인돌은 강화도에만 120여 기나 있으니 가히 고인돌 왕국이라 할 만하다. 고인돌 발굴 과정에서 돌칼, 청동검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나옴으로써 움집을 짓고 도구를 사용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군집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덮개돌의 무게가 53톤가량 된다고 하니 이 무덤을 조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지, 어떻게 저 큰 돌을 옮겼을지 의문이 꼬리를 문다. 고인돌을 세운 강화는 단군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이 그 사실을 말한다. 참성단은 고려와 조선시대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고 전국체전의 성화를 채화함으로써 민족정기가 여기에서 비롯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궁지로 발길을 옮긴다. 800년 전 강화도는 38년간 고려 수도였다. 몽골 침입으로 1232년(고종 19년) 강화로 수도를 옮긴 후 1270년(원종 11년) 개경으로 환도할 때까지 외성, 중성, 내성까지 3중의 방어성을 가진 고려궁이 있었다. 그 규모가 2.2km에 달한다니 개경 궁성의 절반 정도 되는 셈이다.
한국으로 귀화한 일본인 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며 송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고려궁지에 들어섰다. 승평문을 들어서니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조선 강화유수부 동헌이다. 동헌을 지나 경사면의 잔디로 올라서니 고려궁이나 조선시대 행궁은 어디에도 없고 바람만 휑하니 지나간다. 민가가 들어선 아래를 굽어보며 기슭의 쓸쓸함을 한눈에 담는다. 여기에서 무신들에 둘러싸인 왕이 숨죽이고 있었더란 말인가.
무신정권 최우(?~1249년)는 강화 천도를 반대하는 김세충을 베고 고종을 겁박하여 몽골 침입 다음 해인 1232년 천도를 강행한다. 전각과 사원 등을 개경과 같게 이름 붙인 건물들을 짓기 시작하여 1년 5개월만인 1234년 기본적인 시설들을 갖추게 되었다. 그만큼 긴박했다. 강화로 들어가는 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서·남쪽은 갯벌이라 적의 침입이 쉽지 않을뿐더러 서남해의 조운선이 편하게 드나드는 천혜의 요새였다. 본토는 몽골군이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에 걸쳐 11회나 쳐들어와 그야말로 초토화되었다. 그런데도 최우의 사저에서는 끊이지 않는 연회 소리가 흘러나왔고 과중한 세금으로 죽어 나가는 것은 백성들이었다.
개경으로 환도 후 몽골의 요구로 강화궁을 불살라버려 우리 앞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왕궁터 잔디 위로 보이는 외규장각이 외롭다. 조선 정조 때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 내용을 정리한 의궤가 바로 여기에 모셔졌다. 조선 고종 3년(1866년), 프랑스는 천주교 신자 8천여 명과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한 사건을 항의하기 위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병인년 서양 오랑캐의 난인 병인양요다. 그 침략기지가 바로 강화다.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조선의 강화행궁과 외규장각을 불 질러 버리고 어람용 외규장각 의궤 297책과 19상자의 은괴 등 문화재를 약탈해 갔다.
2003년 복원한 외규장각 문은 열려있다. 기록문화의 꽃인 의궤를 벽면에다 전시해 놓았다. 천연색의 정교함과 화려함, 웅장하게 펼쳐진 그림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의궤에는 왕실 구성원의 출생, 혼례, 장례와 같은 의례나 성곽이나 무기, 악기 제작 등의 그림과 설명을 붙여 놓았다. 깃발이 펄럭이고 사람마다 표정이 다른 행렬도를 그린 반차도에 숨이 멎을 지경이다.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고급 안료로 최고의 화원이 그렸기에 예술적 품격이 높다. 예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의 통치 철학이 보인다.
1.
된바람이 흉터를 필사하려 예 왔네
표정 없는 몸돌들 서책을 받쳐 든 듯
그 파란 속살 깊이 품은/ 하늬녘 기둥을 보네
2.
여짓대던 해조음도 미처 풀지 못한 말
한 땀 한 땀 밀려오네 켜켜이 쌓인 주석 되어
이 순간 뼈의 문체들,/ 그대 비문이고 싶네
3.
궐문 밖 달빛을 찾아 초주지草注紙에 새겼을까
지워도 지울 수 없는 저 의궤의 긴 행렬
제 품속 만천명월萬川明月을/ 통점처럼 찍어놓고
- 구애영 「외규장각 - 강화시편」전문
우리가 볼 수 있는 의궤는 한 사람의 노력 덕분이다. 프랑스가 탈취해 간 후 한 세기 동안이나 묻혀 있었다. 1975년 박병선(1923~2011) 박사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박병선은 1955년 프랑스에 유학 가기 전 스승 이병도로부터 프랑스가 훔쳐 간 의궤를 찾아보라는 말을 듣는다. 파리 국립박물관 사서로 근무하던 중 먼지 쌓인 책더미 속에서 의궤를 발견했을 때 손끝이 떨렸고, 목이 메었으며 사지가 마비될 지경이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0년 동안 간절히 찾던 것을 기적과도 같이 만났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보다 78년 앞서는 직지(직지심체요절, 1377년 10월 흥덕사 금속활자본)에 이어 의궤까지 정보를 빼돌렸다며 사서직에서 쫓겨났다. 한국의 스파이로 낙인이 찍혀 도서관 출입 자체를 거부당했다. 세월은 흘러 수년 동안 도서관 입구에 서 있는 그녀에게 출입과 열람이 허락되었다. 그 정성에 도서관이 굴복한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자료를 복사, 정리하여 제목, 제작연대와 특징 등을 기록한 『조선조의 의궤』를 발간하여 세상에 알렸다. 1982년 TV에 첫 공개 되었다. 반환 운동이 들끓는 가운데 1993년 프랑스 대통령 미테랑이 한국의 고속철도 시공권을 따내기 위해 의궤 1권을 갖고 왔다. 프랑스인들의 반환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2011년 5월, 145년 만에 296책이 본래의 고향으로 5년마다 자동 갱신 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 6월 11일 외규장각 귀환을 환영하는 행사가 경복궁에서 있었다. 행사를 실시간 전하는 화면을 보면서 감격으로 가슴이 떨려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외규장각 의궤가 반환되는 것을 직접 본 박병선 박사는 그해 11월 안도의 눈을 감았다. 법적으로는 프랑스 도서관의 재산으로 되어 있으나, 정신적 문화적 실체로 우리의 유산이자 우리의 역사다. 무력으로 탈취해 간 그들의 억지법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리나라 현존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전등사를 찾아간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전등사는 고려, 조선시대의 왕실 사찰이었다. 원래 이름은 진종사였으나 고려 충렬왕비인 정화궁주가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과 옥으로 만든 등잔을 전한 것이 유래가 되어 전등사라고 하였다는 안내문이 있다.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는 삼랑성 성곽의 아치형 동문에 들어섰다. 단군의 세 아들이 세 봉우리를 연결해 쌓은 성이라고 알려져 있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아닌 성문 안에 전등사가 있다. 문루 없는 돌문을 들어서자 오른편으로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눈에 들어온다. 병인양요 때 남문과 동문으로 공격해 오는 프랑스군 160여 명을 무찔러 프랑스군을 퇴각시킨 구국의 영웅이다.
500년 이상 된 노거수가 보호수로 지정된 울창한 숲을 지나며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전등사란 편액이 걸린 대조루 아래를 통과하여 본당인 대웅보전을 바라본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수공사로 가림막을 쳐 놓았다. 가림막 너머로 다가오는 건물에 세월의 무게감을 느낀다.
단청은 바랬으나 고고하며 처마는 날개를 펼친 제비같이 날렵하다. 처마를 받치는 네 귀퉁이마다 나부상裸婦像이 앉아있다. 원숭이로도 보이고 여인이 옷을 벗고 웅크린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을까? 대웅보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가 마을의 주모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공사비로 받은 돈을 모두 주모에게 맡겼는데 주모는 어느 날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나. 자신을 배신한 여인이 대웅전에서 들리는 부처님 말씀을 들으며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라는 뜻일까. 복수를 자비로 승화시킨 도편수의 사랑법일까. 나부상의 자세에서 선조들의 재치와 해학을 볼 수 있어 보는 재미와 함께 상상력을 자극한다
분홍빛 그 풍문에 마음 끈이 풀렸으라
굳이 찾아 나선 전등사 목각 여인
선 채로 몸 빗장 질렀네/ 실오리도 못 걸치고
주점가를 벗고 뛰던 한 여인을 본 적 있다
부끄럼도 내팽개친 대낮의 탈출인가
시련에 타 붙는 속을/ 꺼트리질 못하고
봄이면 잊지 않고/ 동네 찾던 그 막달래
치마를 걷어붙인 치렁한 머리채로
목각이 못 되었기에 웃음마저 헤프던 봄
- 한분옥 「전등사 목각여인」전문
가림막 안으로 기웃하니 앞문은 출입금지 나무막대로 못을 박아 놓았으나 옆문은 열려있다. 누구나 들어와 참배하라는 모양이다. 합장하며 조심스레 살폈다.
세 분의 부처님을 중앙에 모셔놓은 것은 어느 절이나 비슷하다. 부처님 양쪽으로 연꽃 모양의 업경대가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기가 겁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죄상이 고스란히 비칠 것 같아 감히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러다 천장을 올려다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진다. 대들보를 타고 내려오는 두 마리의 용틀임과 봉황새가 여기저기 날고 있다. 법당 안이 갑자기 요동친다. 찬찬히 둘러보니 기둥마다 제멋대로인 붓글이 빼곡하다. 낙서처럼 보인다. 병인양요 때 승병과 군사들이 이름과 간절한 기원을 적어놓은 흔적이라고 한다. 내일을 모르니 얼마나 두려움으로 떨었을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합장했다.
절 뒤를 돌아 사고지로 향했다. 그림 같은 숲을 지나 대문만 덩그런 양반집 같은 문 앞에 섰다. 문은 잠겨 있고 안내판이 나그네를 맞는다.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곳을 1998년 복원한 건물이다. 실록을 한양의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사고에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시 전주를 제외한 세 곳이 모두 불타 버렸다. 전주사고 실록은 황급히 유생들에 의해 내장산으로, 다시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졌다가 정족산 전등사 경내에 사고를 건립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유일한 원본을 보관하다 지금은 서울대 규장각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단군 때 쌓은 삼랑성,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하늘에 제사 지낸 참성단, 고려궁지가 있는 강화는 풍성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고려왕조의 사직을 지키고 몽골 침략을 불법佛法으로 물리치기 위해 약 16년 동안 팔만대장경을 판각했으며, 정묘호란 시 조선의 임시행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의궤를 보관하던 외규장각, 19세기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가는 곳마다 조상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강화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풀뿌리 같은 우리의 역사가 발자국마다 아프게 찍혀 있다.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 《시조21》 2025.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