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와 협업으로 역원 운영·구료사업도 담당
조운흘, 종림 스님과 교제하며 사평·판교 두 곳에 원우 중창 국가가 일부 운영자금 지원하며 부족한 행정력 교계에 위임 국가·승단 협력 양상은 세종 거치며 보편적인 제도로 정착 구한말의 주막. 조선 초 공공 숙박시설인 원우의 경영과 관리는 불교계에 위임됐지만 조선 중기 이후 국가의 제도와 행정력 내로 흡수됐으며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주막 등의 민간 숙박업이 보다 활성화됐다. [국립민속박물관] 사평(沙平)과 판교(板橋). 서울과 경기 남부에 위치한 이 두 지역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의 모습이 떠오른다면 일단 방향은 맞다. 지금이야 수도권의 확장과 개발로 핫플레이스(Hot Place)가 되었다지만, 사실 과거에도 이곳은 외부인의 드나듦이 많은 지역이었다. 한양에서 삼남(三南)으로 통하는 대로(大路) 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경부고속도로가 이 두 지역을 경유하는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과거 사평과 판교에는 원우(院宇), 즉 원(院) 건물이 있었다. 원이란 지방을 여행하는 공무 수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편의시설로서, 당시 교통수단인 말을 공급하며 숙박업도 겸했던 역참(驛站)과 함께 역원(驛院)으로 통칭되기도 했다. 즉 역원은 일종의 공공 교통 및 숙박 시설이었던 것이다. 지리적인 요건으로 보아 사평과 판교에 원우가 설치되었던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원우가 사평과 판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개국 직후 결정된 사안 중에는 “각 도(道)와 주(州)에서는 그 노정(路程)을 헤아려 원관(院館 : 원우)을 짓거나 수리하여 여행객에게 편의를 제공할 것”(‘태조실록’ 2권, 1년 9월24일)이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평원과 판교원을 콕 짚어 거론한 것은 태종 때 죽은 조운흘(趙云仡)이라는 인물의 졸기(卒記) 때문이다. 조운흘은 “(홍무) 신유년(1381, 고려 우왕 7년)에 벼슬에서 물러나…자은종(慈恩宗) 승려 종림(宗林)과 더불어 세속을 떠나 교제하며, 판교와 사평 두 곳에 원을 중창하여[重創板橋沙平兩院] 스스로를 원주(院主)라 칭하였다”(‘태종실록’ 8권, 4년 12월5일)고 한다.
스님과 교제하며 원을 중창하였다고 하므로, 이 때의 원이 공무용 숙박업소가 아니라 단순히 사원, 즉 사찰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없지 않다. 또 스스로 원주임을 자칭했다 하므로, 조운흘이라는 일반인이 스님과 함께 개인 원찰(願刹)을 짓고 소유주와 주지의 역할을 나누었던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로부터 15년이 지난 태조 5년(1396) 조운흘이 아직 생존해 있음에도 “자은종 도승통 종림이 전 판사 윤안정(尹安鼎)과 함께 일찍이 판교원을 짓고[嘗作板橋院], 성을 쌓기 위해 왕래하다가 병이 든 자에게 의원을 불러 진찰시키고 약을 지어 구료하였으며[請醫胗脈, 劑藥救療], 또한 음식도 공급하여 병이 나으면 식량을 주어 보냈다.…임금이 미두(米豆)와 염장(鹽醬)을 내려 주도록 명하였다”(‘태조실록’ 9권, 5년 3월4일)는 기록이 보여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이에 따르면 적어도 판교원의 경우 종림 스님이 설립과 경영을 주도하였고, 설립의 목적과 경영의 내용 또한 숙박보다 구휼에 중점이 두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선 초의 원은 공무용 숙박업과 함께 대민 구료사업도 담당했던 것일까. 아니면 공무용 숙소인 원우와 달리 사평원과 판교원은 불교의 자비활동이 펼쳐진 일선 사찰이었던 것일까. 어느 쪽이 됐건 적어도 판교원에서는 자은종 종림 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승단 측에서 경영과 실무에 앞장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국가는 여기에 운영자금 일부를 지원하며, 앞서 살펴보았던 별와요나 한증막의 경우와 유사하게 국가에서 부족한 행정력을 상당 정도 교계에 위임하고 있다.
판교원에서 종림 스림의 활약이 보고된 바로 이날 원과 관련된 두 편의 기사가 ‘실록’에 더 등장한다. 하나는 효녀 도리장(都里莊)의 이야기. 전남 장성 출신의 효심 깊은 여성은 부친이 한양 도성의 건설 현장에 역부(役夫)로 차출되어 갔다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장(男裝)을 한 후 한달음에 상경하여 판교원에서 아버지를 만나 치료하고 집으로 모셔왔다고 한다. 구료시설로서 당시 판교원의 기능을 확인하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조금 더 의미심장하다. 바로 “승려를 모집하여 온천에 원을 짓게 하고 쌀과 콩 30석을 하사하게 했다[命集僧徒, 營院于溫泉, 仍賜米豆三十碩]”는 것이다. ‘영원(營院)’이라는 표현은 ‘원을 짓다’ 또는 ‘원을 경영하다’ 두 가지 의미로 모두 해석될 수 있지만, ‘실록’의 다른 용례로 미루어 경영보다는 축조/건설의 뜻으로 새기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원우의 건축에 승단의 노동력을 당연한 듯 동원하는 모습에는 눈길이 간다.
여말선초 판교원 종림 스님의 경우는 어쩌면 다소 우연한 계기로 결성된 원우에서의 국가-교단 간 합작 사례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협업의 모델은 세종 대를 거치며 차츰 상규적인 것으로 제도화되어간 흔적이 보인다. 가령 세종 10년(1428)에는 “원우의 설치는 길 가는 나그네를 접대하기 위한 것입니다.…원컨대 각도에 명령을 내리시어 승려 중에 일을 맡을만한 자를 선택하여…원우의 곁에 살게 하며 때때로 수리하게 하여 길 가는 나그네를 묵게 하고, 조정에 보고하여 (그 승려에게) 그 원의 주지 직을 주고[授其院住持], 힘써 수리하고 준비하는 자에게도 벼슬을 제수하여 이를 권장하게 하십시오”라고 주청하는 상소문이 올라오자,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원전(元典 : 경제육전)’의 예를 따라 원주(院主)인 승려에게는 잡역을 면제하여 온전히 구휼만 하게 하고, (원우를) 수리하는 승려에게는 승직을 제수하며, 이미 승직이 있는 경우에는 직을 더 높여 줄 것”을 결정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40권, 10년 윤4월17일.) 이 결정에는 원에 나타나는 공공 숙박시설과 구휼기관의 기능적 혼재, 또 국가와 승단의 협력 양상이 여실이 드러나고 있다.
원주 직을 당연하게 스님에게 맡기고 심지어 주지(住持)라고까지 표현하는 데에서, 원의 설치와 경영이 본디 불교계에서 주도한 사회사업이었으나 점차 국가 행정력 내로 수용되어간 정황을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다만 성종 14년(1483)에도 “원우나 사사(寺社) 같은 경우라면 승려들을 사역시켜도 좋겠으나, 궁궐의 영조(營造)에 그들을 부린다면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의견이 조정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고 있어(‘성종실록’ 157권, 14년 8월14일), 이 때까지도 원과 관련된 업무가 불교계의 일로 여겨지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숙박지로서 판교의 존재는 조선 후기에도 여러 차례 ‘실록’에 오르내리지만, 이 시기에 들어서는 더 이상 스님들과 연관 지어져 서술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는 성종 재위기에 반포된 ‘경국대전’의 ‘공전(工典)’ ‘원우’ 항목에서 “원우 인근의 백성들을 정하여 원주의 역할과 수리를 맡길 것[定附近居民, 爲院主修葺]”으로 규정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