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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산막이 옛길' 걸어 올라가서~ 중턱에서 찍은것임....
내 친구는요, 나랑 참 친하면서도 서로 생각이 달랐습니다.
골목 하나 사이에 두고, 바로 옆집에 삽니다.
초등학교때, 우리집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우리집에서는 언니 둘 다 대구로 유학을 가고
국민학교때, 친구가 없고.....
(없을 수 밖에요...5학년때, 장티푸스병에 걸려서
법정 전염병이여서 아무도 가까이 오기를 꺼려했으니까요)
아마도 병명이 몰라서도~ 허긴 관심도 없었으니까요.
초등 4학년때, 내 나이 열 살때, 1963년도 5월 15일날~
날씨도 꿀꿀리하고 나혼자 심심해서 학교 운동장으로
가보았으나, 아무도 없어서 아마도 쓸쓸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왔을때, 엄마는 막내 젬마를 낳다가 하혈을 하시고
숨을 거두었습니다....큰방에 이불에 누워 있는듯이 ....
아무리 그래도 이해가 불가 했습니다.
어디에서 사람들이 오고 집안이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때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엄마, 왜 그래? 일어나~ 엄마......
내 동생 막내는 저 윗목에 있더니 언제 어디로 갔는지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였지만, 본당 신부님의 배려로
특별히, 대구의 살트르바오로 수녀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런후에 멀리 영동에서도 황간면에 사시는 큰엄마께서 오셨습니다.
큰엄마는 혼자 사셨고,
가끔씩~ 여름에 저의집에 오셨습니다.
그 해는 우리집에서 계셨습니다.
우리집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일하는 일꾼들과 밥해주시는 아줌마~
영태엄마이신지~ 아무튼 나이가 지긋한 맘씨고운분~
우리집에 오셔서 밥과 빨래도 해주시고~
그 해 가을에 젊은 새엄마가 왔습니다.
아주아주 젊어서 언니같았습니다.
어느날, 대구에서도 북성로쪽에 '기린원'이라는
중국집이 유명했습니다.
그곳에서 새엄마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아버지 나이 42살, 새엄마 나이 22살....
큰언니 나이 14살, 둘째언니 나이 12살, 내 나이 열살....
아무튼, 나보다 12살 많은 새엄마와 웨딩드레스 입고 ~
그날도 날씨가 꿀꿀했습니다.
주례를 하신분은 다름아닌, 본당 신부님이신
이임춘 펠렉스 신부님.....
나이는 젊으셨으나, 머리가 하앴구요~
안경을 쓰셨는데, 인품이 남달랐습니다.
생각하시는 차원이 남들보다 앞서 가시는분이 셨습니다.
사리분별력이 뛰어나셨고, 엄격하셨습니다.
특히, 잘 살아야 하신다며,
무학산을 개간하셔서 목장을 만드셨습니다.
무언가 사람들에게 해택을 주시고 싶었지만,
첫번째는 사업을 실패했습니다.
성가병원(종합병원)을 만드셔서 그 사업도 실패....
그래서 세 번째로 교육사업을 하셨습니다.
00중학교를 설립하셔서~ 어려운 아이들,
공부는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못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 제도를 마련하셔서~
많은 인재들을 발굴하여, 정말 가난한 내 동창중에~
공부하도록 하여 고등학교는 입주하여 장학금 받고
대구 00여고를 공부하여 육군간호대학을 갈 수있게 길을 만들어 주었구요.
그리고, 고등학교도 나중에 만드셔서~
교장신부님으로 ~돌아가실때, 뇌암으로 가셨습니다.
참 어려운 고충을 안고 사셨습니다.
그분이 가진돈은 다 사회에 환원을 하셨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돌아가시기전에, 제가 아프시다는걸 알고
찾아 뵈었습니다....나를 보시더니,
'너의 엄마는 성녀이시다...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참 아까운 분이신데...'
그레고리안 성가도 참 잘 부르셨습니다.
무슨 큰 축일때 보면요~
하이얀~ 사제복을 입으시고~
멋진 금색으로 된 지금은 성시간에 성체강복때~
쓰는 성광을 들었다가 놓을때~
보면요~ 짜랑짜랑거리는 종소리~
그때는 다들 장괘를 하고서 고개를 올렸다가 깊게 숙이는
뭣도 모르면서 남들이 하는대로 했던 기억이....
그때는 성체를 모시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서
성전안에 얕트막한 칸막이 담장처럼 있었습니다.
그곳에 장괘를 하고 무릎을 꿇고 입을 벌려서
직접 성체를 받아모시는~신부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씩 입에 넣어 주셨지요.
나는 성체를 영하질 못해서 언제쯤이나 할려나...
너무 부러웠습니다....
실은, 그 전 해에~겨울부터 연극을 할 때나~
교리문답을 할 때였습니다....
교리반에서 뭘 외울때~
우리 엄마는 성당산에 묻혔습니다.
4학년 금방 올라가서~
새 담임선생님이 나보고 빨리 집에 가라고....
밤에 쪽잠을 자는데, 꿈을 꾸었습니다.
엄마가 '아이구, 허리야~' 하시면서 일어나는 겁니다.
그래서 잠에서 깨어나
"엄마", 하고 불렀던 기억이....
초상집에,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돼지를 몇마리 잡았습니다.
돼지가 모자라서 또 새로이 잡았습니다.
그 말을 전하러 내가 갔던 기억이....
그 해 가을에 새엄마가 오자,
우리집의 분위기는 새로이 바꿨습니다.
이듬해에 내가 5학년 봄에 장티푸스에 걸려서
울집 박씨아저씨 자전거에 타고서
매일매일 '성가병원'에 다녔습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학교에 못갔습니다.
찬바람이 일자, 하도 배가 고파서 '나도 밥 좀 줘~'
된장국에 밥아닌 죽을 먹고서 일어났습니다.
그해~ 겨울에 나는 충청도 황간면 '누룩바위'라는 곳으로
우리 큰엄마의 댁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황간면에서 누룩바위라는 곳까지는 많이 멀었습니다.
여름은 걸어가기가 좋았습니다.
겨울엔 눈덮힌 산골을 걸어가자면
한 반나절은 걸렸습니다.
가다가 토끼도 보고, 노루도 보고~
정말 신기했습니다.
눈이 없는 대구에 살다가, 이 무슨 별천지에 온것인지~
너무 너무 좋았습니다....
그곳에는 전기가 없어서 초롱불 밑에서 겨울밤을 지냈습니다.
도시에서 작은아이가 왔다고 그곳 마을아이들이
커든 작든 다 ~ 구경하러 왔습니다.
그곳은 동네아이들이 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연탄이 없고 다 나무를 산에 가서
베거나 주어와서~불을 떼었습니다....
큰엄마의 집에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동네 수양아들인 00오빠를 아들삼았습니다.
그 오빠가 나무를 해다가 줍니다....
그 오빠네 식구들은 4남매였습니다.
그땐 오빠가 총각이였습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지만,
그 오빠네 식구들과 잘 지냈습니다.
집안에 우물이 없어서 공동우물에 가서
물을 져다가도 주었고,
농사도 지어서 옆방에 고구마가
수수대로 엮어서 몇가마니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눈이 많이 오는곳이라~
뒷산에는 토끼나 짐승들이 많아서~
눈이 많이 오는 날은 콩에다가,송곳을 구멍내어
'싸이나'(청산가리)를 넣어서
아침일찍~ 눈을 쓸고서~ 콩을 놓아두면
꿩이나 토끼가 와서 먹고 멀리 못갈때,
빨리 꿩을 찾으러 뒷산으로 갔던 추억이....
나보고 맨날 말괄량이라고 놀렸습니다.
뒷산으로 쫓아다니는것을 너무 신기해 좋아라고
오빠들 뒤를 졸졸~따라다녔습니다,
동네오빠들이 나를 다 이뻐해 주었습니다.
어느날은 앞집오빠네 장가갔는데, 놀러가서
새언니랑 ~ 얘기하는것을 좋아했구요~
어느날은 또 다른 오빠네집으로...
너무 철부지여서 천방지축였습니다.
시골의 사는 재미가~너무 좋았습니다.
마당엔 김치독이 여러개 묻혀있고~
어느날은 우리 큰엄마집에 모두 모여서
모듬밥을 해 먹는다고~
온 동네 언니동생들~남자여자 할것없이 다 모였습니다.
처음으로 화투라는것을 배웠습니다.
편을 갈라서 지는 편은 자기 집에 가서 쌀을 가져와서
밥을 해서 이긴팀에게 해다가 바치는....
누구는 김치를 가져오고~그것도 몰래 가져와서~
김치 대가리만 칼로 툭 잘라서 손으로 죽~죽~ 찢어서~
본래 새벽 2~3시경 출출할때라서~
하이얀 쌀밥이라는 맛은 정말 죽여줍니다....
그 맛이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방바닥은 뜨껍고, 불을 떼어서~
웃풍은 있어서 큰이불 하나를
가운데 두고서~ 발만 전부 넣고서
재미나게 놀이를 했던 기억이....
황순원의 '소나기'란 소설이 있지요.
나는 매년 여름과 겨울방학이 되면
완행열차를 타고 큰엄마집 동네로 갑니다....
중학교 다닐적에~
앞 개울과 뒷동산은 참 즐거운 내 친구이기도 합니다.
혼자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냇가에 빨래하러 가기도 하고~
나랑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랑~
나무하러 가면 나도 따라가서
저 멀리 백화산 아래까지 갔던 기억이....
너무 멀어서 돌아올 때는 다리가 아파서
절뚝거리면서 왔던 기억이....
나는 공부보다는 산으로 들로
돌아다니는것을 좋아했습니다.
어느해~ 겨울날에 혼자서 멀리~
월유봉 가까이 산책하러 갔습니다.
월유봉에서 좀 떨어진 곳이지만
혼자서 얼음구경하러 갔습니다.
경치가 너무 좋습니다.
큰 바위들이 아주 조각을 해 놓은것처럼~ 아름답습니다.
혼자서 흥얼거리면서 가는데,
왠 아이가 물가 가장자리에서
친구랑 둘이서 놀다가,
얼음판이 깨어지면서 물에 빠졌습니다.
어쩌나~ 그래서 한 아이에게
빨리 동네에 가서 친구가 물에 빠졌으니
어른을 불러오라고 하고서는
허우적대는 아이 옆에 나무가지가 큰 것을 찾아다가,
얼음판 가까이에 주면서 잡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자아이는 울면서 안된다고, 못한다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살살~~ 달랬습니다.
할 수 있다고~
내가 중학생였으니까~
아마도 조금 컸겠지요....ㅎㅎ
얼음이 자꾸 깨어졌지만, 다시 한번 해보자~ 하면서
정말 추운날씨에 수십 번을 하면서
아이가 나뭇가지를 잡고서 겨우 밖으로 나왔습니다....
완전히 얼음으로 얼었습니다.
어쩔수없이 내 외투를 벗어다가 아이를 돌돌 말아서
업고서 동네까지 오니까
어른 한 분이 오고 있었습니다.
수고했다면서~ 아이를 전해주고 집으로 왔습니다.
내가 꽁꽁 얼어오니까 울 큰엄마께서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느냐고~
누군지 몰라도 물에 빠져서 구해주고 왔다고 했더니
누군데? 나도몰라~ ....얼마 있다가,
그애 엄마가 고구마인지, 떡인지~
가져와서는 정말 고맙다고, 우리애 살려줘서요~
아마도 그때, 그 아이가 초등학교 다니기전이여서~
너무 어렸습니다....ㅎㅎㅎ
그리고, 그곳에서 주일이면
15리나 먼 황간면까지 걸어서
성당에를 가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아침 새벽밥을 먹고 걸어서 가는겁니다.
그 가족분들의 할머님이 열심한 신자였습니다.
한번은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항상 기도를 하신다고....
나중에 들었는데, 그 할머니의 아드님이
왜관 베네딕도수도원에 수사님으로 갔었다네요.....
내 또래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결혼하고 나서
경주에 살적에 누군가 무슨 기도모임을 만들자고 해서
나도 모르게 같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차가 있어서 기동력이 되니까~
옆성당의 본당신부님을 모시고
회장집에서 그 기도모임을 창설했습니다.
제가 뭣모르고 총무를 맡아서
회장은 성령기도를 열심히하는 누구이였고~
또, 부산의 어느 자매님과 이 모임을 만들어서~
회비도 내고 한달에 한번 모여서 기도하는 날로...
회원이 제법 되었습니다.
어느날, 함흥교구 이동호 아빠스님을 모시고
회장집에서 점심식사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얼마지나지않아~
내 차로 왜관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이동호 아빠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리고~
함흥교구장을 하시는아빠스를 뵈러는 첨으로 갔었지요.
아빠스님의 양복을 맞춰서 가지고 갔습니다.
난 왜 이렇게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다들, 돌아가신분을 위해 미사예물을 넣었습니다.
나도 돌아가신 엄마와 외삼촌을 위해
위령미사를 넣고 돌아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심식사를 하는데,
내가 옛날의 황간면에 큰엄마 마을에서
내친구 뻘이라고 전해들어서 혹시나해서
내 나이 비슷하신 분이....물었더니, 애구...
그 분은 나이가 많으신
그 친구의 형님이셨습니다.
수도원의 책임자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또~ 실수 연발.....ㅎㅎ
그래서 남의 말만 듣고
얘기를 옮기면 이렇게 망신살이가...
그리고 그 모임을 본당 신부님께서
저에게 사사로이 만든 모임은 하지말고
미사와 기도나 열심히 하라고
꾸짖어셔서~ ㅎㅎ
아마도 성령기도모임 비슷한
인가가 안난~ 사설 모임이였습니다.
나중에 뭐가.....좀 문제가 되었지만
그래서 난 안한다고 하고서~ 그만둔적이....
본당 신부님의 말씀을 들어야해서리...
그분이 지금은 대구 대교구의 신학교에 교수신부님으로
박석재 교수신부님이시지요...ㅎㅎㅎ
옆길로 많이 갔네요.
이만큼 예쁜 내 친구 마리아.....
나랑 같이 영세를 한 옆집 마리아는~
72년도 크리스마스때에 했습니다.
단 둘이서~ 유아세례식과 함께~했습니다.
둘은 참 친했지만,
마리아는 성악을 하려고~
서울 수도여사대를 지망했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그때부터 성당 오르간반주자로
지휘자는 신부님께서~ 직접~
위낙 신부님께서 노래도 잘 하시고
음악적 재능이 있으셔서 모든 부분을 다 가르치셨습니다.
한사람씩 다 집어서 발성연습까지~
내가 목소리가 적으니까~
나만 제일 앞에 앉혀놓고서~ 더 크게~ 더~
맨날 혼났습니다.
내 친구 마리아는 성악을 전공하려다가,
못하고서 대구에 있는 00대학교 영문과를 다녔습니다.
'급성신장염'으로 대학 3학년때,
내가 직장 다닐적인데~
그만 하느님께서 부르셔서 급히 갔습니다.
그 친구는 미스였지만,
신부님의 특별배려로~
성가대 반주자로 열심히 하였다고
성당묘지에 묻어 주었습니다.
성당에 입문은 내가 오래 되었으나,
열심히 활동은 마리아가 더 많이 짧고 굵게~
그렇게 하느님께 갔습니다.....
성가연습을 할때,
신부님께서 배에서 소리를 내어라고
복식호흡을 하라시며~
그때 참 많은 연습을 하면서~
밤 늦게 까지 노래공부~ 성가연습을
아마도 그때 가장 성실히 배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신부님께서 열성이 대단하셔서
대구대교구에서도 그 신부님의
함자만 얘기해도 다 아십니다.
지금은 은퇴하시어 시골 작은 '피정의집'을 하시면서
잘 계시리라 믿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잘 사시기를 기도중에 생각합니다.
신부님도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에는 ~
좋아하는분, 안좋아하는분~다 있기에
그건 각자 자기 취향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빨강색 좋아한다고 남도 나처럼~
그래야만 한다는건 ~ 어불성설이지요.
하늘에 있을 내 친구 마리아야~
가끔은 우리 부모님 산소에 가서 기도할 적에~
너에게도 가서 몇번 아니였지만, 찾아가서 연도를 ....
이젠 멀리 와서 그곳에 간다는것이 쉽지만은 않네그려....
잘 지내고~하늘나라에서 편히 잘 쉬고있어...
그런후에 그 가족들 모두가 다 가톨릭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친구의 동생이 성악을 해서
친구가 못다한 한을 대신 하여서 음악선생을 하면서~
아마도 성당에서
너 대신 열심히 잘 하고 있으리라....
그때, 신부님이 세우신 00중학교에 음악선생으로
근무를 잘 하고서 교우랑, 결혼을 했었지요.
참 예쁘고 성격도 좋고,
다리에 소아마비만 없었다면~
2015. 1. 25. 청주에서
Donizetti (1797 - 1848)
Lucia di Lammermoor
(Act III) Edgardo's cabaletta
Tu che a Dio spiegasti l'ali
날개를 펴고 하늘로 간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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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 읽고 나자 그만 눈물이 나네요 , 나이가 차 오르면 눈물도 많아지는지 ..아니 집에는 어렸을 적에 집사 까지 있는
아씨로 자랐지만 어렸을 적에도 눈물이 많았는데 지금도 눈물이 많은건 품성 탓인가 합니다
인터넷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분을 만날 수 있다니 , 제가 13년간 모임 한번 없이 운영하는 1700명의 카페도 '초롱'별님 처럼 진솔하고 훌륭하신 분들로 그렇게 모으자 해도 안될법한데 다음 전체에서 가장 성품이 빛나는 분들로 구성 되어 있는데 요 한달사이 너무 행방이 묘연한 분들을 좀 정리 중이기도 합니다
초롱별님 ,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 낸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 많은 않는것 같습니다 , 많은 경험과
낯선 환경 속에서도 항상 정의롭고 온기가 있는 그 근원이 어디로 부터 흘러 나오는건지
또 항상 노력하고 창조하는 그 생명력 또한 원류가 어디인지 , 참으로 배울게 많은 분이시군요
세상 사람들이 다 낡아지고 때묻어도 우리 초롱별님은 사계절 푸른 소나무 처럼
굳건하나 생기있고 그 무엇 보다 푸른 빛깔로 더 사랑스런 계절로 이어 지시길 빕니다
초롱별님 , 많은 분들이 이글을 읽고 서로 소통과 공감과 감동을 빚어 내야 하는데
몇군데 쪽지를 보내고 그후 아무 행동도 안하고 있었더니 쪽지를 아직도 거의 안 읽고 있더군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 한두분 정도씩 늘어날 것을 믿고는 있지만 제가 별 의욕이 없어서
@미술관 옆에서 그냥 두고 보는데 초롱별님 글 읽을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져 옵니다 .좀더 많은 분들이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과 함께 ... 제가 운영하는 카페도 초창기 8분으로 시작 했는데 그후 초대 없어도 1700 분이 모이신 까닭 , 그것도 의사 7분 교수 9분 . 기타 도 거의 지성파들로 구성되었답니다
지금은 댓글도 안달고 대문에 신경쓰며 잘 관리만 하는데도 굳건히 자리 잡아서
회원님들 스스로를 즐기시는 퀄리티 높은 공간이 되었답니다 , 제가 좀 생기를 얻으면
한번 정식으로 초대를 몇분 하여야 겠습니다 , 더욱더 아름다운 생을 가꾸어 나가시기를
온 마으을 다해 지지해 드리고 싶군요 , 고맙습니다
@미술관 옆에서 애구~ 카페지기님~ 뭘요...저는요....아닌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말로는 할 필요가 없는것은
해 봤자, 서로 얼굴만 붉히지, 뭔 해결방법은 없더라구요....
내가 할 수 있는일, 그러니까,
아무리 남을돕고 싶어도 돈이 없으면 마음뿐이라는말....
그것이지요.
그런데, 객관적으로 볼때,
아무것도 안 변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지요.
세월호의 사건이 나서 직접 총칼을 들고 행동은 못해도....
기도로써 모여 한 마음으로 촛불 시위하면요....
정부도 막지 못하지요.
저 역시 힘이 없어 행동으로 내가 하고싶은대로 못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걸.....
아마도 하느님은 아시리라......
그래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사람의 욕심은 죽고 없어져야 끝이나지요. 왜냐면, 생각이라는 사고력이 그렇게 이끌어 가지요.
저는 아는게 별로 없지만, 내가 살아온 삶속에 체험하고 느끼고, 또 세상의 그 어떤것으로부터
멸시와 학대, 그리고 말로 다 표현 못하고 살아온, 억울함.....
그런것을 혼자서 감당하는데, 전지전능한 그 절대자가 필요했습니다.
내가 원하든, 아니했든간에....내가 태어난것이 내 뜻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였듯이.....그래서 내 운명속에 함께 한 하느님을
어떨땐, 원망도, 어떨땐 왜 나였을까?하는 .....
그런데, 이 모든것은 하느님의 계획아래, 아루어진 것이라는것을요....
그래서 많이는 아니더라도~
성경을 공부해보니까,
하느님의 뜻은 사람의 손에 의해 되어진게 아니고, 본디부터 하느님께서 계획되어진~
그래서 미미한 나에게 나를 도구로 사용하시기위해~ 그렇게 나를 힘들게 하셨구나....
사람은 누구나에게 고통과 십자가가 있습니다.십자가라 함은 자기만의 아픔,
또 이겨내어야 할 건강문제라든지....아무튼, 이겨내어야 할 혼자만의 고통....
나누어 질 수 없는 문제.....그것이 자기만의 십자가라고 표현을 하지요....
그래서 이젠 인간은 안믿고, 바블.....성경책의 하느님 말씀만 믿기로.....
그러면 내 마음이 평화가 온답니다....
종교를 안 믿더라도 성경책을 한번 읽어보십시오...
불경책을 탐독하셔도 좋구요~
@초롱별 컴퓨터가 갑자기 글이 안 쓰여지네요.
아마도 뭔 문제가 생겨졌나 봅니다.
자판의 무선이라, 건전지가 다 되어서~ㅎㅎ
제가 김형석교수님의 에세이를
즐겨 보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얼마전에 '아침마당'에서
tv로 뵈었습니다...
그분의 외모와 온화한 미소를 뵈올때,
참 잘 늙어 셨구나,참 잘 살고 계시는구나...
를 느꼈습니다.
다 늦게 개신교에 입문하셔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사는게 이렇게
좋은줄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하신~
교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초롱별 그 분이 개신교 신자가 되셨지만
학자였습니다. 전 그분의 책 속의
담겨져있는 혼을 존경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젊지만, 암과 투병하시면서,
친환경운동을 하시면서
노인문제에 확고한 뜻을 얘기해주시는
황창연신부님의 동영상을 보신다면,
나의 멘토가 되어버린 그분의 깊은
말씀을 저에게, 많은 숙제를 해결해 주시는 참고서 같은 분....
꼭 이래야 된다가 아니시고,
이렇게 살면 지름길로 가는길을
제시해주는 등불같은...
한편의 장편소설 같고 수필과도 같은 긴글을 잘 정독햇습니다...
글의 내용들이 너무도 순수햇고 냇가에 흐르는 서정시처럼
아름다웟습니다..
같은 가톨릭 신자라서 글 읽기가 편햇던게 사실입니다...
황간이란 지명이 나와서 흥미진진하게 접햇지요 저도 어린시절
충북 영동군 황금면 계룡리 에서 어린 시절을 보냇어요
계룡리는 엄밀히 말해서 황간과 추풍령 중간인 산골동네지요..
가끔씩 어린시절 황간장터를 본것 같습니다.추풍 국민하교를 다녓지요...
황순원의 소나기 읽듯 잘 보았습니다..모쪼록 카페에 오셔서 건필하시길
바랍니다...주님의 은총으로 늘 건강하시옵소서^^
윗글은 초롱별님이 오셔서 여러편의 글을 올리시기전 답글입니다..
언제쯤 카페에오실까 궁금하였는데 바로오셔서 반갑습니다..ㅎㅎ
저는 중학교 2학년때 영세를 받았고 그해 복사로 미사대전에 참여햇지요
왜 이런 말씀을 드리냐 하면 본문글 중에 식복사란 단어가 등장하는데..
복사는 당연히 알지만 식복사는 처음 듣습니다..본문을 읽어가면서 아하
그렇군아 하고 자득해가기도 햇지요..
...이리 곱고 소중한 인연이된점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살롬...†.평화를 빕니다~~~
미사때, 신부님 옆에서 미사예절을
도와주시는 분을 복사라고 하지요.
그런데, 식사와 생활전체를 도와주는 보통은 옛날엔 동정녀들이 참 많았어요.
거의 수도자적인 삶을 산다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본디, 독신자인 사제를 돌봐 준다는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적으로 진짜 하고싶지는 않지만, 음식을 정성껏 해 드린다는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예전엔 24시간 돌봐드렸지만 요즘은 시간제로 출퇴근해서
훨씬 편하고 사제관에 있을때만이라도, 최선을 다하는
만능시종관이 랄까요?
@초롱별 네에 그렇군요..덕분에 잘 알고갑니다..감사드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