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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의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칭의의 소극적인 면이란 죄를 용서받는 복을 말한다. 이 점을 확대시켜 말하자면 칭의는 하나님과 우리의 법정적 관계의 영구적인 변화인데 이로써 우리가 죄과를 사면받으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법정적인 관계는 정죄일 뿐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 때문에 정죄받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칭의될 때 하나님과 우리의 법정적 관계는 유죄에서 무죄로 바뀐다. 이런 법정적 변화의 소극적인 면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거나 사면받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야기시킨다. 칭의에서는 어떤 죄들이 용서되는가? 원죄의 책임까지를 포함하여 과거와 현재의 죄들만 용서되는가? 혹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되는가? 어떤 개신교 신학자들은 신자들의 모든 미래의 죄까지 칭의의 때 용서받는다는 생각을 반대해 왔는데 그것은 왜냐하면 그런 가르침이 신자들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문란해지고 죄와의 싸움에서 게을러지도록 만들 것을 염려해서이다. 이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칭의란 단회적인 행위가 아니라 신자가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마다 반복되어야 하는 행동이라고 가르쳤다.
이런 입장의 대표격으로 두드러진 사람은 윌리암 아 브라켈(William a Brakel)이다. 그는 1700에 최초로 출간된 자기의 책 "합당한 경배"(Redelijke Godsdienst)라는 책에서 화목(reconciliation)과 칭의를 구별한다. 그는 택자들의 화목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서 그들이 믿기 시작한 후에 범한 어떤 죄들로 인하여서도 파기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주장하기를 칭의는 죄인들을 사면한다는 선고이며 이 선거는 죄를 고백한 후마다 반복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신자들은 한번만이 아니라 매일, 아마 더욱 자주까지라도 칭의되어야 한다. 브라켈(Brakel)은 매일 죄를 고백할 것과 죄 용서를 비는 기도의 필요성, 우리의 변호자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언급하는 성경구절들과 칭의와 믿음을 결부시킨 본문들에 자신의 견해의 근거를 둔다. 그러나 한번 의롭게 된 신자는 자신이 죄를 범할 때마다 다시 화목하지 못한 상태로 몰락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처음 받은 칭의는 신자들이 계속하여 범죄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실 것을 실제적으로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그도 인정한다.
이것은 칭의와 우리의 죄 고백과의 관계에 있는 난해한 점 때문에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우리가 단번에 칭의된다면 왜 우리가 여전히 우리의 죄들을 고백해야만 하는가? 반면에 우리가 매일 죄들을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이것은 미래의 죄들은 우리의 칭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이와 관련된 신약성경의 구절들에 대한 연구는 칭의가 신자의 생애에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한번 일어난다는 것을 드러내 줄 것이다. 로마서 8:30,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edikaiosen; 단 한번의 행동을 의미하는 부정과거 시제) 의롭다 하신(edikaiosen)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확실히 바울은 여기서 날마다 반복되는 칭의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서 바울은 마찬가지로 칭의를 단한번 일어나는 것으로 묘사한다. 실제로 그 다음 절은 이 생각을 더욱 굳게 해준다.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단번에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의 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새로운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어 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롬 5:9-11 참고). 그 동일한 궁극성과 영원성의 개념이 로마서 8:1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렇다면 미래의 죄들에 대한 용서는 어떻게 되는가? 로마서 8:33-34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에 대하여서는 어떠한 고소도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중 한 사람의 칭의도 그의 고소로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의 죄 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하신다는 말에는 어떤 반대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신자의 미래의 삶도 펼쳐진 책과 같이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기 때문이다.
쉐드(Shedd)는 이 사실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포괄적인 행위이다. 신자가 칭의될 때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된다. 그가 짓는 죄의 전체 합계는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선고하실 때 하나님의 거룩한 눈 앞에 드러나는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한 번의 행위로 다 지워져 버리거나 덮여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칭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반복이란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은 칭의가 기초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이 반복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죄를 미래에 곧 신자들이 칭의된 후에도 용서하시기로 약속하셨다고 가르친다. 예수는 다른 사람이 죄를 범할 때 그들을 우리가 용서하면 우리의 천부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리라는 것을 가르치셨다(마 6:14). 또한 사도 요한은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용서하신다고 가르친다(요일1:9). 그리고 야고보도 그를 위해서 믿음으로 기도가 드려진 병자에 대해서 말하면서,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5:15)고 하였다.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죄가 범해지기 전에도 그 죄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면서 말하기를, "죄들이 범해지기 전에 이미 다 용서된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신자가 범죄하는 것에 대응하여 그를 다루지 않겠다는 약속을 칭의 때 받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마 더욱 정확한 진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자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칭의라는 것이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며, 미래의 죄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죄들을 고백하도록 하는 성경의 많은 짧은 권면들은 우리가 진실로 날마다 참회하는 중에 사죄를 간청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돌이켜야 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칭의의 때 우리에게 적용된 그리스도의 공로에 기초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험도 새롭게 된 칭의가 아니라 우리의 칭의가 새롭게 적용된 것일 뿐이다. 우리가 슬프게도 죄를 범하면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의식을 잃으며 하나님과의 화평한 마음을 잃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그는 우리에게 사죄의식을 일깨우시며 우리가 단번에 의롭게 되었다는 확신을 새롭게 불러일으키신다.
그래서 칭의된 신자는 계속해서 날마다 사죄를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자신이 은혜에서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절망감으로가 아니라 사랑하는 천부께로 가까이 가는 어린아이의 확신감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칭의는 단번에 일어나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과 사죄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칭의가 사죄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그 적극적인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양되는 것과 영생의 권리를 부여받는 것을 또한 품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두가지 성격을 살펴야 하는데 보통 그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을 일컫는다. "수동적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는 용어는 때때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순종함에 있어서 능동적이 아니라 "피동적"으로, 곧 "마음에 없으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순종"(obedience of passivity)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 표현에서 "수동적"(passive)이라는 형용사가 전달하고자 의도한 것이 아니다. "수동적 순종"이라는 용어는 17세기 루터파와 개신교 신학자들의 라틴어 저작물들에서 비롯되었다. 그들 중 하나인 요하네스 볼레비우스(Johannes Wollebius)는 수동적 순종이라는 표현을 "고난을 받다"(to passio, suffering,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사용되었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동적 순종을 결국은 십자가에 죽게 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나는 "고난받는 순종"(suffering obedience)이라는 용어를 쓰기를 좋아한다.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율법준수의 순종"(law-keeping obedience)이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핫지(A. A. Hodge)는 그리스도의 순종의 두가지 성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한편으로는 형벌을 감수하는 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 순종을 수동적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요구된 것들을 성취하신 면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동일한 순종을 능동적이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우리에게 이 두가지 면을 분리시키지 말도록 경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능동적이면서 수동적인 순종, 곧 죄의 용서를 위해서 그 형벌을 감당하신 것과 생명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신 것은... 두가지 측면의 만족을 이루지 않고, 전 율법을 그리고 율법과 관련된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족시키는 하나의 완성된 만족을 이룬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받는 순종을 통하여 우리의 죄들에 대한 형벌을 대신 받으셨으며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다(갈 3:13, 롬 3:24-26; 5:8-10과 비교해 보라). 그렇게 해서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는 공로를 이루셨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율법준수의 순종을 통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자녀들로 입적되는 권리와 영생을 누릴 권리를 획득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고난을 감당하는 것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하나의 순종행위의 두 국면들이라는 사실이다.
사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을 통하여서만 받을 수 있고 영생은 오직 그의 능동적 순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꼭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형벌을 감수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사역은 율법을 성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행하신 것은 고난받는 일이었고 그는 고난받는 것이 곧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것은 하나의 일이었다.
앞에서 내가 지적했듯이 우리가 칭의되었을 때 우리에게 전가된 혹은 우리의 것이 된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심으로 우리를 위해 획득하신 공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는 두가지 성질을 지니는데 바로 대속과 순종이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고전 15:45, 롬 5:15-21 참조)으로 말한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이중적 사역을 이루셔야만 했는데, 아담의 죄와 그의 백성들이 범했던(아직도 범하고 있는) 모든 죄들에 대한 형벌을 받으셔야만 했으며, 또한 아담이 수행해야 했었으나 실패하여 이루지 못했었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 완전한 순종을 하나님께 바쳐야만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를 받을 때 우리의 몫으로 돌려진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의 형벌을 다 치르신 것 뿐만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하신 것도 포함된다. 그리스도의 율법준수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순종하셨던 것과 똑같이 우리가 완전하게 순종했던 것인양 우리를 그렇게 보아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혹은 율법을 준수한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 중에서 독일 개신교 신학자인 요하네스 피스카토르(Johnannes Piscator, 1546-1625)와 알미니안 신학자들인 리챠드 왓슨(Richard Watson), 힐스(A. M. Hills), 오르톤 뷜리(H. Orton Wiley)가 있다.
이 신학자들은 이 가르침에 대해서 어떤 논쟁들을 개진했는가? (1) 이 교리의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금 뒤에 우리는 이 교리의 성경적 증거를 살펴볼 것이다.
(2)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약화시키며 부주의한 생활을 초래하기 쉽다. 그러나 그 동일한 반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가르침에도 적용될 수 있다. 누구든지 이 교리를 제멋대로 곡해해서 그 교리를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좋다는 허가증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있음직한 오용의 사례를 들어 그 가르침이 잘못되었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3) 세번째 반대는 "그 가르침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를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조건으로 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 두며,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대신 고난받으셔야할 아무런 이유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의 대리적 고난은 야자택일의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둘 다를 행하셔야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준수하신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가르침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먼저 로마서 5:18-19을 보면,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바울은 “의의 한 행동”을 그리스도의 전적인 순종, 말하자면 꼭 우리의 죄들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신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신 것의 의미로 말한다. 그리스도의 순종의 결과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칭의”이다. 우리가 이 칭의를 받는 것은 곧 우리의 둘째 아담이며 우리의 새로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거나 또는 우리의 몫으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의의 한 행동"이 "한 범죄"와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전자의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준수하신 순종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아담을 통해 우리에게 생긴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생긴 것의 대조는 19절에서 계속된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우리는 죄인이 되었다. 여기서 "되었다"(were made)로 번역된 헬라어 카띠스테미(kathistemi)는 "정해지다"(be appointed), "...로 되어 있다"(be constituted), 혹은 "어떤 신분이나 상태에 놓여지다"(be placed in the status of)를 뜻한다. 여기서 바울은 법정적 혹은 법적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아담 안에 있는 우리는 죄인의 신분에 처해졌으며 그러므로 정죄를 받는다(18절을 보라). 그 절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된다"(be constituted, 다시 kathistemi의 한 형태가 쓰여졌다)는 것을 배운다. 19절의 전반부에서 법적 혹은 법정적 개념을 묘사했기 때문에 후반부에서도 비슷한 방법으로 역시 그렇게 묘사한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이제 의롭다고 간주되거나 선포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혹은 율법준수의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의 앞 부분에서 나는 빌립보서 3:8하-9을 다루었다. 바울이 거기서 언급한 "하나님께로서 난 의"는 죄의 전가를 해소시키는 것 그 이상임을 여기에서 덧붙이는 바이다. 그 장에서 바울이 특별히 찬양한 것은 그가 그 자신의 의, 곧 율법으로부터 난 것을 도무지 가질 수 없었으나 이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소유하게 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된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 곧 우리가 칭의될 때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주신 그 의를 소유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21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바울이 단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의 죄와 동일시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동일시되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우리의 죄들을 용서받도록 하신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이제는 우리의 것으로 계산되거나 또는 전가되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그 의가 ”되는“ 놀라운 결과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이 구절에 대한 루터의 주석은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것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이 풍성한 신비로서 놀라운 변화에 의해서 우리의 죄들이 더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되며,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가 그 자신에게서 자기의 의를 비우신 것은 우리에게 그것을 입히시며, 그것으로 우리를 채우시려 함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0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로서 온 지혜가 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의가 되셨다고 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어법은 그리스도의 흠없는 의, 그것은 곧 그의 온전한 순종의 의인데, 그것이 우리가 칭의될 때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상을 다시 한번 드러내지 않는가?
칼빈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로써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역시 명백하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는 의롭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그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의롭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롭게 여겨진다고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탁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마치 그것이 우리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안토니 A.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 11장 '칭의'에서 발췌(292-30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