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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벌영웅 윤관
북벌영웅 1
- 고려가 건국된 이래 숙종-예종 때처럼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겠다는 열망과 그 실행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한국 역사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이 배후에는 윤관이라는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대영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바로 두 번 째 북벌 영웅이었던 것이다.
- 윤관은 태조 왕건에 나왔던 장군 윤신달의 후손으로, 당시 고려의 대표적 명문 귀족 중의 하나였던 파평 윤씨의 일족이었다. 비록 고려의 지배층으로서 충분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었지만 이 가문은 유달리 무장의 기질이 다분했다. 그래서 대대로 파평 윤씨가문은 고구려의 후예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고 나아가 언젠가는 꼭 북방의 광활한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기질이 윤관 대에 와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 젊었을 적 윤관은 고려 국경을 벗어나 백두산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며 장군의 꿈을 키우곤 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당시 여진족의 땅인 만주를 두루두루 살펴보며 많은 모험을 하면서 여러영웅들을 만나 동질감을 키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려와 여진족은 반드시 하나가 되어 고구려를 재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여진족이 누구였던가? 종래의 역사 인식은 일반적으로 야만인 정도로 취급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진족은 곧 발해의 후손이었다. 다시 말해 발해가 망한 이후 그 유민들을 '여진족'이라 불렀던 것이다. 발해가 멸망한 이후 거란은 발해의 땅에 '동단국'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워 태조 야율아보기의 장남인 야율배를 그 왕으로 삼았으나 잇다른 발해 유민들의 저항에 도저히 발을 못 붙이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거란은 어차피 발해를 멸망시켜 동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므로 그런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자 더 이상 만주 땅에 별 미련이 없었다. 과연 거란의 의도대로 옛 발해의 광대한 땅덩어리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일명 '발해열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 이후 후 발해국, 정안국, 오사성 발해국 등등 수 많은 왕국들이 만주에서 명멸하며 약 2백 년 동안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그동안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삼한을 통일하고 이들 왕국들과 단편적인 교섭들을 하였으나 적극적으로 이들을 아우를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신라계의 폐해였다.
- 이것이 당시 숙종이 추진하던 북벌계획 당시 여진족의 상황이었다. 윤관 또한 일찌기 만주 땅을 섭렵하며 이들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윤관은 관직에는 선종 때부터 등용된지 오래였으나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역시 숙종 때였다. 윤관은 자신이 품고 있던 오랜 야망을 숙종을 통해서 펼쳐 보이리라 다짐했다. 윤관은 이를 위해 제왕의 기상이 넘치던 숙종의 곁에서 보좌하며 그의 즉위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다. 때문에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 때마침 서기 1100년을 전후해서 오랜 분열과 전란에 시달리던 만주 땅에 새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생 여진 출신의 오야속이라는 인물이 점차 세력을 키워가며 여러 발해 열국들을 통합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야속은 남만주를 통합하자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려는 요량으로 남쪽의 고려의 국경을 건드렸다. 이때 숙종은 윤관을 보내 오야속을 상대하게 하였으나 결과는 뜻밖에도 고려군의 대참패였다. 여진족의 우수한 전략과 무기를 고려군이 과소 평가 했던 것이다.
- 이때 받은 윤관의 충격은 대단했다. 뒤이어 그는 숙종과 의기투합하여 옛 고구려식의 군대로 고려군의 체질을 개선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평원지대에 맞는 기마병을 대대적으로 확충하고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하던 각 사찰의 승려들을 군대에 동원하여 대군을 키워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이루어진 것이 일명 '별무반'으로 기마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어 여진족에게는 '신의 군대'로 알려지게 된다.
- 이런 와중에 직접 서경으로 가 대대적인 만주 출병을 선포하려던 숙종이 갑자기 급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장성한 왕 우가 즉위하니 이가 예종이다. 예종은 저돌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아버지 숙종에 비해 매우 치밀하고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만주 출병에 만전을 기했다. 이미 이러한 대세는 약삭빠른 신라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이때 만주에서는 오야속이 죽고 그 동생인 아골타가 여진왕으로 즉위하여 제국으로의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아골타는 노골적으로 고려에 국서를 보내 자신의 가문은 옛 신라 왕자 마의태자의 후손이니 꼭 고려를 정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 같은 여진족의 발호는 고려의 조정을 경악시켰고 분노한 예종은 서기 1107년 10월, 드디어 윤관을 대원수로 삼고 오연총, 김한충, 문관, 김덕진, 척준경 같은 내노라 하는 고려의 장군들을 총출동시켜 총 20만 대군으로 여진족의 경계에 이르게 하였다.
- 때마침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아골타도 이미 고려와의 일전을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역시 마친 채 25만 대군으로 남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예종은 숙종의 숙원을 푼다는 의미에서 직접 서경으로 발걸음을 옮겨 동명성제의 제사를 무사히 올리고 만주로 출병하는 고려군을 격려했다.
- 여진족의 땅을 바로 앞에 두고 윤관은 설레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시작이구나! 드디어 선조들의 한을 풀 때가 온 것이다!! 저들 여진족의 땅을 모조리 차지하여 옛 고구려의 영화를 되찾으리라!!! 살을 에는 추위와 칼바람 속에 그렇게 윤관을 비롯한 20만의 고려군은 끝없이 펼쳐진 만주평원을 바라보며 마지막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옛 발해의 후손들도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이 '성전(聖戰)'에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고려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던 '만주출병'은 고려군의 선제공격으로 그 막을 올리는 것이었다.
- 발해가 만주를 다스릴 때는 잘 정돈된 제국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멸망 이후 분열되어 전란으로 지새다보니 교통과 질서가 파괴되었다. 그래서 여진족들은 모든 국가체제를 기동성 위주로 하다 보니 유목 왕국화하여 정주 생활을 기피하게 된다. 따라서 국경이 있다 해도 거기에 상주하는 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주로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 윤관이 20만 고려군을 휘몰아 여진 왕국을 쳐들어 갔을 때도 바로 이같은 상황이었다. 국경을 돌파하여 백두산 근처까지 와도 별다른 여진족의 저항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고려군에 큰 장애가 되었던 것은 광활한 개마고원의 고산병과 거친 자연이었다. 더우기 이제 공포 스러운 북방의 겨울이 시작되는 때여서 고려군은 살인적인 한파와도 싸워야 하는 실정이었다.
- 이때 고려군에 다소나마 행운이 찾아왔다. 25만 대군을 이끌고 본거지인 완안부의 아르치카 유역(지금의 흑룡강성 송화강의 지류인 아집하)에서 남하하던 아골타는 거란군이 여진족의 서쪽에 대군을 운집하고 있다는 급보를 듣고 군대를 양분하여 자신은 거란의 국경으로 향했다. 아골타는 대군으로 고려군을 짓밟겠다는 계획을 수정하여 자신의 아우로 하여금 10만 대군으로 윤관을 치라고 명했다. 이는 고려 외교의 개가였다.
- 한편, 어느덧 힘겨운 행군 끝에 고려의 대군은 백두산 기슭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싸움다운 싸움은 안해 봤지만 배달겨레의 영산 백두산 앞에서 고려군은 윤관 대원수가 집전하는 천 제를 치루고 각오를 새삼 다졌다. 그때 급보가 도달하기를 지금의 함경북도 해안 지대의 일부 여진족들이 군세를 모아 고려군의 배후를 친다는 소식이었다. 윤관은 고려군의 본진은 잠시 멈추게 하고 자신은 오연총과 임연, 척준경 등의 장수들과 함께 이들을 정벌하러 나섰다.
- 여진국의 대장군 고라는 아골타의 밀지를 받고 정주성과 장주성 두 성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고려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받은 고라는 휘하 장수들을 모아 윤관을 사로잡을 계책을 의논했다. 결과로 고라 자신이 항복 사절로 몰래 변장해 윤관에게 다가가 그의 목을 벤다는 훨씬 과격한 행동지침으로 귀결되었다.
- 그러나 고라를 비롯한 여진족 장수들은 윤관이 이미 여진국의 주요 장수들의 초상화를 정확하게 그려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윤관은 정주와 장주의 두 성이 항복한다는 말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진족들은 사전에 사신을 보내 항복 절차를 교섭하겠다고 하고 윤관은 이를 승낙했다.
- 사신으로 변장 한 고라는 휘하 장수들을 하인으로 변장시키고 윤관이 베푼 위로의 잔치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면면을 꿰뚫고 있던 윤관이 술잔을 떨어뜨리는 것을 신호로 고라와 휘하 장수 4백 여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목이 날아갔다. 이로써 동북 지역 여진국의 방어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었다.
- 여진의 대장군 고라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여진족은 초반부터 큰 타격을 입었다. 이때 여진의 10만 대군은 이미 지금의 연길 지역인 문내니성에 도착하고 있었다. 지도자를 잃은 정주와 장주성은 순식간에 고려군이 접수했다. 여기에 일부 병력을 남겨놓은 윤관은 재빨리 다시 본군과 합류했다.
- 윤관은 또한 지리에 익숙한 발해인과 많은 여진족들을 이미 포섭해놓고 있었다. 이윽고 여진의 10만 대군이 웅거하던 문내니성에 도착한 고려군은 주변의 지형을 연구한 끝에 수공을 결심했다.
- 우선 성을 겹겹이 둘러싼 고려군은 숫적인 우세로 여진군의 경거망동을 억제한 이후 비밀리에 주변 계곡에 여러 개의 둑을 만들어 강물을 저장해놓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난 후 둑에 물이 차자 윤관은 옛날 강감찬의 고사를 따라 일시에 둑을 터뜨렸다. 그러자 모든 물길이 문내니성으로 쏟아져 들어와 여진의 기마병을 무력화시켰다. 이로써 여진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아골타 자신의 아우도 이때 목숨을 잃는다.
- 여진의 잔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인근의 보동음성으로 피신했다. 반대로 초반에 엄청난 승리를 거둔 고려군은 한층 사기가 충천했다. 윤관은 척준경으로 하여금 여진족 잔당을 쳐부수러 보동 음성으로 보냈으나 승리에 도취된 척준경은 그만 방심하다가 여진족의 반격을 받고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
- 척준경은 죽여달라고 했으나 이 와중에 아까운 장수를 함부로 처단할 수는 없었다. 윤관은 대신 척준경이 큰 공을 세워 이 수모를 씻어야 한다고 엄하게 타일렀다.
- 윤관이 군사를 이끌고 보동음성에 도달하니 과연 철옹성이었다. 도무지 빈틈이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정공법을 명령했으나 괜히 애꿏은 군사들만 희생이 되었다. 윤관이 고민하자 척준경은 자신이 밤에 결사대를 이끌고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어 보이겠노라고 장담했다. 윤관은 반신반의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양동작전으로 성안의 여진군을 다른데로 시선을 돌린 다음 척준경을 투입하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다.
- 척준경과 장군 이관진은 윤관이 성의 다른 쪽으로 공격을 개시하는 사이 비밀리에 횃불을 던져 수비병의 시선을 다른데로 돌린 다음 재빠르게 성벽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그리하여 수비병을 순식간에 제거한 다음 성문을 열었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고려군이 노도와 같이 성문을 통해 진입했다.
- 성문이 뚫리자 속은 것을 깨달은 여진 장수들이 몰려와 척준경을 에워싸고 화살을 빗발처럼 날렸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를 뚫고 말을 달리며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여진 장수들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한다. 이로써 보동음성도 고려에 의해 함락되었다.
- 여진군의 본진을 이끌고 거란국경에 도달한 아골타는 이것이 고려와 거란의 합동 속임수인 것을 알고 분통을 터뜨렸다. 게다가 윤관을 치러간 자신의 아우와 10만 대군이 문내니성에서 궤멸당했다는 소식에 더더욱 경악했다. 아골타는 이제 고려가 자신의 목에 칼날을 겨누는 형국임을 깨닫고 급히 대군을 이끌고 이제 여진족 남방의 최대 요새인 이위동성으로 향했다. 이제 여진족의 대왕 아골타와 고려 제일의 명장 윤관과의 한판승부는 이위동성에서 가려지게 된 것이었다.
- 과연 아골타가 이끄는 15만 대군의 위용과 기동성은 놀라웠다. 거란과 접경하던 서쪽 변경에서 윤관이 진군하던 목표인 이위동성까지의 그 엄청난 거리를 단 4일 만에 주파했기 때문이다.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하에 15만 기마군단을 이끌고 오는 아골타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제 옛 고구려와 발해의 뒤를 이어 나 아골타가 천하를 도모하는 마당에 남쪽의 고려군이 나의 발목을 이렇게 잡다니...)
그러했다. 아골타의 최종목표는 과거 고구려와 발해가 그러했던것 처럼 중국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본거지인 만주를 통일하여야만 했다. 만주를 차지하는 자가 곧 중국을 떨게 할 수 있던 것이었다.
- 이위동성은 마치 반지의 제왕 2에서 나온 헬름 협곡의 전투처럼 절벽을 양쪽에 끼고 웅거하던 천혜의 요새였다. 이윽고 이위동성에 다다른 윤관의 15만 대군은 그동안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모두 사색이 되었다. 아무러한 윤관도 왜 이곳이 여진국 남쪽의 최대 방어 중심지였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윤관은 우선 척후병들을 사방에 보내 이위동성의 방어막에 약점은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사실 이위동성이 윤관에게 생소한 장소는 아니었다. 이전 젊었을 적에 만주를 두루 섭렵하던 윤관은 천하의 요새라던 이곳도 방문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이위동성은 아골타의 영도력하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철옹성으로 변해있었다.
- 척후병들의 보고 결과도 암담했다. 성의 높이도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성의 후문도 좁은 오솔길이기 때문에 배후공격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오직 탁 트인 벌판은 방금 윤관의 대군이 진군해온 거기밖에 없었다. 여진의 구원군이 온다면 이 길밖에 없었고 그것은 곧 고려군이 양면으로 협공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윤관은 지리적으로 불리함을 느끼고 일단 진지를 구축한 다음에 목책을 두르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하였다. 일부 장수들은 이위동성을 포기하자고 했으나 윤관은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 이위동성은 아골타의 본거지를 치기 위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관문이오. 만약 이곳을 포기하고 우회한다면 지금껏 우리에게 복속했던 여진족들도 딴 마음을 먹게 될 것이 자명하오. 난 오래전에 여진의 땅을 주유해 그들의 속성을 잘 알고 있소. 반드시 이곳을 함락하여 고려군의 위용을 그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어야 하오!"
- 그러나 미처 진지를 구축하기 전에 후방에서 급보가 날라왔다. 아골타의 15만 대군이 불과 10리 밖에서 육박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군은 동요했으나 윤관은 이를 진정시키고 5만의 군사를 남겨 진지구축을 계속하게 하고 나머지 10만으로 맹활약을 펼친 척준경, 임언, 오연총 등을 대동하고 아골타의 대군을 상대하러 나섰다.
- 아골타의 대군은 전원이 기마병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윤관의 고려군은 조금 발걸음을 나서자 마자 지축을 뒤흔드는 엄청난 말발굽 소리에 위압당하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상당수가 기마병이었지만 그래도 대다수는 보병이었다. 이윽고 윤관의 눈에 저 멀리 빨간 망토를 입고 황금 갑옷에 첫눈에도 범상치 않은 풍모의 장군이 선두로 진격해오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아골타였다.
- 아골타 역시 저 멀리 고려군의 모습이 들어오자 직접 말을 몰고 나서 고려의 대장군 윤관을 찾았다. 이윽고 두 영웅은 서로와 조우했다. 아골타가 먼저 날카롭게 물었다.
" 고려는 무슨 일로 우리 땅을 침범하였는가?"
놀랍게도 유창한 고려말이었다. 때문에 윤관의 첫마디도 그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 그대가 여진족의 왕, 아골타인가?"
"그렇다"
" 어떻게 고려말을 할줄 아는가?"
그러자 아골타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금새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 우리 선조가 고려땅에서 왔다. 당연히 조상님이 쓰셨던 말을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대의 선조가 신라의 마의태자였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미 신라는 고려에게 망한 지 오래다. 그런데 신라인의 후손인 그대가 왜 고려에게 반기를 들고 우리를 괴롭히는 것인가? 이전에는 우리에게 공손하던 그대들이 아니었나?"
그 말을 듣자 아골타는 침을 밷으며 윤관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록 우리 조상은 신라인이지만 여기는 엄연히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이며 나도 당연히 그들의 후계자로 내 스스로 생각한다. 여진족은 모두 옛 발해의 후손들이다. 그래서 이제 힘을 모아 발해를 멸망시켰던 우리의 철천지 원수 거란놈들을 쓸어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발해와 동족이라고 자칭하던 그대 고려인들은 왜 거란을 응징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공격하는 것인가?"
윤관도 지지않고 정연하게 대답했다.
" 이미 우리 고려제국은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존심 때문에 백년전 거란과 여러번 싸운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리 철천지 원수라도 영원히 싸울 수는 없는 것. 그래서 우리 고려도 일단 고구려의 옛 땅인 여진족의 본거지를 점령하여 대제국을 이룬 다음 거란을 도모할 것이다. 그대는 이제 대의를 깨닫고 순순히 고려 황제의 명을 따르라!"
"그렇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내 아우를 죽인 네놈들은 결코 이곳을 한 명도 살아 돌아가 처자식을 보지 못하리라!"
그 말을 남긴 채 아골타는 자신의 군사들에게 돌아가 총공격을 명했다.
- 양군이 부딪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그래서 15만의 여진 기마병이 돌진하는 모습은 고려군에게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윤관은 먼저 궁병을 앞세워 소낙비같 은 불화살을 퍼붓게 해 일단 적군의 진격을 주춤하게 했다. 그 동안 윤관은 정예 기마병들을 후방으로 빼내고 보병들로 하여금 진형을 갖추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폭우가 쏟아져 불화살도 무용지물이 되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여진의 기마병도 순식간에 흙탕물로 변한 벌판 때문에 진격이 더디게 되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고구려식 갑옷으로 자신들과 말들을 무장시켰기 때문에 빗물에 더욱 약한 모습을 보였다.
- 이윽고 고려군에 돌진하는 여진족 기병은 특유의 기마전술로 원형을 그리며 고려군을 공격했으나 고려군 역시 큰 방패로 원형방어를 취하며 긴 창으로 기마병의 급소를 노렸다. 이는 그동안 여진족의 전략전술에 능통한 윤관 대원수의 군사훈련 덕택이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동작이 더딘 여진 기마병들은 하나둘씩 말에서 떨어져 고려군의 밥이 되었다.
- 기마병을 돌진시켜 단숨에 고려군을 쓸어버리려던 아골타의 정공법은 예상외로 난항에 부딪치게 되었다. 더구나 벌써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아골타는 기마병을 거두어 진을 치게 하였다. 어둠이 결국 양군간의 전투를 중단시킨 것이었다.
- 윤관은 이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횃불을 그대로 놓은채 밤 사이에 전군을 이위동성의 본진과 합류하게 후퇴시켰다. 소리가 나 발각될 우려가 있는 기마병들을 미리 후퇴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 이를 까맣게 몰랐던 아골타는 다음 날 동이 터서야 고려군이 진지만 남겨놓은 채 전군 철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전군을 휘몰아 이위동성으로 달려갔다. 저 멀리 드디어 이위동성의 웅장한 위용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고려군의 본진이 보였다. 목책이 있었으나 말발굽에 짓밟으면 그만이었다.
- 여진의 정예 기병들은 무서운 기세로 곧바로 고려군의 본진을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앞서 달리던 기병들이 고려군의 진지 바로 앞에 도달하자 모두 땅으로 비명을 지르며 꺼져갔다. 사람과 말의 비명이 어우러진 채 깊은 구덩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던 것이었다. 이는 철저히 위장된 함정으로 윤관이 이미 어둠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파놓도록 한 매우 깊은 함정이었던 것이다.
- 무서운 속도로 돌진하던 여진의 기병들은 갑자기 말을 멈출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미노 현상으로 앞에서 멈추려던 기병들도 뒤에서의 압력 때문에 연거푸 함정 구덩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함정에 빠진 기병들은 곧 고려군의 불화살에 어육이 되어 죽어갔고 함정 구덩이는 금새 불에 타는 핏물로 가득하게 채워질 뿐이었다.
- 당황한 아골타는 화살을 쏘아 이위동성 안에 있는 여진군에게 성밖으로 나와 고려군을 치라 명했다. 그러나 기마병이 아니었던 이들은 성밖으로 나오자 마자 고려의 기마병들에게 여지없이 짓밟혔다. 간신히 성안으로 다시 도망치려던 자들도 고려군에게 모조리 사로잡혀 그야말로 이위동성은 어처구니없이 고려군에게 떨어졌다.
- 아골타는 눈앞의 광경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윤관이 이끄는 고려군이 자신의 정예 기병들을 거의 섬멸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주변의 장수들은 일단 후퇴를 권했고 노련한 장수였던 그 또한 더 이상 후퇴를 늦출수는 없었다. 결국 이위동성을 고려군에게 어이없이 내준 채 공포에 떠는 여진의 잔군을 이끌고 아골타는 비참한 패전의 길에 올랐다. 급히 도주하면서 아골타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여진족을 통합하면서 처음 경험했던 사상 첫 패배였던 것이다.
- 이위동성 대전투 이후 아골타와 윤관과의 정면승부는 일단 소강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위동성에서 대패한 아골타는 일단 본거지로 돌아오자 자신의 제국을 추스리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윤관 또한 그동안 정복한 여진의 땅을 고려의 영토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다. 어쨌든 이위동성 전투로 인해 여진족들 사이에는 고려군이 그야말로 불가능을 이룬 '신의 군대'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윤관은 발해인들을 앞세워 최대한 여진족들의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
- 결과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만족이었다. 고려군의 위용을 경험한 주변 여진족들은 무더기로 윤관의 군대에게 귀부를 청해왔고 앞서 아골타를 타도할 선봉에 나설 것을 서로 자원했다. 여기에는 아골타의 여진 통합시 반대 세력으로 몰렸던 이들도 있었다. 반면 아골타는 주력이 섬멸당하고 군사력을 재건하려는 측면에서 지지 세력들의 이탈은 그야말로 치명타였다. 그의 제국 자체가 존립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 고려 조정에서는 윤관 대원수의 눈부신 활약에 크게 기뻐했고 신라계의 입지는 더더욱 좁아만 갔다. 예종 스스로가 이제 만주 땅에 대제국을 이루면 옛 고구려의 전례에 따라 황도를 대륙으로 옮기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거란에서도 동쪽에서 발흥하던 여진족의 위세에 크게 긴장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뜻밖에 이러한 위험을 대신 제거해주고 있으니 싫을 이유가 없었다. 거란에서도 고려에 사신을 보내 윤관의 여진정벌을 축하했다. 100년전 고려와 피터지게 싸운 이후 거란은 고려를 동격의 황제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상태라서 고려 또한 거란의 호의에 답했다.
- 이제 사방에 적을 두게 된 아골타로서는 절대 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일단 거란에게 사상 유례가 없는 저자세를 취했다. 이는 고려와 거란의 합동작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를 위해 아골타는 직접 거란의 황제 앞에서 춤까지 추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그에게 지금 당장 급한 것은 거란이 아니라 고려였다. 거란이야 대국의 예를 취하면 그만이었지만 고려는 바로 아골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 그다음 아골타는 윤관에게 사신을 보내 휴전을 제의했다. 그동안 쌍방의 피해가 너무 크니 잠시 서로 전력을 수습한 다음에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자는 것이었다. 고려군의 일부에서는 이 여세를 몰아 아골타를 완전 제거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윤관은 이미 고려군의 보급로가 길어진 것을 염두에 둔 심사숙고 끝에 이러한 아골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당시 양측은 모두 숨을 돌릴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 윤관은 이때를 이용하여 정복지를 고려영토로 바꾸는 작업을 개시했다. 우선 윤관은 사방에 부하 장수들을 보내 국경선을 정하였는데, 특히 서쪽 국경으로 새로 정한 몽라골령을 중요시해 그곳을 앞으로의 거점으로 삼을 대 요새를 쌓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영주성이었다. 이밖에 다른 경계에도 고려의 큰 성들이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우뚝 솟아 여진족에게 새로운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윤관이 새로 개척한 고려의 영토는 대략 지금의 남만주의 중심부를 다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땅이었다. 말하자면 만주는 북쪽의 아골타와 남쪽의 윤관으로 양분된 형국이었던 것이다. 만주 서쪽의 요하를 낀 대평원지대는 아직도 거란의 영토였다.
- 윤관은 15만 대군을 각각 나누어 각 경계의 요새들에 3만씩을 배치하고 자신은 중앙군 6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협조를 약속한 여진족의 별동대까지 조직해 그의 군세는 다시 2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아골타의 입장에서는 일단 윤관의 이러한 군사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일환으로 그는 겉으로는 휴전을 유지하면서도 특공대를 보내 곡물창고 등을 불태우는 등 고려군의 보급품 체계를 아예 파괴하려고 기도했다. 이를 깨달은 윤관은 다시 장수들과 의논한 끝에 다소 무리가 있더라고 아골타의 본거지를 칠 장도에 오르기로 결정했다.
- 북쪽 경계인 길주성을 나선 윤관의 10만 대군의 최종 목표는 이제 아골타의 본 거지에 다름이 아니었다. 이때는 북방의 추위가 매섭게 들이닥치던 때로 아무러한 고려군도 크게 사기가 떨어졌다. 윤관이 자신을 향해 다시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아골타는 비장한 각오로 역시 남하하기 시작했다.
- 아골타의 본거지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여진족의 또다른 요새인 가한성을 정복해야 했는데, 이 성으로 가는 길 자체는 아무러한 고려군이라도 대군을 이동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때 근처의 여진족 추장이 찾아와 근처에 고구려의 황실 후손이 있는데 그가 가한성 함락의 비책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윤관에게 말했다.
- 윤관은 귀가 솔깃했으나 이 추장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는 명장 오연총과 8천의 군사만을 이끌고 그 황실 후손이 살고 있다는 병모가지 길 언저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또한 만에 하나 다른 장수들에게도 하루 간격으로 대군을 이끌고 뒤따라 오라고 명했다. 8천이면 근처의 어떠한 여진족들도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 물론 있었던 것이다.
- 병모가지 길은 매우 좁아 고려군은 일렬 종대로 지나가야 만 했다. 그때 북소리가 울리며 울창한 삼림속에서 여진족들이 벌때처럼 일어나 고려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골타는 고려군의 공격에 대비해 이미 모든 여진족들의 전력을 극비로 숨겨놓았고 고려의 척후병과 밀정들은 이를 미처 간파 못한 것이었다. 병모가지 길을 공격하는 여진족은 무려 5만의 대군이었다.
- 여진족들은 우선 고려군의 앞뒤의 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바위와 나무들을 굴려 퇴로를 막는데 성공했다. 이어 사방에 널려있던 함정을 드러내어 고려군을 빠뜨렸고 거기에서 고려군은 독사들에게 물려 처참하게 죽어갔다. 게다가 여진족들은 호랑이나 곰같은 맹수들에게 불을 붙여 고려군에게 돌진하게 하였고 고려군은 미친 듯이 뛰어드는 야수들에게 또다시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 이어 죽음의 불화살과 독화살의 세례가 이어졌다. 한 번에 쏟아지는 5만개의 화살에 고려군들은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고, 백병전을 하기도 전에 전의를 잃고 내빼는 고려군도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윤관에게 더욱 불행했던 것은 때가 밤이 아니라 낮이라 그를 여진족들이 금새 식별할 수 있던 것이었다. 우선 그는 대장군 무장을 하고 있어 다른 병사들과 금새 차이가 났었고 윤관을 보호하기 위해 병사들이 방패로 진을 형성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 이 같은 죽음의 공격으로 고려군은 적들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채 전멸의 위기에 직면했다. 오연총은 순간 혼란을 틈타 윤관의 깃발을 자신과 바꾸어 윤관이 집중적인 표적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그러자마자 곧 무수한 화살이 오연총을 향했다. 오연총을 보위하던 군사들은 곧 하나둘씩 쓰러져갔고 오연총도 날아드는 화살을 보검으로 막으며 필사의 항전을 펼쳤으나 그만 화살이 그의 왼쪽 눈에 박히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 이제 여진족들은 사방에서 윤관을 호위하는 10여 명 남짓의 군사들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것이 남은 고려군의 전부였다.
(아, 내가 이곳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윤관은 앞이 깜깜했으나 이제 정해진 운명인 이상 부하들과 최후를 함께 할 것을 새삼 굳게 다짐하고 그들을 독려했다. 윤관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이었다.
- 죽음의 계곡 병모가지 오솔길은 순식간에 고려군의 시체로 산을 이루며 피는 냇물을 이루기에 충분했다. 여진족의 살인적 기습에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던 고려군들도 남김없이 사로잡혀 즉석에서 목이 날아갔다. 때문에 절대절명의 순간에 처한 윤관을 도울 고려의 후방군에게 아무도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윤관이 병모 가지 길에 접어들 무렵, 후방에서 뒤따라가던 척준경은 본능적으로 뭔가가 깨림직 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고려군이 여진족 추장말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전장에서 겪은 동물적인 직감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인 낭장 척준신과 함께 윤관의 뒤를 불과 10여명의 특공대와 함께 허겁지겁 달려갔다.
- 아니나 다를까. 그 좁은 오솔길을 여진족들이 새까맣게 뒤덮은채 가운데 방패로 원 진을 만든 불과 10여 명의 고려군을 향해 뒤덮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눈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진 장군도 보였다. 오연총이었다. 그리고 윤관은 방패진의 가운데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맞고 있었다.
- 척준경이 이끌고 온 병사들은 10여 명이었지만 모두 힘이 절륜한 일당백의 장사들이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광경을 보고 척준경은 그냥 있을 수 없어 본능적으로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때 동생 척준신이 그를 잡았다.
"형님, 아무리 대원수가 위급지경에 처했다고 하나 저 여진족의 대군을 우리 10여 명이 무슨 수로 당해냅니까? 그야말로 자살행위입니다."
그러자 척준경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준신아. 대원수께서는 나의 허물을 아무런 조건 없이 덮어주시고 나를 크게 써주신 분이다. 무릇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법. 나의 은인이 눈앞에서 죽어가는데 이를 외면한다면 금수만도 못한 짓일 것이다. 설사 내가 죽더라도 나는 반드시 이렇게 할수밖에 없다. 너라도 여기 남아 고향의 늙은 아버지를 부탁한다. 너희들은 어찌하겠느냐?"
"우린 모두 낭장과 생사를 같이 하겠나이다!"
용사들까지 척준경과 죽음의 골짜기로 들어가기로 맹세하자 척준신은 더이상 형을 만류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남아 형의 죽음을 지켜볼 수도 없었다.
" 그럼 어서 가서 대원수님을 끝까지 지켜드립시다. 저도 형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준신아..."
이렇게 척준경 형제와 용사들은 용감무쌍하게 여진족의 바다로 뛰어들었다.
- 포위망을 좁혀오면서도 여진족들은 각종 화살을 퍼부으며 원형방 패진을 궤멸시키려 했으나 남은 이들도 죽음을 앞두고 악착같이 저항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한두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윤관은 자신 때문에 죽어가는 이들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피눈물을 흘렸다.
(아...나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죄 없는 이들이 이렇게 죽어가다니...)
그때 문득 적의 화살에 비참하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여진족이 바로 눈앞에 오자 장검을 빼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그러자...
"대원수, 저희들이 왔습니다!"
뇌성벽력과 같은 소리에 여진족의 시선은 모두 윤관을 향해 달려오는 척준경에게 돌려졌다. 척준경은 비호와 같이 여진족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여러 명의 목을 베고 윤관으로 향하는 길을 뚫기 시작했다.
- 여진족들은 척준경의 모습을 보고 지원군이 도착한 줄 알고 잠시 뒤로 포위망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척준경은 생각보다도 훨씬 수월하게 윤관의 겉으로 올 수 있었다. 이 와중에 결사대 10명 중 과반수가 목숨을 잃었다. 윤관은 척준경이 도우러 달려오자 잠시 삶을 놓겠다는 생각을 접고 합류한 용사들과 남은 장졸들과 함께 용기백배하여 여진족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진족들이 곧 척준경의 군사 수를 파악하자 다시 포위망을 좁혀오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다시 악화되었다. 윤관은 척준경을 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척낭장, 이것이 마지막인가 보네...자네가 나 때문에..."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곧 구원군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참으시면 됩니다. 설사 그 이전에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하여도 소장은 끝까지 장군을 따를 것이옵니다!"
윤관은 더 이상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 과연 척준경의 용맹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릇 사람이 죽을 위기에 처하면 평소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척준경의 경우는 이것이 더욱 여실했다. 달려드는 여진족들을 천하장사인 그가 보검을 휘두르면 추풍낙엽처럼 목이 날라갔고 나아가 여진족 장수들 몇몇도 쓰러뜨린 그는 빗발같이 쏟아지는 화살들을 신기에 가까운 무술로 다 막아내며 빼앗은 말을 타고 빙빙돌며 원형방패진을 방어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여진족들은 혀를 내두르며 사기가 떨어지며 잠시 주춤하게 된다.
- 이렇게 여진족이 주춤하는 사이, 여진족의 포위망 후방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나더니 일단의 고려군이 불화살을 방패진 주위로 집중 사격하며 여진족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최홍정과 이관진이 이끄는 고려의 구원군이 척준경이 여진족에게 돌진하기 전에 보낸 전령의 급보를 받고 급히 병모가지 길로 달려온 것이었다. 여진족들은 이미 때를 놓쳤음을 통분하게 여기며 포위망을 풀고 아골타의 본 군과 합류하기 위해 다시 북으로 발길을 돌렸다.
-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윤관 일행은 급히 오연총을 치료하며 영주성으로 되돌아왔다. 윤관의 일생에서 가장 치욕적인 대패를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북으로 진군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동요하는 군심을 수습하는데에 주력했다. 한편으로 윤관은 생명의 은인인 척준경과 부자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척준경의 공로가 조정에 알려지며 예종은 척준경을 합문지후에 봉하였다.
- 고려군이 병모가지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진족들은 다시 고려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천하의 아골타가 이 기회를 놓칠리가 없었다. 이미 거란에 복속을 표시해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그로서는 이제 휘하의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윤관이 버티고 있던 영주성으로 향했다. 윤관은 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 휘하 장수들을 보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많은 군사들을 잃고 말았다. 이 같은 사태는 이어 여진족의 이탈을 부추기고 있었다. 끊임없는 악순환이었다.
- 아골타의 20만 대군이 영주성에 다달았다는 소식을 들은 윤관은 급히 영주성을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미 사방이 포위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자신의 편에 있던 여진족의 배신 때문이었다. 아골타는 이위동성의 치욕을 설욕하겠다는 각오로 혀를 깨물며 영주성 함락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윤관만 제거한다면 고려군의 철수가 있을 것임은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영주성을 지키는 고려군은 불과 수천이었고 설사 다른 곳에서 원군이 온다고 해도 아골타의 대군을 당해낼 방도는 없었다. 게다가 다른 요새들 역시 군사를 보낼 여건이 아니기도 했다. 윤관은 또한번 일대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 겹겹이 영주성을 포위한 아골타는 일단 포위된 고려군의 심리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그는 피리에 능한 군졸들을 뽑아 밤낮으로 피리를 불게 해 성안의 고려군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케하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피리소리로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고려군의 사기는 급속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 이제 윤관은 성 밖의 적뿐만 아니라 성안에서 동요하는 장졸들을 추스려야 했다. 그래야만 무슨 계책이라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별다른 뾰족한 수를 내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척준경이 포위망을 뚫고 죽기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영주성의 장군들이 갑론을박하는 동안 그나마 영주성을 구원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급파된 고려군들이 아골타의 여진족에게 궤멸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실제로 아골타는 고려 장수들의 수급을 창끝에 매달아 자신의 승리를 증명하기도 했다.
- 어차피 영주성에서 농성한다 해도 전황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다, 고심끝에 윤관은 아골타에게 명예를 건 도전장을 보내 양쪽의 용사들로 하여금 자웅을 겨루자고 요청했다. 그래서 고려가 지면 윤관이 항복하고 여진족이 지면 아골타가 군사를 물린다는 조건이었다. 윤관의 제안을 받은 아골타는 손해 볼 것이 없다는 계산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만에 하나 여진족이 진다 해도 군사를 물리는 척하다가 방심하는 고려군의 허를 찔러 영주성을 차지할 속셈이었던 것이다. 아골타로서는 절대로 영주성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 아골타가 윤관의 도전장을 순순히 받아들이자 윤관은 이를 의심하면서도 척준경을 필두로 수십명의 용사를 뽑아 성밖으로 내보냈다. 이골타도 여진족 최고의 용사들을 뽑아 고려군의 장사들과 맞서게 했다. 이렇게 해서 북방의 광야의 뜨거운 햇볕이 차가운 대지를 내리쬐는 한낮에 고려와 여진의 색다른 한판 승부가 펼쳐지게 된 것이다.
- 결투방식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양쪽의 용사들이 맞붙어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것이었다. 성안의 고려군과 성 밖의 여진족이 서로 자기편을 응원하는 가운데 죽음의 결투가 무자비하게 펼쳐지기 시작했다.
- 여진족 최고의 거한을 필두로 초반에는 여진족의 용사들이 고려군 용사들 20여 명의 살과 뼈를 분지르며 기세를 제압해 나갔다. 그러자 척준경이 말을 타고 나오며 그의 장검으로 그 거한의 허리를 두동강내었다. 그러자 고려군의 기세가 다시 올라 양측은 사생결단으로 접전을 펼쳤다. 척준경도 여진 용사들의 화살에 팔뚝에 부상을 입었으나 굴하지 않고 비상한 무예로 여진족들을 제압해 나갔다. 여진족들도 무술의 고수가 많았으나 그 누구도 척준경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이윽고 척준경이 홀로 남아 승리자가 되었다. 양측의 용사들 중 그가 유일한 생존자였던 것이다.
- 고려측에서는 영웅을 칭송하는 함성이 터져나왔고 여진족 측에서는 사색이 되고 그 많은 대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골타는 당초의 속셈데로 패배를 인정하고 군사를 물리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일단 군사를 되돌린 다음에 야음을 틈타 다시 기습하여 영주성을 함락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 윤관은 아골타가 순순히 물러나자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여진족들이 용사의 패배로 수근거리는 상황을 이용해 몰래 후퇴하는 여진족들 틈에 자신 편인 여진족들을 투입하여 온갖 괴소문을 내게 하여 여진족의 대군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려 획책했다.
- 이같은 윤관의 계책은 상상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막상 밤이 되자 아골타는 전군을 다시 돌려 영주성을 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많은 여진족이 이탈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란과 고려의 연합군이 영주성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괴소문 때문이었다. 아골타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군사들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미 이 때 윤관은 최소한의 수비군을 남겨놓고 비장한 각오로 영주성을 박차고 나와 아골타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 이러한 절호의 기회를 놓칠 윤관이 아니었다. 그는 밤이라는 조건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북과 징소리로 여진족의 공포심을 조장했고 횃불을 많이 들게 하여 대군인 것처럼 여진족의 눈을 교란시켰다. 게다가 낮에 승리한 역전의 용사 척준경을 앞세워 여진족을 향해 짓쳐나가니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여진족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오합지졸떼들에 다름이 아니었다.
- 아골타는 눈앞의 영주성을 두고 쉽사리 또다시 패주하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고려군의 공격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자신의 최정예군으로 길을 돌아 소수의 병력만이 지키고 있는 영주성을 함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행보는 윤관의 날카로운 눈매에 포착되었고, 윤관은 아골타의 이 같은 움직임을 알면서도 그가 영주성 가까이로 접근하게 놔두었다.
- 이미 여진족 20만의 위세는 온데간데 없었고 아골타가 이끄는 2만 정예군만이 조용히 영주성으로 쳐들어가 공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영주성을 지키던 장군 임언은 윤관의 계책에 따라 자신의 거짓 죽음을 은연중에 여진족에게 퍼뜨리게 하였다. 그러자 용기백배한 여진족들은 아골타를 선봉으로 영주성을 넘는데 성공하였으나 고려군은 비밀리에 쌓아놓은 토산을 2차 방어망으로 삼아 저항하기 시작했다.
- 아골타가 영주성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윤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모든 군사들을 이끌고 영주성으로 들이닥쳐 후방의 여진족들을 궤멸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주성 안의 아골타만이 소수의 병력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자 토산으로 방어하던 고려군까지 공세로 전환해 아골타는 협공을 받으며 전멸 위기에 봉착했다. 숫자는 여진족이 월등하였으나 공성으로 체력을 소진하여 맥없이 궤멸당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 아골타는 사태가 급박해지자 다시 영주성 밖으로 빠져나가려고 시도했으나 이미 역포위되어 이것마저 불가능했다. 여진족들은 성벽과 토산의 토루 등 높은 지대에서 화살을 퍼붓는 고려군에게 도륙당하고 있었다. 급박해진 아골타는 부하의 도움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병졸 복장으로 위장했으나 이미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윤관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윤관의 지시로 순식간에 아골타는 척준경에 의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끌려 나오게 된다.
- 윤관이 여진족의 대왕 아골타를 사로잡았음을 선포하자 나머지 여진족들도 저항의 의지를 잃고 집단투항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윤관은 이번 만주정벌의 최대 성과이자 훗날 금나라의 태조가 되는 영웅 아골타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 아골타를 사로잡은 고려군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제 적의 수괴가 사로잡혔으니 여진족 전체가 고려에 항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 여겼던 것이다. 모두들 이제 개선군으로 고려의 고향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어 있었다.
- 그러나 현실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비록 아골타가 사로잡힌 몸이었으나 아골타는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이미 점조직으로 여진족들이 지속적으로 고려군에 대항할 수 있는 제도적인 준비를 완료해놓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영주성의 패전으로 여진족이 지리멸렬하게 흩어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들은 각자의 여진족 장수들의 통솔하에 다시 집합해 이제 이들 단위로 게릴라식으로 고려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 사실 이미 고려군은 너무나도 여진족의 땅 깊숙이 와 있었고 출병한 지도 이제 어언 반년이 다되가고 있었다. 보급로도 문제였지만 예정보다도 훨씬 오랫동안 여진족의 땅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의 사기도 점차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간헐적인 승전보와 요새의 건축도 어찌할 수 없는 군사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 이런 상황에서 아골타의 포획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이 항복할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은 고려군 전체에게 일종의 절망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는 천하의 명장 윤관조차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윤관은 사로잡은 아골타를 움직여 여진족의 항복을 받아내고자 시도했으나 포로가 된 아골타는 한마디로 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일부 장수들은 아예 아골타의 목을 베어버리자고 하였으나 장차 고려와 여진족의 통합을 생각하고 있던 윤관은 이를 결단코 반대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 여진족들이 계속 고려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기 때문에 윤관은 더 이상 현실에 안주할 수가 없었다. 고심 끝에 윤관은 영주성에 고려군을 총집결시켜 아예 아골타의 본거지인 이르치카의 왕성을 치기로 마음먹었다. 아예 적의 본거지를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더 이상 여진족의 도발을 용납안하기로 한 것이다.
- 이미 12월에 접어든 북방의 겨울은 고려와는 비교도 안되게 매서웠다. 더구나 폭설이 빈번하여 영주성에의 고려군의 집결 또한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여진족이 수시로 이들을 기습해 더욱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만의 고려군은 영주성에 집결하여 전원 기병으로 여진족의 왕성으로 쳐들어갈 군사를 일으켰다.
- 윤관이 총대장이 되어 척준경, 임언, 오연총 등의 장수들을 거느린 고려군은 속도전을 수행하여 순식간에 왕성을 에워쌌다. 이미 아골타가 없는 여진족들은 통일된 행동을 취할 수 없던 것이다. 게다가 더 정확한 이유는 윤관이 이끌고 온 고려군과 함께 아골타가 포로로 같이 종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사실상 길을 열어주면서 고려군을 왕성에 이르게 한 형국이었다.
- 뒤로 송화강을 낀 이르치카의 여진족 왕성은 뜻밖에도 평지에 자리 잡은 평범한 성채였다. 이는 아골타가 이곳을 여진족의 가장 안전한 요새로 생각하여 별다른 방어시설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골타는 고려군이 자신을 이용하여 왕성까지 쉽사리 도달하자 피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여진족들이 자신이 끼어있는 고려군을 함부로 도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윤관은 왕성에 농성하는 여진족들에게 항복을 권고하자 여진족들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흩어져있던 여진족들이 왕성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계속 방치하면 군사적으로도 여진족들이 고려군을 압도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를 간파한 지 오래였던 윤관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아골타의 목숨을 담보삼아 왕성의 성문을 열자고 했으나 윤관은 아골타 같은 영웅을 그런 식으로 욕보인다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반대했다.
- 그러나 왕성 공격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고려군 10만이 모두 기마병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기동력을 노려 왕성을 급습했기 때문에 장기전에 대비한 채비가 미비했다. 때문에 모든 것은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 한번 쓴 병법은 다시는 쓰지 않는 윤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진족 정벌의 대미를 장식할 왕성 공략에는 새로운 방법을 써야만 했다. 겨울철이나 이미 송화강은 얼어붙어 수공도 불가능했다. 그때 윤관은 왕성에 집결한 여진족들이 불과 10일분의 식량밖에 없다는 고급정보를 알아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고려군은 불과 1주일분밖에 없었다. 적이 굶주리기를 기다리다가 오히려 고려군이 먼저 전멸될 판국이었다. 게다가 계속 여진족들은 왕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급보였다.
- 뭐든지 빨리 대책을 강구 해야만 했다. 이러다간 고려군은 꼼짝없이 고립되어 인해전술의 제물이 될 판이었다. 결국 고려군이 기병이라는 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고려군은 왕성의 포위를 풀고 부대를 나누어 왕성 주변으로 다가오는 여진족 부대들을 소탕하기로 했다.
- 워낙 나뉘어 왕성으로 집결하던 여진족들은 고려군의 뜻하지 않은 기습공격을 받고는 형편없이 패퇴하여 지리멸렬해졌고 이를 응용하여 윤관은 이들 패잔병들을 앞세워 부락들을 돌아다니며 왕성 안에 있는 여진족들의 가족들을 모으러 다녔다.
- 이윽고 왕성 포위에 다시 집결한 고려군은 수많은 왕성의 여진족 가족들을 데리고 왔다. 이들은 왕성을 향해 애절한 통곡을 하며 여진족이 항복할 것을 권했다. 전시효과를 높이기 위해 윤관은 사로잡힌 아골타의 입을 봉한 채 왕성의 여진족에게 모습을 나타내도록 했다. 이런 광경들을 목격한 왕성의 여진족들은 순간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왕성 내부에서 커다란 싸움이 일어났다.
- 적들의 자중지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싸움은 한나절 동안 지속되고 성내에서는 불길마저 치솟아 올랐다. 그러더니 성문이 열리고 투항파의 대표가 윤관의 말 앞에 무릎을 끓고 항복을 청했다. 그의 손에는 강경파 여진족 장수의 수급이 쥐어져 있었다.
- 순간 고려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여진족 정벌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제 더 이상의 목표는 없었다. 고려군의 환호 속에 아골타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왕성 함락은 아골타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여진족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왕성의 북문을 통해 일단의 여진족들이 말을 타고 얼어붙은 송화강을 건너 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윤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그들이 장차 또 하나의 화근거리였다. 왜냐하면 이들 무리 속에 있던 것은 아골타에 이은 여진족의 제 2인자였기 때문이다.
- 고려군은 이로써 아골타의 본거지까지 장악하고 사실상 북벌의 목적을 달성했다. 낭보는 고려 조정에 전해지고 고려 또한 황제로부터 백성들까지 춤을 추며 축제의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 왕성을 접수한 윤관은 우선 여진족들을 위무하며 민심을 추스리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이윽고 서기 1108년 1월, 6성을 완성하고 이어 3월에 3성을 더해 9성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아골타의 왕성에 공험진을 설치해 여진족의 영토가 고려제국에 편입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표현으로 윤관은 공험진에 비석을 세우고 국경을 확정했다. 송화강 남쪽의 광활한 만주벌판이 드디어 고려제국의 땅이 된 것이었다.
- 윤관과 수하 장수들, 그리고 고려군들은 몇 일 동안 잔치를 베풀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이제 그들 뇌리에는 당당하게 개선하여 고려의 영웅이 되는 생각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시각, 고려에서는 멸문지화를 입었던 이자의의 종실인 이자겸의 딸이 예종의 황후로 입궐하였다. 서서히 윤관과 북벌의 운수도 절정의 순간에서 어느덧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르치카의 여진족 왕성을 점령한 대원수 윤관은 어느 정도 새로운 영토에 대한 정비가 끝나자 다시 예종에게 표문을 올려 고려군의 개선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 사이 고려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바로 신라계를 등에 업은 이자겸 일파의 득세였다.
- 사실 이자겸은 북벌에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전략적으로 신라계와 제휴한 것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자겸 자신이 북벌을 반대하는 데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 군사 전략상으로 볼 때 고려군이 만주 깊숙이 들어가 고려 땅을 넓힌 것은 제국의 경사임에 틀림없었으나 그만큼 치룬 댓가도 엄청났다. 우선 처음에 출발했던 20만 대군 중 9성을 쌓았을 당시에 남아있던 고려군은 불과 10만에 불과했다. 약 반년 동안 무려 절반이나 북벌에 희생된 것이었다. 게다가 그 희생자들의 상당수는 승려들로 구성된 항마군이었다. 일찌기 숙종 때 거의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승병들이라 이들 항마군의 희생이 컸음은 곧 고려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던 사원 세력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라계와 더불어 자신의 또다른 한 축을 담당했던 사원세력의 이러한 분위기는 이자겸으로 하여금 다분히 반북 벌의 여론을 일으킬 충분한 명분을 주었다.
- 윤관이 북벌에 종군하는 동안 고려의 황제 예종의 입장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새로이 부상하는 한안인을 영수로 하는 관료 세력들이 예종으로 하여금 형제상속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북벌을 지지한 반면 이자겸을 영수로 한 외척 세력은 그 반대였다. 예종은 물론 북벌을 지지했지만 이전 아버지 숙종이 자신을 황제로 세우기 위해 형제들을 척살한 것이 불과 얼마전의 일이었다. 그 또한 훗날 인종이 되는 아들을 다음 황제로 앉히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자겸의 힘이 필요했다. 이자겸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북벌을 재고해야만 했다.
- 거란의 압박도 북벌 포기의 또 다른 변수였다. 거란은 윤관의 고려군이 불과 반 년만에 송화강 이남의 만주벌판을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자 장차 2배로 커진 고려제국과 자웅을 겨뤄야 할 부담감을 얻게 되었다. 거란의 대응책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만약 여진족에게 어느 정도 자치를 허락하지 않으면 백년전의 승부를 다시 짓자고 협박을 해왔다. 이미 고려의 정예군이 윤관 휘하에 있는 고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이러한 여러 가지 변수로 인해 최고 결정권자인 예종의 마음은 괴로웠다. 그는 아버지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 북벌을 단행했고 또 그 꿈을 이루어 이제 고구려와 발해의 옛 영토를 거의 다 회복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실은 자꾸만 그에게 북벌을 포기하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관의 귀환 상소를 받은 예종은 고심 끝에 일단 윤관의 고려군은 정복지에 당분간 계속 주둔해 사태의 추이를 살피라는 결정을 내렸다.
- 황제의 뜻밖의 명령을 받은 윤관 이하 고려군은 어리둥절했다. 이것이 아닌데...그들은 당연히 고려로 개선하여 영웅 대접을 받는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대요, 더 많은 인내심과 기다림을 조국 고려는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목적을 달성한 이상, 이런 황제의 명령은 만주의 고려군의 엄청난 반발을 샀다.
- 그렇다고 계속 주둔해 여진족과의 융합을 도모하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계속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말이 되는가? 북벌군의 내노라하는 장수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그동안 고려조정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켰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이제 고려군의 사기는 급속히 떨어져 점차 오합지졸이 되어갔고 군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새로운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이 같은 사태는 윤관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 장수들의 누적된 불만은 이윽고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병모가지 전투에서 여진족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고 그 휴유증을 아직도 치료하고 있던 애꾸 오연총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맡은 영주성에서 허구헌날 휘하의 여진족들을 마치 짐승노예처럼 부리고 학대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여진족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오연총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와 윤관이 있던 웅주성으로 쫓겨왔다.
- 영주성을 장악한 여진족들은 고려군들을 남김없이 살해해 무려 2만의 고려군이 죽었다. 이 엄청난 참화로 오연총은 윤관의 발 아래 엎드려 죽음을 청하였다. 그러나 윤관은 차마 오랫동안 생사 고락을 같이 해 온 동지를 죽일 수는 없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병모가지 전투는 윤관 자신의 불찰이 컸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오연총이 한눈을 잃은 것도 자신의 책임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윤관은 일단 오연총을 하옥하고 고려 조정에 사태의 전말을 보고했다.
- 영주를 점령한 여진족들은 이제 이판사판 오연총의 일을 널리 소문을 퍼뜨렸고 순식간에 여진족들의 태도도 돌변했다. 밤에 고려군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살해당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이에 고려군들도 분풀이식으로 다짜고짜 여진족들을 보이는 대로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양측의 관계는 이제 돌이킬 길이 없었다. 윤관은 이윽고 8성에서 여진족들을 모두 추방하고 고려군만의 전투 요새로 개조하기에 이르렀다.
- 만주의 정황이 험악하게 변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북벌에서 빼앗은 땅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고 평화를 택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전면에는 신라계와 사원 세력의 지지를 업은 이자겸 일파가 나섰다. 이자겸은 특히 달변이자 두뇌 회전이 빠른 김인존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이 같은 여론을 형성해나갔다. 김인존의 언변은 급속히 고려 조정을 장악해 나가 북벌을 유지하려는 예종의 입지를 급속도로 위축시켜 나갔다.
- 아골타의 잔당은 고려 내부에서 북벌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자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남은 여력을 총동원해 온갖 금은보화와 공물을 고려 조정에 바치면서 만약 9성이 건설된 여진족의 옛 땅을 되돌려준다면 차 후로 영원히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매년 조공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이 같은 여진족의 외교적 총공세는 물론 이자겸 등을 비롯한 유력자들에게 별도의 뇌물을 바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사실 윤관도 오랫동안의 여진 정벌로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도 그럴진데 그 휘하의 장수들과 군사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들은 밤낮으로 여진족들의 파상적 공세에 시달리는 한편, 본국에서도 이제 거의 지원이 오지않는 고립무원의 형세였던 것이다. 자살하는 고려군도 빈번했고 이제 윤관의 명령이 제대로 수행되지도 못할 정도로 군율은 땅에 떨어졌다. 고향에 돌아가기 전에 모두 죽을 것이라는 공포심이 고려군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윤관은 순간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겨우 이것이었다는 말인가? 그 옛날 숙종과 함께 결의했던 북벌의 대망의 말로가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해도 고려는 스스로 그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윤관은 그동안의 수많은 피의 댓가가 너무나도 허무하게 느껴졌다.
- 차라리 남은 군사로 고려로 쳐들어가 저 쓸개 빠진 신라계와 이자겸의 목을 베어 버릴까? 아직도 윤관 휘하에는 수만의 군사가 남아 있었다. 그들에게 고향으로 간다며 회군하면 그들은 용기백배하여 황도의 졸개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었다. 실제로 장수들 일부가 윤관에게 이 같은 주청을 올렸던 바 있다. 그러나 윤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어디까지나 고려의 신하였다. 게다가 고려로 다시 들어가 버리면 그동안 이루었던 북벌의 꿈은 그야말로 완전히 끝나는 위험이 있었다.
- 그렇다면 차라리 아골타와 함께 고려에서 독립하여 새로운 제국을 세울까? 이는 특히 북벌군에 종군했던 발해계 장수들이 강력하게 윤관에게 주청했다. 이들은 이제 자신들은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한심한 고려로 되돌아가지 않겠다고 윤관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했다. 앞으로는 다시는 이 같은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그들 나름대로의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윤관은 따를 수가 없었다. 그는 역시 고려의 신하였던 것이다.
- 이렇게 윤관이 점차 죽어가는 고려군의 기상을 목격하며 고민하는 동안, 북방에서의 무의미한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이윽고 서기 1109년 7월, 고려 황제 예종은 눈물을 머금고 북벌의 영토인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이는 예종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결론이었고 즉시 윤관에게도 전해졌다.
- 9성 반환과 고려군의 총퇴군의 소식이 알려지자 북벌군은 희비가 교차했다. 군사들은 고향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에 젖으면서도 이제까지의 희생이 무의미했음을 허탈해했다. 과연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싸웠는가? 여진족들은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고려군이 주둔하던 9성으로 몰려와 빨리 떠나라고 무력적 시위를 밤낮으로 하기에 이르렀다.
- 과연 고려가 전폭적으로 북벌의 마무리를 지원했다면 천운은 어떻게 되었을까? 윤관은 9성에서 고려군의 총철군을 명하기 전날 밤, 조용히 아직까지도 포로로 있었던 아골타를 불러 대작을 청했다. 아골타가 나타나자 윤관은 무표정하게 술을 권했다.
"여진족의 지도자인 그대의 원래의 지위를 회복해주고 내일 방면하라는 폐하의 조칙이요. 축하하오."
"고맙소."
"이제 그대를 놓아주니 고려는 앞으로 한시도 발을 뻗고 잘 수 없을 것이오."
윤관이 뼈 있는 농담을 던지자 아골타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우리 여진족은 그대의 나라 고려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약조하고 날 풀어주는 것이 아니오?"
"허울뿐인 것을...허허허..." 윤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아골타는 그런 윤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대원수, 정말로 고려로 돌아가 그 소인배들에게 수모를 당할 참이오?"
윤관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나는 고려의 신하요."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와 같이 천하를 경륜할 수 있는 영웅이 이렇게 그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 나로서도 가슴 아프오. 비록 현실적으로 그대의 불행이 나의 행운이지만 나 아골타는 그리 옹졸한 인간이 아니오. 나 또한 그대에게 적지않은 원한이 있는 바이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소. 어떻소? 대원수, 나와 함께 여기남아 고구려의 못다한 꿈을 같이 이루는 것이?"
아골타의 그러한 제안에 윤관은 지그시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 했던가...? 그동안의 온갖 북벌의 영광스러운 순간들이 대원수 윤관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 순간 그는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검을 뽑아들어 아골타의 목줄기에 갖다댔다.
"아골타, 나는 그대를 당장 죽일수도 있소!" 그러나 아골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응수했다.
"알고 있소. 허나 그대는 날 죽일 수가 없소. 왜냐하면 그대는 영웅이기 때문이오!"
그 말을 듣고 윤관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 이 또한 천운인 것을...인간의 힘으로 어이하랴...!"
- 다음 날, 대원수 윤관은 9성의 고려군에게 총퇴각을 명하기 전에 예우를 갖추어 아골타를 마중나온 여진족들에게 인계했다. 헤어지려는 순간, 아골타는 윤관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지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앞으로 우리 여진족들은 그대 고려에게 기왓장 하나도 던지지 않으리다. 특히 윤관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잘 가시오, 고려의 영웅이여...북벌영웅이여!"
- 그 때 하늘에서 구름이 모여들더니 이윽고 천둥과 벼락이 치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윤관은 수많은 여진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저 멀리 지평선으로 사라지는 아골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호랑이를 들판에 풀어주었으니...이제 고려가 그 호랑이에 떨 차례로구나...!"
사라지는 아골타의 모습은 곧 윤관이 평생동안 지녔던 야망의 종지부와 일치했다. 이렇게 두 영웅은 서로 다른 운명의 갈림길을 앞으로 가게 되는 것이었다.
- 서기 1109년 7월의 어느날, 윤관의 북벌군은 드디어 9성을 포기하고 우울한 철군의 장도에 올랐다. 서늘한 북방의 여름은 장마비와 천둥번개까지 퍼부으며 고려군의 발걸음을 무겁게 하였다.
- 웅주성에서 출발한 윤관의 본군은 점차 고려국 경쪽으로 남하하며 다른 성들의 고려군과 합류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적대적인 여진족들이 간헐적인 게릴라식 습격을 가해 고려군을 더욱 당황하게 했다.
- 웅주성을 떠나올 때에 윤관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았던 9성의 혼적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웅주성의 누대에서 몇 개의 빛이 번쩍거렸다. 고려로 귀환하기 거부한 일부 발해계 장수들이 윤관에게 경의를 표하며 장검으로 자살하는 순간이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있던 윤관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남으로의 진군을 독촉했다.
- 자살을 택하지 않은 일부 발해계 장수들은 아예 아골타의 여진족에 투항해 장차 금나라의 주축으로 활약하게 된다. 이후 이들은 금나라가 중국을 도모하는데 막중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금나라는 이후 황후 쪽이 모두 발해계로 자리잡게 된다. 사실상 대금제국을 이끌게 되는 이들은 발해계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여진족과 발해인들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그들은 사실상 같은 종족이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려의 북벌이 좌절되자 고려에 몸담았던 발해계 장수들이 아골타에게 귀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감격한 아골타는 '발해인은 여진과 같은 형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전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발전을 하게 된다.
- 오랜 행군 끝에 윤관의 북벌군은 황도 개경으로 개선했으나 성대한 환영은 없었다. 오히려 군대를 해산한 다음 조정의 대간과 간관들은 윤관 등의 장수들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이는 모두 신라계와 이자겸의 농간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윤관 등의 입장에서는 기가 막혔으나 이미 항변할 힘은 그에게는 더 이상 없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예종은 고심 끝에 영주성에서의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오연총 등을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예종은 곧바로 북벌의 장수들을 비밀리에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위로하고 북벌철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윤관 이하 장수들은 그저 말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 고려조정이 비록 이자겸과 신라계에 의해 장악된 형편이었으나 당시 이자겸의 맞수였던 한안인등의 세력들로 인해 이자겸도 북벌 장수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윤관이 철수한 이후 아골타는 윤관이 북벌 때 썼던 모든 전략과 전술을 참고하여 더욱 강대한 여진족을 형성해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여진족의 자체적 단결도 이전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즉, 여진족들은 윤관의 북벌을 겪으면서 더욱 강대한 세력으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소식을 들은 예종은 북벌철회를 뼈저리게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 비록 아골타가 강화조약의 약속대로 고려에 공물을 바치고 있었으나 예종은 이것이 일시적인 술책이라는 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국방과 국제정세에 어두운 이자겸 일파에게 이런 것들을 의지할 수는 없었다. 예종은 그래서 윤관을 자주 불러 여진족에 대한 자문을 구했으며 윤관은 황제의 부름에 응해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 윤관이 철수한 지 불과 1년이 지난 서기 1110년. 드디어 아골타는 고려에 대한 공납을 끊었다. 이제 고려가 다시 북벌을 해볼테면 해보라는 비아냥이었다. 이미 이자겸이 득세하던 고려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아골타는 만약 고려가 또다시 여진족을 도모한다면 그때는 50만 대군으로 고려를 초토화시켜 버리겠다는 호언장담을 했다. 이같은 여진족 사신의 호언장담에 이자겸 일파는 찍소리도 못했다.
- 그러나 이같은 여진족의 오만은 황제 예종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예종은 한안인파의 도움을 얻어 이자겸파의 외교적 무능을 탓하며 이를 기화로 윤관을 문하시중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여진족을 견제하는 정치적인 제스쳐였을 뿐, 실제적으로 윤관이 다시 북벌을 도모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윤관을 중요직에 다시 앉힘으로써 과거 여진족을 떨게했던 그의 건재를 여진족에게 각인시켜 함부로 망동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 뿐이었다.
- 윤관은 문하시중에 오르자 즉각 직권으로 아골타에게 서신을 보내 부디 옛 약속을 지킬것을 재삼 요청했다. 그러자 아골타도 회신하면서 한번 다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윤관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아골타에게 보이기 싫어 이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아골타는 다시 서한을 보내 고려를 침략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국시로 정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 고려는 여진족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윤관은 이같은 아골타의 서신 내용을 조정에 알리고 신라계와 황제는 안도했다. 윤관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 여진족과의 외교 마찰이 일단락되자 윤관은 황제에게 문하시중을 물러날 것을 청했다. 조정 돌아가는 꼴이 마땅치 않았던 것도 있었으나 그보다도 오랫동안 쌓인 회한이 병이 되어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에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진 윤관의 이러한 요청을 조정에서 거절 할리가 없었다.
- 조정에서 물러난 윤관은 중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두문불출하는 그의 소문을 듣고 전국에서 수많은 지사들이 그를 문병하기 위해 찾아왔으나 윤관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내심 아직도 고려에 희망이 있음을 느끼고는 흐뭇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어느덧 그의 병환은 죽음의 문턱에 이르고 있었다.
- 여진족이 고려 조정에 열심히 아부하고 공물과 뇌물을 보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로잡힌 아골타를 풀어 준데에는 윤관 자신의 결단이 있었다. 마음만 먹었더라면 그때 아골타의 목을 베고 여진족을 다시 혼돈의 세계로 쳐넣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왜 그를 놓아준 것일까? 윤관은 고려가 북벌을 포기한 그 순간부터 이제 고구려를 제대로 부활시킬 역사적 사명은 아골타에게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배달겨레의 영광과 부활을 위해 대승적 측면에서 아골타를 놓아준 것이었다. 이는 아골타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어느새 윤관의 입가에는 가는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의 인생역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서기 1111년의 일이었다.
- 윤관의 죽음 소식이 알려지자 예종은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영웅의 죽음을 슬펴 했고, 수 많은 백성들 또한 이를 통곡했다. 윤관의 죽음을 들은 아골타는 대규모의 조문 사절을 보내 이를 애도했고, 고려 전국의 모든 무장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려의 진정한 영웅의 죽음을 애통해했다.
- 윤관이 죽자 아골타의 행보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서기 1115년 1월 28일 옛 고구려의 부여성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연호를 '수국'(收國), 부여성을 황룡부라 고치고 새로운 제국을 세우니 이것이 금나라였다. 바야흐로 만주를 완전히 통일한 새로운 제국이 발해의 멸망 이후 약 200년 만에 재탄생한 것이었다.
- 새로운 제국을 세운 아골타는 그동안의 거란에의 복속 관계를 청산하며 옛 발해의 원한을 갚는다는 기치 아래 거란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을 선포했다. 동시에 고려에는 군신 관계를 요구했다. 이제 큰형인 금나라가 아우 고려를 챙겨야겠다는 노림수였다. 고려는 아골타의 이러한 제안에 크게 분개했으나 이미 힘이 없던 고려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 아골타의 제국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일취월장하여 제국을 세운 지 10년 뒤인 서기 1125년, 거란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이끄는 120만 대군을 불과 2만의 군사로 격파하는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승을 거두며 거란제국을 멸망시키는 눈부신 전과를 거둔다. 이어 1127년에는 중국의 송나라의 도읍인 변경으로 쳐들어가 송나라의 두 황제를 포로로 하여 지금의 함경도 일대인 오국성으로 끌고 와 연금시키고 송나라마저 무너뜨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이 모든 것이 윤관이 만주에서 물러난 지 20여 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로써 금나라는 중국의 북부를 차지하는 대제국을 이루었고 고려 또한 이 같은 대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관이 일찌기 예언했던 '호랑이'가 적중했던 것이다.
- 돌이켜보면 여진족이 이렇듯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은 직간접적으로 윤관의 영향이 컸다 하겠다. 윤관의 전략과 전술이 당시 여진족을 크게 자극했으며 이어 아골타는 고려의 이러한 군사적 기술을 흡수하여 고려에서 투항한 발해인들을 앞세워 거란과 중국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진족이 대제국을 이룬 것도 어찌보면 윤관의 덕택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즉, 여진족의 거란과 중국정벌은 윤관이 고구려와 발해의 영광을 회복한다는 '북벌'의 연장선상에 서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관은 진정한 '북벌 영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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