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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대제학의 별칭)
선비론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를
“선비가 스스로 고상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길만은 아니다. 도덕을 마음에 지니고 때를 못만
나 몸을 고결하게 지키는 사람도 있고 족함에 그치는 도를 알아서 물러나와 안전을 보존하는
자도 있다. 또 자신의 능력이나 분수를 헤아려서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고 편히 있는 자가
있고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자신을 지켜 천하의 일을 관계치 않고 홀로 그 몸만을 깨끗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처한 것이 비록 득실과 대소의 다름은 있으나 모두 그 일을 스스로 고상
하게 하는 자들이다. 선비의 고상한 그 뜻이 본받을 만 한 까닭은 나아가고 물러남이 도리에
맞기 때문이다.”
때를 만나면 공을 세우고 그렇지 못하면 조용히 물러나 고결하게 마음을 닦을 일이다. 세속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세속을 벗어남이 결코 무능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신이 지닌
도(道)와 뜻하는 의(義)가 더럽혀 지는 것을 욕(辱)으로 여기는 자에게는 당연한 처세이다. 존
경받는 많은 선비들이 이를 실천하였고 맹자 또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공자(孔子)라고 하면
서 그 까닭을 나서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잘 알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들은 남의 시선이나 세속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진정 자아(自我)를 위해 살았다. 남에게 해
를 끼치지 않았고 남의 신세를 바라지도 않았다. 선비가 선비인것은 호수처럼 담담하면서도 샘
물처럼 차가운 이런 맛이 나기 때문이 아닐까?
선비...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 특히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계층을 가리
킨다. 상고시대부터 고신도(古神道)를 배경으로 내려온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이상적인 인간상
이라는 의미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유생(儒生)의 전칭으로 변용되었다. 그러므로 선비는 한자
어의 <사(士)>와 같은 뜻을 가지며, 유교이념을 당당한 인격체라는 뜻에서 <유(儒)>로도 쓰
인다. <사>는 학문을 연마하여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으로서 바로 윗계급인 대부와 결합하여
<사대부(士大夫)>라고 일컬어지며, 사·농·공·상 사민(四民)의 첫머리에 위치한다.
역사적 유래
삼국시대 이래 유교문화가 점차 폭넓게 수용됨에 따라 선비의 덕성(德性)과 지조(志操)에 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태학(太學)이 건립된 것을 시작으로 삼국에 태
학 또는 국학이 세워졌다. 태학에서는 유교이념을 교육하여 선비를 양성하였으며, 전문교수인
박사(博士)를 두어 인재를 가르쳤다. 고구려 영양왕 때의 대학박사 이문진(李文眞)과 백세 근초
고왕 때의 박사 고흥(高興)은 역사를 기록, 편찬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은 널리 문사(文士)를 찾
아서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로써 보면 당시 역사의 기록과 편찬은 선비들의 임무의 하나였
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선비들의 공직활동도 뚜렷하게 확대되었고 교육기관을 통한 선비
의 양성도 확장되었다. 국자감(國子監)을 중심으로 한 관학이 쇠퇴할 때는 12공도(十二公徒)의
사학이 융성하였다. 고려 말엽 충렬왕 때 안향(安珦)과 백이정 등에 의하여 원(元)나라로부터 주
자학이 도입되면서 유교이념의 새로운 학풍과 학문이 형성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도학이념이 정
립되면서 선비의 자각도 심화되었다. 곧 불교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의 풍조를 배척하고 유교이념
을 실현하기 위한 사회개혁의식이 이들 선비들 속에서 성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이 지
배한 시대였던 만큼, 선비들의 사회적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그리하여 사대부에 의한 관료제도가
정착되었고,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서의 선비의 위치는 가장 중심적인 것이었는데, 수차례에 걸
친 사화(士禍)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선조 때부터 마침내 선비들이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는 사림정치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생활양식과 활동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선비들이 사회의 지도적 계층으로써 그 지위가 확립됨에 따라 선비의 생활
양식도 매우 엄격한 규범에 의하여 표준적인 정형화(定型化)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선비는 도학
의 이념을 담당하는 계층이므로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지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의리의 신
념을 사회 속에 제시하고 실천해야 함과 동시에 유교적 도덕규범을 실천하는 사회적 모범을 보여
서 대중들을 교화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다. 따라서 선비는 집밖에 나가거나 집안에 들
어오거나 항상 그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고 제시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임무를 실천해야 하는 지도
자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선비는 독서인(讀書人)이고 학자로 이해된다. 선비는
학문을 통해 지식의 양적인 축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를 확신하고 실천하는 인격적 성취
에 목표를 둔다. 그리고 자신의 덕을 사회 속에 실현하기 위해 관직에 나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관직을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펴고 신념을 실현하는 기회를 얻
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로 청환직(淸宦職)에 종사하였는데, 이는 학문을 전문으로 하거
나 언로를 맡아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하는 직책이다. 선비들의 가장 활발한 세 관직활동으로는
경연관(經筵官)·언관(言官)·사관(史官)을 들 수 있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을 경우에는 산림 속에서 스승을 만나 학문과 도리를 연마하고 후진을
가르치며 벗들과 서로 도의를 권면(勸勉)한다. 벼슬에 나간 선비도 여가에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
을 성취하여 <선생(先生)>으로 일컬어지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았다. 선비가 벼슬에 나가지 않
거나 벼슬을 그만두고 산림에서 학문을 연마하는 데 전념하는 경우를 <산림(山林)> 또는 <산
림처사(山林處士)>라 하였다. 산림의 선비로서 학문이 높고 명망이 있으면, 임금은 이들이 과거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하더라도 <유일(遺逸)>로서 높은 관직을 주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리하여 산림은 사실상 그 사회의 공론을 주도하는 영향력을 지녔으며, 그들을 영도하는 <산림종
장(山林宗匠)>은 정치적 영향력이 막대하였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외면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벼슬길에 나갈 의사가 없이 과거공부를 멀리하고
도학공부에 전념하는 것을 선비의 고상한 태도로 여겼던 풍조가 있었다. 왜냐하면 부와 귀의 욕
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거부적 비판정신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세계
선비는 부와 귀의 세속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인의(仁義)의 유교이념을 신봉한다. 특히 세속적
가치를 인간의 욕망이 지향하는 이익이라 한다면 선비가 지향하는 가치는 인간의 성품에 내재된
의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비는 유교이념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에 유교이념 자체
가 바로 선비정신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선비가 가장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냈던 것은 <의>를 추구하는 의리정신에서였다. 의리는 강상(綱常)의 규범
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한층더 큰 범위로서 <존양(尊攘)>의 의리를 들 수 있다. 존양은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의 원리로서 존왕천패(尊王賤覇)의 춘추의리(春秋義理)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선비의 의리정신은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고 화이(華夷)의 분별을 확실히 하여 정통을
존중하고 중화문화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삼는다. 선비정신은 변하지 않고
굽히지 않는 의리정신으로 표현되는 데서 그 강인성이 드러난다. 이민족의 침략을 당할 때 침략
자를 불의의 집단으로 규정하고 의리에 따라 최후까지 항거하였던 것은 선비정신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사림정신의 근대적 성찰과 실현
도학이 정착하면서 선비의식은 어떤 시대보다도 선명하고 자각적인 것으로 나타났고, 사회적으
로도 선비가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선조 때에 이르러 선비가 정치의 담당자로 부상
하여 사림정치가 전개됨에 따라, 사림자체에서 내부분열과 대립이 일어나 이른바 당쟁이 시작되
었다. 당쟁은 출발점에서 보면 선비정신의 기본이념에 따라 자기편을 <군자>라 하고 상대편을
<소인>이라 비판하는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선비가 권력층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면
서 견제할 때는 순수한 입장을 지켰으나, 권력의 주체가 되었을 때에는 권력의 권위를 업고 서민
대중을 억압할 뿐 아니라 착취하는 구실을 하였다. 이것은 선비의 타락상이고 참모습의 상실이다.
따라서 이때의 선비는 나라와 백성들에 대한 봉사자가 아니라 권력의 향유자로 군림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비문화의 중요한 특징인 규범체계는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확보하는 기능을 갖는다.
그러나 이 규범들이 선비의 계층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강화될 때, 특히 의례는 형식화하기
마련이었다. 사대부의 예의범절은 형식주의에 빠지면서 실질적 효용성을 외면하였고, 이러한 선비
문화는 도학파의 정통성이 강화되면서 더욱 확고하게 정착되었으나, 이와 함께 여러 가지 폐단이
발생하였다.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이러한 도학적 관념성과 형식성에 대한 반성을 하고 실질적
효용성에 대한 관심을 높인 새로운 학풍, 실학(實學)이 대두하였다. 실학사상을 선도하였던 세력
은 역시 선비들이었는데, 실학파의 선비들은 도학적 선비문화의 문제점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폐
단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선비의 허위적 면모를 성찰하고 진실한 모습을 추구하는
것은 실학의 중요한 과제였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에 따라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위정척사파의 선비들은
유교이념의 전통에 위배되는 모든 사상이나 이념체계를 거부하고 도학의 정통성을 수호하고자 하
였다. 특히 도학의 정통성에 상반되는 이단으로서 가톨릭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였고, 도학적 의리
에 배치되는 서양의 침략세력을 오랑캐라 하여 거부하였다. 그리고 정부가 개항과 더불어 개화정
책을 취하게 되자 정부의 입장을 정면비판하였으며,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
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도학의 척사위정론이 저항정신에 사로잡혀 보수적·폐쇄적 수구론(守舊論)
을 주장한 데 대한 반동으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자강정책(自强政策)을 추구하는 개혁파가
대두하였다. 그리고 이 수용론에서 더 나아가 유교개혁사상이 출현하였다.
선비정신의 현대적 의의
선비는 그 사회의 양심이고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으로 인식되었고, 심지어 생명의 원동력인 원기
라 지적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사회까지 그 시대적 양상에 차이가 있었지만 선비는 각 시대의
지도적 구실을 하는 지성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해 왔다. 선비는 현실적·감각적 욕구에 매몰되지
않고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하여 상승하기를 추구하는 가치의식을 갖는다. 선비는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인격의 모범이요 시대사회의 양심으로서, 인간의 도덕성을 개인 내면에서나 사회질서 속
에서 확립하는 원천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살며생각하며>
선비정신 한국정신
‘낮게 생활하고 높이 생각한다.’삶은 간소하되 마음은 풍아(風雅)의 유유자적을 참된 인간의
고결한 생활로 여기는 선비정신의 극치가 경(敬)사상이다.‘경’은 학문의 한방법으로서, 진리
를 이해하고 도덕적 주체를 확립하는 문으로 여겨졌다. 퇴계 이황에 이르러 이‘경’의 개념이
세계관, 인간관을 포함하는 철학 체계의 핵심이 되어‘경철학’으로 성립됐다. 퇴계는‘경철학’
을 확립함으로써 유학을 더욱 개성있는 실천철학 선비정신으로 집대성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한양 남산에 가면 9만9999칸이나 되는 거대한 집이 있다는 소문이 팔도에 나돌았다. 상경한 선
비들은 이 꿈만 같은 집을 찾아 헤맸으나, 끝내는 그 집이 겨우 단칸 초막임을 알고는 어이없
어 했다.‘허백당’이란 당호가 붙은, 판서를 지낸 홍귀달의 이 집은 겨우 다리 하나 뻗을 만한
누옥이었다. 그 속에서 9만9999칸이나 되는 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누군가 한 말이 와전된 것
이다. 선비들은 비록 실망하면서도 이 호호탕탕한 생각의 집에서 느끼고 돌아가는 것이 있었다.
예로부터 남산 두메에는 권세에는 아랑곳없는 선비들의 헛가리 몇 채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남산골 샌님, 원(守令·수령) 하나 못내도 당상(堂上) 목은 잘도 자른다’는 말이 생겨난 것
이다.
퇴계는 선비를 세력과 지위에 굽히지 않는 존재라 했다. 그는 선비정신을 세속적 권세와 비교하
여 이렇게 말했다.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하
노라.”“선비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이나 공경(公卿)으로서 빈곤한 선
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으니, 그것은 선비가 공경되고 절의가 성립되는 까닭이라.”
율곡은 선비를 이렇게 정의한다.
“마음으로 옛 성현의 도를 사모하고, 몸은 유가의 행실로 신칙하며, 입은 법도에 맞는 말을 하
고 공론을 지니는 자다.”
‘인’의 포용력과 조화 정신은 선비의 화평과 인자함으로 나타나고 예의는 염치의식과 사양하
는 마음으로 표현되며, 믿음은 넓은 교우를 통해서 드러난다고 했다.
불의를 볼 때마다 목숨 걸고 간언을 서슴지 않은 명재상 이원익의 청백을 포상하는 뜻에서 인조
는 흰 이불과 요를 하사했다. 이부자리를 전달하고 돌아온 승지에게, 임금은 이원익이 어떻게
살더냐고 물었다.
“초가에 비가 새고 문틈으로 바람이 듭니다.”
임금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궁궐에 든 지 40년, 영의정을 지낸 이가 겨우 초가 두어칸이더냐!”
도승지 이민구의 기록에 따르면, 이원익이 돌아가셨을 때 관을 마련할 여유조차 없어 조정의 도
움으로 겨우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선비정신은 교육열, 공동체 사랑, 자연과 인간의 공생, 공익 이념, 자기 절제, 통합적 인문 교양
을 바탕에 깔고 있다.
에리히 프롬이 후진국과 선진국의 차이는 경제적으로 잘사느냐 못사느냐가 아니라, 국민이‘소유
가치(to have)’를 추구하느냐 존재 가치(to be)’를 추구하느냐로 가름된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
는 바 크다.
막스 베버는 한국의 선비를“부도덕과 도덕의 모호한 경계를 선명하게 가르고 행동했던 문인 신분
층”이라고 우러렀다. 만약 베버가 우리 옛 선비들의 ‘귀씻이(洗耳·세이), 눈씻이(洗目·세목),
돈빨래(洗錢·세전)’풍습까지 알았던들 우러를 정도가 아니라 경탄해 마지 않았을 것이다. 선비
는 불의부정(不義不正)하거나 부도덕한 일을 듣거나 보면 집에 돌아와 그 말을 들은 귀나 눈을 물
로 씻음으로써 오염됐을지도 모를 마음의 때를 닦았던 것이다. 악(惡)에 오염된 더러운 돈을 빨아
쓴다는 발상도 자연스럽다.
이 빠진 뚝배기에 꽁보리밥으로 배 채우고 누더기 이불로 몸 가리는 궁색한 살림이지만, 벗이 오
면 차 달일 약탕기 하나, 외로울 때 꺼내 퉁길 거문고 하나, 그리고 머리맡에 책궤 하나, 산과 물
을 거닐 나귀 한 마리면 족하다던 김정국의 선비론은 오늘날 선진국이 추구하는‘단순 인생’과
근본을 같이한다. 조선 선비들의 청빈낙도는 탈속이 고아한 마음에 이르는 전제이며, 욕망으로
부터의 자유로움이 깨끗한 삶으로 인도되는 한길임을 보여준다.
도쿄(東京)대 아베 요시오(阿部吉雄) 교수는 말한다.
“조선 퇴계 이황의 경사상은 도쿠가와(德川) 정권 이데올로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한 메이지(明治)유신의 원동력이 됐던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학파,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과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 등은 퇴계를 신처럼 존경했다. 이런 사실을 오늘날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을 잊는다면 일본 문화가 발딛고 서 있는 그 정신적 기반을 완전
히 도외시해 버리는 게 되기 때문이다.”
메이지유신은 퇴계의 경사상이 교육을 통해 보급됨으로써 가능했다. 서양 문명이 물밀 듯 밀려드
는 메이지 초기는 공·맹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한편 국수주의 복고주의가 일어났다.
그런 양극단 사이에서 천황을 보좌한 모토다 나가자네다. 교육을 바로잡지 않으면 일본의 장래가
없다고 생각한 천황은 메이지 12년 모토다에게‘교학대지(敎學大旨)’를 내리게 명하고, 그
‘교학대지’는 메이지 23년‘교육칙어’로 공포돼 퇴계의 경사상이 일본 근대 교육에 구체적으로
도입되기에 이른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최근 광화문 문화포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100년간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물질적 풍요로움을 얻었으나, 정신적 자신감은 상실했다.
때로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불같은 정신으로 시대를 호령했고, 때로는 초야에 칩거하며 깊이
있는 사색으로 시대를 떠받쳤던 선비들. 하늘이 무너져도 원칙을 지키며 백성의 삶을 끌어안았고
도덕과 양심을 위해 모든 영광을 미련 없이 포기했던 선비정신이 필요한 때다.”
지금 우리는 정치·경제·교육의 가치 체계가 흔들리고 천박한 권모술수·부패가 만연한 위장 시
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대의를 위해 목숨 걸고 탐욕을 버리는 선비정신, 곧 한국정신을
갈망한다.
사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기 위하여 파견된 자. 그리스어, 아포스톨로스는 <파견된 자>
<사자(使者)>를 뜻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는 해군의 원정을 뜻했다. 성서적 용법으로는 오히
려 라비적 유대교의 <사자>를 뜻하는 헤브라이어에 그 기원을 가진다. 그 올바른 의미는 <전
권(全權)을 위임받은 자>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로는 <교회의 사자(고린도후서 8:23)>
<너희 사자(빌립보서 2:25)>처럼 쓰이고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사자>
라 부르고 있다(히브리서 3:1, 요한복음 17:18). 그러나 이 말은 관용어로는 <사도>라 번역되
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선택되어 복음을 전하고 악령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는 힘(마태복음 10:
1, 누가복음 9:1, 마가복음 6:7)을 받아 파견된 자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12사도
가 그것이다(마가복음 6:30, 마태복음 10:2, 누가복음 6:13). 12라는 수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
하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리고 종말에는 12지파(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와
12사도(신약의 하나님의 백성)가 하나로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형성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요한계
시록 21:10∼14). 12사도 중 유다의 탈락에 의한 결원은 즉시 맛디아의 선출로 충원되었다(사도
행전 1:21∼26). 이때 사도의 자격은 예수가 땅 위에서 살았을 때 직접 행동을 함께 한 자이며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이었다(사도행전 1:22, 2:32). 이 <사도>라는 명칭은 12사도 이외의 사람
들에게도 쓰이게 되었다. 바울은 부활한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위임되었다고 하며(갈라디아
서 1:1, 고린도후서 12:11, 12) 바나바도 사도라 불렸다(사도행전 14:4, 14).
사도는 교회의 교직 가운데 가장 권위가 있었다(고린도전서 12:28, 에베소서 4:11).
나는 “이성무의 선비이야기”라는 칼럼을 쓰기로 했다. 그러면 먼저 “선비”가 무엇인지를 알
아야 한다. 국어사전에는 선비를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 “학문을 닦는 사람”,
“학식이 있되 인격이 고결하고 근엄ㆍ강직한 사람”이라고 개념규정하고 있다.
선비는 한자로 ‘士’이다. 한석봉(韓石奉)의 <천자문>에 ‘사’는 ‘선배(先輩) 사’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의 뜻은 같지 않았다. 선진(先秦) 시대에는 ‘전사 사’라고 했
고, 전국시대에는 ‘임협(任俠)사’, 당ㆍ송시대에는 ‘조사(朝士) 사’,‘문사(文士) 사’로 쓰
였다. 한국에서도 삼국시대에는 ‘군사 사’, 고려시대에서 15세기까지는 ‘조사 사’ㆍ‘문사
사’, 16세기 이후 사림의 시대에는 ‘선배 사’로 쓰였다.
선진시대에는 천자ㆍ제후ㆍ경ㆍ대부ㆍ사의 봉건적 위계 하에서 대부와 사는 제후의 가신이나 전사
를 의미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이르면 ‘문학유세지사(文學遊說之士)’ㆍ‘임협지사(任俠之士)’
가 새로운 사인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당대에 이르면 문관귀족을 지칭하는 ‘문사’
라는 명칭이 널리 쓰였다. 그리고 송대에는 양자강 남쪽이 개발되면서 신흥 중소지주들이 대두해
‘사대부’층이 형성되었는데, 여기에는 문ㆍ무관 뿐만 아니라 유교교양을 갖춘 독서인층까지 포
함시켰다. 이‘독서인'층이 조선의 선비에 해당한다. 선비는 유교교양을 먼저 갖춘 ‘선배'라는
용어에서 유래했다.
선비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주역>의 ‘경이직내(敬以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로 집약된
다. 퇴계의 ‘거경궁리(居敬窮理)’, 남명의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경(敬)을 통해 마음을 수양하고, 밖으로 의로운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에서는 하늘의 천리(天理)가 사람에게 품부된 것을 성(性)이라 한다. 성은 본래 착한 것인
데 인욕에 가려 악해질 수도 있으니, 경을 통해 사욕을 제거해 본래의 착한 마음을 보존해야 한
다는 것이다. 존천리(存天理), 알인욕(謁人欲)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우선적으로 경을 해야 한다. 경이란 자기수양이다. 불교의 선(禪)이나 정좌
(靜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스스로 수양해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道)를 실현해야 한다. 그러니 선비는 도학을 연구하는 지식인으로서 인격이 고결해야 하고
청렴결백, 근엄강직해야 하며, 예의염치를 지켜야 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해야 하
고, 의로운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러한 선비정신이 살아있을 때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조선
왕조가 500년 동안 유지된 것도 조선 사대부들의 선비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척세도
정치로 이러한 선비정신이 무너지자 나라가 망하고 만것이다.
1) 선비의 교육
바른 선비를 만드는 교육은 우선 올바른 인격을 도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만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다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그래서 선비 되려는 자에게 가장 먼저 교육시키
는 것은 바른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런 다음 선비는 국가와 천하를 바르게 하는‘제가치국
평천하’(齊家治國平天下)의 책무를 배운다. 국가와 천하를 바르게 하는 임무를 다할 때 참
선비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른 인격을 닦어도 사회에 대한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참된 선비라고 할 수 없다.
선비는 원만한 인품과 사회적 임무를 배울 뿐 아니라 예술적 감수성을 풍요롭게 만드는 각종
예술 활동을 배우기도 한다. 선비는 서예를 쓰고 시를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
기도 한다. 선비는 그런 예술 활동을 배우면서 그 내면을 맑은 감성으로 충만하게 하고 그것
을 다시금 인격 도야의 재료로 활용한다. 이런 교육 과정을 통해 참 선비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선비의 교육에 졸업이란 없다. 아무리 높은 칭송을 받는 선비라도, 언제나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기며 더 높은 완성을 위해 쉬임 없이 공부한다. 공부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
라 공부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선비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선비 되기'의 교육은 끝없이
계속되며 선비는 영원한 학생으로 살아간다.
2) 조선시대의 학교
조선 시대의 교육은 조정에서 주도하는 관학(官學)과 지역의 선비들이 운영하는 사학(私學)
으로 나뉘어 있었다. 관학은 궁극적으로 유교의 이념을 유지하고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
에 있었다. 관학은 한양에서는 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成均館)과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중학(中學)·동학(東學)·서학(西學)·남학(南學)의 사학(四學)에서 이루어졌고, 지방에서는
조정의 지원을 받는 향교(鄕校)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교육은 관학보다는 사학(私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각 지방의 선비
들은 주로 한 스승을 중심으로 학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학문 공동체의 장소가
바로 서원이었다. 서원은 지역의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 아니라 지역 사회의 도덕적 교화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서원 교육은 중앙 관료를 양성한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만은 아니다. 서원의 교육
은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도학(道學)의 실현'과 '참된 선비 만들기'라는 참교육 실현에 큰
비중을 두었다. 서원 뿐 아니라 초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서당이 곳곳에 설치되기도 하였
다. 서당은 아동들에게 글을 깨우쳐주고 예절바른 몸가짐을 가르쳐주는 기초적인 교육 기관
이었다.
3) 교육의 변화과정
조선 초기의 지식인들에게 부여된 임무는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새 국가의 운영에 필요
한 통치 이념과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의 교육은 국가를 위해 일
할 수 있는 유능한 관료를 양성하는 데에 그 목적이 놓였고, 학생들의 목표도 과거에 급제하
여 조정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 체제가 안정기에 접어들던 조선 중기부터 교육의 목적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시
작되었다. 진정한 선비의 길을 탐구한 사림(士林)의 선비들은 부귀나 출세가 아닌 자기 수양
만이 진정한 학문의 목적이라고 주장하였고, 교육의 목적은 과거 급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수양과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여기는 참된 지사(志士)를 양성하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과거를 위한 교육에서 대의(大義)와 명분을 위한 교육으로 탈바꿈해 간 것이다.
사림의 선비들은 각 지방에 서원을 건립하고 참교육의 이상을 실현해갔고, 교육의 주체도
관학에서 사학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물론 사림의 서원이라고 해서 과거를 아예 등진 것은
아니었지만, 과거는 출세를 위한 목표가 아니라 대의와 명분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