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WWE 팬들의 추억 속의 영웅: 헐크 호건과 워리어 - 파트 3>
앞선 파트1과 파트2에서는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반의 “그때 그 시절”로 추억여행을 떠나보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나라의 어린이들에게는 AFKN 방송을 통해서 WWF 프로레슬링을 시청하는 것이 유행이었고,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가장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세대의 팬들이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추억의 매개체를 찾아보면서 “이만기와 강호동”, “영구와 맹구”에도 함께 포커스를 맞춰보았습니다.
그때 그 시절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도 있듯이 오늘날은 정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이제 그 시절의 추억담은 친한 친구들끼리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어쩌다가 한번씩 언급되거나, 아니면 그마저도 각자의 생업에 파묻혀서 기억의 저편으로 점차 잊혀져가는 현실입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등장해서 그러한 추억자료를 보존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습니다. 비록 “올드팬”이라 불리는 세대의 참여율이 저조한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간혹 가다가 오래된 박물관에서 옛 유물을 찾고 관람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 글의 필자인 저에게 있어서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새기는 매개체로서 “은하철도 999”, “꼬마자동차 붕붕”, “이상한 나라의 폴”, “요술공주 밍키”, “요술공주 샐리(세리)”, “개구쟁이 스머프”, “스타에이스”, “메칸더브이”, “고바리안”, “밀림의 왕자 레오”, “호소자”, “맥가이버”, “브이”, “에어울프”, “우뢰매”, “슈퍼홍길동”, “영환도사, 유환도사”, “유머1번지”, “쇼비디오자키”, “영프레이모빌” 등등... 의 이름은 정말 사무치게 그리운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간혹 네이버 블로그나 판도라TV 등의 웹서핑을 통해서, 또는 EBS의 “추억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등을 통해서 그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저는 WWE 프로레슬링과 관련해서도 그러한 공간을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매니아 활동을 하면서 예전 NWA나 WWF 시절에서 오늘날의 WWE에 이르기까지의 프로레슬링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파고들고 탐구하는 것도 한 분야의 “매니아”로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즐거움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환경에서 “AFKN”이라는 매체와 “어린이신문, 만화왕국, 콜로세움 비디오” 등을 통해서 접했던 WWF와 그 시절의 헐크 호건과 워리어에 대한 추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 것 또한 커다란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추억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의 매개체”를 한번 되새겨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서 그때 그 시절에 유치원생, 초등학생(국민학생)이었던 우리들도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거나 또는 훨씬 넘는 나이가 되었고, 우리가 열광했던 그때 그 시절의 스타들도 어느덧 훌쩍 나이를 먹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팬들은 종종 TV에서 옛 추억의 스타들이 등장하면 커다란 기쁨과 향수에 젖어들고는 합니다.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추억의 스타들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WWE 프로레슬링의 무대에서도 종종 추억의 스타들이 등장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쁨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옛 추억 속에서 굉장한 대결을 벌였던 “왕년의 스타”들이 세월이 흘러서 “재대결”을 한다는 것은 실로 커다란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프로레슬링계에서는 “헐크 호건 vs 워리어”의 재대결이 8년만인 1998년에 한 차례 성사되었고, 민속씨름계에서는 “이만기 vs 강호동”의 재대결이 20년만인 2010년에 성사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슈를 통해서 팬들에게는 과거의 추억이 새롭게 재해석되는 장이 마련되기도 합니다.
일단은 이만기와 강호동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풀어보겠습니다. 이미 앞선 시리즈에서도 한번 돌아본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시절의 민속씨름과 WWF 프로레슬링을 “추억의 매개체”로서 포커스를 맞추는 데 있어서는 약간의 괴리감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씨름은 좀더 “어른들의 문화”에 가까웠고 WWF 프로레슬링은 철저하게 “어린이들의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목 자체의 유사성에서도 씨름과 레슬링이 먼 친척뻘에 해당하는 종목이기도 하고, 또한 그때 그 시절에 전성기를 누렸던 스타 플레이어로서 각 종목에서 차지하고 있는 역할이나 위상 등에서 “이만기 vs 강호동”과 “헐크 호건 vs 워리어”의 관계가 어느 정도 오버랩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씨름인”으로서 업계에 종사한 경력만을 포커스를 맞춰봤을 때는 실제로 “이만기-헐크 호건”, “강호동-워리어”의 이미지에 대입시키는 것이 어느 정도는 들어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만기와 헐크 호건은 각자 자신의 종목에서 1980년대를 상징하는 슈퍼스타이자 그 분야의 역대 레전드들 중에서도 “왕중왕”에 해당하는 존재들이고, 강호동과 워리어는 1990년대 초반에 짧고 굵은 전성기를 누리며 한때나마 “왕중왕을 쓰러뜨린 존재”로서 등장했었습니다. 그리고 강호동과 워리어가 업계를 떠난 이후에도 이만기와 헐크 호건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이후까지도 여전히 업계에 종사하며 그 분야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절대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비슷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오늘날 팬들이 바라보는 이미지에 있어서는 “이만기 vs 강호동”, “헐크 호건 vs 워리어”의 관계에 대해서 받아들여지는 이미지에는 좀 차이가 있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강호동이 비록 씨름을 떠나기는 했지만 TV 프로그램에서 인기 개그맨이자 MC로 꾸준히 활약해왔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 속에 박제화되지 않고 오늘날의 팬들에게도 친숙하게 알려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아예 활동 자체가 뜸해지고 잊혀져가는 워리어와는 상황이 좀 다른 것입니다.
씨름이라는 종목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로서는 여전히 이만기의 이름이 첫손에 꼽히고 있기는 하지만, 강호동은 유재석과 쌍벽을 이루는 “국민 MC”로서, 오히려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이만기보다도 더욱 유명하게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씨름선수 출신 개그맨, MC”라는 그의 독특한 이력 때문에 강호동의 현역 선수시절의 업적에 대한 기억이나 이미지 또한 더욱 전설적으로 포장이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씨름의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만기와 강호동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여전히 유명인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만기와 강호동은 팬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의 존재감이 지속되어왔고, 그들의 현역 씨름선수 시절의 이야기들도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대화 소재로서 꾸준한 생명력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만기와 강호동이 만약 재대결을 한다면?”과 같은 상상을 한번쯤은 해봄직 했지만, 그게 정말로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상은 2010년에 비로소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전국민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인 “1박 2일”을 통해서였습니다.
사실 이만기와 강호동의 재대결은 정식 경기라고 할 수는 없고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사된 하나의 “이벤트”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이만기는 당대 최고의 씨름선수이자 이 종목을 상징하는 인물이고, 강호동은 한때 이만기를 쓰러뜨린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재대결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이슈와 화제성을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1박 2일” 프로그램을 통해서 성사된 재대결에서는 이만기가 강호동에게 2:1로 승리를 거뒀고, 경기가 끝난 후 이만기는 “1박 2일” 멤버들과 하룻밤을 보내며 옛 추억을 함께 나누는 훈훈한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물론 공식적인 대회를 통해서 맞붙는 것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이벤트를 벌이는 것은 그 성격 자체에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많은 시청자들은 비록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라도 이만기와 강호동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서 옛 추억을 되새길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만기와 강호동의 관계는 2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팬들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선물하면서 훈훈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WWE 프로레슬링 팬들이 기억하는 두 인물,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물론 인터넷 매니아 활동을 벌이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겠지만,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관계는 그다지 훈훈하지는 못한 관계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아예 철천지 원수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1990년 당시의 아름다운 추억만을 간직하고 싶은 팬들에게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됐든간에 “헐크 호건 vs 워리어”의 재대결도 1998년에 한 차례 성사된 적이 있었고, 거기에 대한 기억도 한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WWF 시절인 1990년에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경기는 단 한 차례 이루어졌고, 그 경기에서 워리어가 승리한 뒤, 헐크 호건은 워리어에게 자신의 세계챔피언 벨트를 건네준 뒤 감동의 포옹을 했습니다. 그 시절 어린이들의 기억 속에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미지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추억을 선물한 두 영웅”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1998년에는 WWF의 경쟁단체인 WCW에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재대결이 성사되었습니다. WCW에서는 1980년대 당시에 NWA나 WWF에서 활약했던 “왕년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헐크 호건, 마초맨 등의 선수들이 다시한번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 무대가 되었고, 급기야는 워리어마저 이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헐크 호건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기억하고 있던 “정의의 사도”로서가 아닌, NWO(뉴 월드 오더)라는 폭력조직을 이끌고 있는 “악당의 수괴”로서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NWO 일당을 이끌고 있던 헐크 호건의 앞에 워리어가 홀연히 나타나서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워리어는 8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의의 사도”의 모습으로 등장했고, 헐크 호건에게 “넌 날 이긴 적이 없다”는 발언으로 도발하며 승리를 자신했습니다. 하지만 1998년 10월에 성사된 역사적인 재대결에서는 결국 NWO 일당들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비열한 반칙이 난무하는 가운데, “악당의 수괴”인 헐크 호건이 “정의의 사도”인 워리어에게 승리를 거뒀습니다.
1990년 당시에 헐크 호건의 팬이었던 필자와 같은 어린이들은 호건의 패배가 무척 안타까웠고, 언젠가 헐크 호건이 워리어와 재대결을 벌여서 반드시 이겨주기를 소망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후에 실제로 재대결이 벌어져서 헐크 호건이 설욕의 1승을 거뒀지만, 필자와 같이 왕년에 헐크 호건의 팬이었던 “추억세대”들은 결코 기뻐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헐크 호건은 “어린시절의 정의의 사도”가 아닌 “악당의 수괴”로 변해 있었고, 그 경기에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보여준 모습도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실제로 그 재대결 자체가 팬들과 업계 관계자들로부터 혹평을 당하기도 했지만, 필자처럼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영웅적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추억세대”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재대결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오히려 과거의 소중한 추억마저 망가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 사석에서의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호건과 워리어는 종종 온라인 공간이나 언론매체의 인터뷰를 통해서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 얼룩진 설전을 벌였고, 한때는 소송 직전까지 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워리어는 그의 사업 실패라든지, 전성기 시절과는 대조적인 초라해진 현재의 모습 때문에 다소 실망감을 드러낸 팬들도 있었고, 헐크 호건의 경우에는 여전히 업계에서는 잘나가고는 있지만, 사석에서 여러 선수들과 설전을 벌였고, 또한 그의 이혼이라든지 호건 가족들의 불미스러운 사건사고 등이 이슈화되면서, 오늘날 온라인 공간에서는 프로레슬링 매니아들에게 상당한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추억세대” 중에서는 아직도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전성기 시절의 영웅적인 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오프라인 공간에 상당수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종종 온라인 공간에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뒷이야기를 뜻하지 않게 접하게 되면서 실망감을 느끼고, 어린시절의 추억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은 이 글의 필자인 저 역시 그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2010년에 TV 화면에서 “이만기와 강호동의 훈훈하고 아름다운 결말”을 접하게 되면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아름답지 못한 뒷이야기”는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좀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필자는 인터넷상의 문서나 또는 동영상을 통해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왕년의 전성기 시절의 영웅적인 모습만을 기억하면서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리고 필자와 비슷한 또래로서 “그때 그 시절”에 어린시절을 보내며 AFKN과 콜로세움 비디오, 만화왕국, 어린이신문 등을 통해서 WWF를 즐겼던 “추억세대”들은 다들 비슷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래도 1998년 WCW에서의 그들의 재회가 좀더 아름답고 훈훈하게 연출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한편 2010년대에 접어든 오늘날에 와서는 새로운 세대의 팬들이 WWE 프로레슬링을 즐기는 팬덤 내지는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고, 이들에게는 헐크 호건과 워리어에 대한 이미지가 올드팬들과는 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매니아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세대의 팬들은 대체로 2000년대 초~중반 무렵에 TV에서 자주 접할 수 있었던 THE ROCK, 스톤 콜드, 골드버그, 브락 레스너, HHH, 언더테이커 등의 선수들을 좀더 친숙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으며, 그들보다도 좀더 나이가 어린 세대의 팬들은 JOHN CENA, RANDY ORTON, BATISTA, EDGE, CM펑크, 크리스 제리코 등의 현역 간판급 선수들에 좀더 친숙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WWE 프로레슬링 팬들이 비교적 나이가 어린 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만큼은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이 생각보다 꽤 많이 알려져 있는 편입니다. 우리나라의 팬들은 아무래도 미국과는 또 다른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WWE 프로레슬링이 가장 인기 있었던 시점이 1989~1991년, 2001~2003년경 무렵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대의 팬들이라 하더라도 인터넷상에서 프로레슬링 매니아 활동에 입문하게 되면, 기존 매니아층의 글들을 접하고 자연스럽게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약 2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워리어는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열광적인 인기 자체는 다소 사그러들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의 팬들에게도 그 존재 자체는 잘 알려진 편입니다.
하지만 “추억세대”에 해당되는 올드팬들이 헐크 호건이나 워리어에 대해 갖고 있는 영웅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오늘날의 매니아층이 호건이나 워리어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로 부정적인 편입니다. 헐크 호건의 경우에는 주로 사석에서 동료 선수들과 설전을 벌인다든가 이혼 등의 가정사가 더 이슈가 되는 경향이 있고, 워리어의 경우에도 그의 사업실패 등이 더 이슈가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대 위에서의 모습보다는 무대 뒤에서의 사생활이나 뒷이야기 같은 가십성 루머에 더 관심을 보이는 오늘날의 인터넷상의 매니아층의 취향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날의 매니아층 중에서는 워리어가 우리나라에서 헐크 호건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영웅으로 추앙받는 분위기를 좀 의아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고, 이들은 종종 워리어가 “한국에서 과대평가됐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반면에 올드팬들 중에서는 인터넷상의 이러한 분위기를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우연하게 워리어의 뒷이야기와 그에 대한 부정적인 코멘트를 접하고 커다란 충격에 휩싸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워리어가 우리나라에서 유독 영웅적인 이미지로 과대평가되었는지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과대평가”라 하면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견해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애초에 워리어는 헐크 호건과 대적할 정도의 대스타도 아니었고 별볼일 없는 선수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헐크 호건의 라이벌로 과대평가되고 있다”는 식의 견해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미국 사람들은 헐크 호건, 마초맨, 로디 파이퍼 같은 선수들을 레전드로 인정하고 워리어를 별로 쳐주지도 않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헐크 호건과 워리어를 라이벌이라고 과대포장되고 있다”는 식의 견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여기에 대해서 필자가 나름의 해명을 해보자면, 1990~1991년 당시의 상황만을 놓고 봤을 때는 분명 워리어가 미국 현지에서도 헐크 호건에 필적하거나 또는 능가할 정도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선수였고, 그 시절에 WWF를 접한 우리나라의 팬들에게도 워리어가 강렬한 임팩트를 심어주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워리어가 “미국에서는 별볼일 없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인기 있었던 선수”였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워리어에게 “화려했던 영광의 시절”이 존재했던 것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고, 워리어가 호건을 꺾었던 사건의 이슈나 상징성 자체만큼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따라서 1990년대 초반 당시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워리어는 미국 현지에서도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던 최고의 선수였으며, 특별히 우리나라에서만 과대평가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와서는 분명 미국의 프로레슬링 팬들과 우리나라의 팬들이 워리어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기억이나 이미지에 상당한 온도차가 실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워리어가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존재”인 것이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나라에서만큼은 “헐크 호건과 쌍벽을 이루는 영웅”으로서 추앙받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이렇게 미국과 우리나라에서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른 이유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면, 필자는 그에 대한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팬들이 기억을 공유하고 추억하는 그 시간의 범위”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필자는 다시 이만기와 강호동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990년대 초반에 강호동이 이만기의 독주체제를 무너뜨리고 그의 후계자로 등극했던 사건 자체는 명백한 사실이며 결코 날조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대해서 오늘날 팬들이 이야기를 나눌 때는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시간의 범위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올드팬들 중에서도 1980년대 민속씨름의 황금기에 이만기와 이준희, 이봉걸의 트로이카 체제가 절정을 이뤘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씨름의 역사에 좀더 꾸준하게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1990년대 이후 이태현과 김영현이 이만기 이후의 새로운 강자로 등극했던 사실도 기억을 할 수 있고, 그 외에도 김정필, 신봉민, 백승일, 김경수 등의 강자들이 존재했던 사실도 기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오직 이만기와 강호동, 두 영웅만이 존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상황만을 단편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만기와 강호동의 전성기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민속씨름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날 강호동이 “유재석과 쌍벽을 이루는 국민MC”로서 TV 화면에 활발하게 노출이 되면서, 그의 씨름 전성기 시절 또한 더욱 영광스럽게 포장되는 경향도 있는 편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대중들 중 상당수는 민속씨름에 대해서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의 범위가 “1990년대 초반의 이만기와 강호동의 세대교체기”가 거의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민속씨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오직 이만기와 강호동, 두 영웅만이 존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고, 이러한 모습이 씨름의 역사에 깊은 관심이 있는 매니아층에서는 “강호동이 과대평가됐다”는 인식을 가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프로레슬링의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상황도 바로 이와 닮은꼴을 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프로레슬링 팬들은 1980년대 WWF의 양대산맥이었던 헐크 호건과 마초맨의 전성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편이고, 1990년대 이후에도 호건과 마초맨이 WCW에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던 소식과 워리어의 이후 행적 등에 대해서도 비교적 그 소식이 소상히 전해졌고, 폭넓게 기억하고 있는 편입니다.
그리고 올드팬들 중에서도 매니아적 성향이 강한 팬들은 헐크 호건의 초창기 라이벌이었던 로디 파이퍼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기억을 하거나, 또는 호건 이전에 전성기를 누렸던 안드레 더 자이언트에 대한 정보도 폭넓게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헐크 호건 이후에 전성기를 누린 브렛 하트나 숀 마이클의 활약에 대한 정보도 폭넓게 공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의 범위를 폭넓게 기억하고 있는 미국의 팬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라는 두 영웅만 존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WWF 프로레슬링을 즐겼던 “추억세대”가 기억하는 시간의 범위는 사실상 1990년대 초반의 워리어의 전성기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드팬들 중에서도 종종 1980년대 중후반에 있었던 일들까지 상세하게 기억하는 팬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비중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의 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대체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양대산맥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 다음에 마초맨과 달러맨이 각각 3인자 내지는 4인자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안드레 더 자이언트는 그들보다도 더 레벨이 떨어지는 선수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이후로는 미국 프로레슬링에 대한 소식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었기 때문에 헐크 호건, 워리어, 마초맨의 소식 자체가 거의 전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팬들의 기억 속에서는 헐크 호건과 워리어가 WWF 프로레슬링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고, 그들이 WWF 프로레슬링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라는 두 영웅만 존재했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WWE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매니아층에서는 “워리어가 과대평가됐다”는 인식을 가지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현상이 꼭 워리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 WWE 프로레슬링이 가장 높은 인기를 얻었던 시절은 19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의 두 시기가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당시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선수는 헐크 호건이었지만 우리나라의 팬들에게는 워리어가 가장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대 초반 당시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었던 선수는 THE ROCK이었지만 우리나라의 팬들에게는 스톤 콜드와 골드버그가 가장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인터넷상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매니아층에게는 언더테이커가 가장 높은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프로레슬링뿐만이 아닌 어느 분야에서든지, 팬들은 자신들의 단편적인 기억에 의해서 특정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선수에 대한 기억을 그 종목의 역사 자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자체는 꼭 이 글에서 예로 든 강호동과 워리어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WWE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워리어의 존재는 그래도 특별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WWF 프로레슬링이 가장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던 시절이 1990년대 초반이었고, 그 시절의 추억세대들이 사석에서는 “워리어가 영웅이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해서 종종 추억담을 나누곤 하지만, 인터넷상의 매니아 활동과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마치 어르신들이 “김일 선수가 영웅이었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해서 종종 추억담을 나누곤 하지만, 오늘날 인터넷상의 프로레슬링 매니아 활동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AFKN 방송으로 접했던 WWF 프로레슬링의 이야기도 점차 추억의 한켠으로 박제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 WWE 프로레슬링의 종주국인 미국 현지에서는 올드팬들이라 하더라도 우리나라처럼 워리어에 대한 기억만을 특별하게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마치 우리의 “7080세대”와 비슷한 문화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종 TV화면에서 “그때 그 시절”에 활동했던 코코 비 웨어, 핵소 짐 더간, 홍키통크맨, 빅보스맨, 슈퍼플라이 등등...의 모습이 나오면서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또한 올드레슬러들이 모여서 종종 레슬링 이벤트를 펼치기도 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7080 콘서트”와 비슷하게 올드팬들의 추억을 자극하는 무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올드팬들에게도 헐크 호건과 함께 마초맨 랜디 새비지, 워리어 같은 선수의 이름은 그들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이름입니다. 비록 우리나라처럼 워리어만을 특별하게 더 영웅으로 추앙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1990년 당시의 “레슬매니아 6”에서 워리어가 헐크 호건을 꺾었던 사건 자체는 그들에게도 커다란 이슈가 된 사건이었고, 그 상징성만큼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WWE에서도 레슬매니아 시즌에 역대 명장면을 보여줄 때는 종종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이 화면에 생생하게 나오기도 합니다.
본래 WWE 프로레슬링은 미국이 종주국이고 그것이 바다 건너서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얻게 된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팬들에게는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은 단순한 “프로레슬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절 WWF를 접할 수 있는 주요 창구로서 “AFKN”, “만화왕국”, “소년중앙”, “어린이신문”, “동네 비디오가게” 같은 매체는 그 자체로서 한 세대의 추억을 공유하는 매개체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린이회관 무지개극장”에서 “헐크 호건의 죽느냐 사느냐”를 친구들과 함께 봤던 기억이라든지, 또래 애들끼리 AFKN 방송이나 또는 비디오 테이프를 함께 보면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팬으로 서로 갈라져서 티격태격했던 기억 자체가 지금은 한시절의 “추억” 그 자체로서 향수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예전 1960~70년대 당시에 흑백TV로 프로레슬링을 시청했던 어르신 세대들이 김일 선수와 안토니오 이노끼가 혈투를 벌였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1990년대 초반에 AFKN 채널을 통해서 WWF 프로레슬링을 시청했던 어린이들은 “그때 그 시절”에 대한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AFKN이라는 채널을 매개체로 한 헐크 호건과 워리어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프로레슬링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뿐만이 아닌, “한 세대의 추억을 공유하는 매개체”로서 좀더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리즈를 작성하고 있는 필자 역시 AFKN 채널을 통해서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모습을 접했던 “그때 그 시절의 어린이”로서 “추억세대”의 한 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까지 WWE를 꾸준히 시청하고 프로레슬링 전체의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매니아층의 한 일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필자의 매니아적 관심에 의한다면 헐크 호건과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던 마초맨 랜디 새비지의 이름이라든지 헐크 호건 이전 시대의 주역이었던 안드레 더 자이언트, 밥 백런드, 브루노 사마티노의 이름이라든지 헐크 호건 이후 시대의 주역이었던 브렛 하트, 숀 마이클의 이름도 분명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WWF의 경쟁단체였던 NWA와 WCW의 할리 레이스, 릭 플레어, 더스티 로즈, 리키 스팀보트, 스팅 같은 선수들의 이름도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고 2000년대 이후 WWE의 간판스타로 떠오른 THE ROCK과 JOHN CENA 같은 선수들의 이름도 분명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AFKN 추억세대”의 일원으로서 단순히 프로레슬링의 역사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추억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헐크 호건과 워리어의 이름뿐 아니라 “AFKN, 만화왕국, 보물섬, 소년중앙, 우뢰매, 슈퍼홍길동, 꼬마자동차 붕붕, 이상한 나라의 폴, 요술공주 밍키, 우주보안관 장고, GI유격대, 유머1번지, 쇼비디오자키 등등...”의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의 매개체들을 떠올리면서 함께 옛 기억과 추억을 되살리고 공유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헐크 호건과 워리어, 두 영웅만이 존재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올드팬끼리만 모여서 “아, 옛날이 좋았어~~”를 외치는 데만 그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헐크 호건과 워리어에 대한 추억 자체는 있는 그대로 보존을 하고 올드팬들끼리도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동시에, 프로레슬링의 전체 역사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도 잃지 않으면서 20년 가량의 터울이 있는 오늘날의 WWE 프로레슬링 팬들과도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글의 필자인 저는 최근 우리나라의 가요계, 연예계에 불고 있는 “7080 붐”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어르신들은 “가요무대”를 통해서, 7080 세대는 “7080 콘서트”를 통해서, 올드팬들끼리 함께 추억을 공유하는 문화 자체는 이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던 것이 2000년대와 2010년대 이후에는 좀더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명절 특집으로 편성된 “아이돌 7080”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서로 다른 세대간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도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남진, 윤복희, 조용필 등의 원로가수들의 노래가 신세대들에게 재조명되고,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이돌 가수들과 그 팬들에게 “7080세대의 가요”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WWE 프로레슬링 무대에서도 2000년대 이후로 “레전드”, “드림매치”에 대한 열풍이 일었고, 과거의 선수들이 등장해서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는 이벤트들이 종종 성사되었습니다. 헐크 호건, 릭 플레어, 브렛 하트, 숀 마이클 같은 선수들은 마치 팬들에게 1980년대 또는 90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한 즐거움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헐크 호건 vs THE ROCK”, “THE ROCK vs JOHN CENA”의 대결과 같은 이벤트를 통해서 “세대간의 격돌”로서 이슈를 만들기 위한 시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힌트를 얻어서 필자는 인터넷 공간의 매니아 활동에서도 그러한 “과거와 현재의 만남”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AFKN으로 WWF를 보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나누면서도, 오늘날의 팬들과도 함께 교감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특히 “헐크 호건 세대”와 “존 시나 세대”는 좀더 많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글이 다소 어수선하고 중구난방식으로 전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필자의 미흡한 글솜씨를 통해서나마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즐거운 추억여행이 되었기를 희망하면서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진: 헐크 호건과 워리어>
(출처: wwe.com)
<사진: 헐크 호건>
(출처: 프로페셔널 레슬링 온라인 뮤지엄)
<사진: 얼티밋 워리어>
(출처: 온라인 월드 오브 레슬링)
<사진: 얼티밋 워리어>
(출처: 온라인 월드 오브 레슬링)
---------- 감사합니다 ----------
{출처: 프로레슬링에 관한 내용은 “wwe.com”, “최승모의 레슬링 홈페이지”,
“레슬뱅크 닷컴”, “레슬매니아 닷컴”, “야후 위키피디아” 등에서 얻은
정보들을 토대로 해서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했습니다.
민속씨름에 관한 내용은 “네이버 나루세님의 블로그”의 내용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그밖의 과거 회상에 관한 내용의 대부분은 필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추억을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 과거 신문기사 등을 참고해서
부족한 기억력을 보충했습니다.}
** 원문 작성자 => JOHN CENA
** 원문 작성 날짜 => 2012년 2월 15일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31432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