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주택은행에 입행할 수 있었다. 나는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주판 실력이 썩 좋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일반적으로 2학년 상반기에는 취득하는 주산 급수 3급을 2학년 말에 가서야 딸 수 있었다. 상고에서 주산급수는 성적을 좌우했고 나는 고교 2학년까지 중간 보다 조금 나은 성적의 위치에 있었다. 내가 졸업하던 시절 1981년에만 해도 우리나라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 단계에 있었고 취직자리도 많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취직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말쯤에는 반 학생 3분의 2 정도는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사전 취업을 하려면 고등학교 2학년 말 성적이 좋아야했다. 그런데 나는 성적이 좋지 않아 사전 취업을 할 수 없었고 3학년 말까지 계속 학교를 다니며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3학년 9월쯤 나에게도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단자회사"라는 곳에 면접을 보았는데 어떤 질문을 하고 어떤 대답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3학년 말쯤 나에게는 공개채용(공채) 시험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주택은행에서 공개채용을 하는데 지원 할 수 있게 된것이다. 공채를 지원하려해도 학교추천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적이 중요했다. 그래도 주산급수를 땋고, 많은 친구들이 사전 취업을 나가 3학년 말에는 공채시험을 볼 수있는 성적이 되었다. 공채시험은 3가지 과목이었는데 국어, 역사, 영어 였다, 다른 과목은 내가 자신이 있는 과목이었는데 영어는 영 자신이 없었다. 인문계를 다니고 있던 친구에게 고민을 말했더니 시험에 잘나오는 문제와 숙어를 외우라고 했다. 시험을 보러 갔는데 마침 내가 공부한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많이 나와 자신있게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지금보다는 훨씬 취직자리가 많았고, 선린상고를 졸업했다면 왠만한 회사에 거의 취직을 했기에 시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긴장하진 않았다. 마침내 해를 넘겨 1월에 결과가 발표되었고, 나는 당당히 합격할 수 있었다. 선린에서 주택은행 공채로 나와 같이 입행한 친구는 열댓명이었고 전체 동기수는 100명 정도 였다. 주택은행은 특수은행으로 주택건설과 관련된 업무를 집중적으로 실행 하기 위해 탄생한 은행이었다. 그리고 창업한지 몇년 되지 않아 세가 점점 커져가는 은행이었다. 3월1일 나는 동기들과 청량리에 있는 연수원에서 약 2주간의 연수를 받았다. 어머니의 아는분이 양복점을 하여 외상으로 슈트를 한벌 맞춰 입을 수 있었다. 우리는 천둥벌거숭이 였지만 그래도 양복을 쭉 빼입으니 사회인으로 티가 나는것도 같았다. 나는 신정동에 살고 있었는데 청량리까지의 출근길이 멀지 않게 느껴졌고, 나 자신이 뿌듯해서 가슴을 피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었다. 2개월 연수 후 첫 발령지는 신정동지점이었다. 지점에서 처음 받은 업무는 출납업무였는데 매일 맟추는 시재가 잘 맞지 않아 크게 고생하고 돈도 많이 꼴아받았다. 출납을 보면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동전을 셀수있는 판대기다. 직사각형의 판대기에 가로세로 줄을 내고 홈을 판 판대기였다. 그 판대기에 동전을 넣고 이리저리 흔들면 홈에 동전들이 들어가고 쉽게 동전 갯수를 셀수 있었다. 지금 은행에 가보면 동전을 셀수 있는 기계가 있고, 동전을 종류별로 분류할 필요도 없이 기계에 넣으면 100원, 500원 짜리가 자동 분리되고 포장끼지 되어 나온다. 그러나 요즘 은행에 가서 동전을 바꾸려면 거래은행 통장이 있어야 하고 동전을 교환 해주는 요일,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에 가야 바꿀수 있다. 요즘 누가 동전을 가지고 다니겠는가, 플라스틱으로 물건값을 지불하고 핸드폰에 카드를 집어 넣고 다니는 세상이다. 돼지저금통의 추억은 사라지고 애들에게 용돈을 줘도 세종대왕이나 신사임당을 주어야 한다. 40년 만에 세상이 엄청나게 변했다. 모든것이 너무 빨리 변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동전뿐만 아니라 그때는 통장도 수기로 적어서 발행했었다. 고객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 고객의 모습만 보고도 원장을 누가 빨리 찾는지 시합도 했다. 지금 간혹 은행에 가면 전표가 사라지고 테블릿화면에 금액과 서명을 한다. 은행을 오랜만에 찾아가 전표가 없어진것을 보고 감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점차 은행을 방문해 직접 거래하는 건수보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컴퓨터나 핸드폰을 이용하여 은행 거래를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나는 은행업무를 배우는데 시간이 적지 않게 들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다보니 점점 업무를 잘 이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익혔던 외향성이 발현되어 고객들에게 씩씩하고 친절하게 인사도 잘하고 응대도 잘했다. 그러다보니 은행 지점장을 포함한 책임자들이 나를 좋게 보게 되었고 직원들에게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숫자에 밝지 못했고, 반복되는 은행업무가 왠지 나하곤 맞지 않는것 처럼 느껴졌다. 1년이란 시간이 흐르자 후배들이 다시 신입행원으로 들어왔다. 이제는 막내가 아니었다. 나는 주임이란 직책으로 불리었다. 여자 후배들이 나에게 주임님, 주임님 이라고 부르며 업무를 물어보면 어깨가 올라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부터 도끼병이 생겼나보다, 조금만 나에게 친절하고 조금 미소를 보여줘도 나는 저 여직원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너무 외로웠고 누구라도 여자친구가 되길 간절히 바랐다.그러나 여자들은 이상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도 미소를 보이고 친절을 베풀다니, 나는 홀로 사랑에 빠졌다 이별을 했다. 생난리 부르스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는 토요일도 반나절 업무를 했다. 업무가 끝나고 직원들이 많이 퇴근을 하면, 나는 목청 높혀 세레나데를 불렀다. 그러나 아무도 내 세레나데에 응답하는 여자는 없었다. 사귀지도 않았는데, 떠나가버린 여인을 그리워하고 비난하고, 슬픔에 빠져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 유행가는 전부 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처럼 들렸다. 최성수의 "동행, 해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양희은의 "이루워질수 없는 사랑" 백영규의 "슬픈계절에 만나요" 양하영의 "가슴앓이" 등 그 시절 내 가슴을 후벼팟던 노래들이다. 청춘은 불타오르는데 외로움만 커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