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회사를 경영하던 시절 (1978~1984)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한복음 6장 27절)
어느 날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친구의 포도밭에 갔다가 현대건설이 모래벌판에 아파트를 짓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파트 4동을 짓고 있었는데 분양가를 물어보니 그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높은 가격이었다. 그날 집에 와서 계산을 해보니 주먹구구식으로 어림잡아도 절반 정도가 이익이 날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아파트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현대아파트는 지금처럼 튼튼하게 지은 콘크리트 아파트가 아니고 외부와 벽을 6인치 블록으로 지은 아파트였다.
이때부터 건설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들었다. 그러나 건설업은 워낙 큰 자본이 드는 사업이라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늘 머리 속에 건설업을 염두에 두고 기도하던 중 주식을 모아 주식회사로 건설업을 시작해야겠다는 착상이 떠올랐다. 나는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동업자를 찾아 나섰으나 모두 다 회의적이어서 동업자를 구하지 못하고 2년여 동안 계획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건설업이 위험 부담은 많아도 사업성이 있고 남자가 할 만한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동업자를 구하던 중 친구의 소개로 김재근 씨를 만나게 되었다. 김재근 씨와 동업을 하기로 하고 설립한 것이 프린스주택㈜이었다. 나는 대표이사직에 취임하고 첫 번째 프로젝트로 1978년에 우리 자본에 맞게 인천 수봉산 밑에 두 동짜리 프린스아파트를 지었다. 그러나 아파트 경기가 좋을 때가 아니라 어려움이 많았다. 다행히 분양이 원만하게 끝나기는 했으나 이 일을 통해 얻은 교훈이 있었다. 역시 사업은 서울에서 해야겠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아파트를 짓기 전에 모두 분양이 되었지만 인천만 해도 수요가 적고 서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분양에 어려움이 많았다.
뒤이어 신월동과 우이동 등지에 연립주택도 짓고 상가도 지어 어느 정도 회사가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런데 자리가 잡힐 무렵 뜻하지 않은 사건이 생겼다. 아파트 준공검사를 받지 않고 입주자를 입주시킨 것이 문제가 되어 큰 곤욕을 치렀으며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혈압이 높아져 안면근육 마비현상이 생긴 것이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사업을 정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사업을 하더라도 항상 무차입 경영을 해왔기 때문에 회사를 정리하면서도 큰 부담 없이 정리할 수가 있었다.
그 이후 아파트 경기가 지속적인 호황을 누리는 것을 보면서 아쉬움이 많이 남기는 했다. 그래도 정리를 하니 흑자였다. 나는 그간 여러 사업을 하고 필요에 따라 정리를 하곤 했지만 적자로 끝난 사업은 없었다. 어떠한 사업이든 다른 사람에게 피해나 부담을 주지 않고 정리하게 된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의 경험을 살려 이후 나는 빌딩을 지을 수 있는 기술을 배웠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건축업을 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