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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지식의 부자와 작은 실천[개정증보판]
이시환 문학세계
글 : 들우물
환생 윤회의 끈, 식신(識神)에 관하여
사람이 죽으면 영(靈)과 육(肉)이 분리되어 육은 썩어 없어지나 영은 썩지 않고 부활 또는 환생한다고 많은 사람이 믿는다.
그런데 ‘과연, 그 부활이나 환생이 어떻게 이루어질까?’
사도 바울도 보리 종자에서 새순이 나오는 과정과 연계시켜서 사람의 몸이 썩어야 부활한다고 주장했고, 나가세나 스님도 망고나무 씨앗에서 새로운 망고나무가 나오는 것으로써 환생을 주장하는 궤변(詭辯)을 늘어놓았다.
둘 다 우스꽝스러운 비유법이고, 터무니없는 주장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듯이 그 후에도 사람들은 희망과도 같은 그 부활과 환생의 끈을 붙들고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영혼(靈魂)’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데 -그렇다고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영혼에 해당하는 용어로 ‘식신(識神)’이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했다.
‘식신(識身)’이 아닌 ‘식신(識神)’은, 형상이 없어서(경률이상, 육도집경, 불설견정경) 몸 안에서 찾을 수 없고(불설장아함경), 임시로 사사(四蛇:四大)에 편승하고, 차츰 사라지면서 빙 돌다가 이내 없어지는 것(경률이상)이며, 죽은 몸을 떠나 중음(中陰)에서 다음 생을 기다리는 것이고(출요경, 불설견정경), 장차 어디에 태어날 것인가를 찾아 돌아다니며(잡아함경), 임신하게 하여(법원주림), 태(胎)에 들어가는 것이며(증일아함경, 법집요송경), 다시 태어나는 것(불설염라왕오천사자경)이며, 파초 같아 허망한 것(불설해우경)이고, 공(空)한 것(법집요송경)이며, 지옥에 가서 벌을 받는 것(불설아난분별경)이라고 여러 경에서 기술되어 있다.
이처럼 많은 경문에서 식신(識神)을 설명하고 있지만, ‘영혼’이라는 단어만큼이나 모호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경문들 가운데에서 이 식신(識神)에 관하여 가장 알기 쉽고도 자세하게 설명한 경이 있다면 바로 일명 ‘생사변식경(生死變識經)’이라고도 불리는「불설견정경(佛說見正經)」을 들고 싶은데 나는 한때 문제의 식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경을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었다.
그 경문 속에서는 질문한 견정(見正) 비구 외 여러 제자에게 부처가 식신에 대하여 직접 설명하는 내용인데 그 핵심 내용인즉 이러하다.
태어나고 죽는 것도 그(씨와 나무의 관계)와 같다.
식신(識神)은 연기법(緣起法)을 만들고, 연기법은 치(癡)를 만들며, 치는 탐애(貪愛)로 나아가게 하니
치는 저 나무의 씨와 같다. 씨는 작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는 것처럼 하나의 치가 숱한 인연을 만드니, 숱한 인연은 본래 치로부터 나온다.
치(癡:無明)는 행(行)을 내고, 행은 식(識)을 내며, 식은 자색(字色:名色)을 내고, 자색은 6입(入)을 내며, 6입은 갱락(更樂:觸)을 내고, 갱락은 통(痛:受)을 내며, 통은 애(愛)를 내고, 애는 수(受:取)를 내며, 수는 유(有)를 내고, 유는 생(生)에 이르며, 생은 노사(老死)에 이르니, 이 12인연을 합하여 몸을 이루는 것이다.
몸이 있으면 당연히 늙음과 죽음으로 나아가야 하며, 식신이 변하고 바뀌어 행을 따라가게 되면 다른 부모가 있게 되고, 다른 형제를 받게 되며, 다른 6정(情), 다른 습관, 다른 고락, 다른 풍속이어서 모두 옛것이 아니기 때문에 곧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다시는 옛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새로 보는 것을 향하여 유(有)라고 생각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하며, 의지하는 것에 집착해 참다운 것이라고 부르며 전세 후세가 없다고 말하나, 식신이 바뀌고 옮겨 행을 따라 유가 된 것이다.
식신이 이미 옮기고 나면 다시 부모가 있게 되고, 다시 새로운 몸을 받게 되며, 다른 6정(情), 다른 습관, 다른 고락, 다른 풍속이어서 곧 다시는 옛것을 알지 못하게 되고, 또한 옛 몸과 옛 습관과 옛 장소에 돌아올 수 없게 되니, 나무가 다시 씨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보라.
위와 같은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한 견정(見正)이라는 비구가 부처께 아래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부처의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게 된 것이 이 「불설견정경」이다.
저는 태어나서부터 이후로 사람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부자·형제·부부 내외나 혹은 서로 사랑하던 벗, 혹은 서로 미워하던 원수도 있었는데 죽은 뒤에 돌아와 얼굴을 마주하고 좋은지 나쁜지를 대답해 주는 식신은 끝내 없었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식신이 무언가에 막혀서 면전(面前)에 돌아와 사람에게 알려줄 수 없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받은 부처는 죽은 자의 식신이 다른 생명체로 들어가도 과거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 비유법을 써서 반복적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종자(種子)와 나무, 돌[石]과 철(鐵), 상인(商人)의 기억, 나무와 가공된 나무제품, 모래와 가공된 적토(赤土), 물과 그릇, 굼벵이와 매미, 날고기와 부패한 고기, 어둠 속의 오색 물건, 불과 섶나무 등을 끌어들여서 새로운 몸을 받은 식신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함을 설명했다. 이들 가운데 한 예문만을 옮겨 붙여 보겠다.
목숨이 끓어지고 몸이 죽어 식신이 변화하고 옮겨 다시 새 몸을 받으면 5음이 막고 가리며 보고 익히는 것이 각각 달라 그곳에서 또한 늙어 죽어야 하니, 다시 돌아올 수 없으며 다시 옛것을 알아 면전에서 서로 대답해 줄 수도 없다. 이는 나무에 있는 매미가 다시 도로 굼벵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위 예문에서 보면, 몸은 죽어서 없어지지만, 식신은 다시 새 몸을 받으나 오음(五陰)이 막고 가리어서 보고 익히는 것이 달라져 전(前) 생명체의 기억이 나지 않기에 설명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아래와 같이 모호한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①행을 따라 몸을 받게 되어 보는 것과 익히는 것이 다시는 옛 몸이 아니므로 돌아올 수도 없으며, 다시는 옛것을 알 수 없으므로 면전에서 서로 대답해 줄 수 없다.
②식신은 본래 없고 일정한 형상이 없어서 행의 선악을 따라 곧 가서 몸을 받되 희고 검고 길고 짧음과 고와 낙과 선과 악을 행에 따라 바뀌어 받는 것이 마치 물이 그릇을 따르는 것과 같다.
③사람이 세간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악을 생각하고, 입으로 악을 말하며, 몸으로 악을 행하다가 죽었다면 곧 식신이 변화하고 옮겨져 지옥의 몸이나 혹은 축생의 몸이나 혹은 고기나 벌레의 몸에 떨어진다. 그곳에서 보는 것이 다르고 전과 같지 않으며 죄의 그물에 가려 다시는 옛것을 알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면전에서 대답할 수 없게 된다.
④식신은 어리석고 어두운 법이므로 살아서 선과 악의 행을 짓다가 죽으면 변화하여 가서 받으니, 선과 악의 행을 따라 형상과 징조가 있게 된다. 마치, 불이 섶나무를 얻게 되면 그 모습이 나타나다가 섶나무가 다하면 소멸하는 것처럼 의식이 선과 악을 짓지 않으면 행도 소멸되어 나타나는 것이 없다.
부처 말씀의 핵심인즉 이러하다. 곧, 몸은 죽는다. 죽은 몸이 살았을 때 지었던 행(行) 곧 업(業)에 따라 죽은 몸의 식신이 새로운 몸으로 옮겨가는데 새 몸을 얻게 된 식신은 새 몸의 오음(五陰)으로 가려져 전생의 행을 기억하지 못하고 새 몸이 새롭게 짓는 행에 따라 식신도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신은 형상이 없고, 어리석고 어두운 법이지만, 환생 윤회를 거듭하는 끈과 같은 것이다.
이런 그럴듯한 주장을 펴고 있으나 나는 믿지 못한다.
그러나 기원전 사람이 이런 사유를 했다는 것 자체가 기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믿지 못하는가?
식(識)이란 감각기관과 신경과 뇌 사이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생화학적 작용에 의한 감각적 인지(認知)에다가 뇌(腦)의 독자적인 기억과 기억된 정보에 대한 비교 상상 유추 등의 사유(思惟)가 보태어진 것으로서 하드웨어의 기능으로 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몸 안의 감각기관과 신경과 뇌의 상호 유기적인 작용의 메커니즘이자 그 결과이기 때문에 몸의 죽음과 동시에 식이란 기능도 중지되어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유기적 작용을 하는 복잡한 구조의 몸이 먼저 존재해야 만이 식이라는 기능이 나오는 것이지, 식이 몸 안으로 들어와서 몸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와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집단 무의식처럼 환생 윤회를 전제하기 때문에 식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전도(轉倒)된 논리를 펴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식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해야 환생 윤회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