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조선왕릉, 김포 장릉 이야기입니다.
위치는 경기도 김포시 장릉로 79에 있습니다.
주차장입니다.
해설사는 김포 시청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해설시간은 10:30/13:30/15:30입니다.
장릉 역사문화관입니다.
재실은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입니다.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며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습니다.
능의 특징
첫째는 향로와 어로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습니다.
둘째는 능침 뒤편 언덕에는 군사시설이 있어 보기에 좀 그렇습니다.
6.25 당시부터 있던 중요한 시설이라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셋째는 저수지 건너편에 문제가 되었던 아파트가 있으나 나무 숲에 가려 관람객이 올라 갈수 있는 정자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능침에서는 아파트가 보입니다.
능의 구성
장릉은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장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원종, 오른쪽이 인헌왕후의 능이다.
연지
철종 즉위년 12월 26일 장릉령陵"에 임명된 이제상이 1850년에 연지를 수리하고 지은 시
“능침 아래 황폐해진 연못 줄곧 그대로 두었는데
열 장부가 일하여 이십일 만에 완성하였네.
나그네가 노니는 즐거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재관이 빠뜨린 것이 많아서라네.
돌길에 낀 안개는 작은 섬을 두르고
금빛 연못에 밝은 달은 맑은 파도를 비추네.
선왕이 남긴 은택 덕분에 백성이 자식처럼 오니,
진실로 종묘와 사직에 복이 아니겠는가?”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판위,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수라간은 복원되지 않았고, 홍살문은 23년 12월 현재 수리 중 입니다. 비각 안에는 한 기의 표석이 있는데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면서 세운 표석입니다. 비각 옆에는 육경원으로 있을 때 사용한 비석 받침돌이 장릉 근처에서 노출되어 발굴 후 전시되어 있습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만이 둘러져 있는데, 이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 되기 전 흥경원을 조성할 때의 호석입니다. 그 밖에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는 원종이 왕으로 추존된 이후에 새로 설치한 석물입니다.
능의 역사
1619년 정원대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고 1626년 당시 계운궁이던 인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김포 성산에 무덤을 만들고 육경원이라 하였고, 이때 원래의 정원대원군 묘도 원으로 지위를 높여 흥경원이라 하였다. 1627년흥 경원과 육경원을 합쳐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무덤의 이름을 흥경원이라 하였다 가, 1632년 정원대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흥경원은 장릉이 되었다. 장릉으로 높여지면서 무석인, 석마, 석양과 석호 등의 석물을 추가로 세웠으나,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두른 상태로 두었다.
김포에 있는 유일한 왕릉인 장릉은 풍수적으로 명당이면서도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안산*인 계양산과 남북으로 일직선에 있는데 파주에 있는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릉과도 일직선을 이루고 있어 마치 부모의 묘를 멀리서나마 모시는 모양새다.
* 안산 명당터를 보호하는 앞산
장릉문화관에는 정조 임금이 직접 지은 시
-장릉 재실에 쓰다.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해 파주 장릉을 참배하였는데 마치 인조 대왕 말씀 들은 듯하였다. 옛 주나라 종묘 제사보다 예를 극진히 하니 후손 잘됨이 한나라 비석처럼 드러났다. 가로지른 한강은 하늘이 감동한 것이고 높은 계양산은 땅의 정령 본받은 것이다. 원종 대왕 영령이 오르내리며 게시는 곳 가을날 김포 장릉 재실에서 절을 올립니다.”
원종(1580~1619)는 선조와 후궁 인빈 김씨의 셋째 아들로 1580년(선조 13)에 경복궁 별전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부입니다.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 선조를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습니다. 원종은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 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내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선조는 이를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합니다.
광해군 즉위 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로 인하여 커다란 옥사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지에서 자결하였고, 정원군은 그의 화병으로 1619년에 4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정원군의 첫째 아들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의 사친으로 정원대원군에 추존되었으며, 인조는 재위 초반부터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가, 재위 10년 만에 아버지를 원종으로 추존 하였습니다.
인헌왕후 구씨는 능안부원군 구사맹의 딸로 1578년에 태어났습니다. 1590년에 선조의 아들 정원군과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에 봉해졌습니다. 원종 사이에서 3남을 낳았습니다. 1623년에 첫째 아들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연주부부인에 책봉되고 계운궁이라는 궁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1626년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1632년에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자 인헌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원종과 인헌왕후를 연도별로 정리한 표입니다.
원종 가계도입니다.
추존 원종의 아들인 인조는 인열왕후과 같이 파주 장릉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