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용균(羅容均) 연보
나용균(羅容均, 1895년 고종 32년 11월 25일 생~1984년 7월 6일 몰; 향년 90세)
제헌국회의원·4선 국회의원·보건사회부장관·국회부의장 역임
대한민국 건국 지도자(한국민주당 정치인으로 건국 주도)
우리나라 정치학의 아버지
한국 정치학의 선구자
독립운동가(2·8독립선언과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활동)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해방 당시 삼천석꾼 유지)
호남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
민족주의 계열·독립 계열 정치인(일제 독립운동가·건국 정치인)
동학란의 발상지 전북 정읍 출신의 대표적인 정치인
전북 정읍 고부초등학교 배출 최고의 동문 인물
전북 정읍의 한학자
천주교도
정읍의 부호 건릉참봉 나도진(羅燾珍)의 3자
『나씨가승』 소장자(송암 나위소의 연시조 「강호구가」 수록)
『송암유집』 공찬자(송암 나위소 시문집)
본관 나주(羅州). 나주 나(羅) 씨 금양군파(부위공파) 25세손
자 원상(元相)
호 백봉(白峰)
백조부 나용집(羅龍集; 1763년 11월 5일 생~1815년 12월 3일 몰; 묘역: 운학동)
1처 파평 윤 씨
2처 여산 송 씨
조부 정읍의 부호 나정집(羅正集; 1769년 1월 23일 생~1839년 4월 10일 몰; 묘역: 전북 정읍군 영원면 운학동)
나주 나 씨 금양군파 23세손
자 군중(軍中)
전봉준을 키운 인물
동학란 때 가슴에 칼을 맞고 전라 감영에서 악형을 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었다 석방된 인물
조부모 남평(南平) 문(文) 씨 문사흠(文思欽)의 여식(출생 연도 미상~1766년 6월 24일 몰; 묘역: 전북 부안 산내면)
부 정읍의 부호 건릉참봉 나도진(羅燾珍; 1864년 4월 18일 생~1945년 2월 12일 몰; 묘역: 운학동)
생부 나정집의 1남
백부 나용집(羅龍集)의 양자
아들 나용균의 독립운동(일본, 중국, 영국)으로 일경으로부터 18차례 가택 수색을 당한 인물
나주 나 씨 금양군파 24세손
모 남원 윤 씨 윤태선(尹泰善)의 여식(1861년 12월 14일 생~1935년 10월 5일 졸)
숙부 나도현(羅燾玹; 1868년 4월 29일 생~1946년 7월 2일 졸; 묘역: 정읍 운학동)
생부 나정집의 2남
자 사옥(士玉)
숙모 밀양 박 씨 박형채(朴衡采)의 여식
부 나도진의 8남 7녀
1남 나홍균(羅鴻均)
2남 나택균(羅澤均)
3남 본인 나용균(羅容均)
4남 나명균(羅明均, 숙부 나도현의 양자)
5남 나팔균(羅八均)
6남 나재균(羅宰均)
7남 나성균(羅聖均)
8남 나대균(羅大均)
숙부 나도현의 1남 나명균(羅明均; 양자, 나도진의 4남)
나용균의 2처
1처 고흥(高興) 유(柳) 씨 유병식(柳秉湜)의 여식 유옥경(柳玉卿; 1896년 10월 10일 생~1922년 12월 25일 몰; 묘역: 전북 정읍군 영원명 운학동)
2처 밀양 박 씨 박귀례(朴貴禮; 1913년 8월 15일 생~1996년 1월 8일 졸; 묘역: 합장) 여사
나용균의 자녀 6남 1녀
1남 나종구(羅鍾九; 1914년 5월 5일 생~2006년 1월 11일 졸; 묘역: 남양주시 연동교회)
명치대 학사
처 밀양 박 씨 박태경(朴胎京; 1922년 3월 15일 생~)
2남 나종욱(羅鍾旭; 1934년 3월 10일 생~)
미 하버드대 정치철학과 졸업
미 콜롬비아대 교수
3남 나종오(羅鍾五; 1938년 8월 23일 생~; 미 일리노이주립대 졸업, 미 버지니아홀린대 교수)
4남 주일대사·주영대사·경희대 교수·우석대 총장·동국대 석좌교수 나종일(羅鍾一; 1940년 12월 5일 생~; 서울대 정치학과·영국 캠브리지대 정치학 박사, 경희대 정경대 학장·국정원 차장·주영 대사·주일 대사·우석대 총장 역임; 처 남양 홍 씨 홍신자(洪峷子; 1944년 9월 27일 생~))
5남 나종만(羅鍾萬; 1944년 10월 1일 생~; 미 시카고치과대 졸, 서울 여의도 나종만치과원장; 처 파평 윤 씨 윤혜영(尹惠暎; 1946년 11월 5일 생~)
6남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나종억(羅鍾億; 1947년 5월 10일 생~; 고대 농대 졸·고려대 경영대학원 수료·명예경영학박사·명예정치학박사, 부산여대 석좌교수, 시인, 국민훈장목단장(牧丹章)·대통령표창; 처 덕수 이 씨 이채영(李彩永))
1녀 나종란(羅鍾蘭; 1936년 생~)
나용균의 손자 손녀
1남 나종구의 2남 3녀
1남 나윤수(羅允洙; 1947년 3월 10일 생~)
한국외대 국제행정과 졸업
처 의성(義城) 김 씨 김진숙(金秦淑; 1953년 3월 19일 생~)
2남 나형수(羅亨洙; 1955년 3월 12일 생~)
처 장미화(張美華)
1녀 나순영(羅順英; 1944년 9월 20일 생~)
부(夫) 유은조(兪殷朝)
2녀 나혜영(羅惠英; 1950년 10월 28일 생~)
3녀 나소영(羅素英; 1952년 11월 11일 생~)
부(夫) 오춘근(吳春根)
4남 나종일의 1남 3녀
1남 나경수(羅慶洙)
1녀 나연수(羅蓮洙)
2녀 나영수(羅英洙)
3녀 나한수(羅韓洙)
5남 나종만의 1남 1녀
1남 나성수(羅晟洙)
1녀 나은수(羅隱洙)
6남 나종억의 1남 1녀
1남 나범수(羅範洙)
1녀 나혜수(羅蕙洙)
1남 나종구의 손자
1남 나윤수의 1남 나영진(羅榮振; 1983년 3월 8일 생~)
2남 나형수의 1남 나영훈(羅榮勳; 1983년 12월 25일 생~)
나용균의 조카
전 청와대행정관 나종윤(전북 정읍 지역 정치인)
기타 후손들
1895년 고종 32년 11월 25일 동학혁명전쟁 발발기에 동학란의 발상지 전북 정읍 생가(소재지: 현 전북 정읍군 영원면 운학2길 14-6; 구 고부군 운학동)에서 출생
1890년대 나용균 생가와 사당 건축(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76호)
1902년 고부초등학교 입학
1907년 고부초등학교 졸업
1908년경 나용균 가문의 방식대로 집안에서 운영하는 나씨서당에서 한학(漢學) 수학
1914년 19세 일본 동경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정치학과 입학(후에 중퇴)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중 1918년 미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아 동경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으켜 3·1운동의 직접적인 요인이 됨.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 대강당에서 조선인 유학생 3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조선유학생학우회 2·8독립선언에 참가(재정 책임자)하여,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 1889년 1월 28일 생~1951년 10월 25일 몰)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2·8행사 당일 일경이 주모자급 재정 담당 나용균을 포함해 12~13명을 체포해 간다경찰서로 끌고가 투옥하고 고문을 가한 후, 7월에 석방; 7월(또는 4월 망명설도 있음)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전북 대표),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 역임.
1921년 1월 1일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참석; 11월 소련 주최 모스크바 원동혁명자대회에 여운형(呂運亨; 1886년~1947년)·김규식(金奎植)과 조선 대표단으로 참가하기 위해 상해 출발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극동인민대표자대회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했으나, 삼일운동과 조선 독립이 조선공산당의 주동에 의한 것이라는 선언서 서명을 거부하여 소련 관헌 총살장에서 세 차례 사형 집행이라는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김규식과 여운형은 선언서에 동의했다; 극동대회 참가자들 가운데 이동휘, 여운형, 박헌영 등은 공산주의자로 분류되고, 김규식, 나용균 등은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2월 상해로 귀환해 5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발전적 해체를 위한 국민대표대회준비위원회 준비위원에 선임되어 선언서 발표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 무산 후, 영국 유학을 떠나 영국 런던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며 영국식 민주주의를 학습
1929년 영국 런던대(정치경제학 전공) 졸업
1930년 영국에서 일제 강점기에 귀국해서 전북 함평 지역에서 삼양사 사장 김연수와 함께 간척 사업을 추진하여 전북 함평군 함평읍 장년리 구주포 지역 옛 바다를 간척; 나용균이 귀국하기까지 일경이 부친의 생가를 18차례 가택 수색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 당시 정읍 “운학리 나 씨” 집안 전체가 개명 거부
1941년 문중 사당(재실) 건축(호남의 명장 목수 심사일(沈士一)이 건축했고, 중요무형문화재 고택영(高澤永) 대목장이 수습 목수로 참가)
1945년 한국민주당 결성 및 사무국장에 취임하여 건국 주도 세력으로 부상; 해방 후, 나용균 가문은 재산 3천석꾼 유지
1948년 5월 10일 54세 전북 정읍갑 한국민주당 제헌국회의원(전북 정읍갑) 국회내무치안위원장
1950년 한국전 발발; 국회 대표단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미 의회 대한원조안 부활 교섭; 민주국민당대회 정책위원장
1951년 5월 16일 전북 출신 인촌 김성수가 이승만 정권에서 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본인이 적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사하자, 김춘연, 나용균, 신각휴 등이 설득해서 1951년 5월 18일 국회 본회의에서 취임 인사
1952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혁신위원회 사건”을 조작하고, 덧붙여 김준연, 나용균 의원, 고재욱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정부 전복 음모로 연행, 조사했으나, 방한 중이던 『뉴욕타임스』 사장 솔즈베리가 이승만 정부에 강력 항의해 김준연, 나용균, 고재욱 3인을 석방하라는 압력 전화 한 통으로 당일 석방
1958년 제4대 민주당 국회의원(전북 정읍갑); UN총회 대표
1960년 7월 민의원 제4대 대통령 선거 후보 낙선; 9월 12일 장면 내각 제6대 보건사회부 장관 취임, 제5대 민주당 국회의원 민의원 역임; 12월 15일 보건사회부 장관 자격의 기자회견에서 전국노동단체통합대회 명칭과 규약의 통과와 중앙운영위 위원 선출을 합법이라고 규정하고, 무기 연기 상태인 중앙위 대의원대회를 소집해야 한다고 언급(『조선일보』, 1960년 12월 15일 석3면).
1961년 1월 29일 보건사회부 장관 이임; 4월 1일 대한가족계획협회 창립 및 초대 회장
1963년 민정당최고의원, 제6대 민정당 국회의원(전북 정읍); 제6대 국회부의장(의장 이효상, 부의장 나용균·장경순); 12월 17일 제6대 국회부의장 취임; 제3공화국 첫 국회 개원식에 박정희 대통령, 이효상 국회의장, 나용균과 장경순 부의장 참석
1964년 제6대 국회부의장; 6월 5일 제6대 국회 프로필에 「독립운동가 라용균」 소개; 갑오혁명기념사업협회 이사장, 국제의원연맹지부 부의장; 덴마크 코펜하겐 개최 국제의원연맹 제53차 총회에 대회 부의장 자격으로 참석하고 국제의회연맹에 대한민국으로 가입했다; 영국 정부의 초청으로 방영; 국회 대표단으로 도미(『대한뉴스』 제492호, 1964년 10월 31일 제작)
1965년 12월 16일 제6대 국회부의장 이임
1966년 대한민국 서울 개최 아시아의원연맹대회 운영위원장; 4월 6일 “일신상의 사정”으로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사직
1967년 8월 23일 전직 국회의원 나용균, 강선규, 조남철, 김익기, 김두한, 방성출 등을 상대로 가불금 반환 청구 소송 제기; 민주공화당 입당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수상; 미 펜실베니아대 이정식 교수와 박권상이 나용균과 대담
1977년 독립유공자 건국포장
1979년 광복회 고문, 독립동지회 의장; 송암 나위소의 후손으로서 나위소 작 연시조 「강호구가」가 수록된 『나씨가승』을 나용균 집안에서 소장하다가, 전남 영암 송암공 종중에서 필사본 『나씨가승』(羅氏家乘)을 『송암유집』 권1~2로 재발행하고 「강호구가」 시조 9수를 수록했다(나용균 외 공편, 광주 일진인쇄사 인쇄). 『송암유집』에는 나위소의 한시와 시조 그리고 김만영, 이만웅, 이안로, 정철 등의 누정시가 수록되었다. 2권 1책 석인본이며, 나용균, 나도식(羅燾植), 나종완(羅鍾完) 공편이다. 이민수(李玟秀)의 서, 10대손 나평균(羅枰均)의 발이 포함되었다. 『송암유집』 권1에는 시 57수, 부 3편, 책 1편, 서(書) 16편이 수록되었으며, 권2 「부록」에는 수운정운 36수, 만장 28수, 서 68편, 김만영의 「수운정서」, 정중원의 「수운정중수기」·「사실기」, 「수운정상량문」, 허목의 「신도비명」, 시조 「강호구가」 등이 수록되었다. 『송암유집』은 현재 전북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80년 제헌동지회 의장
1984년 7월 6일 서울 종로구 명륜1가 33-58번지에서 서거, 사회장으로 국립서울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 25호 안장, 묘비명 “국회부의장 라용균의 묘”(배위 박귀례 합장); 향년 90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9년 5월 28일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기념사업회 회장 이만섭 국민회의상임고문, 운영위원 박권상 한국방송공사사장, 운영위원 이수성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수석, 부의장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공동대표, 부의장 장재식·최재승 국민회의의원, 부의장 박연호 전 가톨릭대부총장, 부의장 임덕규 전 의원, 고문 송월주 전 조계종총무원장, 고문 장영식 전 한전사장 등);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와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주관으로 백봉 나용균 선생의 정치적 업적을 기념해 백봉신사상을 모범적인 현역 의원들에게 수여; 『전북일보』 선정 “20세기 전북인물 50인” 선정
2006년 9월 19일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이 문화재청 등록 문화재 제276호로 지정
2007년 5월 나용균의 조카 나종윤 전 청와대행정관이 정읍 지역에서 선거에 출마하고 정치 활동을 시작
2017년 9월 12일 사단법인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개원; 백봉연구원 개원식 및 학술토론회가 「협치의 이상과 실제」라는 주제로 오전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개최; 백봉기념사업회가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으로 법인화
2022년 12월 21일 국회의사당에서 제24회 백봉신사상 시상식 개최(김진표 국회의장 시상, 주호영 의원 수상)
2023년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에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선정(“2·8독립선언과 국민대표회의의 든든한 조력자, 나용균”)(공훈전자사료관); 독립기념관 4월의 독립운동가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선생 전시회; 임시정부 청년 외교 활동가로 평가; 영묵 강병인 작 캘리그라피 「백봉 나용균 어록」―“사람을 대할 때 신사적 면모를 보여라. 그러면 상대방도 신사가 된다.”(화선지 93x30cm)(「국가보훈처 4월의 독립운동가 라용균 선생의 어록을 강병인 쓰다」, 강병인의 멋글씨, 캘리그라피 이야기, 2023년 4월 24일 네이버 블로그).
* 나용균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어려운 벗이나 불우한 이웃을 망설이지 않고 돕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일제 창씨개명 당시 가문 전체가 개명을 거부했고, 나씨 서당에서 한학 교육을 받았다.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와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정치학자이기도 하다.
* 백봉 나용균은 전북 정읍의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이고, 백봉 나용균 생가는 전북 정읍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다.
* 4선 국회의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전북 대표,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정읍갑 한국민주당 사무국장), 제4대 국회의원(정읍갑 민주당), 제5대 국회의원(정읍갑 민주당), 제6대 국회의원(정읍 민정당 최고의원, 국회부의장) 역임.
* 나용균 가문: 나용균 가문은 나주 나 씨 금양군파(부위공파)이며,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이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해방이 된 후에 집안의 남은 재산이 삼천석꾼이었다고 한다. 전북 김제와 정읍을 집성으로 하는 나주 나 씨 금양군파이다.
1890년대 구한말 나씨 서당을 운영하며 집안 가족들과 지역 유생들을 교육했으며, 나용균도 가문의 지시에 따라 나씨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당시 양반 가문은 가족이나 외부의 선생으로부터 직접 사사를 받는 게 상례였다. 나용균의 조부 시절에 나씨서당에 전봉준(全琫準; 1855년~1895년)이 수학했으며, 조부가 전봉준을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고 한다.
1895년경 정읍과 나용균의 생가는 동학혁명전쟁의 발상지로서, 동학혁명 때 나용균의 생가 뒤편 대나무밭에서 농민들이 죽창을 만들어 봉기를 일으켰고, 생가 뒷길은 동학 농민군의 진출로로 쓰였다. 동학란으로 나용균의 조부는 조선 관군으로부터 가슴에 칼을 맞고, 동학 연루자로 전라 감영에 끌려가 악형을 당했으며, 서울로 압송되는 불운을 당한 후 석방되었다. 1895년 당시 정읍 나용균 생가는 동학혁명의 발상지였으며, 전봉준이 나용균의 선조들과 학습한 나씨서당이 있었다. 현재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은 동학혁명의 발상지 정읍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며, 문화재청 근대 이후 등록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독립운동 당시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 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의 재정을 담당해서 조선에 귀국해 송진우 등과 자금 지원을 협의했으며, 이 당시 그의 조선 방문이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2·8독립선언 당일에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 및 고문을 당했으며, 석방 후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중국 상해로 망명해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활동했다. 1922년 모스크바를 방문해 민족대표대회에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대표단으로 참가했으나, 3·1운동과 조선 독립이 공산주의자의 주동과 공산혁명에 의한 것이라는 선언문에 서명할 것을 강요받고, 러시아 관헌 총살장으로 세 차례 끌려가 사형 집행의 위기를 겪었으나 조선의 독립운동과 독립이 공산혁명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거부했다. 이때 김규식과 여운형은 선언문에 동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해 귀환 후, 유학생 동기이자 2·8독립선언 서명자인 김철수와 협의하고 독립군 유학생용 군자금으로 영국의 민주주의를 학습하기 위해 영국 유학을 가기로 합의했다. 백봉 나용균은 1929년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학 전공 6년여의 유학 생활을 마친 후, 1930년 일제 당시에 고향 정읍으로 귀국했다. 나용환이 일본 와세다대에서 유학생으로 2·8독립선언에 참가하고 체포되었다 석방되고 상해로 망명한 이후, 일경이 정읍 고향의 아버지 생가를 18차례 가택 수색하며 백봉 나용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1930년 일제 때 귀국 후에는 일본인 친구의 조언대로 전북 함평 지역의 간척 사업을 사업가 김연수와 추진해서 완성했다. 나용균의 조부 때 동학란의 발상지에서 동학혁명을 겪고, 나용균의 아버지 때 일제 독립운동의 고초를 겪었으며, 해방 당시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 나용균 가문의 재산은 삼천석꾼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나용균은 일제 때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를 수학했고, 독립운동 당시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경제학을 수학하며 영국식 신사도와 민주주의를 학습했다. 영국 유학 전에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활동했다.
1930년 일제 강점기에 나용균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으며, 일본인 친구의 제안으로 전북 함평 간척 사업을 추진했다. 간척 사업 기간에는 삼양사 사장 김연수가 나용균의 생가에 머물며 대규모 간척 사업을 나용균과 함께 진행했다.
1940년 2월 이후 일제 강점기 창씨개명 당시 나용균 가문은 집안 전체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했다.
1945년 해방 후, 대한민국 건국 시 한국민주당을 인촌 김성수와 발기했다. 전북 정읍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 포함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나용균은 후에 민정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의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당시 학생들이 반대했던 한일국교정상화를 찬성했다.
1979년 나용균 집안에는 과거에 많은 고서적들이 있었으나 6·25 당시 대부분 소실되고 불완전한 상태의 『나씨가승』을 보존했다. 한국전쟁 후, 백봉이 선조 송암의 글을 어렵게 찾아 출판을 논의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1979년 백봉은 연시조 「강호구가」가 수록된 『나씨가승』을 『송암유집』으로 공찬 재발간했다.
1980년대 1984년 백봉 선생 서거 후, 큰아들 나종일이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유학했으며, 서울대 교양과정 교수와 경희대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나종일은 주일본대사와 주영국대사를 지냈고, 청와대와 국정원 등의 국가 기관에서 외교와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중책을 맡았다. 한양대 석좌교수와 가천대 석좌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이다.
결론적으로, 나용균의 가문은 전북 정읍의 부호로서, 조선의 동학농민전쟁과 일제의 독립운동을 대표한다고 특성화할 수 있다.
* 나주(羅州) 나(羅) 씨 세보(世譜)―1세~5세: 나주(羅州) 나(羅) 씨는 한국 고유의 성씨이다. 금성(錦城) 나(羅) 씨가 라말여초에 시작되었다면, 나주 나 씨는 여말선초에 시작되었다.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에 따르면, 나주 나 씨의 시조(始祖)는 나부(羅富)이며, 고려 시대 정의대부(正義大夫) 감문위상장군(監門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정의대부는 정3품이며, 감문위는 고려 6위의 제1위로서 상장군이 감문위 수장이다. 묘역은 1953년 봄 관향(貫鄕, 본관, 선향) 나주 송현동(松峴洞)에 시조묘를 설단(設壇)하고 매년 3월 13일 세일제(歲一祭)를 시행하고 있다. 1977년 가을 묘역을 보수했다. 2008년 시조묘 설단을 나주 보산동으로 이설했다.
1세(世)는 나득규(羅得虯)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2세는 나중윤(羅仲允)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3세는 나송기(羅松奇)이며, 고려 시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4세는 나수영(羅守永)이며, 고려 시대 진사(進士)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했다.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으며,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1세~4세의 묘역은 실전되었으며, 1954년 봄 전북 김제 청도원(淸道院)에 선영을 설단했고, 매년 3월 15일 세일제를 시행한다.
5세 나위(羅位)는 고려 시대 제 호조전서를 역임했으며, 세칭 금양처사라고 했고, 말년에 나주로 퇴거했다. 전서공파(典書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2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계(羅桂)는 고려 시대 중서시랑을 역임했으며, 처는 창원 황 씨이고, 후손들은 경기도에 살았다. 시랑공파(侍郎公派)의 시조이며, 후에 4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석(羅碩)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 영동정(令同正) 금성군(錦城君)을 역임했고, 처는 남평(南平) 반(潘) 씨이며, 후손들은 전북에 살았다. 금양군파(錦陽君派)의 시조이며, 9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세(羅世)는 고려 시대 문과 한림 상원사 연안군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고, 전북에 후손들이 살았다. 연안군파(延安郡派)의 시조이며, 5개 파로 분파했다.
5세 나원(羅源)은 고려 시대 사온서직장 영동정을 역임했고, 묘역이 나주 송현동에 있으며, 후손들이 나주에서 세거했다. 직장공파(直長公派)의 시조이며, 27개 파로 분파했다. 나주 송현동 개발로 2008년 7세 묘역이 있는 나주 보산동으로 5세 묘역 일부가 이장되었다.
4세까지는 묘역이 실전된 실전 선조이며, 5세부터 묘역이 현존하는 현존 선조이다. 당시 나주 나 씨 선조들은 본관이나 관향을 표기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으나 조선 시대 전기 세종 1년 전북 김제 출신 나득강(羅得康, 1378년~1444년)이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서 본관을 나주로 기재(나주인)함으로써, “최초의 나주인”이 탄생했다. 판서공 나득강은 세종의 신임을 받아 이조좌랑, 예조정랑, 의금부지사를 역임했고, 이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이후부터 전남 나주(羅州)가 나주 나 씨의 관향으로 정착되었고, 조선 시대 후손들은 나주 또는 나주인이라고 출신지를 표기하기 시작했다. 판서공 나득강의 부친은 낙천와(樂天窩) 나중우(羅仲佑)이며, 고려 시대 후기에 예문관지제고, 춘추관편수관 등을 역임했고,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로부터 우의정을 제수받았다. 나중우와 나득강은 전북 김제를 대표하는 유학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와 대한민국 시대를 거치며 나주 나 씨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인물들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 중기 사대부 시조 문학을 대표하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사초 「겸춘추일기일사」(兼春秋日記一事)를 기록한 호조정랑·승정원좌승지 송암 나위소(羅緯素)는 또한 호남 제일의 부호였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대대로 이어받은 나위소 가문의 재산은 후손 나만치(羅晩致)에게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 시대 후기 전북 정읍 출신 백봉(白鳳) 나용균(羅容均, 1895년~1984년)은 독립운동가이자 우리나라 정치학의 아버지이다.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학을 유학하고 독립운동을 거쳐 제헌의회와 대한민국국회에서 5선 의원을 역임했으며, 장면(張勉) 정부에서 보건사회부장관과 박정희 정부에서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나용균 가문은 전북 정읍 제일의 부호였으며,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남은 재산이 삼천석꾼이었다. 대한민국 3개 정부에서 4선 국회의원과 재무부장관, 상공부장관, 경제 부총리, 통일 부총리 등 장관직 5회, 부총리직 3회를 역임한 나웅배(羅雄培)는 또한 서울대교수와 아주대총장 그리고 중앙대특임교수와 목원대초빙교수를 역임한 우리나라 정관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또한 나웅배는 대전중학교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대 경제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사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를 마친 경영학자로서 고도 성장기 한국 경영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나라 경영학의 아버지이다. 나웅배의 동생 나중배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했으며,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고, 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한국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참고 자료: 『나주나씨대동보』(羅州羅氏大同譜)).
* 독립운동가 나용균: 민족주의 계열 정치인으로,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에 참가해서 일제 때 조선을 방문하고 송진우 등과 독립선언의 자금 조달에 대해 논의했고, 2·8독립선언에 재정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행사 당일 일경에 체포되어 구금 및 고문을 당한 후 석방되었다. 석방 후,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와세다대를 중퇴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해서 상해 임시정부 전북 대표로 의정원 활동을 했다.
*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 소재지는 전북 정읍시 영원면 운학리 천태산 언덕이며, 사당 뒷길은 동학농민전쟁 고부 봉기 때 농민군의 진출로였고, 사당 뒤편 대나무숲에서 고부 농민들이 죽창을 만들어 봉기했다. 현재 안채는 소실되어 지반만 남아 있고, 사랑채, 문간채, 고방, 사당이 남아 있다. 1941년 사당(재실)은 호남의 명장 목수 심사일(沈士一)이 건축했고, 중요무형문화재 고택영(高澤永) 대목장이 수습 목수로 참가했다. 생가의 최초 건립 연대는 1890년대로 추정한다. 2006년 9월 19일 우리나라의 근대 이후 주요 문화유산에 부여하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북 정읍의 주요 관광 명소로 알려져 있다.
* 나용균의 독립운동과 보천교(普天敎): 나용균은 천주교도였으며 영국식 신사로서 광신을 기피했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 당시 전북 정읍 거점 민족 종교 보천교는 독립운동의 자금을 제공하는 주요한 루트였다고 알려져 있다. 정읍 출신 독립운동가 백봉 나용균이 정읍 거점 보천교의 독립운동 자금 거금 5만 원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외에도 정읍 지역의 보천교와 보천교도들은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한다.
* 백봉신사상(白峰紳士賞): 1999년 5월 28일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와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주관으로 백봉 나용균 선생의 정치적 업적을 기념해 백봉신사상을 모범적인 현역 의원들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신사적인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매해 국회의원, 국회 출입 언론인, 국회 상임위 소속 사무처 직원들의 설문 조사로 의정 활동과 성과, 리더십 등으로 구분하여 점수가 높은 의원에게 시상하고 있다. 1999년 제1회 백봉신사상은 김근태 의원 등이 받았고, 2022년 백봉신사상은 주호영 의원 등이 수상했다.
* 나용균 가문과 동학혁명전쟁: 나용균 가문은 전봉준(全琫準; 1855년~1895년)의 고향 전북 정의군 이평면 오소리에서 가까운 이웃지간이었고, 나용균의 선조들과 나씨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나용균의 조부가 전봉준을 아끼고 사랑했으며, 전봉준도 나용균의 조부를 존경했다고 한다. 당시 조부는 정읍의 부호였으며, 동학란으로 관군에게 가슴에 칼을 맞고도 부상에 그쳤고, 동학 연루자로 전라 감영에서 악형을 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석방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조부의 생가 뒷길이 동학 농민군의 진출로였고, 뒤편 대나무숲에서 농민군의 죽창이 만들어질 정도로 나용균 가문과 전봉준의 동학혁명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러한 까닭에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은 정읍의 주요 관광지가 되었고,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4년 나용균은 갑오혁명기념사업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 나용균 가문과 독립운동: 나용균 가문은 1940년 2월 11일 창씨개명 당시 정읍 “운학리 나 씨” 집안 전체가 개명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와세다대 정경학부 정치학과에 유학 중, 2·8독립선언에서 나용균이 재정 담당으로 조선에서 자금을 조달했으며, 선언 당일 행사장에서 주모자급으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되었다. 그 여파로 중국 상해로 망명해서,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 전북 대표가 되었고,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에 상해로 귀환해서 독립운동가 김철수를 만나 영국에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영국 런던대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며 6년 이상을 영국에서 체류하며 영국식 민주주의와 신사도를 학습했다. 일제 때 귀국해서 간척 사업을 했으며, 2·8독립선언의 여파로 3·1운동이 일어났고, 1945년 8·15해방이 되었다. 한국민주당을 창당해 건국을 주도하며, 제헌국회의원으로 입성했고, 1950년대 한국전을 거쳐 4선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1960년대 장면 내각에서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박정희 정권에서 야당의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송암 나위소의 후손으로 연시조 「강호구가」가 수록된 『송암유집』을 공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집안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일본과 영국의 대학에서 정치학을 유학했으며, 일본과 중국 그리고 영국을 넘나드는 백봉의 독립운동은 “청년 외교 활동가”로 정의했다.
* 나용균 가문과 국가안보: 정읍의 부호 나용균 가문은 나용균이 일본 와세다대와 영국 런던대에서 민주주의를 학습하면서 청년 외교 활동가로 인정받았다. 그의 셋째 아들 나종일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했으며, 귀국 후에 서울대 교수, 경희대 교수를 역임하고, 주일본대사와 주영국대사를 지냈으며, 청와대와 국정원 그리고 국가안보상임위 등에서 활동했다. 우석대 총장, 한양대와 가천대 석좌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국대 석좌교수이다. 나종일 교수는 정치학 교수와 외교관 그리고 국가안보 관련 직책을 맡아서 일했다.
* 나용균 가문과 2·8독립선언: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인 유학생 독립선언 당시 백봉 나용균은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 학생이었으며, 독립선언의 재정 책임자로서 조선에 귀국해서 송진우, 김성수, 최린 등과 독립선언의 자금 지원에 대해 협의했다. 이것이 1919년 3·1운동의 직접적인 기폭제가 되었고 도화선이 되었다. 동경선언에서 주동자 12~13명이 행사 당일 체포 및 구금되었고, 나용균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백봉은 일경의 체포와 구금, 고문, 석방을 겪은 후에,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이후로, 나용균이 상해 임정 활동과 런던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까지 고국의 정읍 생가에서는 나용균의 아버지가 일경으로부터 18차례나 가택 수색을 당하는 등 형언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다.
* 2·8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 조선청년독립단 대표자로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최팔호(崔八鎬), 김도연(金度演), 이광수(李光洙), 김철수(金喆壽; 1896년~1977년), 백관수(白寬洙; 1889년~사망 연도 미상), 윤창석(尹昌錫; 1921년~사망 연도 미상), 이종근(李琮根), 송서백(宋緖白), 최근우(崔謹憂), 김상덕(金尙德), 서춘(徐椿; 1894년~1943년).
이들 주동자 외에도 나용균이 재정을 담당해서 3·1운동 전에 조선을 다녀갔으며, 행사 당일 체포되었다가 후에 석방되었다. 나혜석은 조선에서 일본을 잠시 방문해서 행사에 참가했으나 일경을 피해 변장하고 부산으로 밀항했으며, 후에 이화학당에서 김마리아 등과 만나 3·1운동 유관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나혜석은 3·1운동 당시 체포되어 6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 지운(芝雲) 김철수(金錣洙; 1893년~1986년)의 나용균 회고: 지운(芝雲) 김철수(金錣洙; 1893년~1986년)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서, 전북 부안 출신이며, 일본 와세다대 정치학과 유학생이었다. 사회주의 계열 김철수와 민족주의 계열 나용균은 전북 동향 출신이었고, 일본 와세다대 동문이었으며, 1919년 2·8독립선언에도 함께 참가했다. 김철수는 백봉 나용균에 대해서 회고하기를, 독립선언을 주도하지 않고 재정만 담당했지만, 일경에 체포되었다. 석방된 후,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평소 나용균은 의협심이 강했으며, 어려운 처지를 보면 도와야 하는 성격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유학생 송진우(宋鎭禹; 1890년~1945년)가 일본에서 문등병으로 오해를 받고 굶어 죽을 고비에 이르자, 나용균이 먹을 것을 가지고 문병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상해에서 김철수와 나용균이 만났으며, 나용균이 영국 유학 결심을 비치자, 김철수가 군자금 인재 유학 자금으로 유학비와 영국행 여행비를 주었다고 한다. 해방 후, 나용균이 영국에서 귀국해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하에서도 잘 지냈다고 비난하며, 그런 인간을 동지로 마음을 준 것이 영 후회된다고 회고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김철수는 독립 이후에는 활동을 중단하고 고향 전북 부안으로 낙향해서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의 한국민주당 회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건국을 주도했다. 이에 전북 출신 인촌 김성수와 근촌 백관수, 백봉 나용균, 가인 김병로 등이 한국민주당을 내세워 건국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다(이영일(기고), 「대한민국 건국, 전북에서 시작되었다」, 『새전북일보』, 2023-04-19).
* 셋째 아들 전 주영국 대사·경희대 교수·우석대 총장 나종일의 아버지 4선 국회의원·보건사회부 장관·국회부의장 백봉 나용균 회고: 큰아들 나종일은 아버지 나용균이 종교적 광신주의나 지나친 사회적 기대감을 거부했으며, 아이들에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어른이나 길에서 침을 뱉는 사람들, 집의 달걀을 아이들 먹이지 않고 팔아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비난했다고 했다. 선거 유세 중에도 집안에 선거구민을 들이지 않았고, 선거 유세 중에도 항상 예의범절을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고 회고했다(라종일, 「백봉 라용균 선생―회고」, 『세계일보』, 1992년 7월 20일자 기사, 백봉연구원). <끝> <1차 2024년 상반기, 수정 2024년 11월 10일; 나종혁 나주 나 씨 부사공파 26세손 글>
* 참고 자료: 「‘2·8독립선언’ 주역의 고향, 정읍 나용균 생가와 사당」, 『역사문화유산―세월의 흔적, 근대문화 역사유산』, 지역N문화, 한국문화원연합회, <http://ncms. nculture.org>; 「나용균」, 대한민국헌정회, <http://rokps. or.kr>; 「나용균 보건사회부 장관, “전국노동단체 통합대회의 명칭·규약 통과 합법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민주화운동 일지 1960년; 「일화 민의(民意) 부통령」, 인촌기념회; 「정치인에겐 ‘현재 이 상황에서’ 결단이 중요」, 『중앙선데이』, 2023년 3월 25일; 이여산, 「대인의 풍모를 지닌 선각자 백봉 라용균 선생을 기리며」, 『전북도민일보』, 2020년 1월 9일; 「백봉 라용균 선생―약력」, 「백봉 라용균 선생―평전 라용균」,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인터넷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