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한국 기독교 전래
1884년 8월 10일 미국의 의료 선교사였던 알렌이 제물포항에 입항하여 한국 땅에 선교하게 되었고 그 후 8개월이 지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가 인천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이 복음을 접하기는 그 이전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1253년 불란서 수도승이었던 윌리암 루부르크가 몽고군을 따라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 교황청에 한국을 소개하여 선교의 필요성을 제시한 바가 있었으며 천주교의 전래 시기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4년부터 1800년이며 수난시대는 1801년 신유교난, 1839년 기해교난, 1886년 병인교난 등으로 그 수난 시기는 1878년 홍포시대가 시작되기 까지 계속되었다. 그간 9명의 신부와 2천여명의 한국 천주교 신도가 살해되어 피의 제단을 쌓았던 것이다. 개신교는 천주교의 수난 시기가 끝나 전도와 포교를 시도하던 홍포시대 초기부터 국내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상기와 같이 천주교회가 많은 박해를 받은 이유로는 그 당시 나라의 기강을 잡고 있던 유교도들의 투철한 배타심에 기인했으며 조선인들의 외국인과 외국 문물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선교와 함께 우연 또는 의식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무력으로 위협한데 대한 보복심의 발로였으며 또한 천주교 신자들이 황사영의 백서 등으로 노골적으로 외세를 이용하여 박해를 제거하려한 것, 그리고 고유문화를 무시하고 급격히 자기들대로의 생활과 의식을 요구한 데 대한 발로로 심한 박해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국의 개신교는 전혀 기독 신앙의 불모지에 그 첫 발을 내어디딘 것이 아니라 천주교의 피밭 위에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는 성경을 전파하지 않고 교리서와 성구등을 전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간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개신교와 처음 접촉한 것은 1627년 네덜란드 사람 벨프브레(박연) 일행 세 사람이 경주 앞바다로 들어와서 살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 두 사람은 죽고 박연만 살아서 훌륭한 군인으로 업적을 남겼으며 도를 가진 사람으로 감화를 끼치며 살았던 것과 1653년 네덜란드 사람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상륙하여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14년 동안을 억류생활 했었던 일이다.
제2장 한국 장로 교회의 전래
선교사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된 경위는 1832년 화란 선교회에서 파송된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다. 그는 실제로 선교적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이 땅을 방문한 최초의 목사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1827년 화란 선교회(Netherland Mission Society)에 소속한 독일인 선교사로 자바, 수마트라 등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부임하였다. 그 후 그는 화란 선교회와 관계를 끊고 태국을 거쳐 중국인 선교에 열중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동해안 지대를 항해하면서 선교하다가 1832년 7월 17일에 한국 서해안인 황해도 백령도에 도달하였다.
백령도에 도달한 귀츨라프 목사는 다시 그곳에서 남하하여 그 해 7월 21일에 군산 등 항구도시를 돌며, 가는 곳마다 한문 성경을 나누어 주며 전도하였고 의약품 등을 나누어 주며 주민들의 병을 고쳐 주기도 했다. 한편 그는 홍주 목사인 이민회와 수군우회 김영수를 통해 국왕인 순종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귀츨라프 목사가 40여일간 서해안의 전도를 마치고 돌아간 후 33년이 지나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가 된 토마스 목사가 1865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는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Wales)에서 회중 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 대학교 뉴칼레지에서 교육을 받아 1863년에 목사가 되었다. 그는 곧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 Society)에서 중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그의 아내인 캐롤라인과 함께 1863년 12월 상해에 도착했다. 그 후 1865년 산동성 치푸로 임지를 옮겨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런데 1865년 6월 토마스 목사는 상선 제너랄 셔먼(General Sherman) 호에 승선하여 청진을 출범 한국으로 향했다. 제너랄 셔먼호의 목적은 서울로 가서 국왕에게 통상을 요청함에 있었으나 지리에 서툰 선원들은 대동강을 한강으로 오인하여 내륙 깊숙히 항해하며 평양에서 10리 밖인 만경대에 이르러 토마스 목사는 동리에 들어가 성경과 전도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 평양에서 온 신태정과 중군 이현익이 나타나 문정을 개시하고 토마스 목사는 북경에서의 약속을 믿고 감사를 만나기로 요청했다. 그러던 중 모여든 군중과 병졸들이 함성을 외치며 혹은 돌로 혹은 화승총으로 셔먼호를 공격하였다.
셔먼호가 불타기 시작하자 놀란 선원들은 물위로 뛰어 피했으나 토마스목사는 필사의 힘을 다해 싣고 온 성경을 강변을 향해 산포하였다. 결국 토마스목사외 4인만 남고 전 선원은 사멸했다. 토마스 목사는 박규수감사 앞에 끌려가 국문을 받았으나 그 때 쇄국정책이 강화될 때라 감사는 어찌할 수 없어 토마스 목사를 군졸들에게 맡겨 사형시키게 했던 것이다. 토마스 목사는 양각도(羊角島) 옆 쑥섬에서 참수 당하였다. 때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9월 1일 저녁 무렵이었다. 그 후 최후까지 자신의 목을 치는 군졸들에게 성경을 주었으며 그 때 토마스목사의 목을 친 행인 박추군은 회개하여 1899년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평양의 초대 교인이 되었다. 1899년 토마스목사가 순교한 대동강변에는 토마스의 이름을 따서 T형의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그 후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우는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 호스(Ross) 목사가 만주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으며 1881년부터 우리글로 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1887년에 드디어 [예수교 성교 전서]란 이름으로 신약 성경이 번역 출판되었다. 그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 번역과 국내 반포에 협조한 사람은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이상 4명은 1876년 세례 받음), 그리고 서상륜 등이다.
1883년 백홍준이 의주에 와서 성경을 전하며 전도해서 반년도 못되어 그의 집에서 10여명이 모이는 한국 최초의 기도소가 되었다. 그 후 서상륜도 의주에서 전도하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동생 서경조와 함께 삼촌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솔내(송천)에 와서 전도하여 58세대 가운데 50세대가 믿게 되었고 1885년 한국 최초의 교회가 여덟칸 초가집으로 건축되었다.
제3장 선교사의 본격적인 활동
1. 알렌 의사의 내한
미국 북장로교 의료 선교사인 알렌 박사가 약가방 속에 성경책을 넣어 가지고 1884년 9월에 내한하였다. 그 해 12월에 일어난 개화당의 쿠데타에 의하여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는 금부대장 민영익이 중상을 입었는데 그 치료를 알렌 의사가 맡게 되었고 서양 의술의 우수함과 알렌 의사의 성의가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알렌 의사는 황실의 시의관으로 임명되었고 1885년 2월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설립 허가를 받게 되었다.
한국 선교의 길이 서서히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2. 언더우드 목사의 내한
1885년 4월 5일 부활 주일 아침이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Under Wood)목사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Apenzeler)목사 부처와 함께 제물포에 상륙하였다. 아
펜젤러 부처는 당시의 정세에 의하여 일본으로 돌아갔고 언더우드 목사는 서울로 와서 알렌 의사를 도와가면서 선교의 기회를 기다렸다. 1886년에 체결된 한불 조약에 교회(敎會)란 문구가 삽입되었고 이 문구에 의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와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복음 전도가 용인되었다. 1887년 가울 솔내에 내려가서 7명의 신자에게 세례를 베풀고 1887년 9월 27일 새문안 자기 사랑방에 14명의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드린 후 정식으로 교회의 설립을 공포하니 이것이 오늘의 새문안교회의 창립인 것이다. 이 날 참석자 중에는 전도자 백홍준, 서상륜, 알렌 선교사, 로쓰 목사 등이 있었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7년 10월 9일 정동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제4장 문경의 개신교 전래
문경지역의 개신교 전래연도를 분명히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1928년에 총회에서 간행한(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상권)에는 문경지역 교회에 관한 기록이 누락 되었다. 정확한 기록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 교회들의 연혁을 참고할 수박에 없다,
문경지역 최초교회 설립의 공식적 기록은 1903년 문경군 마성면 외어2리 39번지에 설립된 늘목교회(노목교회로 개칭 후 현 동성교회)가 문경 최초의 교회였다. 동성교회 연혁에 다음의 내용이 있다. 1903년 5월 15일에 마성면 정승달(의병 김성달로 추정, 일제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한자가 비슷한 전승달로 이름을 바꾸었을 가능성이 있음)씨가 마을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처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얼마 후에 전승달씨는 일본 수의대(경찰)에 의하여 연행되어 간 후 전혀 소식이 없었으니 전승달씨는 늘목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어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후 주님의 복음은 더욱 힘있게 전파 되어갔다. 일본 수의대의 핍박이 심했으나 마을에 청년들은 믿기로 결심을 하고 주님께 돌아오니 그 대표적인 인물들은 권수원, 이덕삼, 엄팔봉, 김대용, 전응서, 박남진 씨였다고 동성교회 역사에 기록되었다.
1909년 10월 5일 김창원 씨가 박래영, 김상국 씨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이 현재 점촌침례교회의 시작이며 1913년 10평 내외의 흙벽돌 예배당을 지었다.
문경군 가은읍 하괴2리의 하괴교회는 1912년 3월 25일 오월번 선교사가 파송되어 이준호, 정주섭의 주선으로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문경시 가은읍의 성저교회 연혁에서 1904년 4월 5일 하괴교회에서 분립과 1901년 성저교회 한인수 영수 모친과 1903년 한인수 자신의 하괴교회 입교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한편, 하괴교회가 1901년 이전에 설립되었다며 하괴교회가 문경지역의 최초교회라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20년 문경읍에 문경교회가 설립되었다. 1920년 3월14일 경안노회 인노절 선교사가 문경면 하리에서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1952년 12월 신복규, 주경태씨가 장로 장립되어 당회를 조직하였다. 문경교회는 1955년 합동과 통합 교단 분리 때 문경읍교회가 통합 측으로 분립 되어 1995년에 교회 명칭을 문경시민 교회로 개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