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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장효조 일러스트 / 출처=KBO
1982년 9월14일 서울 잠실야구장.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극적인 승부가 펼쳐졌다. 제27회 IBAF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과의 결승전. 0-2로 패색이 짙던 한국은 8회 마법 같은 역전드라마로 일본을 5대2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좌측 폴대를 맞힌 한대화의 역전 스리런 홈런과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로 기억되는 잊지 못할 환희의 순간. 당시 대표팀은 화려했다. 국내에서 치러진 대회 우승을 위해 아마추어의 빅스타들은 그 해 출범한 프로야구 입단까지 미뤄야 했다.
최동원, 선동열, 김시진에 김재박, 한대화, 이해창, 박노준 등 최강 전력의 한국대표팀. 4번타자는 1m74, 70kg의 작은 체구의 사나이, 장효조였다. 그는 프로 입문 전부터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였다. 밥 먹듯 만들어내는 안타는 물론 홈런까지 펑펑 날리던 호타준족. 명성은 1983년 프로 입문 후까지 이어졌다. 10년 통산 0.331의 경이적인 타율. '타격 달인', '타격 교과서', '안타 제조기', '타격 천재' 등 그를 향한 수식어는 끝이 없었다.
타격에 관한 한 독보적이었다. 최고가 내뿜는 자신감 넘치는 묘한 포스가 신비롭기 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억측에 의한 왜곡된 이미지도 있었다. 11년 전 너무나도 갑작스레 팬들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된 전설의 사나이. 진짜 장효조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장효조는 천재였다?
"예전에는 야구 좀 한다 싶으면 모두 1년씩 유급을 했어요. 그런데 중학교 때 유급을 안 한 친구가 장효조에요. 중학교 때까지는 그냥 그랬거든. 그냥 너는 고등학교로 진학해라 한거죠. 그런 과정 속에 고등학교(대구상고, 현 대구상원고)에 올라갔고, 거기서 부단하게 노력을 많이 했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친구 임호균)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천재적 타격솜씨. 각고의 노력이 발굴해낸 결과였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1m70이 조금 넘는 마른 체구의 외야수. 작은 체구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근력을 키웠다.
덩치 큰 선수도 혀를 내두르는 140kg에 달하는 벤치프레스를 척척 들어올리는 놀라운 괴력은 노력의 결과였다. 그 덕분에 스윙스피드가 빨라졌고 근 지구력이 늘었다. 배트박스에 한번 서면 100번을 쉬지 않고 스윙할 정도였다. 정확한 타격을 위해 가상의 타깃을 정해놓고 끊임 없는 스윙훈련을 했다.
"공에 새겨진 협회 로고 일부가 보였다"던 믿기 힘든 정교함. 포수 미트에서 공을 꺼내 친다는 느낌을 줄 정도의 빠른 스윙스피드. '장효조가 안 치면 볼'이란 말이 나올 정도의 매의 눈. 정타를 통해 시원하게 날리는 빨랫줄 같은 홈런. 연습벌레라 불릴 만큼 부단한 노력으로 만들어낸 성과였다.
▲ 장효조 MVP 수상 장면 / 사진 출처=KBO
타인의 주목을 받는 걸 불편해 했던 장효조는 이 모든 노력을 가급적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했다. 안되면 될 때까지 했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집념으로 똘똘 뭉친 사나이. 최고의 재능은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본 사람들은 말한다. '장효조는 타고난 천재였다'고….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이야기다. 장효조는 노력으로 내재된 천재성을 끄집어낸 타자였다.
진흙 속 묻힌 진주 처럼 내재된 천재성을 땀방울로 세상에 드러내는 시점이 늦었다면 주목받지 못할 수 있었다. 덩치 작은 외야수에 눈길도 주지 않는 현재의 신인드래프트 풍토였다면 장효조는 미지명 육성선수가 됐을 수도 있다. 프로 스카우트들이 작은 체구 뒤에 숨은 재능과 이를 끄집어낼 수 있는 노력과 근성을 볼 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자칫 이 순간 '제2의 장효조'가 패싱되고 있을 지 모른다.
장효조는 돈에 집착했다?
"아버지는 학창시절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셨어요. 아버지는 대구에서 야구를 하고 있었는데 식구들이 야구에 방해될까봐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늦게 하셨나봐요. 갑작스러운 아버지 부재가 한이 된 아버지는 야구에 모든 것을 거셨어요. 오로지 야구만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친할머니께서 막내아들 야구 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아버지한테 야구는 생존수단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장남은 아니었지만 야구로 성공해야 집안이 일어설 수 있다는 생각이 있지 않으셨나 싶어요. 그 시절에는 야구가 좋아서 하고 그런 것도 있지만 이거 아니면 안되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래서 더 독하게 하지 않으셨나 싶어요."(장효조 아들 장의태)
'타격의 천재'를 세상에 드러낸 각고의 노력. 절반 이상은 이른 나이에 떠 안게된 소년 가장의 책임감이었다. 장효조에게 돈은 온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할 생존 수단이자,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였다. 아버지의 부재로 힘들었던 그는 가정을 꾸리고 아들이 태어난 뒤 가장으로서 의무감이 더욱 강해졌다.
"할어버지를 일찍 여의셔서 아버지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경험이 없으셨어요. 그러다보니 무뚝뚝하셨지만 저에게는 한없이 잘 해주셨어요. 순수하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죠. 어머니나 저나 아버지의 큰 그늘 아래 있었던 것 같아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생업으로서의 야구.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가치를 당당하게 어필했다. 1979년 포항제철 입단 당시 '철강왕' 고(故) 박태준 회장을 직접 만나 "서울에서 살 집이 필요합니다"라고 요구한 내용이 훗날 인터뷰를 통해 밝혀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야구도 인생도 만약은 없다. 하지만 장효조를 알고, 야구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만약 프로야구가 5년쯤 일찍 출범했다면…' '현재 FA 제도 같은 게 있었더라면…' 하지만 장효조의 목표는 큰 돈이 아니었다. 돈은 오직 생존수단일 뿐이었다. 가족과 자존심을 위해 평생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최고로서의 자존심과 가족을 끝까지 지켰다.
실제 그가 이룬 업적은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다. 틀림 없는 사실은 실력만큼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점. 특히 요즘 흔한 거액의 'FA’ 선수들과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가 프로에서 뛰던 때는 구단 절대 우위의 시절이었다. 선수협도, 에이전트도 없었다. 선수는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기 힘들었다. 스스로 연봉협상 테이블에 앉아 구단의 논리에 설득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효조는 매년 연봉협상 때 마다 성과 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요구했다. 고분고분 쉽게 넘어가지 않으니 구단 입장에서는 썩 달가울 리 없었다.
장효조는 강한 남자였다?
부리부리한 눈과 레이저빔이 나올 것 같은 강렬한 안광, 타석에서 사각 턱진 고개를 빳빳이 치켜뜨고 타이밍을 맞히는 모습. 장효조의 모습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강한 남자로 기억한다.
많은 사람들이 겉모습 만으로 그를 판단했다. 그리고 어려워 했다. 사이가 불편하거나 시기하는 사람들은 최고타자의 자존심에 '건방지다'는 프레임을 씌웠다.
하지만 야구장 밖 장효조는 한없이 여린 남자였다. 오로지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내향성이 방어기제로 작용해 뻣뻣하게 보였을 뿐이다.
마음도 여리고 두려움도 많았다. "체구가 작아 언제 선수생활이 끝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던 그를 채찍질 한 건 바로 이러한 내적 공포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야구에 쏟아 붓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효조와 상대를 많이 했어요.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고민되는 까다로운 타자였지요. 워낙 열정이 좋고, 자신감도 넘치고, 대단한 타자인 건 분명한 데 뭔가 여린 면이 있는 친구였어요. 겁이 많았지. 예전에는 빈볼을 던져도 퇴장 이런 게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효조한테는 특히 몸쪽 빈볼이 많았어. 몸쪽으로 강하게 들어오면 화들짝 놀라 피하곤 했어요. 나도 그래서 효조가 나오면 냅다 몸쪽부터 던져놓고 봤지. 만약 그 친구가 강한 면모를 그라운드에서 더 많이 보여줬다면 4할 이상도 칠 수 있었을거야. 백인천 선배보다 더 좋은 타율도 나왔을거야."(친구 임호균)
▲ 김일융과 함께한 장효조 / 사진 출처=KBO
끊임 없이 스스로를 채찍질 했던 최고 타자. 하루하루 터질 것 같던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주는 건 시원한 맥주 한두 캔이었다. 하지만 그 때 그 시절 흔했던 경기 후 폭음은 철저히 삼갔다.
"서울 원정 왔는데 낮에 경기 마치고 호텔에서 식사하는데 땀을 많이 흘렸어요. 선배랑 늘 식사를 같이 하는데 맥주를 드시고 계시더라고. 나는 술을 못 마시니까 갈증 나고 땀 많이 나면 사이다를 마셨거든요. '선배님, 땀 많이 나는데 맥주까지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니까 '마, 사이다 마시면 갈증이 더 생겨. 맥주 한잔이면 사이다 안 마셔도 돼'라고 하시더라고요. 나는 사이다만 마시니까 밥맛도 없고, 갈증만 나고 그랬어요. 자기관리가 철저하신 장효조 선배는 맥주 한 두잔 말고는 현역 시절 술을 많이 드시지 않았어요. 다른 선배들과 달리 폭음하는 건 한번도 못봤어요. 눈이 매섭고 강인하게 보이지만 내성적이고 여린 선배였죠. 그런 사람이 남들 앞에서 강하게 보이려고 한거죠. 마음이 여려서 안 좋은 일 있으면 지인들과 풀어야 하는데 혼자 참고 삭히는 편이었어요. "(후배 이만수)
외로움도 많이 느끼고, 여린 면도 많았던 천재 타자. 가족을 지키고, 정상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롯데로의 트레이드와 야인 생활 속 공백기는 큰 스트레스를 안겼다.
55세란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운명을 달리한 것은 투철한 책임감과 야구에 대한 열정에서 오는 스트레스 탓이 컸다.
장효조 타율은 고평가됐다?
10년 간 3050타수 1009안타, 통산 타율 0.331.
신인 시절을 포함, 4차례 타격왕(1983년, 1985년~1987년)과 MVP(1987년), 최다 안타 1위(1983년), 출루율 1위(1983~1987, 1991년), 골든글러브 5회(1983~1987).
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국내 최고의 교타자였다. 27세란 늦은 나이에 프로에 입문해 36세에 은퇴한 타자의 통산 타율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올 시즌 초 키움 이정후가 통산 3000타석을 넘어 통산 타율 1위로 등극하기 전까지 통산 타율 1위는 줄곧 장효조였다. 메이저리그에서도 현대 야구의 출발점인 1940~1950년대 이후 장효조보다 높은 통산 타율을 기록한 선수는 테드 윌리엄스(0.344), 토니 그윈(0.338), 스탠 뮤지얼(0.331) 등 3명 뿐이다.
'외국인투수도 없고 수준이 떨어지는 프로야구 초창기에 달성된 기록'이라고 폄하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왜곡된 시선이다. 그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한국 프로야구의 투고타저가 정점일 때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에이스의 시대였다. 반발력이 약한 공을 쓴데다 5선발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리그 정상급 투수들이 사나흘 만에 수시로 올라왔다. 최동원, 선동열, 김시진 트로이카에 이상윤, 김용남, 하기룡, 양상문, 장호연, 김용수, 윤학길, 이상군, 한용덕, 정명원, 송진우, 이강철, 조계현 등 한 시대를 풍미하던 명투수들이 있었다.
▲ 1987년 골든 글러브 시상식. 좌측에서 4번째가 장효조 선수 / 사진 출처=KBO
외인투수는 없었지만 전무후무한 30승 투수 장명부 등 재일교포 투수들의 존재감도 대단했다.
현재적 잣대로 과거 업적을 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지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장효조를 역대 최고 교타자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다.
"국내에 훌륭한 선수가 많지만 제가 지금까지 야구하면서 장효조 선배만큼 타격을 잘하는 선수를 못봤어요. 마치 이치로 선수 같은 느낌을 받아요. 요새 제일 잘한다는 이정후 선수가 워낙 훌륭하지만, 아직까지는 장효조 선배의 타격 센스나 컨택이나 스윙하는 모든 면에서는 못 미쳐요. 정말 이전까지 저는 그런 선수를 한번도 못봤어요. 당연히 저 역시 장효조 선배 만큼 안된다고 늘 느꼈어요."(타격 3관왕 출신 후배 이만수)
"때리는 감각 하나는 정말 대단했어. 물론 요즘 선수들도 대단하죠. 하지만 몇몇 선수하고 비교를 한다면 과연 지금의 선수가 장효조를 쫓아갔을까 하는 의문이 있죠. 지금 가장 뛰어난 교타자 이정후와 스타일이 조금 다르지만 누가 더 낫냐 하면 타자로만 본다면 장효조가 더 낫다고 봐요."(임호균)
스타출신 지도자의 한계가 있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장효조는 롯데에서 6년간 지도자 생활을 했다. 직후 1년간 미국 유학길에 올라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 자신과 삼성 팬들은 원 소속팀 삼성에서 지도자 생활을 원했다.
하지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1988년 롯데 이적 후 2000년 1군 타격코치를 1년 반짝 한 것을 끝으로 10년 공백이 있었다. 2010년에야 삼성 2군 수석 겸 타격코치를 맡으며 현장에 복귀했다. 그는 애정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후배들을 지도했다.
신인왕 배영섭을 필두로 모상기 정형식 등이 1군 주전 멤버로 폭풍 성장했다. 흔히 '너는 이게 왜 안돼'라고 말한다는 스타지도자의 한계를 장효조 감독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야단을 쳐도 자신의 타격이론을 강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견을 나누며 하나씩 고쳐가는 스타일이었다.
2011년 신인왕에 오른 배영섭은 "프로 입단 후 장 감독님께 그립 잡는 요령부터 배트 위치까지 세세히 배워 1군에 올 수 있었다"며 "안 좋을 때면 한 마디씩 툭툭 해주시는데 좋았을 때의 폼이 기억나게끔 해주셨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현역 시절 볼에 대한 선구안 만큼 선수를 보는 선구안과 안목 역시 탁월한 지도자였다. 2004년 시즌 초 부산 사직구장이었다. 야인이던 그는 한 신문사 해설위원으로 기자실을 찾곤 했다.
늘 포마드 기름을 발라 올백으로 넘긴 단정한 머리에 말쑥한 정장 차림으로 야구장을 찾던 신사였다. 옆자리에 앉아 친숙해진 이후에는 늘 "정 기자, 경기 끝나고 맥주 한 잔 하러 가야지"라며 친근하게 말을 걸곤 했다.
▲ 롯데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은 장효조 / 일간스포츠
당시 4년차 롯데 내야수 이대호는 미완의 거포였다. 사령탑에 따라 호불호가 엇갈리던 선수. 타격의 달인, 그의 시선이 궁금했다.
'저 선수 큰 타자가 될 수 있을까요?' 순간, 눈이 둥그래졌다. "정 기자, 아직 야구 볼 줄 모르는구먼. 저 거구에 저 정도로 유연한 선수는 정말 보기 드물어요. 저 큰 몸으로도 3루 수비를 해내잖아. 두고 봐요. 우리나라 최고 거포가 될 거야."
예언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대호는 바로 그해 야구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마련했다. 양상문 감독의 전폭적 지지 하에 무려 132경기에 출전, 20홈런과 68타점을 기록했다. 데뷔 후 첫 두자릿수 홈런과 50타점을 넘긴 시즌이었다.
이대호는 2년 뒤인 2006년 타율(0.336), 홈런(26), 타점(88), 장타율(0.571)의 4관왕을 차지하며 국내 최고 타자로 거듭났다. 1984년 이만수 이후 진정한 트리플크라운(타율, 홈런, 타점)을 달성한 유일한 레전드로 우뚝 서며 허언이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장효조가 그리워하던 원 소속팀 삼성의 현장으로 돌아온지 불과 2년째인 2011년, 몹쓸 병이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간암과 위암 4기로 판명된 그는 절망감에도 불구, 끝까지 의연했다.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행여 동요할지 모를 선수단을 위해 구단에 "투병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달라. 특히 병명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구단 관계자들에게 "큰 일 아니니 선수들이 동요할 필요 없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는 친했던 지인들의 문병도 사절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장효조는 병마와의 외로운 싸움을 홀로 견뎌야 했다. 늘 홀로 져야할 책임감과 최고 자리의 외로움 속에 살았던 그는 의연한 모습으로 늘 그리워 하던 야구장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됐다.
정현석 기자 / 스포츠조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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