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신간회 문경지회 설립대회 (후)
문경에서는 신간지회新幹支會를 설치코자 지회설립 준비위원회를 조직 한 후 각 방면으로 회원모집을 하여 정수 이상 입회하고 기타 준비가 완성되어 본부의 승인을 얻어 지회설립대회를 개회하였다.
1928년 2월 5일(음 1월 14일) 경북선 점촌문경역전 청년동맹青年同盟 사무실에서 일반인도 다수 참석한 가운데 경성본부의 특파원의 강연도 있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서울에서 창립한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으로 민족협동전선이다
1927년 2월부터 1931년 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만∼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계기로 일어난 6·10만세운동에 자극받아 국내에 있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공산주의자 간의 타협에 의해 민족유일당운동으로 조직되었다. 일제강점기의 가장 큰 합법적인 결사로서 항상 일제의 주목을 받았다.
1924년 전후 사회주의사상에 압도된 민족주의 진영과 6·10만세를 고비로 사회주의 진영의 활동이 퇴보하자, 좌우 합작의 민족 유일당 설립이 필요했다.
일제는 두 진영의 동태와 활동을 추적, 구금하기 위해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미명으로 허가해 주었다. 발기인은 신석우(申錫雨)·이상재(李商在)·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일보사계가 중심이 된 34명으로 이상재와 권동진(權東鎭)을 정·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규약은 25개조로 활동 강령은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단결을 공고히 함,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등이었다. .
창립총회에서 간사 35인을 선출하고,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의 7개 부서를 두었는데 창립 당시 중앙 본부의 회장단을 민족주의 진영에서 독점했다
신간회에서는 민족,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조헌영(趙憲泳)을 일본 동경 지회장에, 7월 10일 한용운(韓龍雲)을 서울 지회장에 임명하였다. 1928년 말에는 국내외에 143개의 지회와 3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조직이 커지자 일제는 대규모의 전체 대회를 승인하지 않는 등으로 신간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1929년 7월 1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열린 전국복대표자대회(全國複代表者大會) 에서 허헌(許憲)이 중앙집행위원장과 좌익계의 중앙집행위원 45명과 중앙검사위원 10여 명이 선출되었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계속됐지만 투쟁 목표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굴레를 과감히 벗어나며 타협주의를 배격할 것, 언론·집회·결사·출판 등의 자유를 쟁취할 것과 청소년·부인 형평 운동을 지원할 것과 파벌·족보주의의 배격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기타 이민을 강력히 반대하며 재만 동포의 구제도 역설하였다. 근검 절약과 민족혼을 되찾아 우리의 얼이 건재하다는 걸 국내외에 과시하는 것만이 우리 민족의 살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사단으로 광주에 다녀온 김병로(金炳魯)의 건의로 서울에서 광주실정보고민중대회를 1929년 12월 13일을 개최하여 규탄하기로 하였다.
권동진·한용운·조병옥·송진우(宋鎭禹)·홍명희(洪命熹)·이관용(李灌鎔)·김항규(金恒奎)·주요한(朱耀翰)·이원혁(李源赫) 등이 민중선언서를 발표하고 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는데 일본 경찰은 조병옥·김무삼(金茂森, 일명 金東駿)·권동진 등 44명과 근우회(槿友會) 간부 등 40명을 연행·구속하였다. 그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0년 2월 석방되었다. 김병로는 즉시 석방되어 신간회 재건운동에 힘써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좌우익 간의 갈등·대립으로 분란이 계속되던 신간회는, 1931년 5월 16일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산을 결의하여 창립된 지 만 4년 만에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