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8. 22.
의대 정원 확대 문제로 의사들의 2차 총파업이 목전으로 다가온 가운데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한 국민 의견을 물어보려 했던 국민권익위원회가 민의를 오히려 오염시키는 장을 마련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의사 단체들이 의료인들의 투표를 독려하던 가운데 공공의대를 유치하려는 시군과 도청까지 공무원을 동원해 맞불을 놓으면서 설문 조사 자체가 순식간에 여론 세력전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설문이 갈등을 키우고 민의를 왜곡한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권익위는 보건의료체계 개선에 대한 자유의견을 듣는 방식의 설문을 추가하는 방안을 꺼냈다. 하지만 가뜩이나 첨예한 갈등 관계에 있던 의사와 문재인 정부, 지방자치단체 간 앙금의 골은 더 깊어진 모양새다.
▲ 김영록 전남지사가 배포한 권익위 설문 참여 독려 공문(위)과 남원시가 지난 14일 시장님 지시사항이라며 직원들에게 내린 공문. / 자료제공=독자 제보
전남도, 전북 남원시 등 권익위 설문에 공무원 동원
관가와 의료 업계에 따르면 권익위가 지난 12일부터 오는 25일까지 실시하는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설문조사에는 순수한 일반인이 아닌 이해관계자들과 그 주변인들의 참여가 더 활발한 상태다. 특히 서울경제가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김영록 전남지사는 지난 14일 ‘권익위 국민의견조사 참여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까지 각 관할 시군·출연기관에 배포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전남도는 이 공문에 “권익위의 설문 결과가 우리 도 핵심과제인 의과대학 설립 추진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바 각 시군·출연기관에서는 ‘모든 직원’과 지인분들이 설문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공문에는 김 지사의 직인도 찍혔다. 전남은 목포와 순천이 공공의대 유치전에 나선 상태다.
전남도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의과대학 유치는 우리 도의 주요 이슈인 만큼 각 시군도 권익위 설문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취지로 공문을 발송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권익위의 설문에 집단대응에 나선 것은 비단 전남도뿐만이 아니다. 전북 남원시청도 같은 날 ‘시장님 지시사항’이라는 제목으로 직원들에게 “필히 권익위 설문에 참여하고 그 결과를 19일까지 회신하라”는 공문을 내린 것으로 파악됐다. 현 남원시장은 이환주 시장이다. 설문 독려 대상에는 남원시 공무원뿐 아니라 청원경찰까지 포함됐다. 전북 남원은 의대 정원 확대 시 2018년에 문을 닫은 서남대 의대 정원을 활용해 국립공공의료대학원이 개교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전남 목포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목포시청은 “30여년간 우리 지역민의 숙원사업인 목포대 의대 유치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며 내부망에 청와대 국민청원 인터넷 주소를 지인에게도 홍보하라는 글을 올렸다.
▲ 전남 목포시청이 내부망에서 의대 정원 관련 직원들에게 청와대 국민청원 동의를 독려하는 내용의 게시글. /자료제공=독자 제보
의사들 집단 투표에 맞불... “우리도 억울한 설문”
이들 지자체가 공무원까지 동원하는 무리수까지 둔 것은 해당 설문 결과가 의사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자체와 관가에 따르면 해당 설문은 지자체의 집단 참여에도 의사 집단의 의견에 찬성하는 입장이 70%를 웃도는 것으로 알려졌다. 설문 참여 인원은 19일까지 일주일 간 3만 명을 갓 넘었으나 21일에는 5만 명을 넘는 등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설문 플랫폼 이름은 ‘국민생각함’이지만 이곳은 어느새 이익집단 간 힘겨루기의 장이 돼 버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로 설문조사 댓글에는 “공문으로 공무원들·가족들에게 설문조사 찬성하라고 강요하고 명단까지 돌리는 나라가 우리나라 맞느냐” “정부 주도 여론조작”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또 “이런 설문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지인에게 링크를 받아 들어왔다”는 내용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남원시청 관계자는 본보 취재진과의 전화통화에서 “설문 초기 90%가 의사협회의 의견에 동조하는 상황에 상식적으로 국민의 뜻이 반영된 게 맞는지 의문을 가졌고, 시 입장에서도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며 “갈등을 조장하는 이 같은 설문은 의미도 없고 우리 입장에서도 억울하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했다는 한 20대 의사는 “의사협회가 설문조사를 독려하는 것과 시에서 공문을 보내는 것을 동일하게 볼 수 있느냐”며 “남원시 공문 얘기를 의사들 단체 채팅방에서 듣고 설문에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 / 연합뉴스
전현희, 결국 ‘의료체계 개선’ 자유의견 개진 설문 추가
논란이 확산되자 권익위는 결국 지난 21일 ‘보건의료체계 개선을 위한 국민의견 수렴’이라는 새 설문 코너를 추가했다.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 상의 문제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단기적 대책(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의료인력 증원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약 10년 정도 소요) △중·장기적 대책 등을 사실상 주관식으로 묻는 설문이다. 다만 기존 설문 조사도 그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권익위가 원래부터 이 같은 설문을 적극 추진했던 조직은 아니다. 지난 6월29일 정치인 출신인 전현희 위원장이 취임한 이후 ‘현안 대응’에 대한 빈도가 부쩍 늘었다. 지난 13일에는 부동산 대책과 관련한 국민 의견을 발표했고 이달 10일부터는 ‘대학등록금 반환’ 관련 설문조사도 진행 중이다.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19일 성명서를 내고 “고충 민원 처리와 행정제도 개선을 통해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권익위가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며 “(권익위 설문조사 질문은) 의료계 단체행동의 이유를 피상적으로 단정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전현희 위원장은 21일 “권익위는 정부 정책 결정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갈등 조정과 제도 개선에 필요한 역할을 해 나가겠다”며 설문 취지를 재차 설명했다.
▲ 정세균 국무총리. / 연합뉴스
정세균 총리 경고에도 의사 2차 총파업은 눈앞
권익위 설문 논란에서 다시 한 번 확인했듯 의대 정원 확대와 공공의대 설립을 둘러싼 정부와 의사들 간 이견은 아직도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21일 전공의 4년차와 인턴을 시작으로 전공의협의회가 무기한 업무중단에 돌입한 상황과 다음 주 의사협회가 예고한 3일간 2차 집단휴진을 언급하며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고 있는 엄중한 상황에서 국민 생명을 지켜야 할 의사들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경고했다. 정 총리는 “지금 국민들께서 바라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며 “의사협회와 전공의협의회는 집단행동을 멈추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의료현장을 굳건히 지켜주실 것을 거듭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반면 최대집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14일에 이어 오는 26∼28일 예고한 2차 전국의사총파업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공공의대 설립, 한방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비대면 진료 육성 등 4대 의료정책의 철회 시 파업을 잠정 유보한다”고 파업 강행 의사를 재확인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