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굴곡이 아로새겨진 인생
백 승 대 명예교수(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흔히 사람은 때를 잘 타고 태어나야 한다고 한다. 때를 잘 타고 태어나는 게 보통은 사주(四柱= 生年月日時)를 잘 타고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사주팔자가 좋으면 복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하고 사주를 중시여기는 태도는 주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사주팔자를 별로 믿지 않는 나 같은 사람이야 그저 심심풀이 삼아 사주팔자를 볼 따름이지 거기에 매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때를 잘 타고 태어나야 하는 것은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 태어나느냐에 따라 개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니 말이다.
인공지능(AI)이 등장할 정도로 기술문명의 진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지만 인간 세상의 야만적인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 시각에도 중동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자지구를 지배하는 팔레스타인 하마스 집단이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일어난 전쟁은 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축제 행사에 들이닥쳐 많은 사람들을 총으로 쏴죽이거나 그들을 인질로 납치한 하마스 집단이나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가자지구에 포격과 폭격을 쏟아 붓는 이스라엘 정부나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스라엘에 살고 있거나 가자 지구에 살고 있다면 전쟁을 피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그 곳에서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전전긍긍하면서 목숨을 이어갈 따름이다.
인간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온전하게 제 명을 다 살지 못했고 역사적 고난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폭풍의 소용돌이 같은 여러 굴곡으로 채워져 있다. 19세기 말부터 근 100년 동안 청일전쟁, 한일합방, 일제 식민지지배, 해방 후 좌우이념갈등,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 10월 유신, 12·12사태,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등 굵직한 역사적 굴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뜻대로 자신의 인생을 펼칠 수 없었다. 역사적 굴곡은 수많은 개인의 삶에 커다란 상처를 새겼다.
얼마 전에 『전쟁 같은 맛』(글항아리)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소용돌이가 한 여성의 개인적 삶을 어떻게 결정지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여성과 미국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미국 뉴욕 스탠튼아일랜드 대학 사회학 교수인 그레이스 조(Grace M. Cho) 교수는 자기 어머니의 굴곡진 삶을 학문적 관점과 가족사적 관점에서 숨김없이 서술하고 있다. 동시에 조 교수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미국 워싱턴 주의 아버지 고향 마을로 이주하여 온전한 백인이 아닌 주변인(marginal man)으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고통도 언급하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1940년에 창녕에서 태어났는데 6·25전쟁 통에 아버지와 오빠를 잃게 된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부산의 미군 클럽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어머니는 기지촌 여성이었다. 그 당시에는 점잖은 말로 ‘양공주’, 직설적인 말로는 ‘양깔보’라고 불렀다. 6·25전쟁 후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곳곳에 미군을 상대로 매춘행위를 하는 기지촌이 생겨났다. 기지촌과 기지촌 여성은 6·25전쟁이 한국에 남긴 깊은 상흔이었다. 조 교수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어머니가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머니는 클럽에서 만난, 외항선 선언이었던 미국 남성과 1972년 결혼하게 된다. 어머니에게 그 결혼은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조 교수를 낳고 나서도 한국에서 살던 어머니는 그 후 아들과 딸을 데리고 아버지의 고향인 미국의 시골 마을로 이주하게 된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인에게 한국인은 존재감도 없는 이방인에 불과했다. 많은 한국 여성들이 그러하듯, 어머니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억척같이 살아간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웃 사람들 속에서 전쟁하듯이 한국 음식을 만들어 그들에게 대접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현지의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을 터득하여 그 음식으로 이웃사람들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 한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는 한편으로 미군 클럽에서의 기억이,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시골 마을에서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분투의 기억이 담겨 있었기에 40대 중반에 조현병 증세를 앓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현병이 악화되면서 두 차례의 자살 시도 등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어머니의 험난한 인생살이는 60세가 되기 전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내가 만약 조 교수의 어머니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과연 그 곤곤한 삶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더구나 1910년대 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소용돌이를 견뎌내야 했던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니 조 교수의 어머니 인생이 그저 학문적 관찰이나 분석의 대상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의 강제징용과 6·25전쟁으로 전체 인생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우스운 가정(假定)이지만 그런 역사적 굴곡이 없었다면 나 자신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나의 어머니는 어려운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억척같은 노력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우리 가족을 일으켜 세운 여장부였다. 곤곤한 인생을 살았던 나의 어머니에게 그나마 노년에 편안한 삶을 살게 해드렸던 것 그리고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할 수 있게 해드린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다.
이제 70이 넘은 내 인생을 돌아보니 어린 시절 배고팠고 궁핍했던 기억이 아직도 살아있지만 그래도 나의 세대는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산업화 과정에 들어서면서 운이 좋은 세대였다. 고도성장과 급격한 인구증가는 팽창경제의 시대를 가져왔다. 그 덕분에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세대에 비해 더 나은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더 윤택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나 자신도 대학교수라는 직업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민주화의 험난한 과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사에서 전례 없었던 고도 경제성장은 젊은 세대에게 자기 뜻을 펼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 점에서 나의 세대는 때를 잘 타고 나온 세대였고 나는 행운아였다. 이제 이 나라는 급격한 출산율 저하로 수축경제시대에 접어들었다. 게다가 이 땅의 사람들은 지정학적 위상으로 늘 전쟁의 위험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또 다시 나의 아들이나 손자 세대에 감당하기 힘든 역사적 소용돌이가 휘몰아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모든 사람들이 폭풍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의 뜻과 의지대로 자기 인생을 전개해 나갈 수 있기를 소망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