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看話禪 수행과 公案工夫의 문제
韓國禪文化硏究院
鄭性本
1. 序言 ----- 간화선의 수행구조 ------.
송대 오조법연선사에 의해 제기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은
대혜종고선사가 새로운 선수행 방법으로 대성시켰다.
송대의 간화선은 唐代 조사선의 정신(불교의 경전, 어록, 禪問答 등)을 공안으로 간주하고
이를 마음의 눈으로 읽고(看) 공부하여 깨달음의 경지와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도록 하기 위해 창안된 새로운 선수행이다.
중국인들이 先例를 중시하는 尙古주의적인 정신으로 대승 經典과 唐代 조사들의 선문답을 깨달음의 先例(判例)인 公案으로
간주하고 이를 참구하여 각자의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하고 정법의 안목(正法眼藏)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한 것이 간화선이다.
따라서 간화선은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불성)을 깨닫는 無字公案參句와 餘他의 수많은 공안의 다양한 사례와 판례를 공부(看)하여 정법의 眼目을 체득하고 구족하는 公案공부를 병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간화선의 수행은 조주의 無字話頭 참구와 공안공부(看經,看話) 이 두가지를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불교에서는 고려시대 普照知訥과 慧諶등 修禪社의 定慧結社 이후로 간화선의 수행체계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선수행이 중심이 되고 있고,주지나 조실이 語錄이나 {벽암록} {무문관} 등을 提唱하여
正法眼目을 갖추는 看經과 看話의 본질적인 公案공부는 등한시 되고 있다.
不立文字,敎外別傳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한 正法의 眼目없는 禪師들이 경전이나 어록,공안집을 제대로 후학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학인들이 경전이나 어록 등을 읽고 보는 것 조차도 못하게 하여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모르는 불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철저히 교육울 통해서 배우고 익히지 못한 불교인은 자기 자신이 불교인으로서 올바른 안목을 갖춘 수행을 할 수도 없을 뿐만아니라, 참된 불교의 정신과 가치관을 토대로 지혜로운 삶과 인격형성을 할 수 없으며,또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제기되고 있는 한국불교 간화선수행의 문제점을 아예 무시하고 등한시 할 것이 아니라,
한국불교의 전통적인 간화선수행의 제반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성하여,
올바른 간화선의 수행방법과 공안공부,
지도방법 등을 바르게 파악하여 이 시대에 맞도록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한국불교는 교단과 학교교육 등 제반문제점이 다양하게 돌출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출가 재가의 불교인이 전통적인 간화선 수행에 대한 올바른 교육이나
실천수행방법의 문제, 불법정신을 바로 알지 못하고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군다나 불교인들이 불법의 정신을 제대로 모르고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슨 말로서 대변해야 하는가?
불교인들은 철저히 아프게 각성해야 한다. 선불교의 수행과 정신으로 이 시대와 미래 인류를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갈 새로운 길을 제시 해야 할 시대적인 요청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필자의 이 논문이 불교인들이 새롭게 발심하여 경전이나 어록,공안을 참구하여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불법공부와 자기자신을 번뇌망념의 중생심에서 깨달음의 불심으로 지혜롭고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구도자의 수행생활을
철저히 확립하고, 한국불교 간화선 수행의 전통을 재정립하고 올바른 선수행이 실행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 선수행의 기본 구조.
대승불교의 실천체계를 정립한 {대승기신론}의 止觀門에는 다음과 같이 선불교의 실천구조를 제시하고 있다.
어떻게 지관문을 수행해야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止란 마음을 安定(집중)하여 대상의 모양(相)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
(곧 心眞如를 念하는 것)이다. 범어로 奢摩他( samatha ; 寂靜)의 수행(觀)을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觀이란 여러 가지 현상의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모양
(心生滅의 相)을 분명히 파악하는 지혜이다.이것은 범어로 毘鉢舍那( vipasyna : 智慧. 正見)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어떻게
隨順해야 하는가? 사마타와 비파사나의 수행을 점차로 수습하여 이 두가지의 수행이 하나가 되어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云何修行止觀門.所言止者.謂止一切境界相.隨順奢摩他觀義故.所言觀者,謂分別因緣生滅相.隨順毘鉢舍那觀義故.云何隨順.
以此二義漸漸修習.不相捨離雙現故.) ({大正藏}32권 582쪽 上 )
여기서 말하는 止란 sammatha 로서 寂止,寂滅,無念의 실천을 말한다.
즉 일체의 산란심이나 망념 망상을 멈추고 마음이 본래 적정의 세계로 되돌아 가도록 하는 수행을 말한다.
좌선 수행을 통하여 禪定 三昧에 든다고 함은 止의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삼마타(止)의 실천으로 根本 無分別智를 체득하는 요인이 되며, 이로 인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眞如門에 들게 된다.
그리고 觀이란 vipasyana로서 直觀,智慧,正見이란 의미인데
일체의 만법의 실상을 관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즉 觀察修習하는 수행으로 진리나 진실,일체의 모든 만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진리인 四聖諦나 연기의 법칙 등이 일체의 생멸법은 붓다의 止觀 수행으로 체득된 사실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만법이 인연따라 생멸하는 중생의 生滅門에 들어가는 지혜로 後得智를 체득하게 되는 요인이 된다.
3. 간화선의 화두참구는 趙州의 無字 公案.
대혜가 주장한 간화선은 각자의 煩惱妄念(不覺)을 조주의 無字公案이라는 방편을 참구(始覺)하여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참선수행을 말한다.즉 煩惱妄念과 生死輪廻의 고통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본래심의 세계
(還歸本處)로 되돌아가 涅槃寂靜의 경지를 체득하게 하는 참선 수행인 것이다.
즉 무자 공안을 방편으로 스스로 苦에서 해탈하는 자각의 종교인 것이다.
그래서 간화선은 조주의 無字 公案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게 하는 수행인 것이다.
대혜가 제시한 간화선의 유일한 話頭(公案)는 조주의 無字 화두뿐이다.
수많은 공안 가운데 특히 조주 무자 공안을 찾아내어 참구하도록 한 것이 대혜에 의해 大成된 간화선의 역사적인
의미라고할 수 있다.즉 {대혜어록}제24권 [示妙明居士]에 다음과 같이 조주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주장하고 있다.
生(번뇌 망념이 일어남)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死(일어난 번뇌 망념이 없어짐)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을 의심하여
잊지 않으면 즉 이것은 生死가 交加하는 것이다. 生死가 交加하는 곳에 이 話頭를 看하도록 하라.
어떤 스님이 조주화상에게 "개한테도 불성이 있습니까?" 질문하니,
조주스님이 "無" 라고 말한 화두를. ({大正藏} 47권 911 쪽 上 )
대혜가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제시한 화두는 조주의 무자 화두가 유일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대혜의 어록과 {大慧書} 등에
일관되어 주장하고 있으며, 또 {人天寶鑑}[秦國夫人 法眞비구니]장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법진 비구니가 어느날 謙선사에게 질문했다. "徑山大慧선사는 평소 어떻게 사람들을 지도 하고 있습니까?"
{스님께선 오직 사람들에게 [狗子無佛性]의 無字 話頭만을 들어 참구하도록 합니다.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그 곳에는
발을 붙여도 안되고, 이리 저리 헤아려서도 안됩니다.오직 " 狗子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스님이 " 無 "라고
한 그 말만을 들으라고 합니다. 오직 이렇게 학인들을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續藏經}148권 70, d)
대혜의 간화선의 특징은 조주의 무자 화두(공안)만을 유일한 공안으로 참구하며 참선공부하도록 하고 있는 점이다.
{大慧書}나 {대혜어록} 등에서는 다른 庭前栢樹子나 麻三斤 그 밖의 공안도 제시하고 있지만,이러한 공안은 선문답의 의미를
참구하여 정법안목을 구족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화두인 인 것이다. 대혜의 간화선을 계승하여 체계화시킨 無門慧開의 {無門關}은 무엇보다도 그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사실 간화선의 근본은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며,간화선의 수행에서
본래심을 조고해보는 도구(방편)로서 조주 무자 공안을 능가하는 체계적인 공안은 없다.
趙州 無字 화두를 看하여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宋代의 간화선은 五祖法演( ? --1104)의 법문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으며, 大慧宗 에 의해 간화선으로 대성되었고, 無門慧開(1183--1260)의 {無門關}에서 수행체계가 완성되었다.
대혜의 公案禪에 대한 주장을 {大慧書}등을 통해서 살펴보자. 대혜는 한결같이 趙州의 無字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하고 있는데,{大慧書} [答汪內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묻기를 '狗子(개)도 佛性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趙州스님은 [없다(無)]라고 대답한 공안을 참구
하시오.부디 쓸데없는 사량분별의 마음을 [無] 위에 옮겨 놓고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눈 깜짝할 사이에 사량을 초월한 곳에서 (生死의 분별심인) 一念이 打破 된다면 그것이 三世에 통달하는 것입니다. ( {大正藏} 47권 928.下 )
{大慧書} [答榮侍郞]에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아직 이렇게 되지 않으면 먼저 세간의 번뇌를 思量하는 마음을
思量이 닿지않는 곳으로 돌려서 시험삼아 사량해 보시오.어떤 곳이 思量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가?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狗子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趙州는 없다(無 )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無]라는 한 자를
만약 당신이 어떤 技倆이 있으면 잘 按排해서 조절해 보시오.計較 분별해 보시오.그리고 思量하고 분별하고,안배(조절)해서
無字를 처치할 수가 없고 다만 가슴속에서 고민하다 心中이 괴로움을 느낄 때야말로 정말 이것이 좋은 시절이 된 것입니다.
제 8識도 계속해서 작용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自覺했을 때 내던져 버려서는 안됩니다.단지 이 無字위에서 화두를 들고 공부하도록 하시오.工夫에 工夫를 거듭할 때 生處에 스스로 익어가고 익은 곳에서 스스로 홀로 살아나게 됩니다.
( {大正藏} 47권 939. 中)
대혜가 無字公案을 참구하도록 하는 것은 生死心인 일체의 사량분별을 끊고 思量이 미치지 못하는 그 곳에서 근원적인
자기의 자각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선수행의 방편으로 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래서 대혜의 看話禪은
生死를 타파하고 불안의 疑心을 끊는 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즉 {大慧書} [答陳少卿]에 다음의 일단을 살펴보자.
원하건대 당신은 오로지 疑情이 깨어지지 않은 그 곳을 향해서 참구하도록 하시오.行住坐臥에 정신을 느슨히 풀어놓아서는
안됩니다.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狗子도 佛性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趙州는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조주의 無야 말로
생사의 번뇌를 타파하고 불안의 의심을 끊는 (지혜) 칼인 것입니다.이 칼자루는 다만 각자의 손에 있습니다.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손을 쓰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반드시 자기 자신이 손을 써서 타파하고 끊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大正藏} 47권 923. 上)
대혜는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을 억누르고 조주의 無字 화두를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따라서 조주의 無字 公案은 知見會解를 때려 부수는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대혜의 간화선은 일체의 차별심과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최선의 참선수행의 방법이며,이러한 공안 참구로서 일체의 思量 分別이 일어나지 않은 근원적인 자기의 本來心을 깨닫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간화선의 공안은 자기의 본래심인 불성을 照顧해 보는 道具인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대혜는 간화선의 참구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해야 할 것이 간화선의 禪病에 떨어지기 쉬운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즉 [이 無를 깨달으려고 하면 有無의 상대적인 의식을 일으켜서도 안되며,
도리로서 알려고 해서도 안되며,
의식으로 사량해서 판단해서도 안되며,
눈썹을 치켜올리고,눈동자를 굴리는 곳에 머물러서도 안되며,
말하는 그 곳에 생활을 삼아서도 안되며,
無事 그 가운데 머물러서도 안된다.
제시한 공안에 대해서 바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문자 가운데서 그 증거를 찾으려 해서도 안된다.]라고 하는 공안 참구의 주의 사항이다.
고려시대의 공안선을 도입하여 고려불교 선종의 새로운 선불교 실천을 주장한 普照知訥은 {看話決疑論}을 저술하여
이것을 看話十病으로 규정하고 간화선 수행자들을 주의시키고 있다. 지눌이 {간화결의론}에서 看話禪病의 근거로
의용한 것이 {大慧書}인데 그 가운데서 [答張舍人狀元]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의 시키고 있다.
情識이 타파되지 않으면 心中의 불길이 타게 된다.
이러한 때 오로지 疑問으로하는 화두를 들고 공부하시오.
예를들면 어떤 스님이 趙州에게 '狗子도 佛性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조주가 [없다(無 )]라고 대답한 이 無를 한결같이 들고 참구하도록 하시오.
왼쪽으로 갖고 와도 안되고 오른쪽으로 갖고 와도 안됩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려서도 안됩니다.
공안을 제기한 그 곳을 향해서 납득해서도 안됩니다.
玄妙한 領解를 해서도 안됩니다.有나 無로 추측해서도 안됩니다.
眞無의 無라고하는 臆測을 해서도 안됩니다.
無事 그 자체 가운데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擊石火閃電光處를 향해서 이해해서도 안됩니다.
곧바로 마음의 작용이 없이 마음의 行處가 없을 때 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해서도 안됩니다.
이렇게 참구할 때 좋은 공부가 됩니다.곧바로 쥐가 소의 뿔속에 들어가 進退할 수 없을 때,
곧바로 미혹함과 전도망상이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大正藏} 47권 941. 中 )
또 {大慧書} [答宗直閣]에도 다음과 같이 看話禪病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시키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因緣에 應하할 경우 다시한번 차별의 境界에 만났다고 느낄 때에는 다만 그 差別의 장소에 대하여 狗子無佛性의 話頭를 들고 參究(看)하시오.번뇌를 털어버리겠다는 생각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情塵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差別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佛法의 생각을 일으켜서도 안됩니다.
오로지 狗子無佛性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시오.
오로지 이 無字 하나만 들고서,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만약에 깨달음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으면,
境界도 차별하고 佛法도 차별하고,情塵도 차별하고 ,
狗子無佛性話頭도 차별하고,
中斷하는 경우에도 차별하고,
중단하지 않을 경우에도 차별하고,
情塵에 惑亂되어 身心이 安樂하지 않은 경우도 차별하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차별해서 잘 아는 것도 차별하게 된다.
이러한 病弊를 없애고저한다면,오로지 無字를 참구하도록 하시오. ( {大正藏} 47권 933. 中 )
대혜는 간화선의 수행에서 일어나기 쉬운 여러 가지 禪病을 지적하고
이러한 일체의 차별심,분별심이 일어나는 그 곳에 無字공안을 들어 참구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특히 看話禪에서 공안참구 목적을 대혜는 { 山警策}의 [以悟爲則] 즉 깨달음을 원칙으로한다는 말을 여러 곳에 인용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간화선의 목적처럼 看做하기 쉽게 되었다.
그래서 묵조선에서 간화선을 비판하기를 [깨달음을 기다리는 待悟禪]이라고 지적하면서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혜가 看話禪의 수행에서 禪病에 떨어지기 쉬운 여러개의 항목을 열거한 가운데 몇차례나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주의주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주체적인 無字 공안의 참구는 앞에서 대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不可思量底의 思量인 것이다.
즉 不可思量인 그 곳에 無字 공안을 들고 參究하는 것이기에 여기에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개입하거나
존재할 틈이 없는 것이다. 즉 待悟의 마음을 부정하고 開悟를 기대하는 마음을 일체 끊는 것이 無字公案을 들고 참구하는 것이다.
또한 待悟의 마음뿐만 아니라 문자나 이치로 無字 公案을 이해하려는 마음 ,
有無의 상대적인 차별심이나 일체의 사량 분별심이 無字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순간 일시에 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이 無字야 말로 [生死의 煩惱妄念을 타파하고 일체의 疑心을 끊는 지혜의 칼]이라고하며
,[일체의 나쁜 知見會解를 쳐부수는 무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는 無字 公案을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의미를 {大慧書}[答湯丞相]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다만 언제라도 마음을 텅 비워서 일상생활의 할 일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고 경계를 만나거나 인연을 만나면
때때로 무자 화두를 들고 참구하시오. 빨리 어떤 효과를 구해서는 안됩니다.
무상의 도리를 연마하고 궁구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을 법칙(기준)으로 합니다.
(硏窮至理 .以悟爲則) 그러나 제일 먼저 마음 속으로 깨달음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대하면 기대하는 마음에 道를 볼 수 있는 눈을 가리게 되어
급히 서두르면 급히 서두를수록 지체(遲滯)되고 맙니다.
오직( 조주 無字) 話頭를 들고 참구하시오.화두를 들고 참구하는 그 곳에
곧바로 生死의 번뇌심이 끊어지니 이곳이 즉 자기의 집에 돌아가 편안히 앉아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 이를 수가 있다면, 자연히 옛사람의 여러 가지 방편법문을 알아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저절로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大正藏} 47권 941. 下 )
대혜는 무자 공안을 들고 참구하는 그 곳이 다름아닌 生死의 번뇌심이 끊어진 歸家穩坐之處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大慧書}[答李寶文]에서도 [歸家穩坐底路頭]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즉 선불교의 목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본래심인 집에 되돌아가서 일체의 근심걱정과 불안(苦 )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안전하게 일상생활을 전개하는 安心立命의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행상의 구조는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정신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집(家)을 중심으로 가정생활과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한 동양인들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집인 것이기에
밖에 외출했다가 집으로 되돌아 옴은 일체의 불안과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十牛圖}에서도 소를 찾아 나갔다가 소를 찾아 소를 타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騎牛歸家]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동양종교의 본질을 숲의 종교로 파악하여 논하고 있는데, 여기서 숲의 종교의 구조를 장황하게 소개할
여유는 없지만, 집(家)과 숲(자연,農土)과의 구조적인 관계에서 살아가는 동양인의 사고에서 歸家穩坐가 선불교의
安心立命處로 이루어진 정신만을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대혜는 조주의 無字公案을 참구하는 看話禪을 개발하여 근원적인 인간의 佛性을 깨닫고
개발하여 安心立命處를 얻도록 하는 송대의 새로운 선수행론을 제시한 것이다.
고려시대 대혜의 {書狀}에 의거하여 새로운 간화선을 도입한 普照知訥(1158--1210)은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을 주장하면서 {看話決疑論}을 저술하였고, 그의 제자 慧諶(1178--1234) 역시 {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학인들이 조주 무자화두를 올바르게 참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저술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太古普愚. 鏡虛.滿空선사도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법을 설하고 있다.최근에 입적하신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선사도 모두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방법을 小艶의 詩를 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小艶의 詩는 조주의 무자공안을 참구하는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간화선의 수행구조에 많이 응용되고 있으며,
五祖法演선사가 소염의 시를 陳提邢에게 설하는 말을 창밖에서 듣고 원오극근선사가 깨달음을 체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면 小艶의 詩가 公案禪(看話禪)의 參究에 어떻게 응용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유명한 [小艶의 詩 ]원문은 다음과 같다.
一段風光畵難成 : 저 큰 저 댁의 우아한 풍경, 그림으로 그릴 수가 없어라 !
洞房深處陳愁情 : 지금 저 깊숙한 여인의 방에서 사랑에 괴로워하는 여인이 있네.
頻呼小玉元無事 : 그녀는 자주 소옥아! 소옥아! 라고 시녀의 이름을 부르지만 원래 그에게
시킬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只要檀郞認得聲 : 사실 그녀의 속샘은 소옥아! 라고 부르는 자기의 목소리를 밖에있는
낭군이 알아 듣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보통 선종에서는 이상의 [小艶의 詩 ] 가운데 뒤의 두 구절만을 주로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앞의 두 구절은 잘 사용하지 않고 있어 생소한 느낌이 든다.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小玉이는 唐代 楊貴妃의 侍女 이름이다.
楊貴妃는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낭군(안록산)에게 자기의 존재와 현재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서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暗號로 侍女인 小玉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아무리 부른다고 해서 그 누가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양귀비가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면 지금 玄宗은 돌아가고 자기는 지금 혼자 있다는 자기의 현재 상황을 전하는 약속이 두 사람 사이에 암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있는 낭군에게 시녀 소옥이 이름을 불러서 자기의 현재 상황과 자기의 목소리 들려주려고 별 볼일도 없는 시녀 소옥이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양귀비의 입 밖에로 엉뚱하게 튀어나온 [소옥아!]라는 소리와 양귀비의 마음 속에 [님에게 소식을 전하려는 의지]를 간화선의 수행에서는 言語文字와 근원적인 本來心에 비유하고 있다.직접 만나서 대화를 할 수없는 낭군에게 안 방 깊숙이 앉아 있는 미인이 창 밖에 있는 낭군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킬 일도 없는 시녀 小玉이의 이름을 하염없이 불러대어 자기의 존재와 현재 상황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즉 趙州의 無字 公案을 參究할때 의심으로 응어리진 話頭를 [無 !]라고 하면서 마음의 소리가 튀어나오는 것은 [ 님을 그리워(의심)]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소옥아! 소옥아!(無!)] 라고 불러대는 목소리인 것이다.
그리고 [ 無 ! 無! ] 라고 하는 그 자기의 본래심의 목소리를 자기의 본래심이 알아듣도록(自覺) 하게하는 것은 ,소옥아! 라고 부르는 그 소리를 밖에 있는 낭군이 알 아 듣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주의 無字 공안을 참구한다고 하는 것은 無字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양귀비가 侍女 小玉이에게 시킬 일이 있어서 소옥아! 소옥아! 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래서 公案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인 것이다. 즉 자기의 본래심의 집에 들어가기 위한 [無字]이다. 本來心의 자기 집 대문에 [無!]라는 기왓조각으로 두드리고 깨달음으로 들어가 安穩하게 앉아 安心立命의 삶을 가꾸는 것이 간화선 수행에서
공안을 참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無!]라는 그 法音의 소리를 듣는 또렷한 자각이 자기를 본래심(깨달음)의 경지에서 지혜로운 살림살이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철저한 자각을 통해서 자기 변혁과 頓悟의 전환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의미없는 無字공안을 [無 ! ,無!]라고 소리만 아무리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자각이 없는 행위는 자기를 깨달음으로 전환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본래심의 자각이 없는 선수행은 멍청한 범부의 일상생활이 되는 것이며, 沒自覺은 無記에 떨어지고 空虛에 타락된 엉터리 수행이 된다. 대혜가 이러한 선 수행자를 [黑山鬼窟]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배척하며, 또 [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魂不散底死人)]
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傳燈錄} 제14권 雲巖曇晟장에 [잠시라도 있지 않으면 죽은 사람과 같다.(暫時不在 如同死人)]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임제가 [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주장한 것은 자각적인 無位眞人의 지혜작용을 강조한 것이다.
* 이뭣고 ? 화두의 문제점.
그런데 요즘 한국불교에서는 [이뭣고?]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이 무척 많다고 한다.
이뭣고?라는 화두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주장되어 한국 선원의 수행자들이 많이 참구하는 화두가 되었는지 잘 알 수가 없으나,
간화선의 수행에서 볼 때 이뭣고? 화두는 올바른 간화선의 수행을 할 수 있는 화두라고 할 수가 없다.
이뭣고? 라고 의심을 하는 것이 화두라고 한다면 이것은 간화선의 올바른 수행구조와 정신을 잘 모르는 말이다.
간화선은 화두를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의심을 각자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도록 해야 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간화선의 의심은 본래심의 전환을 이루기 위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문제제기만 하고 본래심의 자각적인 깨달음으로 전향하는 자각이 없다면 영원히 깨달음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의심으로 이루어진 분별망념의 시간만 지속될 뿐이다.
또한 의심을 참구해서는 안된다. 이웝고? 의심을 일으키고 의심을 참구한다는 것은 깨달음으로 전향하는 본래심의 참구가 될 수 없고, 본래심의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인연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원오극근선사가 화두를 남의집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敲門瓦子)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의심을 일으키는 것은 [본래심의 자기 집으로 되돌아 가야지] 라는 문제제기만으로는 본래심의 대문을 두드릴 수 있는 기왓조각이 없으며, 깨달음의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조주의 무자화두의 경우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부처님은 {열반경} 등에서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스님은 왜 개한테는 불성이 없다고 했는가?라는 의심(문제제기)을 일으켜서, [無 ! ]라는 마음의 목소리를 참구하여
마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無! 라고하는 각자의 마음의 목소리는 대문을 두드리는 기왓조각과
같은 것이며, 無 !라고 하는 각자의 마음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자각하는 것은 본래심을 깨닫는 것으로 본래심의 집에
들어가 安心立命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조주의 無字 화두는 일체의 知見解會(알음알이)와, 分別心,疑心,
번뇌 망념을 끊는 지혜의 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많은 선승들의 설법집에는 [화두 드는법]이라는 법문에 조주의 무자화두 참구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無字에 대하여 있다 없다,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참으로 없다.虛無다.이와같이 이리 저리 두갈래로 분별하지 말고,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홑으로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 하고만 생각해라.
조주스님이 무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이다.
무자화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無라는 말을 천착하지 말고,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할지니라.
조주화상의 [板齒生毛]라는 화두도 이와같은 방법으로 의심을 참구하도록 설하고 있는데,이와같이 조주의 無字公案을
"어째서 無라고 했는고?" "無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하라"고, 이렇게 화두를 의심으로 참구도록 한다면
대혜종고가 제시하고 있는 간화선의 올바른 실천수행이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간화선에서 無字話頭를 참구하는 방법은 五祖法演선사가 제시한 小艶의 詩를 통해서 잘 이해할 수가 있다. 또한 많은 선사들의 설법에는 [萬法歸一 一歸何處]나 [庭前栢樹子], [麻三斤], [板齒生毛] 등의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고 있으나, 이러한 공안 역시 조주 無字 공안처럼 본래심을 깨닫도록 참구하는 공안이 아니라 正法의 眼目을 체득하도록 제시하고 있는 공안(화두)인 것이다.
4. 간화선의 공안공부 .----看經과 看話.
간화선에서 정법의 안목을 體得하는 公案은 일체의 경전과 어록이며,
학인들의 正法眼目을 체득하게하는 교육이 선지식의 語錄提唱과 上堂 示衆,小參法門 등이다.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이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 제시한 진실된 佛法을 배우고 익혀서 각자가
붓다와 똑같은 지혜와 인격을 구족하기 위해 수행하고 또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전개하는
이타행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붓다가 밝힌 불법은 45년간 중생교화의 설법을 기록한 대소승
경전에 모두 밝혀 놓고 있다. 깊은 삼매를 통해서 체득한 연기의 법칙이나
因緣法,
三法印과
四聖諦
八正道,
六波羅蜜,
三學 등의 실천정신도
모두 대소승 경전에 전부 제시되고 있다.
불교는 붓다의 교설을 배우고 익히고 선의 수행과 실천으로 이러한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여 지혜와 인격을 형성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정신을 경전과 어록등을 통해서 看經 看話를 학습하여 본인이 각자 불법의 정신을 체득하도록 새로운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간화선의 참된 의미는 이러한 경전과 조사들이 깨달음을 체득한 선례(判例)인
공안을 공부하고 看(참구)하여 각자가 깨달음을 이룸과 동시에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지혜의 眼目(後得智)을 체득하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경전과 어록 등에서 수많은 정법의 안목을 체득한 事例와 判例(公案)를 공부하여 스스로 간접체험을 체득하고
자신이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도록 하는 공부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매사가 선각자들의 체험과 깨달음으로 제시한 생활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서 우리들 각자의 실생활에 지혜롭게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들면 자동차의 운전을 배우고 익혀서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나,컴퓨터,전화기,복사기 등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 체득한 後得智로서 생활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간접경험과 직접경험.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이 세상의 많은 일을 직접체험을 통하여 많은 지혜를 체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직접체험을 통하여 체득한 지혜야 말로 완전한 지혜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인간은 무상한 존재이고 시간과 공간의 한정을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에 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세상의 모든일을 직접체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과 부모 등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가르침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배우고 익혀서 자의 직업이나 생활이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항상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이나 어록을 배우고 익히는 것도 이러한 성현의 체험적인 지혜의 말씀을 배우고 익혀 자신이 간접체험으로 많은 後得智를 체득하여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숲속(사바세계)에서 迷兒가 되었을 때 그 숲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중생의 괴로움(苦) 번뇌 망념(숲속: 사바세계)에서 자신이 자각을 통하여 스스로 해탈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수행하고 자각해야 할 것이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지혜의 이정표가
경전과 어록의 말씀이며 공안인 것이다. 잠시 이러한 입장에서 공안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사례를 통해서 살펴 보기로 하자.
※公案工夫의 事例
{坐禪儀}에 선수행의 기본이 되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일단이 있다.
一切善惡,都莫思量. 일체의 선과 악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분별하지 말라.
念起卽覺 覺之卽失, 妄念이 일어나면 망념이 일어난 그 사실을 자각하라.
妄念이 일어난 구 사실을 자각하면 妄念은 없어진다.
久久忘緣,自成一片. 이렇게 오래 오래 수행하여 일체의 인연이 없어지면
자연히 나와 경계가 하나가 된다.
此坐禪之要術也. 이것이 좌선수행의 요술인 것이다.
선수행을 통해서 [선악을 어떻게 사량하지 말아야 하는가?] 구체적인 실천방법을 모른다면 이 공안의 의미를 체득할 수가 없고 정법의 안목을 얻을 수가 없다.善惡,凡聖,美醜,등 일체의 상대적인 분별심, 차별심,중생심의 번뇌 망념을 초월하여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게 하기 위한 실천방법을 이 공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문제점)
선악의 차별심을 털어버릴려고 해서도 안된다.----拂塵看淨(北宗禪)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放棄. 放下着) 不可. ---- 無記. 沒自覺. 自己喪失.黑山鬼窟의 살림.
번뇌의 망념속에 살면서 그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른채 멍청하게 살고 있음.
(해결방법)
자신이 善惡,凡聖 등의 차별,분별,번뇌 妄念속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의 자각.-----念起卽覺
善惡,凡聖 등의 차별,분별의 번뇌망념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일체 번뇌 망념은 없어지고(覺之卽失)
근원적인 본래심(佛性)으로 되돌아 가게 된다.
번뇌망념의 자각을 통해, 각자 본래심으로 되돌아 갔을 때,善惡을 모두 함께 사량하지 않고
번뇌 妄念을 초월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 할 수있다. 善惡,凡聖 등의 상대적인 차별심, 분별심을 모두 한꺼번에
사량하지 않는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사량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의 근원적인 각자 본래심으로 되돌아 가는 것 뿐이다.
還歸本處. 歸家穩坐.安身立命處.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는 길(이정표: 경전,어록,공안)과 구체적인 방법(수행과 실천방법)을 모르고는 깨달음을 체득 할 수가 없다. 善惡,凡聖 등의 차별,분별심, 번뇌망념의 자각을 통해서 중생심에서 각자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一念相應하여 단번에 되돌아가는 것을 頓悟,혹은 頓悟見性이라고 한다.
5. 맺는말
이상 간화선의 수행을 본래심을 자각하는 조주 무자 공안참구와 정법의 안목을 구족하는 공안공부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다.
이러한 간화선의 수행구조를 전통적인 선수행의 입장에서 止觀으로 나누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止 (samadhi) : 寂止 ,寂滅, 無念으로 일체 번뇌 妄念이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의 寂靜으 | 로 되돌아 가는 것.
즉 眞如門에 들어 가는 것.根本無分別智를 얻는 要因이 된다. | 煩惱妄念에서 본래심의 涅槃 寂靜의 세계로 .
| 간화선에서는 趙州의 無字를 참구하는 수행.始覺이 本覺에 合致도록 함.
禪 |
+- 觀 ( vipasyna) : 慧 ,正見. 觀念修習하는 것으로 法相을 관찰하는 진리나 진실, 제 법을 관찰하는 지혜. 즉 生滅門에 들어가는 지헤로서 後得智를 얻는 요인이 된다. 간화선에서는 看經,看話의 公案工夫로서 정법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체득하도록 하며, 불법의 사상적인 深化와 다양한 方便智와 생활의 지혜(後得智)를 구족하게 하는 수행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선수행은 止와 觀이 나누어서 이루어 질 수 없으며 止觀이 하나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간화선 수행은 조주의 無字공안 참구는 각자의 본래심을 체득하고 일체의 사량분별과 괴로움(苦)에서 해탈할 수 있는
수행을 이룸과 동시에 看經과 看話의 공안공부를 통해서 正法의 眼目을 구족하여 正法眼藏을 구비한 수행자가 되어야
佛祖의 慧命을 繼承할 수가 있고,또한 다양한 후득지와 방편지로서 중생제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새 화두: 看話와 頓悟를 넘어
한형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철학)
*이 글은 간화선 중심의 한국 불교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불교와 선의 새로운 정체성을 모색하자는 취지의 글이다.
나는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에서 선의 전통과 화두의 방법을 적극적으로 기술한 바 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그 책부터 일별하기를 권한다. 그 가운데 특히, [책을 묶으며]에서 제시한 장문의
몇 논설들(20, 22, 29, 31, 32장)은 다음에 전개하는 논지의 토대이다.
1. 불교의 도구적 실용주의
불교는 실용주의에 철저하다. 다시 말하면, 절대적 진리나 유일한 방법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불교는 도그마일 수 없다.
불교의 어법은 "무엇은 무엇이다"가 아니고, "네가 무엇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유용할 것이다"의 형식을 취한다.
이 상대적 도구적 <言說>관이 종교적 종파적 갈등을 막으면서 불교를 유연하게 혁신시켜 온 힘이다.
가르침으로서의 불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므로--절집의 화법으로 말하면,
그것은 <方便>이지 <究竟>이 아니므로--불교는 결국 자신의 언설마저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교는 다시 없을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열반 시, "나를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등불로 삼아라"라고 했고,
선의 전통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과격한
신성모독을 제창할 수 있었다.스스로를 부정하는 힘이야말로 불교의 창조력의 근원이다.
2. 불교의 약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있다.
불교의 궁극적 관심은 윤회를 떠나 열반에 이르는데 있다. 그렇지만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은 단일하거나 절대적이지 않다.
불교는 구원이라는 관심의 궁극성과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에 이르는 다양한 <根基>의 현실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구체적 현실성>에 입각한 <특정하게 유효한 방법>들은 다양하고 또 상황적이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역사는 그 <方便>들의 발전과 재해석의 역사이다.
그와 더불어 불교의 약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보태졌고,
불교는 점점 더 유능한 의사가 되어 갔다.
그러나 2,500백년을 지내오면서 그 수많은 약과 노하우들 가운데 어떤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잊혀지거나 폐기되었고,
어떤 것은 발전되고 혁신되었으며, 어떤 것은 새로운 처방으로 창안되었다. 불교가 다른 지역에 전파될 때 이 약상자는
더욱 급격하게 요동치고 새로운 면모를 갖게 되었다. 그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았으면 불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시아는 물론 세계로 전파되는 생명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3. 禪은 불교의 혁신적인 처방전 가운데 하나이다.
선은 중국이라는 이질적 문화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불교의 처방전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불교의 역사에 있어
너무나 파져적이고 급진적이어서 인도 불교의 전통에서는 이를 도무지 불교의 이름으로 인정해야 하느냐는 의혹이 제기됨직한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자연적이고 현실중시적 사고가 인도의 정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유와 접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학자적 해석이고, 方便論的 관점에서 선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不立文字>로 제창되는 <敎學의 부정>에 있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근원적 틈을 <이론을 폐기하고 오직 실천만>을 통해서 메꾸어보려는 종교 운동이었다.
선은 더 이상 불교의 형이상학적 모델이나 심리학적 분석에 시간을 쪼개지 않고, 단도직입적 훈련을 강화시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을 표명했다. (*선은 이처럼 <이론적 교학의 발전>을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그렇지만 이것이 유일한 배경은 아니다.
선은 당대불교의 <비대해진 경제력>, <관료화된 제도>, <依他불교의 번성> 등을 근원적으로 반성하고
초기의 불교정신을 회복시키려는 종교혁신운동이었다.)선은 불교가 <지혜의 이름으로> 발전시킨 고원한 형이상학이나
심원한 심리분석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무명 속에서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지혜>를 버리고, <계율>을 밀치며, 오직 <선정>에 집중했다.
4. 禪은 三學 가운데, <지혜>와 <계율>의 전통을 버리고, <선정>에 집중했다.
불교는 진리에 이르는 방법으로 세 가지 길을 제시했다.
1) 戒 (계율), 2) 定 (선정), 3) 慧 (지혜). 선은 우선 3)을 버렸다.
선은 붓다의 四聖諦의 가르침에서 아비달마의 세계 분석,
中觀의 진리 변증과 唯識의 정신분석이라는 불교사의 장관을 "한가한 잡담"으로 돌린 것이다.
이들을 끌어안고 진리를 찾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선은 그 발전단계에서 1)을 상대적으로 경시하고 때로는 부정했다.
선은 <자신의 진리관에 의해> 기존의 격식과 관행을 무시했고,
이것이 우리가 선에서 곧바로 연상하는 고의적인 기행과 파격으로 나타났다.
선은 2)를 남겨 여기에 집중했다. 선이라는 이름이 선정을 말하는 <디야나(dhyana)>의 음사인 것은
바로 그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선가에서 禪을 디야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 판단이다.
선은 이론이 아닌 실천으로서의 좌선에서 출발했다, 혹은 선의 중심은 좌선이다.
5. 좌선에서 출발한 <禪>의 정체성 확립: 신수의 漸修에서 혜능의 頓悟에로
좌선에서 시작한 禪이 자각적 전통으로 정체성을 얻게 되는 것은 육조 혜능대이다.
선의 독자적 실천 목표와 방법이 이때 정초된다.
초기에는 禪定을 중심으로 한 신수의 북종이 우세했다. 그러다가 8세기 이후,
신회의 노력으로 혜능의 남종이 선의 주류가 되면서 이후 선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신수는 선정의 기본 목표와 방법에 충실한 漸修를 내세웠고,
혜능은 내적 자각을 통해 궁극적 차원에 一超直入하는 頓悟를 창시했다.
돈오는 육조의 선의 중심이 되었다. 이를 혜능의 고제인 남악회양과 그의 제자인 마조도일 사이의 일화에서도
선명히 읽을 수 있다. 마조는 처음 "좌선을 통해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남악은 그를 향해,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못 만들 듯이 좌선으로는 궁극에 이를 수 없다"고 질타했다.
놀란 마조가 가르침을 청하자, "진리는 좌선이나 격식에 매이지 않는 다"며,
그런 부자연스런 作法은 오히려 진리를 질식시키는 행위라고 일갈했다.
이 일화가 <선정(디야나)에서 독자적 선>으로, <점수에서 돈오에로> 향하는 결정타가 되었다.
6. 돈오의 발전과 화두의 등장
그동안 불교는 돈오를 이념으로 설정하지만, 그에 이르는 방법은 모두 점수에 의존했다.
그런데 혜능 이후 선은 방법까지 <돈오>에 의지하게 되었다.
방법으로서의 돈오는 이전의 불교 전통에서 일찍이 실험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렇게 제창된 방법은 워낙 미묘하고 난해하고 까다로왔다.
그것은 일상과 究竟 사이의 거리를 매우 가깝게 설정한 돈오의 필연적 결과이다. 누가 "저 강물 소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선은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발전되었다.
교단을 조직하거나 교설을 체계화하지 않았고,
더구나 일정한 방법적 지침에 대한 합의도 마련되지 않았다.
선의 발전은 오로지 선사들의 개성적 지도력에 맡겨져 있었다.
이것이 선의 영광이면서 또한 쇠퇴를 예비했다.
선은 <不立文字>를 기치로 내건 이상, 교리와 방법을 체계화할 수 없었다. 선의 생명이 活潑潑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선이 唐대의 융성을 지나 쇠락의 조짐을 보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文字로 기록하고> <經典으로 확정할> 필요를 다급하게 느꼈다. {傳燈錄} 등 선의 역사서들과, {碧巖錄} 등 선의 방법론으로서의 <화두>가 이렇게 출현했다.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역사의
기록과 화두의 제창은 위기의 시대, 선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한 것이지만, 또 달리 보면 선의 정신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타협이다.
7, 정리: 불교와 선, 그리고 화두와의 관계
화두는 선의 전통에서 돈오의 방법으로 제시된 것 가운데 하나이다.
화두는 불립문자를 표방한 선의 전통 위에 있으면서도, 한편, 그동안 선이 발전시켜 온 다양한 대안적 교설과
수련까지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과 화두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선의 전통은 화두 외에도 다양한 가르침을
담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정돈해 보고 가야겠다. 나는 <불교와 선, 그리고 화두와의 관계>를 이렇게 읽는다.
1) 불교와 선의 <정신>은 일치한다:
선은 불립문자를 표방했지만, 불교 전통의 이념과 정신을 공유한다. 그 차이는 번잡하냐 간명하냐, 논리적이냐 직각적이냐,
산문적이냐 경구적이냐의 <정도> 혹은 <문체>의 차이일 뿐이다. 선은 불교의 근본 정신을 벗어나지 않는다.
초조 달마 이래 고승들의 수많은 수련지침서가 있다. 그것은 대부분, 선의 이념과 방법의 개략을 <간명하게> 핵심만 추려
적은 것이다. 달마의 {二入四行論}은 선 또한 언설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실천> 이전에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門路의 次第를 설정했다. 行入 이전에 理入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구체적 실천에 앞서 과연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무엇을 향해, 그리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달마의 {二入四行論}과 황벽의 {傳心法要}, 그리고 一宿覺의 {禪宗永嘉集}은 마명의 {大乘起信論}이나
원효의 {金剛三昧經}과 동일한 계열의 것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을 가리켜, "수천년 교학의 발전 단계에서 지나치게 비대한
교학의 전통이 오히려 궁극적 관심에 이르는 길을 막고 있으니 이를 핵심만 간추려 불교의 문법 혹은 설계도를 제시한 책"이라고 말했다. 선은 불교가 교학에서 응축으로 돌아서던 바로 그 진행의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선의 <암묵적> 교학은
불교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2) 불교와 선의 차이는 그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 있다:
그 방법 가운데 초기의 점수는 이전의 불교 전통과 연속되어 있지만,
후기의 돈오는 이전과는 다른 독창적 혁신이다.
- 연속: 선의 교학적 간명화는 직접적 수련에 몰두하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그래서 처음 선은 <계율>과 <지혜>보다 선정을 중시했다.
선의 초기, 漸修는 이전의 불교전통을 충실히 지킨 것이었다. 가령 신수의 게송은 고타마 붓다 이래 호흡법과 명상법,
그리고 九想觀 등의 다양한 법식, 그리고 그를 집대성한 {淸淨道論}의 연장선에 있다.
이 점에서도 선은 이전의 불교 전통과 별다른 단절이라고 볼 수 없다.
- 단절: 선의 독자성은 <돈오의 방법>을 제창한데 있다. 혜능을 기점으로 頓悟를 기축으로 하게 되면서
다양한 수련법이 제시되었다. 이 돈오의 방법은 선장마다 나름의 개성을 보이는데, 그 기본 발상과 토대는 비슷하다.
그것은 <무명의 오염된 세계와 열반의 궁극적 세계의 차이>를 일거에 뛰어넘으라고 권한다.
그 전통은 부처와 중생 사이의 거리를 매우 근접시켜 놓았다.
이에 이르기 위해 혜능은 "부모 이전의 네 자신의 얼굴," 즉 자신의 영원한 본성을 즉각 낚아채라고 권했다.
마조는 "네가 곧 부처다(心卽是佛)"이라고 했으며, 임제는 "네 정신과 육체가 바로 절대이다"라고 말하고,
운문은 "부처가 나타나면 몽둥이로 때려라"라고 일갈했다.
이전까지 불교는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백억겁에 걸쳐 善根을 닦고 諸業을 정화해야 비로소 엿보일까 말까하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돈오의 선은 이 거리를 일소에 부침으로써 명실상부한 독자적 전통을 구축했다.
이 길은 위태롭다. 지속적이고 가열찬 수련의 의미 자체를 무화시키고 作用是性, 인간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낙관론의
비도덕적 위험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내가 간화와 돈오의 방법을 비판하는 근본 취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화두는 돈오의 발전이면서 위축이다:
돈오의 길은 오직 훌륭한 스승의 지도가 인도할 수밖에 없다. 이 방식은 근본적으로 私的이다.
제자는 자신의 내적 본질의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일상적인 지평을 확인하기 위해 홀로 고투하고,
스승은 이를 지켜보면서 빗나간 점을 바로잡고, 뒤쳐진 걸음을 재촉하는 역할을 했다. 줄탁지기.
이 수련법은 스승의 개성이나 산문의 가풍은 있어도 선의 이름에 걸맞는 보편적 방법론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다.
뛰어난 스승이 없을 때, 그리고 스승에 대한 제자의 믿음이 굳건하지 않을 때, 돈오의 수련은 위축되거나 소멸한다.
唐末, 선은 그 쇠퇴기를 맞아 돈오의 방법을 사적 관계에서 공적 관계로, 주관적 방식을 객관적 정식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에 있었던 활발발한 거래가, 선이 그렇게 꺼리던 문자로 정착되어 <公的>인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화두를 公案이라 부른다. 간화선은 일찍이 과거에 있었던 어느 스승과 제자 사이의 역사적 일화를 지금 나의 상황으로
감정이입시켜 수련해나가는 것이다.
중간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역사적 개관을 해 본 것은 "<화두>가 선의 전통 가운데
<돈오>의 한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선의 전통을 대표하거나 집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화두법은 불교의 약상자에 들어있는 처방전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유일하고,
가장 뛰어난 수련법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 뛰어난 선장의 지도를 따라 화두를 지속적으로 파지하면 어느날 우리를 옭죄고 있던 漆桶이 부서지고 乾坤이 다시 열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화두법은 <준비를 마친>
"최상승의 예외적 근기에게만 유효한 처방"이지, 보통의 학인이나 末法의 중생들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절대적 처방이란 없다. 모두에서 말한 대로 불교의 모든 언설과 방법은
늘 <어떤 것에 대해서>라는 病根을 전제하고,
또 <누가 하느냐>는 根基를 고려하는, 方便적 입각을 떠나서는 안된다.
나는 여기에 아울러 시대와 역사와 상황이라는 조건을 더 보태고자 한다.
8. 화두에는 <의미>와 <무의미>의 두 차원이 공존한다
이제 방법으로서의 화두를 살펴보기로 하자.
"화두에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물음이다. 전통적으로 선가에서는 화두에 의미가 없다고 역설한다.
의미를 확인하거나 부여하는 순간, 화살은 십만 팔천리 서역으로 날아가고, 뒤통수에는 몽둥이 세례가 터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면적 진단이다. 의미의 층위는 흑백의 양단을 갖는 것이 아니고, 아날로그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나는 화두가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주의 <無>는 확실히 <무의미>를 향해 있다. <뜰 앞의 잣나무>는 <의미>쪽에서 읽을 수도 있고, <무의미>쪽에서 읽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마조의 <心卽是佛>이나 <心不是佛>, 그리고 <非心非佛>은 분명히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분류는 상대적일 뿐, 화두는 예외없이 <의미>와 <무의미>의 차원을 동시에 갖고 있다.)
화두에 내포된 의미와 무의미의 층위는 이렇다.
1) 의미: 전통적으로 이 측면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는 화두를 <해석>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선가의 전통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心卽是佛이나 心不是佛, 非心非佛은 불교가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간명한 그렇지만 파격적인
<진술>이다. 이 진술은 頓悟, 즉 구원과 일상이 하나이고, 涅槃과 無明이 둘이 아니라는 돈오의 진실을 표명하고 있다.
(*물론, 그 <경지>를 어떻게 성취하느냐는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심즉시불이라는 <화두>의 <의미>라면,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그 교설은 불교 일반의 그것과 취지를 같이 한다. 즉, 심즉시불은 아비달마가 제창하는 세계에 대한 비인격적 인식이나,
色卽是空의 般若 지혜, 그리고 華嚴의 法界에서 원효의 一心과 지눌의 眞心을 통관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덧붙일 수 있다. 화두와 선을 알려면 불교 일반의 전통을 알아야 한다!)
화두는 이 점에서 불교 일반의 전통과 선의 간명한 취지와 다른 나름의 독자성을 갖는다고 보기 힘든다.
문제는 화두의 <무의미>의 차원이다.
2) 무의미: 돈오는 不二의 교설이고 방법이며 경지이다. 그 절대는 주객의 분리에 입각한 인식론적 분절을 극히 경계한다. 인식이란 열반의 과정에 개입하여 고통을 산출하는 無明의 활동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미>를 지우려는 성향을 갖는다. 선에서 채용하는 <역설>이나 파격적 <언행> 등은 바로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과 情動은 好惡와 욕망에 의해 생산되고 증폭된다는 뜻에서 선은 때로는 무의미한 언설로, 때로는 역설적 모순으로, 때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때로는 몽둥이나 할의 직접적 행동으로 그 의식=무명의 <준동>을 근원적으로 차단시키려 한다.
화두는 일상의 에너지가 分別(vikalpa)로 전이하여 외곡되고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공적으로 설정한 차단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차단이 깊어지면 산란으로 흩어지던 에너지들이 지속적 <집중>을 통해
내면의 본질인 <本來面目>과 직접 조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화두의 무의미한 차원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9. 화두는 과연 가장 탁월한 수련법인가
나는 여기서 화두의 효용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1) 의미의 차원에서: 화두는 너무 간략하고 압축적이어서 거의 암호에 가깝다.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의 전적이나,
불교 일반의 교리를 통해 우회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화두가 적극적으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가에서 화두의 <무의미>의 차원을 집중적으로 강조한 것은 다음에 보듯 분명한 이유가 있지만, <의미>의 차원을 지나치게 경계하여 눌러놓으면, 예기치 않게 불교의 위축과 쇠퇴를 부른다. 그것이 언설의 역설이다.
이 대목에 대해서는 11절 이하에서 다시 논하려 한다.
2) 무의미의 차원에서: 화두는 의식의 분열을 차단하는 유용한 장치이다. 분명히 그렇다.
그렇지만 화두가 그 가장 효과적인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다.
나는 화두를 들기보다, 차라리 瑞巖의 화두처럼 차라리 <주인공>을 부르는 惺惺法을 권하고 싶다.
인간의 대부분의 활동은 대개 <무의식적 상태>에서 일어난다. 대개의 선사들이 인정하고 있듯이 각성된 상태에서
인간은 자신의 내적 본질과 분열되지 않고 일체가 되며, 그 상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주적 화해의 무도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 자신의 의식과 감정, 의지와 욕망의 미세한 흐름까지를
각성하고 제어하는 통제력이 더 긴요하다. <자신의 호흡>을 끈기있게 파지하는 <자각의 훈련>이 지속되면 {대승기신론}이
말하는 거친 오염들이 줄어들고 이윽고 미세한 의지의 충동들이 들여다 보일 것이고, 심신은 점점 더 헐거워질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여럿이다.
1) 자신이 그 효과를 즉각 알 수 있고,
2) 지속적 파지와 더불어 호흡이 안정되고 그와 더불어 내적 본질과의 일체감이 더욱 깊어진다. 이것은 점진적 과정,
즉 기본적으로 漸修의 방법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차이는 이 <자각>의 수련은 "삶의 공간,
즉 일상의 일과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실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을 결정적인 장점으로 제시한다.
바람직한 수련은 그 자체 <과정>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어야 한다.
이에 비해 화두는 그렇지 않다. 화두를 들 때, 그것은 에너지의 불건전한 전이를 차단시켜, 자신의 불건전한 욕망과 의지,
정감을 순화시키는 일차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효과는 더 이상 진전되기 힘든다.
그 지속적 파지는 일종의<자신감>이라기보다 <불안감>과 <초조감>으로 다가 온다. 왜냐?
화두는 그 자체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 진리를 보겠다는 초조감이 화두에 드는 자신을 늘 열패감에 시달리게 하고
자신의 존재를 무력하게 하기 쉽다. 그 제자리 걸음은 쉬 피로해지고, 흔들린다.
화두는 인위적인 공간을 설정하고 거기에 자신을 가둔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실적 삶의 공간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화두를 들면,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농사를 지을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상담을 할 수도, 물건을 만들 수도
없다. 이것은 산 속의 소수 예외적 수도승들에게 요청할 수 있는 일이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일정한 직무를 감당해야할 사람들의 수련법은 아니다. 화두는 그럴 경우, 역설적으로 "남의 돈을 세는 일"에 그치고 말 수 있다.
10. 화두는 最上乘의 根基에 맡겨야할 예외적인 수련법이다
지금까지의 지적은 일반적 근기에 해당되는 말이지, 상근기는 화두를 통해 일거에 자신과 세계의 어둠을 뚫고 상승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다. 물론이다. 그 점을 나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上上根基는 극소수의 예외이다.
일찍이 육조 혜능조차 자신의 길은 최상승의 근기에나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보통의 근기는 신수의 길을 따르라고 충고했다.
한국선의 비조 지눌 또한 자신 교학을 통해 <소식>을 깨쳤고, 看話決疑를 보편적이 아니라 예외적으로 인정했다.
이 점을 한국불교는 깊이 새겨야 한다.
11. 最上乘의 근기라 하더라도 三學의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최상승의 근기란 어떤 사람인가.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한다. 육조 혜능이 일자무식이었다는 것은
선의 전승이 지어낸 말이거나 곡해한 말이다. 그 말은 혜능이 불교 교학의 복잡한 언설에 휘둘리지 않고, 그 핵심을 단번에
장악하는 탁월한 이해력의 소유자였다는 말이다. 지나가는 승려가 외우는 {金剛經}에 한 번에 마음이 밝아졌다는 {壇經}의
말을 잘 음미해야 한다. 그 이해력은 물론 문자적 이해의 박식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불교의 이념과 목표,
그리고 방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선의 역사를 돌아보면, 뛰어난 선사들은 교학에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만 해도,
덕산, 향엄, 운문, 수산이 있다. 전적을 주의깊게 뒤져 보면 적어도 반 이상이 교학에 정통하거나 깊이
몰두해 본 사람들일 것이다. 선이 불립문자라고 해서 문자와 언설을 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문자와 언설을 버리면 불교 뿐만 아니라 선도 또한 죽는다.
12. 교학을 버리기 위해서도 교학을 거쳐야 한다.
{莊子}에 이런 비유가 있다. 여기서 저기까지 가는 데는 땅을 밟고 가야 한다. 그런데 발자국 딛는 자리만 필요하니,
나머지 땅은 다 파버리면 그 사람은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냐. 없다. 마찬가지이다. 어떤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단계와
차제가 필요하다. 선은 교학을 버렸지만, 그것은 "교학이 너무 융성하여 그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는 상황"이었기에 버려야 했다.
그 단계를 건너 뛰어서는 안된다. 이 이치는 학생을 지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스승이 오랜 연구를 통해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면,
제자는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쉽게 배우면 제자의 성장은 멈춘다.
그는 스승이 갔던 길을 그대로,
아니 스승보다 더 고통스럽게 그 길을 다시 밟아야만
스승을 능가할 수 있다. 선의 불립문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선이 불립문자를 제창하자, 곧 이은 세대는 교학으로부터 점점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불교 교학뿐만 아니라 선의 생명력까지 고갈시켰다. 적어도 한 수행자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고, 또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길 가운데,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적절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서산대사가 {禪家龜鑑}에서 적은 대로, "부처의 마음(禪)과 부처의 말(敎)은 다르지 않다." 종밀과 지눌은 화엄의 교학으로
선의 실천을 떠받치려 했고, 서산의 문하는 선의 소의경전으로 {금강경}을 생각하기도 했다. 敎와 禪은 더 이상 배치되어서는
안된다. 화두의 <의미>의 차원은 화두를 든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화두>는 빙산의 끄트머리만 알려줄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E=mc2을 말할 때, 이 정식에 담긴 메시지는 죽을 때까지 이 공식을 안고 있는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의 기초부터 차근차근 밟아 나간 이후에 그 이해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화두 또한 그렇다. 무턱대고 앉아
화두를 들고 앉아 칠통이 깨지기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기다리던 한 소식은 오지 않는다. 온다면 그건 마군일 것이다.
13. 현대인들에게 불교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절간을 찾을 때 안타까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는 스님네들이 초등학생이든, 대학생이든, 회사원이든 장사꾼이든 개의치 않고, 다만 화두를 붙들고 <강의>할 때가 제일 곤혹스럽다. 그러면서 "불교는 본시 없는 것이야. 네 마음이 곧 부처야"라고 설법하는데,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싶다. 그럼 절간은 왜 있고, 사람들은 왜 이다지 고통스러운가. 나는 우리 불교가 고타마의 실존적
고뇌와 그의 일생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그 원인, 그리고 그 해법에 대해 그야말로 <근기>에 맞게, 감동적은 아니더라도
재미있게라도 설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올바른 좌선의 방법과 그 효용에 대해, 그리고 서방 정토의 구원에 대해,
그리고 불교 전통의 화려한 교학에 대해 들려 주었으면 싶다. 그래야 무지로 고통받고 있는
말법 중생들이 작은 희망의 불씨에 환희하며, 佛法을 향해 發心할 것 아닌가.
병이 달라지면 처방도 달라져야 한다. 시대가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졌다. 불교는 선 이후 1000년을 새로운 혁신을 통해 거듭나지 못하고 있고, 화두 또한 천년을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지금은 불교와 선이 살아있는 전통으로 사람들의 의식과 관념, 문화와 생활을 지배하고 있던 호시절이 아니다. 불교는 다른 종교적 실천적 전통들과 한 자리에서 그 정당성을 승인받아야 하는 자유경쟁시대를 살고 있다. 무엇보다 사태를 어렵게 하는 것은 현대 사회와 그 문화가 궁극적 구원에 대한 종교적 관심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근대는 욕망을 그 자체로 승인하고,
그에 합당한 물질적 제도적 기반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기치 하에 발전시켜왔다. 근대 이후 인간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잊혀졌다. 현대는 인간의 욕망을 규율하거나 심의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인정하며, 모든 관심과 노력을 이들을 충족시켜줄 공리주의적 기제를 확장하는데 맞추었다. 그 <위대한 약속>의 기치 아래 종교적 영성과 도덕적 수련은 제반 전통적 가치와 더불어
잊혀지고 폐기되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 다른 종교와 더불어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러므로 이 적나라한 색계(色界)의 도도한 도전 앞에서 불교가 무엇으로 대적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찾아내야 한다.
14. 지금은 화두의 혁신과 선의 재구축이 필요할 때
나는 이 도전 앞에서 화두는 너무 좁고 무력하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활로는 <일상>과 <합리>의 지평 위에서 구축될 것이라고 믿는다. <대화>와 <설득>을 통하지 않고는 길이 없다. 이 든든한 바탕 위에서 비로소 초월과 불합리의 문을 <아주 조금> 열어놓아야 건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붓다께서 그리하셨다.
이것은 불교와 선의 초점을 頓悟가 아니라 漸修 위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돈오를 잊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한 <소식> 하자고, 온 청춘을 다 바쳤는데"를 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 우려하고 경계해야할 욕심이요 아만이다. 頓悟는 없다. 오직 漸修만이 있다. 그리고 그에 따른 漸悟만이 있다. 그리고 그 漸悟에 정직해야 한다. 정직해야만 자신의 작은 깨달음이나마
전할 수 있고, 그런 공감대 위에서 불교가 이웃을 향해, 그리고 미래를 위해 발언할 수 있다.
15. 화두를 넘어 선으로
그러기 위해 나는 화두를 버릴 것을 요청한다. 물론 다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화두는 선의 전통의 객관화이다.
이 객관화된 것을 <과감하게> 해석의 지평 위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선의 발전과 불교의 전통이라는 거시적
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방법으로서의 화두는 최상승의 상상근기의 돈오를 위해 <선택으로> 남겨두자는 것이다.
1) 화두가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미약해진 <선>을 활성화시켜야 한다. 나는 선의 정체성을 <좌선에 축을 둔 자신과 일상의 자각> 위에 세울 것을 요청한다. 선은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고통받고 있는 심신에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효과가 있다. 그 효력은 해외에서까지 널리 인증받고 있다. 그 장점은 또 있다. 그것은 일정한 종교적 도그마의 장애물이 없다. 그것은 유구한 불교 정신인 실용주의적 정신의 산물이다. "네가 네 자신이 지우고 환경이 부추긴 심신의 고통과 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면 이렇게 해 보라." 선이 <좌선>을 더 정교화시키고, 이에 일상의 지속적 자각을 보태는 체계를 재구축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대 문명의 고통스런 상황을 구원하는 중심으로 승격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교의 오랜 전통이 발전시키고 정착시킨 수련의 지침들을 적극 채용해야 한다.
2) 다음으로 화두와 돈오의 선이 빠뜨리고 건너뛴 <계율>을 다시금 살려야 한다. 계율이 없다면 불교는 없다. 그 필요성은 자기
규율과 사회적 규범이 지도력을 잃은 지금 더욱 절실하다. 선도 초기에는 그 실천적 지향으로 인해 율종의 사원에서 기거했다.
그것이 돈오의 발전과 더불어 희미해진 것이다. 나는 불교의 출가자 중심의 계율을 과감히 현실에 맞게 고쳐 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율이 너무 높게 엄격하면 삶이 그에 배반하므로 中道를 갖추어야 한다. 재가자에게도 계율이 필요한데,
이 둘 사이를 너무 크게 벌려 놓아서도 안된다.
16. 선에 <지혜>를 입히기
3) 마지막으로 <지혜>이다. 선이 주창한 불립문자의 깃발을 이제는 내려야 한다. 원효는 진리가 문자와 언설을 떠나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구원이 문자와 언설에 의지하고 있다(依言眞如)"라고 했다. 언어를 떠나면 불교는 생명력을 잃는다. 아니,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잃어버린 언어를 회복하지 못하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
- 이 말은 발만 대장경 자체를 다시금 교과서로 삼자는 말이 아니다. 三藏의 바다 가운데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취하며, 어디를
낮추고 어디를 세워야 하는지 재 보기 위해서 <연구>부터 활성화되어야 한다. 불교 교학 연구는 취약하기 이를데 없다. 전각을
세우고, 요사채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의 재원 가운데 대체가 <연구>를 진작시키고, <인력>을 키우는데 쓰여야 한다.
- 교학 연구는 훈고에 그쳐서는 안된다. 자료를 정리하고, 경전을 번역하며, 디지털화하여 제공하는 것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위에 이런 한문이나 산스크리트 팔리어 원전들이 <이해되고> <해석되어> 자신의 언어로 되새김되어 교통 가능한 현대어로 제공되어야 한다. 그렇게 <장악된> 연구만이 쓰임새를 가질 수 있다. 그렇게 장악되어야 取捨가 정해지고, 새로운 중심의 형성도 가능하다. 여기서 분야는 계율과 선정, 지혜 모두를 포괄한다.
- 이 해석학적 작업은 현대적 화두에 자연스레 결합될 것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근대 이후진보의 위대한 약속이 발진시킨 산업화와 개발의 과정에서 잉태된 개인과 사회, 문명의 여러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나는 그 두 축을 인간의 <소외>와 생태의 <환경>으로 축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그 도저한 정신주의적 전통으로 인한 전근대적성으로 근대 이후의 탈근대적 전망과 가장 잘 손잡을 수 있는 자원 가운데 하나이다. 불교는 문명의 어둠을 밝히는 시대적 소임을 자부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불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반성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기획해야 한다.
17.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
선은 태동 초기부터 자신의 생활을 자신이 감당해왔다. 백장의 일화는 감동적이다. 노구라 무리라고 제자들이 호미를 감추자 자신의 원칙에 따라 수저를 들지 않았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 그 자립 정신이 三武一宗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선을
소멸로부터 건져 올렸다. 선은 또 출가자와 재가자 사이의 구분을 없애 버렸다. 선이야 말로 불교의 초세간적 가르침을 일상 속에 구현하는 종교적 혁명을 만들어 간 것이다.
선에 철저하자면 먹물 옷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수행자들이 생활을 통해 자립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한국 불교는 산문 입구의 관람수입과 신도들의 보시 등 타율적 의존도를 크게 줄여야 한다. 타율적 의존도가 클수록 역설적으로 대중과의 연계가 희미해지고, 정재 운영의 효율성이나 투명성도 기하기 어렵다. 살림의 재원은 산중의 물산과 수행 공동체의 울력, 그리고 <선의 실천적 수련>을 가르치면서 얻어지는 자립형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금 구미에서 선 센터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다. 한국불교는 이들 모델을 요즘 말로 벤치마킹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 경계할 것이 있다. 나는 선 센터가 화두를 중심으로 하면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마음의 평화와 안식, 그리고 보다 활기차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선사들을 찾는다. 궁극의 구원은 그 다음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은 종교적 수련이 슈퍼마켓처럼 다양하게 실험되고 융합되는 시대이다.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름표를 확인할 수가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여기에 선의 자원은 단연 중심이고, 중심이 될 수 있다. 선 수행에 대해 구미에서 나온 수천권의 책이 서가를 메우고 있다.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은 <깊이는 없는지 모르나> 매우 구체적이다. 삶의 절실한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선의 지혜를 빌어 말하고 있다. 한국불교가 이 조류를 선진적이고 진취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 가르침의 중심 목표는 <한 소식>이 아니라, 일상의 활동을 의식과 감정의 분열 없이 자각적으로 비약없이 영위해 나가는 법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앞에서 말한 그동안, 화두와 돈오에 의해 버려지고 방치되어 있었던 불교의 풍부한 전통들을 다시금 빛 속에 불러내어
<선의 전통>과 결합시키는 일부터 범불교적으로 진작시켜야 한다. 거기에는 戒, 定, 慧 三學 가운데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 그들을 한 용광로에 넣고 담금질하여 새로이 시퍼런 칼날을 세워 번뇌와 망상을 能斷하고 영혼 깊이의 진정한 평화를 여는 불교의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사람들이 불교를 떠나고 있다. 옛적 조사들의 지나간 이야기를, 그것도 <의미>를 頓除하고 끌어안고 있을 일이 아니라, 황폐하고 궁핍한 물신의 시대에 오늘날 불교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정 "뱉아도 나오지 않는 뜨거운 쇳덩이처럼" <화두>로 품어야 한다. 불교를 미래의 대안이라 자부하지 말고, 불교가 대안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왜 간화선인가
-"간화선 수행과 공안공부의 문제"를 읽고
도법 (실상사 주지)
한국불교 중심수행전통은 간화선이다.
우리 모두는 간화선이 최고의 수행론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사스님의 법문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의 강사, 율사, 법사, 포교사들도 화두들고 참선하는 것만이 최고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본인도 머지 않아 참선하러 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현실적으로 화두참선만이 최고의 길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경향은 거스를 수 없는 도도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중공양을 간다고 하면 그 대상은 자연스럽게 선방을 떠올린다. 심지어는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몇 생의 업장이 녹아내린다'고 말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행자라면 선방수좌를 뜻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속내가 어떻게 되어있든 관계없이 선방 또는 토굴에서 참선한다고 하면 무조건 참되고 훌륭한 수행자라고 믿는다. 한국불교인들의 심성에 자리잡고 있는 수행에 대한
정서를 읽을 수 있는 대목들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요즈음은 예전 같지 않고 많이 변했다고 한다. 비록 불교계 내부가 예전과 다른 부분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오히려 더 높아지고 있다.특히 우리가 선망해 마지않는 선진 서구사회에서의 선에 대한 호응은 놀라울 정도라는 소문이다.
이런 흐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21세기의 대안은 禪'이라는 주장들이 무성하다.
실제 선에 관한 책들도 많이 출판되고 읽힌다는 이야기들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선을 실참실구하기 위해 행동하는 대중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도 시대의 흐름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주제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매우 높은 것이 사실이다.그런데 오늘의 자리가 마련되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숨막히는 답답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늘상 그래 왔듯이 또다시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덕담을 늘어놓는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한국불교(선불교)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언제인가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이 깊은 애정으로 한국의 문제를 다루면서 맞아죽을 각오로 글을 썼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본 토론자도 온갖 비난을 감수할 각오를 하는 심정으로 한국불교의 납자사회와 발제문에 대한 논자의 생각을 내놓을까한다.
먼저 선방문제에 대한 개인적 심정을 밝히고 공개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다.
첫째, 돌이켜보면 삼십여년 전 출가수행자로서의 푸른 꿈을 안고 선방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나름대로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선원에 들어갔는데 첫안거를 지내면서 심한 실망감에 빠졌다. 이유는 납자사회에 선수행을 위한 세계관과 철학,
그에 입각한 사상과 정신의 빈곤, 그리고 그 정신에 따른 윤리도덕의식의 부재함 때문이었다.
둘째, 뚜렷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으므로 회의와 갈등을 갖고 있으면서도 십오년정도 납자의 길을 걸었다. 그 동안 선수행자체에 대한 회의는 없었지만 납자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은 처음보다 더욱 확고해졌다. 그때부터 납자사회에 대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해왔다.그로 인해 수없이 많은 비난을 들어왔고 보이지 않는 피해를 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번 만나본 적도 없는 납자들에 의해 밑도 끝도 없는 비난들이 되풀이 되어왔다. 실망스러운 것은 비난만 무성할 뿐 지금까지 한 사람도 직접 찾아와서 문제의 내용을 확인하고 따지는 당당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납자가 정직하고 당당하지 못하다면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이 자리를 빌려 제안하고 싶은 것은 뒤에서 비난이나 하는 비겁한 태도를 버리고 당당하게 마주 앉아서 옳고 그름을 탁마하는 납자다움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셋째, 현실적으로 납자들이 갖고 있는 최고의 신념체계인 간화선을 주제로 한 만큼 반드시 납자들이 주체가 되어야 옳다.
너무나 당연한 임에도 불구하고 발제자 중 납자가 한 분도 없다는 것은 매우 실망스럽다.
오늘날 안팎의 우리 현실이 어떠한가. 안으로는 한국 불교인이라면 너나없이 선이 최고의 길임을 믿고 있다. 밖으로는 현대 서구 사회 대중들이 선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게 나타나고 있다. 사실이 이렇다면 선의 위대성과 중요성을 선양함으로써 한국 불교 중흥을 이끌어내고 시대 대중의 갈망에 응답함으로써 선불교 문화를 꽃피울 수 있도록 나서야 하는 것은 납자의 본분일 터이다. 한국 불교 현실로 볼 때 참으로 시급하고 중요한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았는데도 침묵, 침묵으로 일관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뒷방에서 '간화선 만이 참 수행이다' '선방 수좌가 최고다' 라고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공개된 대중 앞에서 대중을 이해시키고 대중을 감동시키는 당당함을 보이지 않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참으로 슬프고 답답하다.
납자는 탈속해야 된다고 들었다. 탈속이란 솔직 담박하고 막힘 없이 시원하게 트인 자유로운 모습을 의미한다.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내용적으로 자신 없음인가. 말로 따져서 안된다는 신념인가.
만약 말로 따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뒷방에서 무책임한 불평불만과 비난을 늘어놓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다.
아울러 선이 최고라는 주장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수좌라고 대접받으려는 태도도 있어선 안된다.
자신들의 신념대로 만인이 납득하고 감동받을 수 있도록 온몸을 바친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야 타당하다 할 것이다.
다음은 발제문에 대한 몇 가지 느낌과 의문점을 내놓고자 한다.
첫째, 오늘의 선풍토에 대한 정확한 진단 없이 단순하게 간화선 수행만을 논하고 있는
발제문을 대한 토론자의 심정은 매우 공허했다.
둘째, 간화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관점을 갖는 것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이 무엇인지, 간화선을
어떤 것인지, 왜 간화선이 위대한지, 무엇 때문에 선이 21세기의 대안인지 등에 대한 정밀한 정리가 필요한데 발제문을 통해서는
그런 점을 선명하게 가닥잡을 수가 없었다.
셋째, 발제자께서 전통적인 간화선 또는 오늘의 간화선 풍토의 기본 입장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하지 않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넷째, 간화선을 주제로 하고 있을 뿐 실제 간화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발제자의 관점과 태도는
주관적이고도 자의적이며 교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째, 발제문으로 볼 때 사용하는 개념들이 혼란스러운 부분들이 많으며 동시에 오늘의 간화선에 대해 부정적인지,
긍정적인지의 태도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발제문을 이해하는데 애매모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토론자 또는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의문들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몇가지 질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선의 세계관이 무엇인지 또는 선 수행에 있어서 윤리 도덕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둘째, 천태선, 묵조선, 간화선 등 여러 형태의 선 수행이 있는데 그 세계관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에 대해 듣고 싶다.
셋째,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연기법이라고 하는데 반해 선사들은 본래면목(불성, 자성)을 깨달았다고 하고 있다.
내용적으로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만일 같은 것이라면 왜 다른 개념들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다.
넷째, "화두는 분별심을 타파하는 무기"라고 했는데 오늘의 간화선 수행자들에게서 오히려 편견,
독선, 편협, 배타, 이기의 분별심이 더욱 견고해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설명해 주었으면 한다.
다섯째, 선에서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을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불교와 선은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불교와 선은 무관한 것인가. 같다면 왜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고 했는가에 대한 견해가 어떤지 묻고 싶다.
발제자께서 선학을 전공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의문점들을 풀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끝으로 한가지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올바르고 바람직한 활로를 열어가기 위해선 철저하게 자기 반성과 비판을 해야 된다는
믿음으로 덕담 한마디 없이 문제 제기를 했다. 표현상 지나친 부분이나 무례한 점 있다면 깊은 이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