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백운동천 물길이 흐르는 자하문로로 옮겨 길을 건너면 아마도 이 일대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맛집
,
<토속촌삼계탕
>(종로구 체부동
86)이
위치해 있다
. 꽤 큰 한옥을 상점으로 이용하고 있는 이곳의 입구에는 하늘로 높게 세워진 수직 간판 아래
길게 줄 선 대기손님들이 시야에 확 들어온다
. 음식도 음식이지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조차 즐겨 찾던 곳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욱 인기를 끈 곳이다
. 그런데 이처럼 대통령단골집이라는 명성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듯싶다
. 이명박정부가 들어 선 뒤에 노무현 전대통령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그 수사망은
이곳 식당까지 뻗쳐 지난
2008년 세무조사까지 받아야 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 ▲ 종로구 체부동의 유명 맛집인
<토속촌삼계탕>. 주차장 쪽 가옥은 동농 김가진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하기
직전 그가 살았던 집이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이곳 삼계탕을 선전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 이곳 식당이
이처럼 장사가 잘되면서 기존 식당과 붙어 있던 바로 옆 집도 사들이며 공간을 확장하였는데 지금의 주차장 쪽으로 확장된 곳이 바로 그곳이다
. 그런데 확장된 이 집이 본래 독립운동가 동농 김가진이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발길을 멈춘
것이다
. 김가진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청나라와 싸우다 강화성이 함락되자 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직한 척화파의 거두였던 장동
김씨 김상용의
12대손이다
. 그는 대한제국시기 입헌군주론을
주장했으며
, 독립협회도 참여해 창립 당시
8인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 또
59세 되던
1904년 종
1풍 승정대부의 반열에 올랐다
. 하지만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대한협회
, 대한자강회
, 기호흥학회 등을
통해 여러 애국개몽운동도 벌려 나갔다
. 하지만 이미 정세는 개인자격으로 혼자서 어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 이런 정세 속에서 결국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그는 칩거하였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대한제국 중신들에게 작위를 수여하면서 김가진에게도 작위를
수여했다
. 이에 대해 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작위에 따른 연금수령을 단호히 거부했다
. ▲ 자하문터널 동쪽 일대에 동농 김가진의 글씨로 새겨진
‘白雲洞天
’ 각자바위가 본래의 집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 당시 그가 거주했던 곳은 현재 내가 서있는 이곳 체부동이 아니었다
. 약
1만 평의 청운동
1~10번지 일대로 현 자하문터널 우측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몰몬교회
)와 청운벽산빌리지를 아우르는
<백운장
>이었다
. 하지만
1917~18년경
, 당시 집안일을 맡아 보던 집사가 주인 몰래 이
집을 동양척식회사에 저당 잡히는 바람에 소유권이 넘어갔고
, 이에 대해 원인무효소송을 제기했지만 당장
집에서 나와야 해서 일단 사직동
(사직동
162)으로 이사했다가
이내
1919년 이곳 체부동
86번지로 규모를 대폭 줄여
이사온 것이다
. 그 집이 바로 토속촌삼계탕이 확장한 부분이다
. 그런데 이곳으로 이사 올 시점
3.1운동이 발발하였고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74세였는데 그런노구의 몸으로 비밀독립운동조직인 대동단 총재직을 수락한 뒤 그 해
10월 아들 김의한만을 데리고 가족들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 상하이로 떠난 것이다
. 이런 그가 망명길에 오르는 열차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김으로써 지 아무리 고위관료출신일 지라도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슬픔 역시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 “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망하고 사직도 기울었는데
부끄러움 안고 죽음을 견디며 지금껏 살았구나
늙은 몸이지만 아직 하늘을 뚫을 뜻이 남아
단숨에 높이 날아 만 리 길을 떠나가네
민국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보랴
천라지망 경계망을 귀신같이 벗어났네
누가 알아보랴 삼등열차 안의 이 나그네가
누더기 걸친 옛적의 대신인 것을
” ▲ 동농 김가진 가족 사진
. 우측 어린아이가 그의 손자이며
,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 회장인 김자동
(88)이다
. 한편 아들 김의한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대동단총재와 임시정부 고문으로 활동 하였다
. 그런데
‘바늘 가는데 실 간다
’고 며느리 정정화도 이듬해 시아버지와
남편의 뒷바라지를 위해 예고도 없이 홀로 상하이에 온 것이다
. 이렇게 혈혈단신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중국을 찾아 온 정정화는 그 뒤 여섯 차례나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아오는 역할을 하며 그야말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았던 것이다
. 이렇게 아들과 며느리가 함께 했지만 김가진은 김좌진의 권고로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가려고 자금 등을 준비하다 그만
1922년
77세의 나이로 숨지고 말아 결국 조국의 해방을 못 본
것은 물론 자신의 육신마저 멀리 이국 땅에 묻히고 말았다
.. ▲ 남북으로, 중국으로
찢겨진 동농 김가진의 가족묘 이렇게 세월은 흘러 그 뒤 해방이 되고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 내외는 모두 귀국하였지만 그 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들 김의한은
북을 선택했다
. 전쟁도 분단도 잠시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렇게 갈라진 분단은
70년이 흘러버렸다
. 상해에서 모두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 결국 조선은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산가족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
동농 김가진은 현재 손문 부인의 이름을 딴 상하이 송경령 능원에
, 아들 김의한은 평양
재북인사묘에 묻혀있다
. 그리고 며느리 정정화는 대한민국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혀있는 것이다
. 이들의 무덤 위치는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 결국 우리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통일만이 완성된 형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