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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은둔형 농부로 나서는 걸 성가셔 한다는 '산아래' 이재철 농부와 공부 대신 농부의 길을 선택한 '연꽃' 이은화 농부는 산청과 함양을 오가며 생강, 고추를 키우고 곶감과 감말랭이를 만드는 전업농 5년차다. 연두빛이 초록빛으로 변하는 계절, 도로 옆 작은 다리를 건너 세상과는 조금 떨어진 부부의 아지트 산아래연꽃의 흙살림터 ‘도란들’에 도착했다.
자연농을 지향하며 건강한 땅을 만들고 도란도란 농사짓는 두 농부의 5년은 어땠을까?
산아래연꽃의 흙살림터 ‘도란들’ 로 찾아가 만난 이은화 농부(연꽃, 오른쪽)와 이재철 농부(산아래, 왼쪽)
반갑습니다. 산아래와 연꽃, 농부이름이 정말 예쁩니다.
연꽃) 농부가 되기 전부터 저희는 산아래와 연꽃이었어요. 활동했던 인터넷 카페 닉네임을 결혼하고 나서도 사용하고 있는 거죠. 예전에는 폴더폰에 짧게 이름을 넣을 수 있었잖아요. 제 폰에는 ‘산아래 연꽃’, 남편 폰에는 ‘연꽃피는 산아래’로 되어있었어요. 사람들은 닭살이라고 했지만 우리는 나름 서로에게 의미도 있고, 자기 이름도 지키고 싶어서 찾은 방법이었어요.
농장이름 ‘도란들’에도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산아래)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들녘’이란 의미로 도란들이라 지었어요. 농사도 결국 사람들과의 소통이라고 생각해요. 들판에 모여 앉아서 나물도 캐고 농사 이야기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즐거운 농사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200개 넘는 단어들을 끄적이다 도란들로 낙점하게 된 거죠. 결정하고 혹시 등록된 게 있나 싶어 검색해보니 지명에 들녘이름으로 도란들이 있긴 하더라고요.
두 분의 첫인상과도 정말 잘 어울려요. 산청과 함양을 오가며 농사짓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연꽃) 그동안은 산청의 대원사 땅을 임대하고 여러 군데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어요. 저희가 약을 치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다 보니까 윤작을 기본으로 하는데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더라고요. 또 친환경 인증을 하려면 농지 계약서가 필요한데 농사지을 땅은 빌려주지만 임대계약서는 써줄 수 없다는 곳도 있고, 농사 잘 짓다가 갑자기 쫓겨나기도 하고요. 몇 년 전에 계약서 없이 빌린 땅에 농약 안치고 열심히 농사를 짓다가 갑자기 땅주인이 흙을 공짜로 얻게 되어서 성토작업을 한다고 작물들을 옮기라는 거예요. 5월에 한창 작물이 자라는 시기였는데 마땅히 옮길 곳도 없고 너무 황당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작물 그까짓 거 얼마 한다고 그러느냐’ 했지만 저희에겐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었거든요. 작년 연말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암 투병중에 ‘우리 농사지을 때 너희들이 휴가도 없이 매번 와서 돕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도와줄게’ 하면서 심어주신 감자였거든요. 환자가 애써 심은 걸 그냥 갈아엎겠다는 거예요. 우기고 우겨서 감자밭 조금만 남겨놓고 다 갈아엎었어요. 그런 상황이 되니까 우리 생각대로 농사지으려면 우리 땅이 일부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함양 농장을 마련하게 되었어요.
친환경 인증은 무사히 받았나요?
산아래) 친환경 인증에 필요한 농지 번지수, 필지 지적도를 빌린 땅들은 아직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한편으로 우리가 직거래로도 판매할 수 있는데 굳이 친환경 인증을 받아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서울과 창원에서 생활하다 귀농했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 통해서 알음알음 판매하는 방식이라 친환경 인증이 다급하지 않거든요. 직불금 조금 더 받겠다고 절차상으로 귀찮은 문제들을 감수해야 되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주작물은 몇 가지인가요? 돌려짓기는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도 궁금해요.
산아래) 감은 함양 농장에서 주로 하고, 생강과 고추는 함양 농장과 산청 임대농지를 오가며 심어요. 봄 작물로 산채류를 확장하려고 하고 있죠. 400평씩 땅을 나눠서 작물들을 교체하면서 4~5년 단위로 돌려짓기합니다. 올해 생강을 심었으면 다음 해에 고추 심고 그 다음 해에는 깨 심고, 콩 심고, 양파 심고. 이렇게 한 바퀴 돌면 다시 생강을 심는 거죠. 땅에 미생물과 발효유황을 투입하지만 외부적으로 저희가 수고를 덜면서 화학 농약을 안 쓰려면 윤작을 하는 게 최선인 것 같더라고요.
도로 옆 작은 다리를 건너면 세상과는 조금 떨어진 부부의 아지트 산아래연꽃의 흙살림터 ‘도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전업농 5년차인데 귀농을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산아래) 저는 고향이 하동군 적량면입니다. 삼화실에서 태어나 북천에서 자랐어요. 고등학교는 진주로 갔고, 대학은 서울로 갔죠. 도시에서 생활했지만 부모님이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셨어요. 저희가 5남매인데 형제가 모두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아버지가 만들어 준 지게 지고 나무하러 다녔고, 겨울에는 여름 장마 때 무너진 논둑을 수리하는 아버지를 도와 지게로 돌을 주워 날랐어요. 그렇게 자랐으니까 다른 형제들은 시골에서 사는 걸 싫어했어요. 그런데 저는 어릴 때부터 시골에 살고 싶었어요. 산에서 약초를 키우고 싶은 꿈이 있었고 농사짓고 살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저를 만나면 물어봅니다. “그렇게 시골 들어가서 산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꿈을 이뤘네. 그래 살만하냐?”고. 몸이 힘든 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지금이 정말 마음 편하고 즐거워요.
어릴 때부터 꿈이 시골에서 농사짓는 거였다고요?
산아래) 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했는데 부모님은 자식이 공부를 좀 한다고 하니까 공무원이 되거나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셨죠. 그래서 법대를 갔어요. 내가 가고 싶은 농대를 가겠다고 할 형편이 안 되었거든요. 대학 가서 사법 시험 합격해서 돈 벌어서 시골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공부할 때도 마음은 늘 시골에 가 있었죠. 그러니 절에 들어가 있어도 공부가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벌 받았죠(웃음). 마흔까지 사시 준비하다 그만두고 딱 10년 동안 직장생활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고향인 하동이 아니라 산청을 택했나요?
산아래) 제가 살던 북천은 고령토가 많이 나던 곳이라 나무를 심거나 약초를 재배하기에 땅이 좋지 않았어요. 원래는 함양을 생각했었는데 귀농귀촌에 관해 검색하다가 산청에 먼저 들어와 살고 계신 분들과 인연이 닿아 이쪽으로 들어오게 되었지요.
산아래 농부는 꿈을 찾아 산청으로 왔는데 연꽃 농부는 어떤가요? 귀농에 적극 찬성이었나요?
연꽃) 일본 유학 중에 학회가 있어 한국에 나왔다 남편을 처음 만났어요. 연애하면서 저한테 대뜸 ‘나중에 시골 가서 살 건데 괜찮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인연이 더 깊어지기 전에 일종의 선전 포고였죠.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남원이 고향인 아버지께서 버려진 땅에 텃밭을 만들고 가꾸는 걸 보고 자랐어요. 저도 꽃과 식물을 워낙 좋아하니까 ‘하면 되지, 못할 게 뭐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막에 가서 살든 북극에 가서 살든 결국은 사람이 살고자 하면 살아지더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제가 ‘그래, 일단 해볼까’ 하면서 나아가는 편이라서 ‘한 번 해보고 아니면 말지 뭐’ 하는 마음으로 수락했던 것 같아요.
농부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없었군요.
연꽃) 농사를 지을 거라고 전혀 생각 못 했죠. 계속 공부를 할 생각이어서 결혼할 생각도 못 했거든요. 일본에서 박사과정 끝나면 미국으로 갈까, 어디를 가지? 정도만 생각했었지 이렇게 시골로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연애시절 한 번의 선전 포고가 있었고,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제가 가야할 길이 잘 안 보이더라고요. 한숨 푹푹 쉬고 잠도 잘 못 잤던 시기가 있었어요. 어느 날 남편이 ‘뭘 그렇게 고민하느냐, 나중에 할 거 없으면 내가 호미 한 자루 사줄게’ 하는데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내 안에서 답답했던 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어요. 좌절이 아니라 숨구멍이 생긴 것 같은.
‘그래! 너무 막막하면 호미 들고 밭 일구면 되는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너무 고민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편하게 공부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시골 가겠다고 했을 때 흔쾌히 따라왔죠.
귀농하고 어려움은 없었나요?
연꽃) 저희가 결혼하자마자 부모님이 서울에서 고향 남원으로 귀향 겸 귀농을 하셨어요. 논농사도 80여 마지기 하시고 복숭아, 고추농사도 많이 지으셔서 시간 날 때마다 도우러 남원에 왔다 갔다 했죠. 우리가 도와드린 경력은 꽤 되는데 곁에서 돕는 것과 내 농사를 내가 직접 짓는 건 전혀 다르더라고요.
최대한 자연농을 지향하면서 친환경으로 농사를 지으시는데요,
산아래) 아직 완전한 자연농은 아니고 친환경에서 유기농으로 가는 단계예요. 농사를 짓는데 있어서 장인어른은 관행농에 크게 거부감이 없는데 장모님은 가능하면 화학비료나 화학농약 특히 제초제는 안치고 농사짓기를 원하셨어요. 저도 기본적으로 농약 처리는 많이 꺼리는 편이기 때문에 ‘어떤 작물을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농사를 지을까’ 책도 보고 자연농법 연구회 모임도 하고 근처에 있는 농부들 농사짓는 모습도 보면서 친환경으로 방향을 정했죠. 처음 들어와서부터 일반 농사에는 화약 농약을 쓴 적은 없어요. 병충해는 발효유황과 목초액, 님오일 같은 걸로 예방을 하고요, 미생물로 면역력을 키우지만 완벽히 병을 막기는 어려워서 우리가 필요한 만큼 수확할 때까지 최대한 적게 퍼져나가도록 뒤로 미루면서 버티는 거죠.
농막에서 차 한 잔과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작물이 나온다고 하잖아요. 두 분은 땅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궁금해요. 특별한 비법이나 비결이 있을 것 같은데요.
산아래) 처음에 발효유황, 미생물, 천일염과 퇴비로 기본적인 땅을 만들고요, 농사 시작하기 전 늦가을이나 초봄에 항상 토양 검증 신청을 해요. 토양 검사를 해서 토양 산도나 영양 상태를 체크하고 어떤 퇴비를 얼마나 넣을 건지, 발효유황을 얼마나 넣을지 아니면 넣지 말아야 할지 조정을 하죠. 해마다 바로바로는 조정이 안 되기 때문에 땅을 꾸준히 만들어가는데, 땅이 안 좋으면 아예 심지를 못하죠. 토양 상태에 따라서 식물들의 성분이나 맛은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납니다.
연꽃) 해마다 토양검사를 하는데 저희가 발효유황을 쓰잖아요. 유황을 많이 쓰면 아무래도 땅이 산성화되거든요. 전년도 토양검사서와 비교해서 올해 산도가 높아졌으면 유황을 줄이고 미생물을 좀 더 넣는 식으로 조절해요. 저희는 해마다 같은 농법으로 농사를 짓지만 땅에 따라서 생강 맛이 달라지기도 하고, 날씨에 따라서 생강 맛이 또 달라져요. 저희 고객들 중에 미각이 아주 뛰어난 분들이 있어요. 그 분들에게 매년 평가를 부탁해서 생강 맛이 어떤지 서로 소통하고 있어요.
산아래) 작물을 키울 때는 발효된 퇴비를 물에 우려서 퇴비차를 만들어서 천일염, 필요에 따라서 목초액을 넣고 꼭 필요할 땐 키토산, 천연 칼슘, 칼륨 같은 특정비료성분도 넣어서 엽면시비*를 한 번씩 해줍니다. 천연 재료 제품을 찾아서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엽면시비에 특정비료성분을 넣는다는 점에서 보면 저희가 화학 비료 자체를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할 수 있어요.
* 엽면시비 : 비료나 농약을 물에 타서 식물의 잎에 뿌려 양분이나 약액을 흡수하게 하는 일. |
이렇게 모두 공개하셔도 되나요?
연꽃) 괜찮아요. 저희도 교육받아서 배운 거고 또 유튜브 찾아보면서 우리 방식으로 해 보는 거니까요.
농사규모로는 생강과 고추의 비중이 큰 것 같은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산아래) 약초를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고, 밭농사를 짓더라도 약성을 충분히 갖추고 사람들이 음식이나 음료에 재료로 많이 이용하는 작물을 재배하고 싶었거든요. 산에서 도라지, 더덕, 마, 복분자, 오미자 같은 것들을 키워보려고 했는데 산을 못 구했으니까 밭에서 할 수 있는 작물을 고민했죠. 마침 같이 공부하던 분들 중에 생강 농사짓는 분이 있었어요. ‘아 이거 괜찮겠다’ 싶어서 생강농사를 시작했어요. 첫해는 완전히 망쳤어요. 다랭이논 같이 생긴 야산의 묵정밭을 빌려서 처음으로 생강을 심어봤는데 하필이면 그 해 가뭄이 너무 심했거든요. 첫해에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고 다음 해부터는 평지로 내려와서 농사를 짓게 되었어요.
생강농사는 몇 월부터 시작인가요? 농사과정도 얘기해주세요.
산아래) 4월 하순부터 5월 상순까지 생강을 심어요. 그 위에 왕겨나 짚을 깔아줘요. 왕겨를 4cm 정도 두께로 깔아서 풀을 막아주죠. 생강의 최적 생육 기온이 25도거든요. 최저 기온이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냉해 피해를 입기 때문에 언제 심느냐가 가장 고민되는 부분이죠. 6월 되면 싹이 올라와요. 여름에 차광막을 씌워놓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물 관리죠.
그 다음은 풀과의 전쟁이구요. 중간에 두 번 정도 추비를 해주고 복토 작업을 해줍니다. 가을이 되면 수확을 하는데 저희들은 생강이 자체의 맛을 충분히 머금을 수 있도록 최대한 수확을 늦추는 편이예요. 생강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살이 차오르더라고요. 그전에는 생장만 해요. 그래서 10월 말부터 11월에 수확을 하죠.
연꽃) 대가 시들어지면 생강이 뿌리에 영양소를 가득 채우잖아요. 저희는 생강이 광합성을 충분히 하다가 스스로 생장을 정지하고 뿌리에 최대한 영양분을 저장하고 맛을 가둘 때 캐는 게 맞다 싶어서 생강대가 시들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기다렸다가 수확해요.
생강은 병충해 피해가 많은가요?
산아래) 벌레는 잡으면 되는데 바이러스가 문제예요. 생강대가 노랗게 말라가다가 잘 자라던 생강까지 썩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고추의 역병처럼 한번 생기면 삽시간에 밭이 초토화되고 말죠.
연꽃) 사람도 면역력이 강해지면 웬만한 건 이길 수 있잖아요. 그러다보니까 건강한 땅 만들기에 더 신경을 쓰고 정성을 쏟는 것 같아요. 얘네들이 버텨줘야 되니까요.
혹시 생강농사지으면서 보조금이나 행정적인 지원을 받은 적이 있나요?
산아래) 올해 처음으로 산청군에서 보조를 받았어요. ‘전략약초특화단지조성사업 및 한방약초안정생산지원사업’에 생강 종목이 추가되면서 생강 종강 구입비, 관수시설, 피복작업 및 차광막 설치에 필요한 자재비 보조금을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관심받지 못하다가 이런 기회가 오니 얼마나 반갑던지요(웃음).
연꽃) 차광시설은 올해 저희도 처음 시도해 보는 건데 생강 자체가 원래 반음지 식물이라서 햇빛이 강렬한 여름철에는 차광막을 설치해주는 게 생육에도 좋아요. 아주 뜨거운 계절은 덮어주고 해가 짧아지는 시기가 오면 다시 걷어주는 거죠.
농작물 아스파라거스를 보여주는 이은화(연꽃) 농부
농사는 두 분이 같이 짓는 거죠? 농사에서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나요?
산아래) 둘이서 같이 하는 거죠.
연꽃) 교육은 제가 좀 많이 받으러 다녀요. 힘쓰는 일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남편이 주로 해야 하니 교육은 아무래도 제가 받게 되는 것 같아요. 함양이나 산청에서 유기농 교육이 있으면 제가 가서 받고 유튜브를 보고 보완해서 남편에게 정보도 전달하고 같이 상의를 하죠.
산아래) 처음 3년 동안은 웬만한 교육은 다 신청해서 둘이 같이 다녔어요. 견학도 다니고요. 그런데 해마다 교육 프로그램이 비슷해서 농사일 놔두고 계속 교육을 듣는 게 별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농업 행정적인 측면에서 함양과 산청 두 지역이 차이가 좀 있어요. 함양은 농업기술센터에서 유기농 교육을 오래전부터 해서 기반이 갖춰진 농부들도 많고, 농업인들이 필요에 의해 요구하는 부분도 있어서 민원 해결 차원에서도 교육을 많이 여는 편이에요.
제가 교육받을 당시를 개인적으로 평가하자면 산청은 아직까지는 기반이 좀 부족하고 교육프로그램 심화에도 다소 소극적인 것 같아요. 예를 들자면 함양은 유기농 교육을 하게 되면 이 범주 내에서 40시간 정도 집중적으로 교육을 실시해요. 산청도 해마다 귀농·귀촌자 기본교육, 심화교육을 하는데 심화교육 단계에서도 하나의 주제에 최대 4시간 정도만 할당이 되더라고요. 4시간은 교수님이 오셔도 기본을 이야기하기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그 정도로는 특정 농법이나 작물재배에 대한 심화학습이 안 된다는 것이 3년 동안 계속 교육을 받으면서 가졌던 제 개인적 불만 사항이었죠.
교육의 부족한 부분이나 갈증을 공부모임으로 해결하신다고요, 산청에서 생강 농사지으면서 같이 공부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산아래) 막상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관공서의 지원이 쉽지 않다 보니까 우리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되겠다 싶어서 산청군 농민회 산하에 자연농법연구회, 적정기술모임 같은 소모임을 농부들이 만들었고 그 분들 중에 생강농사 짓는 분들과 같이 고민하고 서로 정보를 나누게 되었어요.
연꽃) 생강 농사짓는 분들하고 같이 교육도 받으러 다니고 겨울에 책을 놓고 스터디도 하고 생강 발효액을 만들어서 맛을 비교해 보기도 하지요. 어떤 건 매운맛만 너무 강해서 목 넘김이 힘들고 어떤 건 매운 맛은 덜하긴 하지만 맛이 풍부한 것 같은데 장단점이 뭘까? 어떤 부분에서 이런 차이가 만들어지는가? 서로 상의하면서 농사 방법을 보완해 나가는 거죠. 같이 농사짓는 동지가 있다는 건 서로 피드백을 해줄 수 있어서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생강은 주로 어떻게 판매하나요?
연꽃) 주변에서는 약 안치고 농사짓는 걸 가만히 지켜보셨다가 생강 캘 때 밭에 직접 오셔서 생강 달라고 하는 분도 계시고 미리 예약을 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하지만 생강 자체를 파는 건 얼마 안 돼요. 저희는 기본적으로 생강발효액을 만들어서 팔아요. 해보니까 1차 생산만으로는 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산아래) 저희가 농사를 지으면서 생각했던 게 소규모 판매 네트워크를 형성을 해야겠다는 거였어요. 우리가 생산하는 농산물을 해마다 소비하는 분들이 있으면 우리도 이익을 얻고 그 분들도 농산물만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 정도 규모의 판매 네트워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죠. 대량 판매를 할 생각도 없고 농사 규모도 두 사람이 짓는 거 이상으로 확장할 생각도 없고요. 농산물 판매로 6천만 원 정도 매출이 나오면 2천만 원 정도가 비용으로 나가고 나머지 4천만 원으로 시골생활하는데 크게 문제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아직은 절반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과수 중심의 농장이 아니라 소량 다품종으로 한 해 매출 6천만 원을 올리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산아래) 쉽지는 않아요. 지금 제대로 매출이 나오는 작물이 곶감, 감말랭이, 고추, 생강인데 작년에는 목표에 절반을 조금 넘겼던 것 같아요. 나머지는 제가 아르바이트를 했죠. 아직은 그만큼 안 나오지만 저는 생강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꽃) 저희가 직거래를 선호하는 건 저희 스토리를 알고 저희를 신뢰하는 분들에게 안전한 농산물을 보내드리고 싶어서예요. 지금은 생강발효액 한 병을 1만 3천 원에 팔아요. 우리가 어떻게 가격을 제시하느냐에 따라 만 5천 원이 될 수도 있고 만 8천 원이 될 수도 있는데 저희는 먹는 사람이 부담스러워도 안 되고 농부가 밑져도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가격을 조금 낮추는 대신 꾸준히 찾아주는 고객을 만드는 게 더 낫잖아요. 그래서 가격을 정할 때도 우리가 고객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요. 생강발효액은 겨울에 잠깐 먹는 건데 사 가시는 분들이 주변 분들과 나눠 먹고 계속 사 먹으려면 얼마가 적정한지를 고민하고 가격을 정하는 거죠.
도란들에서 생산하는 생강발효액
혹시 생강발효액 제조과정도 공개 가능한가요?
산아래) 저희가 생강을 캐서 발효액을 만드는 곳에 가져가면 깨끗이 세척해서 파쇄하고 착즙해서 전분질과 찌꺼기를 가라앉히고 맑은 윗물만 따라내요. 거기다 유기농 원당을 배합해서 60도에서 65도 상태에서 발효를 시켜요. 이렇게 하면 즙을 끓이는 것보다 생강의 맛이 훨씬 더 풍부해요. 끓이지 않으니까 영양 손실도 최소화되고요. 오랜 시간 끓이면 농도가 걸쭉해지는데 이건 발효만 시킨 거라서 농도가 묽어요. 그래서 좀 헤퍼요(웃음).
연꽃) 사실 발효액 가격의 3분의 2 정도가 제조원가예요. 그렇게 해서 유지가 되겠냐고 걱정을 하시는데 이건 기호식품이니까 우리가 가격을 더 올려버리면 소비자들은 ‘그럼 다른 거 먹지’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화학 비료, 화학 농약 안 쓰는 걸 알아주는 분들과의 소규모 네트워크가 저희에겐 더 필요해요.
생강을 수확하고 나서 그 땅에 다른 작물을 심기 위한 특별한 작업을 하나요?
산아래) 작년에 생강 고랑이었던 밭에 올해는 고추를 심어요. 생강밭은 이랑 폭이 넓은 편인데 고추도 이랑 폭이 넓거든요. 통풍 때문에 약을 안치려다 보니까 밀식하면 병이 많이 와서 폭을 넓게 하는데 생강도 폭이 넓어서 그대로 활용해서 하려고요. 가능하면 무경운으로 하고 싶은데 아직 무경운까지는 못가고 고랑에 퇴비 뿌리고 나서 두둑의 흙을 고랑으로 넘겨 두둑과 고랑의 위치를 바꿉니다.
자연스럽게 고추농사로 이야기가 이어지네요. 고추가 병도 많고 수확하고 말리는 과정도 과정까지도 고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산아래) 고추도 기본적으로는 같은 방식으로 농사를 지어요. 퇴비와 미생물을 쓰고 거기에 발효액을 뿌려서 기본토양을 만든 다음에 고추를 심어요. 관리에 가장 좋은 건 재식 거리를 넓히는 거예요. 고추는 열이 올라갈 때와 장마철에 병이 많이 오는데 땅에 풀이 하나도 없이 너무 매끈하면 오히려 병충해가 더 올 수 있어요. 차라리 풀이 무성한 게 도움이 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한여름에 생육 온도가 30도 이상 되면 고추가 제대로 성장을 안 하거든요. 오히려 풀이 그 열을 좀 식혀주는 역할을 해요. 그래서 지금까지는 고랑의 풀을 어느 정도 키웠다가 깎아줬어요. 방제는 예전에는 발효유황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유기농제재가 잘 나와요. 거기에 소금, 목초액, 필요한 미량 원소를 조금 타는 식이죠. 그렇게 하면서 최대한 병을 늦추는 거예요.
‘전략은 병을 늦춘다’군요.
산아래) 고추는 완전히 병을 없애지 못하겠더라고요. 제일 심각한 게 탄저병인데 얼마나 빨리 오느냐, 늦게 오느냐에 따라 수확량에서 차이가 많이 나죠. 저희 농사방식으로는 생산량이 관행으로 하는 고추농사의 60% 정도 될 것 같아요.
고추도 가루로만 판매하죠?
연꽃) 네. 저희는 7월부터 고추를 따는데 첫물, 두물, 세물로 따서 말린 시기에 따라 번호를 써 놔요. 요즘은 날씨가 너무 변덕스러워서 태양초로 말리기 힘들어요. 예전에 비해서 과피도 두꺼워졌구요. 태양초하던 고추가 아니에요. 과피가 두꺼우니까 무게는 많이 나가는데 빨리 말리지 않으면 겉은 멀쩡해도 안에서 곰팡이가 생기더라고요.
예전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태양초를 고집했어요. 일기가 불규칙하다보니 고추를 트럭에 싣고 다녔어요. 말리느라고. 한번은 고추를 마당에 널어놨는데 저희가 밭에 간 사이에 비를 흠뻑 맞은 거예요. 누가 걷어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싣고 다니면서 밭 넓은 데 펼쳐놓고 말리기도 했지요.
두 해 고추농사를 지으면서 말린 고추를 하나하나 다 갈랐어요. 확인하느라고. 안에 곰팡이 핀 부분을 확인하고 일일이 분류하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건조방법을 바꿨어요. 대신 건조 온도를 최대한 낮췄죠. 처음에 42도에서 12시간을 돌리고 그다음에는 38도에서 장시간 건조를 했죠. 남들은 이틀 건조하면 끝인데 저희는 4일 정도 건조해야 돼요. 이렇게 하면 고추가 건조됐을 때 예쁘진 않아요. 온도가 올라가면 고추 안에 열이 차면서 풍선 부풀듯이 빵빵해져서 매끈해지는데 우리 고추는 약간 쪼글쪼글하게 말라요. 대신에 영양소 파괴가 줄고 김치를 담갔을 때 색깔도 예쁘고 끝까지 변하지도 않아요. 주부들이 태양초를 찾는 이유는 김치색깔과 맛 때문이거든요. 요즘은 농업기술센터에서 건조 온도에 관한 정보 보급을 많이 하는데 저희가 생각했을 때는 그것도 조금 높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온도를 좀 더 낮춰서 말리죠. 저희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적정 온도를 찾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산아래) 넘버링한 고추를 순서대로 보관했다가 추석 전에 한꺼번에 다 섞어요. 고추는 뒤로 갈수록 씨가 많아지고 두물, 세물에 딴 고추가 제일 좋거든요. 우리는 고춧가루만 팔기 때문에 한꺼번에 섞어서 빻아 배송해요. 첫물, 두물, 세물의 맛이 다르고 씨 양도 달라지니까. 그런데 고춧가루를 사는 사람은 언제 사든지 맛이 같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다 섞는 거죠. 고추 과피와 씨앗을 같이 빻으면 고춧가루가 좀 거칠거든요. 씨앗을 먼저 잘 빻은 다음에 과피를 넣어 다시 빻으면 색깔도, 분말 상태도 곱고 예쁘게 나와요. 우리만의 가공시설이 없다보니 원하는 대로 해주는 곳을 찾아다니죠. 심지어 남원까지 찾아가서 빻기도 했어요.
연꽃) 저희는 고추도 청양고추, 매운 것, 안 매운 것으로 세 가지 이상을 심어요. 그렇게 하면 맛이 더 부드러워지고 풍미가 있으니까 블랜딩해서 빻는 거죠. 매운 걸로 달라고 하는 분들은 청양고춧가루를 더 넣어주는 식으로요. 우리가 조금 번거롭고 힘들어도 소비자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거든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것도 소규모 네트워크의 멤버십이라 가능한 거네요. 고객들과 소통이 정말 중요하겠군요.
연꽃) 네. 운영하는 비공개 밴드에 농사 일지처럼 우리 이야기를 올려요. 소비자들도 알 권리가 있잖아요. 농사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아니까 생강과 고추를 수확한다고 하면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해요. 미리 입금부터 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여러분이 드시는 생강이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생산되고 있다, 고추는 어느 방앗간에 빻는다’고 중간 중간 보고를 하는 거죠. 그렇게 하니까 저희를 믿고 또 연결해 주시고요.
산아래연꽃의 흙살림터 ‘도란들’ 로 찾아가 만난 이은화 농부(연꽃)와 이재철 농부(산아래)
이제 산청에서 함양으로 넘어와서 감이야기를 해볼까요?
산아래) 덕산에 살면 감과 연관이 없을 수가 없어요(웃음). 저희도 처음에는 감말랭이만 조금 하려고 했어요. 곶감보다는 말랭이가 상당히 매력적이더라고요. 젊은 사람들 입맛에도 맞고. 저희가 이사한 집이 마당에는 저온 창고와 작업장이 있고 2층에는 곶감막이 있는 20년 넘은 농가주택이라 있는 시설을 이용해서 곶감을 조금씩 하는 건 문제가 없었어요. 반 동(5,000개)으로 시작해서 다음 해에 한 동(10,000개) 해보고 이렇게 조금씩 늘렸죠. 처음에는 감이 별로 없었으니까 빌린 땅에 있던 감도 따고 지인이 키운 감을 구입해서 곶감을 만들었어요. 감나무가 심어져 있던 함양농장을 사고 함양 고종시는 저희들이 일부만 쓰고 함양 지역 분들에게 팔아요. 저희는 주로 산청 고종시로 말랭이랑 곶감을 만듭니다.
감은 불가피하게 농약을 칩니다. 감 농사짓는 분들이 보통 5~6번 친다는데 저희는 세 번 정도 쳐요. 2월에 잎이 트기 전에 석회 유황합제 살포하는 것까지 하면 네 번이 되겠네요. 감은 5월 중순 지나면 꽃이 피고 5월 말쯤에 꽃이 떨어지는데 6월 달에 두 번을 쳐요. 낙엽병 때문에. 낙엽병은 방법이 없어요. 잎이 떨어지면 나무가 몇 년에 걸쳐 쇠퇴하다가 결국 죽어버려요. 감도 안 달리고. 어떻게 방법이 없더라고요. 저희들이 손실을 조금 감수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라 정말 다 떨어져버리거든요. 그리고 7월 중순이나 8월 중순에 노린재 방제 때문에 한 번 더 칩니다. 나머지는 하늘에 맡겨야죠.
연꽃) 감도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분들이 계실 텐데 저희는 아직 실력이 부족해서 거기까지는 안 되더라고요. 대봉감은 계속 발효유황과 목초액만 쳤더니 80% 이상 떨어져서 남아 있는 것만 저희들이 먹었어요(웃음).
산에서 반 야생으로 약초농사를 짓고 싶어 산청으로 귀농했지만 아직 꿈을 이루지는 못했는데요, 언제쯤 이루어질까요?
산아래) 산청으로 들어와서 5년 정도 농사를 짓다 보니 행정적인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 조금씩 쌓였어요. 이렇게 얘기하는 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산청군의 모토가 ‘약초의 고장 산청’인데 군에서도 노력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아직 내세울 약초들이 없는 것 같아요. 동의보감촌도 있고 외부 사람들이 오면 팔 약초가 있어야 하는데 내놓을 만한 게 별로 없는 거죠.
저는 산에서 약초재배를 하고 싶어서 산청에 들어왔으니까 군에서 관리하는 산들 중에서 약초재배용으로 빌려주는 게 나오면 이야기 해달라고 군청에 여러 번 부탁을 했는데 결국 안 되더라고요. 군유지를 개인에게 빌려주고 회수하는 과정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가 봐요. 최근에는 군유지는 군에서 직접 관리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임대조건이나 회수절차에 명확한 기준을 잡아서 잘 관리하면 저 같은 사람들이 기회를 얻어서 약초를 키울 수 있을 텐데 약초의 고장 산청에서 약초 농사를 지어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안주는 건 굉장히 아쉽죠.
개인적 생각을 하나 더 말하자면 우리나라 농업정책이 농부들의 소규모 농사모임을 위한 행정적 지원이 너무 부족해요. 거의 없거나 지원조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요. 저는 앞으로 소규모 농사모임들이 농사의 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특히 산청은 약초의 고장이라는 특성상 대표 약초 육성과 함께 소규모의 질 좋고 다양한 약초 생산이 뒷받침되어야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양한 약초를 키우는 소규모 농사 모임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된다고 봐요.
연꽃) 생강농가입장에서 제일 필요한 건 종강을 보관하는 시설인데 산청에는 자체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요. 서산이나 태안, 완주처럼 생강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은 자체적으로 생강을 보관하는 시설이 있거든요. 산청은 생강농가는 늘어났는데 보관시설이 없어서 결국은 종강을 계속 사와요. 저희가 친환경적 농법으로 생강 농사를 짓는 농부로서 우리 생강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생강을 보관하는 건 얼어버리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포기해버리는 거죠. 지금은 산청에 생강농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지만 앞으로 좀 개선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농사지으면서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나요?
산아래) 곶감은 유황훈증을 하지 않고 ‘자연건조’합니다. 그래서 곶감 색깔이 일률적이지 않아요. 유황훈증이나 주정 살포 없이 자연건조하기 때문에 곶감을 거는 간격도 넓히죠. 건조과정에서 통풍이 잘 안되면 곰팡이가 쉽게 필 수 있거든요. 많이 말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말리는 게 중요하죠. 농산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든가 판매하는 방식이 모두 우리의 농사법(농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인식)과 연결되어 있어요.
연꽃) 생강발효액도 어쩔 수 없이 액체라서 플라스틱 용기에 담고 혹시나 배송 중에 흐를까봐 OPP필름으로 마무리 포장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쓰레기를 최대한 줄여보자는 생각으로 스티커는 사용하지 않고 분리 배출이 쉽도록 포장을 최소화하려고 애쓰고 있어요. 발효액 용기는 다른 용도로 재사용하기도 하고 안쪽을 헹궈 행택만 제거하면 바로 분리 배출할 수 있거든요. OPP필름도 비닐류로 분리배출하면 되고요. 곶감도 상자포장을 하지 않아요. 페트 재질 도시락 용기에 곶감을 세워서 담고 라벨은 작은 테이프로 살짝 고정만 하는 정도예요. 상자포장이 받을 때는 있어 보이는데 냉동실로 넣으려면 부피가 있어서 도착하자마자 버려지게 되는 게 너무 아까웠어요, 버려지는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고 소비자 입장에서 분리 배출이 편한 방법을 고민하다 나온 궁여지책의 포장 방법이라서 좀 더 나은 방법을 계속 찾아보고 있는 중이에요.
제조 방식과 포장재를 고민해가며 만드는 곶감과 생강발효액 (사진출처: 이은화, 이재철농부가 운영하는 밴드 ‘도란들’)
소비자에게 전해지고 난 이후의 처리과정까지 엄청나게 고민하고 실험하시는군요.
연꽃) 농산물은 생산부터 저희 생각을 담는 거니까요. 그렇게 신뢰를 쌓아가는 거잖아요. 실제로 포장이 마음에 들어서 재구매 한다며 연락하는 분도 가끔 계세요.
마지막으로 연꽃농부는 공부대신 농사를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나요?
연꽃) 저는 항상 호기심 가득해요. 불교 미술사를 전공해서 한·중·일 비교 연구를 하느라고 일본에 가 있었거든요. 문화재를 좋아해서 문화재 공부를 했었는데 박사 과정을 하면서 아이는 남원에 있고 남편은 공부한다고 산에 가 있는 거예요. 인천공항 도착하면 남편 먼저 만나고 남편이랑 남원으로 이동해서 아이를 만났어요. 잠시 같이 지내다가 제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또 뿔뿔이 흩어져요. 어느 날 방학이 되어 아이를 만나러 갔는데 아이가 할머니 손에서 자라다 보니 엄마를 모르는 거예요. 할머니 뒤에 숨어서는 ‘저 아줌마가 왜 나한테 아는 척을 하지?’ 이런 표정을 짓다가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울더라고요. 애가 자기 엄마도 못 알아보는 이 상황에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나 싶어 속이 많이 상했어요. 친정엄마는 종일 아이를 업고 농사를 짓다가 척추 협착증으로 고생 중이셨고요. ‘이거 뭐지? 내가 지금 나 살겠다고 엄마 건강 망치고 우리 애 망치는 건가’ 싶은 거예요.
둘째 아이가 생겨서 더 이상 친정엄마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박사 과정 수료(일본에서는 ‘단위 취득 후 자퇴’로 표시)만 하고 공부를 접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전업주부로 살기 시작했어요. 내 가족이 먼저잖아요. 아이들도 성장해서 언젠가는 부모 곁을 떠날 텐데 어릴 때 시골에서 자라는 것도 좋겠다 싶어 귀농을 구체화시키기 시작했지요. 제가 먼저 아이들 데리고 산청으로 들어왔고 남편은 3년 뒤에 들어와 드디어 산아래 농부, 연꽃 농부가 된 거죠.
산청에 와서 주변에서 필요로 할 때 아이들 대상으로 박물관 수업도 하고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저는 어떤 일 보다도 농사 일이 먼저인 농부입니다. 가끔 농사짓는 게 힘든데 괜히 시작했다 후회되진 않느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사람이 어떻게 한 가지 길로만 가겠나. 내가 가진 걸 필요로 하는 곳이 있으면 조금씩 나누며 살면 되지’ 하고 생각하니까 후회는 없어요.
산아래 농부도 같은 마음이겠지요?
산아래) 시골에서 돈을 벌 생각이면 안 들어오는 게 훨씬 낫죠. 저는 농사짓는 게 좋고 시골에 사는 지금이 마음 편해요.
산아래 농부는 꿈을 반쯤 이루었고 연꽃 농부는 새로운 꿈을 찾았다.
연꽃 농부는 ‘겁먹지 말고, 미루지 말고 새로운 인연이 닿을 수 있으니 한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산아래 농부는 5년 동안 농사지으며 쌓인 것도 있고 할 말도 있었지만 ‘그 날의 기분’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우리는 꽤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나눴다.
빗소리가 들리는 농막은 낭만적이었고, 생산에서 가공, 포장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는 두 농부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런 진심이라면 뭐라도 이루어질 것 같다. 누구라도 두 농부를 만나면 ‘기어코 응원하고야 말테다’가 될 것이다. 두 농부의 진심이 그토록 원하는 산에도 전해지면 좋겠다.
글 이경원
기획, 기록, 연결로 변화를 만드는 일과 사람을 돕는다. 2014년 ‘시골에서 농사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궁금해서 찾았던 지리산시골살이학교 덕분에 지리산이음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는 몰랐다. 7년이 지난 2021년 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을 다니며 ‘농사를 업으로 하는 농부’들의 이야기를 글로 전하게 될 줄은.
사진/진행 이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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