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약사
창경궁의 전신은 수강궁이다. 수강궁은 조선 태조 4년에 낙성한 후로 자주 사용치 않아 황폐한 상태로 있다가 성종이 재위 14년(1483)에 왕의 조모인 정희왕후, 모후(母后)인 소혜왕후, 예종의 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리하고 확장함으로써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창경궁은 창덕궁에 있던 왕이 왕후 등을 자주 찾아뵙기도 하고 조신들을 면회하기도 하던 궁궐이었던 만큼 두 궁궐 간의 경계가 모호하였다.

초봄의 창경궁
창경궁은 성종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 때에 창덕궁과 함께 전소되었다. 광해군 1년(1609)에 창덕궁이 재건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는 창경궁이 다시 지어졌다. 그 후에도 창경궁은 잦은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는데, 그 중 피해가 컸던 것은 인조, 순조 때의 화재이다.
창경궁에서는 왕족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숙종 때 계비 민씨와 장희빈의 갈등으로 빚어진 신사년(辛巳년) 변고, 영조 때 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궁내 선인문 안뜰에 8일간 두어 죽게 한 신임년(辛壬年) 사화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융희 원년(1907) 11월에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 한 후로 창경궁은 자주 황제의 산책로, 빈객 접견 장소로 이용되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창덕궁에서 우울하게 생활하는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창경궁 경내에 동물원, 식물원 등 보고 즐길 거리를 만들었다. 이 와중에 주변 일대의 모든 행각과 궁문, 궁장이 훼철되었고 심지어는 궁전의 초석까지도 파내어져 홍화문 안 어구 보수 석재로 사용되는 등 창경궁은 큰 상처를 입었다. 일제는 또한 탕춘대 위 높은 언덕에는 박물관을, 시민당 옛터 부근에는 표본실을, 권농장 터에는 연못과 정자를 새로 지으면서 기존의 전각들을 철거하였다. 그 결과 창경궁 안에는 명정전과, 통명전, 그리고 경춘전․환경전․양화당․함인정․집복헌 등 몇몇 건물만 남게 되었다.

밤벚꽃놀이 기사(조선일보)
한편 일제는 동물원, 식물원, 박물원이 들어선 창경궁을 처음에는 삼원(三園)이라 불렀다가 다시 그 위치가 창덕궁 후원의 동쪽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동원(東苑)이라 했다. 그러다가 다시 창경궁이라는 궁 이름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창경원으로 고쳐 부르고 일반에게 공개했다. 이때부터 창경궁은 조선왕조의 궁궐로서 권위를 잃고 서울 시민의 유흥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창경궁은 일반인들에게 놀이터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렇게 40여년이 흐른 1983년에 들어 궁의 복원 사업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창경원이라는 명칭을 원래대로 창경궁으로 고치고, 궁내의 동물사를 모두 서울대공원으로 이주시켰으며, 일본인들이 심은 벚나무를 뽑아냈다. 1986년에는 통명전 뒤쪽 언덕에 있던 장서각(옛 박물관) 건물을 헐어냈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던 문정전, 명정전 행각 등을 다시 지었다. 그 결과 창경궁은 어느 정도 정비되었지만 지금도 원래의 면모를 갖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태로 있다.
요즘 창경궁은 경복궁이나 창덕궁보다 일반인들의 인기가 덜하다. 그렇지만 지난 시절 창경원은 다른 어떤 궁궐보다 높은 인기를 누렸다. 창경궁이 구경꾼들로 붐비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창경궁의 격을 낮추기 위해 온갖 구경꺼리와 놀이시설을 궐내에 끌어온 희한한 동물과 식물들을 볼 수 있고, 벚꽃 구경도 하고 케이블카도 타고 춘당지에서 뱃놀이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봄철이 되면 전국에서 몰려온 상춘객들로 궐 안팎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창경궁이 인기 절정에 달했던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신문기사를 보면 실감이 난다.
“작일은 일요일이라 엿 세 동안 괴로운 살림에 몰두하던 일반은 손님을 기다리는 창경원의 웃는 꽃 우는 새를 찾으려 하여 배우개를 들어가는 넓으나 넓은 길에는 남녀노소의 구경꾼들이 줄줄이 늘어서게 되었다. 평시보다 더 늘인 마흔 다섯 채의 전차도 구경꾼을 미처 수용치 못하여 창경원에 들어가는 배우개 네거리에는 대혼잡을 일으키어 전에 없던 교통 순사까지 출동하여 질서를 정돈하게 되었다. 전차는 끊일 사이 없이 땀이 흐르게 분주하되 대해중(大海中)에서 한방을 물을 덜은 듯이 아무 가감이 없이 길바닥에는 사람의 천지였다. 이 구경꾼들의 수효는 얼마나 되나. 일전에는 하루 종일 들어 온 구경꾼이 5천명에 지나지 않던 것이 놀라지 말라 작일 아침부터 정오까지 들어간 수효가 1만 2천명이나 된다 한다.”(동아일보 1923년 4원 16일자 기사)
해방 이후에도 창경원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날 종로 4가에서 창경원에 이르는 길목은 하루 종일 인파와 차량의 홍수였고, 인파에 밀려 표사기부터 아귀다툼을 해야 했다.…겨우 표를 얻어 정문을 들어선 상춘객은 정원 없는 인파에 숨이 막히는 듯, 먼지를 마시고 인파에 밀려 꽃구경을 하기도 전에 자리부터 잡아야 했다. …1회 용변에 10원씩 받는 유료변소에도 수 십 명씩 줄을 서서 순번을 기다려야 했으며, 참지 못한 일부 상춘객들은 담 밑이나 나무그늘에서 ‘실례’를 하다가 경찰 단속에 걸려들기도 했다.…이날 하루 동안 상춘객이 남긴 쓰레기는 30트럭분, 빈병은 8만 개나 되었다.”(조선일보 1970년 4월 28일자 기사)
그렇게 북적이던 창경궁이 요즘은 조용하고 평화롭다. 일제가 창경궁을 놀이동산으로 전락시킬 목적으로 들여다 놓은 구경꺼리, 즐길꺼리를 없애버린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잘한 일이고, 벚꽃을 뽑아버리고 일제가 지은 건물들은 허문 것도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것들이 사라진 자리는 빈터로 남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창경궁을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