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룡(權相龍, 1706~1765)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용여(龍汝), 호는 긍재(兢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권구(權坵)이고, 할아버지는 권이칭(權以偁)이다. 아버지는 권한(權澣)이고, 어머니는 통덕랑 조연(趙淵)의 딸 풍양 조씨(豊壤 趙氏)이다. 부인은 이화(李華)의 딸 흥양 이씨(興陽李氏)이고, 아들은 권경(權檾)이다.
1706년(숙종 32) 상주목 산양현[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에서 태어나 큰아버지 권심(權深)과 사촌 형 권상일(權相一)에게 학문을 배웠다. 1735년(영조 11)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38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후 1739년 권지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후 장녕전별감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1745년 예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호서경차관을 역임하였다. 1746년에는 함경도도사로 부임하였으나 어머니가 사망하여 낙향한 뒤 1752년까지 부모의 상을 치렀다.
1753년 호조정랑으로 복귀하여 8월에 자인현감으로 부임하였지만, 1754년 사직 후 귀향하였다. 1757년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지만 4월에 다시 사직한 뒤 귀향하며 사도세자에게 백성들이 굶어 죽는 참상과 봄날에 농사를 근면하는 방도를 상언하였다. 1758년 다시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고, 1760년에는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762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을 때 권상룡은 국왕에게 체직을 청원하여 낙향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권상룡은 근암서원에 가서 곡을 한 뒤 사도세자의 원통한 죽음에 대한 상소를 하려고 하였지만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이후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를 소요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1765년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형천리에 있다.
내용 시 112수, 사(辭) 1편, 서(書) 20편, 별지 26편, 서(序) 2편, 기 2편, 발 1편, 상량문 1편, 만사 34수, 제문 4편, 묘갈명 3편, 가장(家狀) 2편, 부록으로 만사 13수, 제문 2편과 행장·묘갈명·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체적으로 힘찬 기상과 고아한 정취를 풍기고 있다. 「영무등(咏無燈)」은 등불 없는 캄캄한 방에서 정진하다가 갑자기 방안이 밝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신비로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읊은 것으로 선사(禪師)의 오도송(悟道頌)을 연상시킨다. 「공자동유음(孔子洞有吟)」은 ‘공자동’이라는 동명(洞名)에서 시상이 떠올라 학문에 대한 열정과 공자를 사모하는 정을 읊은 것이다. 「속리산」·「수정봉(水晶峯)」·「복천사(福泉寺)」 등은 모두 산수와 자연을 읊은 서경시로서 웅건하고 호방하면서도 형용이 섬세하여 그 표현기교가 뛰어난 작품들이다. 서(書)의 「답오상원문목(答吳尙遠問目)」에서는 『주역』과 『중용』의 말을 인용해 귀신의 덕(德)을 논변하고 하늘과 조상에게 절기에 따라 제사하는 이치 등을 설명하고 있다. 「여이정수(與李正叟)」는 여러 편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학문하는 방법과 『대학』의 본말에 관해 의견을 피력한 내용이 있다. 「동계안서(洞契案序)」는 마을에 친목계를 만들면서 그 취지와 목적 등을 설명한 것이다. 이밖에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쓴 기행문인 「유금강내산대략(遊金剛內山大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