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세탁기 속에
빨래를 집어넣고 빙빙 돌린다
빨래를 고문하자는 게 아니다
제 살아온 날들을 추적해보자는 것이다
아프게 매질하지 않아도
옷들은 두 말 않고
제 과거를 비워낸다
항복하듯 땟국을 마구 토해낸다
몇번의 시련 끝에
빨래는 속살 하얀 마음이 되어
빨랫줄 타고 종일토록
너울너울 춤을 춘다
늦가을이 바쁘다
호박은 과부의 엉덩짝 같은 것
쪼그라진 할매의 젖통 같은 것
이나저나 창피해서
우글거리는 넝쿨 속에 숨어 있다
그것도 모르고
넝쿨 마디마디 갓 달린 새끼 호박들
쇠불알 만 한 것
방망이 만 한 것
절구통 만 한 것
지지리 못난 것들이
한데 어울려 숨바꼭질을 한다
돌담 위 제 어미 닮아 가느라
늦가을이 바쁘다
황혼녘 민들레
민들레는 녹 쓴 철길에서 늙어간다
하고많은 곳을 놔두고
바람마저 위험한 철길에 날개를 접는다
급행열차의 쇠바퀴가 철길을 밀고 갈 때마다
민들레는 고독을 쓸어 모아 꽃을 피운다
꽃방석처럼 펼쳐진 꽃
저 꽃이 왕관처럼 부풀어 씨앗 날릴 때
고향집 툇마루에 등을 기대고 졸던 할아버지
반지르한 머리통에 햇살을 쬐며
고향 떠난 내 새끼 지금쯤 잘 살고 있을까
철길 같은 위험한 세상의 길목 어디쯤에서
새끼들은 민들레처럼 늙어가고 있을까
민들레
참 너도 팔자가 사납다
허공 자유롭게 날다가
하필 찾은 보금자리가
실금으로 갈라진 아스팔트 가슴이라니
씨앗은 안전한 착지의 방법도 익히지 못했나보다
불행하게도 그 실금 속에 떨어져
힘겹게 외로움과 싸웠으니
갓 피운 꽃빛에도 독한 빛이 역력하다
그래도 그리움의 싹 피어 올리는 것이 기특하지 않느냐
황량한 아스팔트길 비춰주는 모습이 가상하지 않느냐
만추
벌써 귀뚜라미가 뒤란에서 운다
새벽녘 달빛 쓸어 모아
뒤란에 쌓아놓으려고 귀뚤거린다
정에 목말라 가슴 절절이 우는 밤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 하나
살결이 쪼글쪼글한데
저 홍시처럼 내 가슴속도 주름 깊어
속 깊이 퍼내는 눈물
홍싯빛보다 더 붉고 진득하다
단풍나무가 씨앗을 날리는 법
단풍나무는 씨앗을 가볍게 날리는 법을 알고 있다
허공에 씨앗을 날리면
바람 머리채 살며시 휘어잡아
프로펠러처럼 핑글핑글 돌며 허공을 난다
단풍나무 가지 끝을 벗어나 땅에 닿기까지
씨앗들은 수천 번 허공을 돌고 돈다
그렇게 쉼 없이 돌고 돌아야만
씨앗이 땅에 발 딛고
사뿐히 안착할 수 있음을
단풍나무는 씨앗을 프로펠러처럼 돌려 그 비밀을 알려준다
끝없는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넓은 허공 끌어당겨 매끄럽게 하늘을 난다
소음이 전혀 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온몸으로 밀고 가는 세월이 가볍다는 뜻이다
오십견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들어왔다
오랫동안의 평화가 무참히 깨지는 소리
육중한 해머를 들고
억겁의 세월동안 지은 육신의 집을
우악스레 때려 부순다.
뼈에 살을 붙이고
살에 뼈를 끼워
온전히 나를 빚어놓은 부모님의 노고도
저 해머 앞에선 허사였다
나 오십 해 동안 저주스럽게 살지 않았다
누군가 해머를 들고 와
내 어깨뼈를 부술 만큼 죄도 짓지 않았다
그대, 정체를 밝히시오
밤새도록 육신의 집만 부수지 말고
잠깐이라도 공포스러운 해머
어둠의 뜨락 위에 살며시 내려놓으시길
채송화
채송화들이 고물고물 피어 있다
장독대를 빙 두른 시위대처럼
줄기마다 붉고 노란 꽃불 켜들고 있다
나 여태껏 살아왔어도 채송화보다 못한 놈이었다
불의에 맞서 촛불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 없었다
찬바람 몰아치는 거리에서
희망처럼 촛불 한 번 켜든 적도 없었다
납작 엎드려 살아도 저들에게 겁쟁이라고 하지 말라
이래 봐도 저들의 가슴속엔
몹쓸 세상 깨부술 힘 너울거리고 있다
청양고추
나이 먹어도 철없이 구는 놈들에게
청양 고추 몇 개씩을 던져준다
세상 어느 맛보다 더 맵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입 와짝 깨물면
혀끝에 벌침 놓듯 톡 쏘는 그 맛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눈물 돋는다
밥알 같은 고춧꽃
어디서 저런 독한 맛이 들까 의심 들지만
땡볕에 들볶인 탱탱한 고추 속엔
지친 세상살이 보다
더 지독한 아픔 가득하다
정신 차리고 한 입 와작 깨물어도
혀끝 얼얼한 그 맛이
바이러스처럼 퍼져 눈물 돋는다
봉숭아
봉숭아가 어깨 걸고 모여 앉았다
붉고 노란 꽃잎을 두른 봉숭아들이 무언가를 모의한다
깨어 있는 자는 꽃잎에 새겨진 글씨를 마음으로 읽지만
우둔한 자는 눈으로 보여줘야 믿는 법이라며
봉숭아는 시든 꽃잎을 뭉쳐 꼬투리를 만든다
탄약 같은 실탄이 잔뜩 들어 있는 꼬투리를 터뜨려
한꺼번에 퍼질 사랑의 순간을 생각한다
사랑은 실탄과도 같은 것
꼬투리가 터질 때는 딱총처럼 화력도 세
가을을 기다리는 처녀들의 가슴엔
울긋불긋한 설렘이 가득하다
숨바꼭질
보름달이 뜰 때
애들이 볏단 속에 숨어들었다
달무리가 희미하여
애들을 찾는데 애를 먹었다
볏단이 뼈대를 일으켜
애들을 숨겨 주었지만
구석구석 어슴푸레한 달무리의 잔해가 무서웠다
볏단 속을 들쳐보니
애들이 벌레처럼 웅크려
잠을 자고 있었다
푸른 산경에 들다
봄날 숲속에 들었다
자벌레들이 산길에 나와 삼보일배를 한다
푸른 육신이 쿨렁거릴수록 환히 길이 열리고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길을 피해서 간다
기계톱은 아카시아 숲을 파먹느라 시끄럽고
허공을 부유하는 날벌레들이 성가시다
그 소리에 묻혀 침묵을 끌고 가는 행렬이
아카시아 숲 그늘에 묻힌다
저 작은 저항이 아카시아 숲을 지켜낼 수 있을까
백 마디 말보다 꿈틀대는 절규가
더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 올까
기계톱으로 파헤쳐진 아카시아 숲길에
자벌레는 무거운 침묵을 끌고
물결처럼 푸른 산경에 든다
봉숭아
늙은 꽃대 속에 연분홍 그리움이 들어 있다
꽃잎 찧어 처녀애들 손톱에 붙이던 날은 이미 가버렸다
탄피처럼 날아다니는 벌들은 휑하니 사라지고
꽃가지엔 씨방이 탄알처럼 맺혔다
꽃대를 총구처럼 겨눠 세상을 향해 쏘고 싶었다
그 옛날 누이와 꽃물들이던 추억을 씨방 속에 숨기고
봉숭아는 늙은 다리 일으켜 세월을 보낸다
붉은 꽃잎 돌로 찢어 손톱에 붙이면
그 옛날 추억이 살아나듯
하룻밤 새 발그레 물이 드는 보름달
봉숭아가 꽃대 아래 씨알 주르륵 쏟아놓는 것은
가슴 속 그리움이 그만큼 절절하다는 것이다
고목의 나이테
고목 속엔 둘둘 말린 세월이 있다
가도 가도 아득한 길이 있다
한참 가다보면 숲 바람이 일고
자욱한 꽃향기도 피어 올랐다
고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
촉촉이 땀 흘리며 부피를 늘리던 살 냄새가 났다
제 분신 한 쪽을 세상에 남겨두기 위해
고목은 줄기차게 나이테를 감는다
자개농이 된다든지
책장이 되어
제 살아온 날들을
가슴 속 깊이 구구절절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잘려진 고목의 나뭇결에는
세월을 감으면서 놀라 흩으러진
천둥과 번갯불도 보인다
첫눈
새벽 눈길 밟으며
집에 도착했을 때
부엌의 창틈으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익숙지 않는 손놀림으로
덜걱덜걱 설거지를 하다가도
누군가를 기다리듯
부엌문 열고 빠꼼 바깥을 내다보았다
닭똥 같은 눈물
흘러내릴 듯한 그늘진 눈빛
이마를 타고 내려온
헝클어진 반백의 머리칼
굽은 등 위에 여든 해의 묵은 세월을 얹고
하염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고나도 소식 없는 눈길 위로
멧새들만 어깃장 놓듯 울어쌓는데
어머니는 첫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꾹꾹 밟고 들어오는
아들의 발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