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비백산 GI(government issue)
강 동 구
GI는 미군 병사를 지칭하는 말이다.
육군은 아미 (army) 공군은 에어포스 (air force) 해군은 네이비(navy)로 부르지만 일반적으로 미군 병사를 GI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는 국방의 임무를 필 해야 비로써 진정한 남자로 거듭난다. 꽃보다 아름다운 이십 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누구에게는 허송세월일지 몰라도 내게는 생애 최고의 소중한 시간이고 내 인생이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가 되였다.
1972년 12월 초겨울 찬바람이 코끝을 스치는데 병무청으로부터 입영 통지를 받았다. 전쟁통에 태어나(1950년생) 군에 입대하는 작은아들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빛을 뒤로하고 육군 훈련소에 입영 하였다.
머리를 깎고 군복을 갈아입으니 어설픈 군인으로 변신하여 10주간의 혹독한 훈련을 견디며 멋진 군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고된 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내일이면 전 후방 부대로 배치되어 새로운 군 생활을 하게 된다.
특기가 있는 사람은 특기병으로 운전면허가 있으면 운전병으로 보병 의무 통신 취사 군종 행정병 등 다양한 보직이 주어진다.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 흔한 자격증 하나 없는 쓸만한 구석이라곤 한 군데도 없는 나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는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카투사로 선발해 주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카투사로 선발되는 것은 신의 놀라운 축복이다.
지금은 시험을 통과해야 선발되지만, 당시에는 무작위로 선발하여서 나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만약 시험을 치른다면 나에게는 결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리라? 카투사(KATUSA)는 미 육군에 배속된 한국 군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미군 부대의 생활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맛있는 양식을 하루 세 번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언제라도 더운물에 샤워하고 푹신한 침대에 누우면 여기가 군대인지 지상낙원인지 분간이 안 되는 곳이다. 외출도 자유로워 서울 시내 어디든 갈 수가 있다.
영내에는 수영장 볼링장 골프장 영화관 레크레이션쎈타 각종 체육시설 병원 등을 활용할 수 있고 지금은 전설로 남아있는 연예인들의 등용문 미8군 무대를 경험할 수 있고 넓은 영내에서 친구나 연인을 초청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미군 부대는 일반인들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군인을 위한 모든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1970년대 미국의 경제가 호황을 누려 그런지 물자가 풍족하였다. 근면 절약이 몸에 밴 우리는 풍요를 누리는 것이 차라리 어색하였다.
꿈같은 세월 삼 년이 어느새 흘러 전역을 앞두게 되었다. 우리나라 군인들은 전역 날짜를 손꼽아 기다린다는데 나는 전역 날짜가 다가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내 생애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주어질까 생각하니 아쉬움이 가득하다.
군 생활 그중에서도 미군 부대의 경험이 내게 없었다면 지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남들처럼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내가 미군 부대의 좋은 환경을 부족한 지식을 채울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아무리 전역이 하기 싫어도 때가 되니 전역을 해야 했고 결혼도 하여 경기도 양주 땅에서 아버지를 도와 양돈 사업을 시작하였다. 인근 군부대에서 배출되는 잔 반(일명 짬밥)을 경운기로 운반하여 돼지를 사육하였다.
양주 땅은 우리나라 군부대도 많이 있지만, 미군 부대도 의정부 동두천 양주군 등에 주둔하고 있어 미군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때로는 지각없는 미군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무뢰한 행동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미군들에게 우호적이어서 크게 벗어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대충 넘어가 주었다. 이를 악용하는 극히 일부 철없는 미군들이 한국인을 희롱하면 당황해하면서 쩔쩔매는 모습을 그들은 유희로 삼을 때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이놈들이 이번에는 임자를 잘못 만났다.
그날도 군부대에서 경운기로 잔 반을 수거하여가던 중 미군 대여섯 명이 손짓하면서 경운기를 멈추라고 한다. 무슨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 그런가 하여 멈추었더니 나를 희롱하면서 유 헝그리? 유 헝그리 하면서 내 입에 과자를 넣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른 눈치를 채고 벌떡 일어나 잔 반을 담는 바가지에 잔 반을 떠서 큰 소리로 정확한 본토 발음으로 유~우 헝그리 유~우 헝그리 카몬! 갓댐 선 오브 베취. 그들을 향하여 잔 반을 뿌리는 행동을 취하며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욕을 영어로 퍼부으니 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듯 달아나 버렸다.
놈들은 아마 많이 헷갈렸을 것이다. 어수룩한 시골 촌놈 하나 골려 먹으며 희롱하려다 뜻밖에 봉변을 당했으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촌놈이 어떻게 영어로 욕을 잘하지? 그것도 정확한 미국 본토 발음으로~~~
우리 카투사가 미군 부대에 배치되면 미군들에게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욕이다. 한국에 배치되는 미군도 마찬가지다. 한국말로 욕을 제일 먼저 배운다. 누가 일부러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배우게 된다. 참 신기한 일이다.
미군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장마철 농촌의 땅은 비포장 이어서 지반이 약해 사료를 실은 차가 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농로에 빠지고 말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미군들이 탱크와 장갑차로 훈련하고 있기에 프리스! 헬프 미를 외치니 주저 없이 탱크를 가져와 사료를 실은 트럭을 스르르 꺼내 주었다.
마침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이 나와 있다가 미군들을 말 몇 마디로 동원한 작은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동네 사람들에게 어깨가 으쓱하셨을 것이다. 공부를 별로 시키지 못한 아들인데 표정 없는 아버지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
군 복무 시절 당시에는 불법이지만 아버지는 작은아들 덕에 귀한 양담배를 즐기시고 양주 맛도 어쩌다 볼 수 있었다. 간간이 미군 부대 식재료를 가져다드리면 마을 어른들을 불러 약주를 대접하시면서 흐뭇해하시는 기억이 새롭다.
미군 부대에서 카투사로 근무한 삼 년 세월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가 아닐 수 없다. 아~ 옛날이여 그때 그 시절이 그립구나. 이제는 아련한 추억 속에서 그때를 회상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본다.
첫댓글 강동구선생님,군인의길에대한 지식을 배우고갑니다.^^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