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자율규제와법
사업자 행동 강령
사업자 자율 규제의 출발점은 인터넷 사업자의 법적 책임이다. 인터넷 사업자는 비록 콘텐츠 제공을 매개한다고 해도 알거나 알 수 있었고 기술적으로 차단이 가능한 경우에는 법적 책임이 있다. 인터넷 사업자는 법적 책임에 대한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율 규제를 한다.
자율 규제의 포괄적인 시행 방안이 행동 강령의 제정이다. 행동 강령은 그 자체가 법은 아니지만 법 제도와 결합하여 사업자 자율 규제의 절차와 방법을 제시한다. 사업자들은 행동 강령의 집행을 위해 자율 규제 기구를 운영한다.
인터넷 사업자의 법적 책임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정보의 법적 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논란이 많이 되었던 것은 문제되는 당해 정보를 매개한 인터넷 사업자의 법적 책임 문제다. 대표적인 예가 명예훼손이다. 예컨대 특정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의 정보가 A사가 운영하는 포털 사이트의 게시판에 올라왔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 당해 명예훼손 내용의 정보를 직접 제작, 제공한 자는 당연히 당해 정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그 정보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식으로 단순히 정보 유통을 매개만 한 사이트 운영자 A사는 당해 정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가 문제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명예훼손뿐만 아니라 지적재산권의 침해 행위라든지, 음란물의 유통 행위와 같은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정보 매개와 관련된 법적 책임의 유무는 당해 정보를 매개한 자에게 ‘편집자율성(editorial autonomy)’ 내지 ‘편집통제권(editorial control)’을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결정되어 왔고, 이러한 해결 방식은 인터넷에서도 여전히 적용된다.
일반적으로 인터넷과 관련된 사업자는 그 종류가 다양하나 기능별로 구분하면 인터넷 콘텐츠 제공자, 인터넷 콘텐츠 매개 서비스 제공자,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의 세 가지다.
첫째, 인터넷 콘텐츠 제공자(ICP, Internet Content Provider)는 인터넷을 통해서 콘텐츠나 정보를 제작·제공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이를 ‘정보 제공자’라고 부를 수도 있다.
둘째, 인터넷 콘텐츠 매개 서비스 제공자(ICH, Internet Content Host)는 타인의 정보(정보 제공자가 제공하는 정보)를 매개하는 자를 말한다. ‘정보 매개 서비스 제공자’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상의 각종 포털 사이트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용자로 하여금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정보를 관리·매개하는 자를 의미한다.
셋째, 인터넷 접속 서비스 제공자(ISP, Internet Service Provider)는 타인의 정보(정보 제공자가 제공하는 정보)를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제공자가 제공하는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다시 말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정보 통신망 접속 서비스 제공자’라고도 할 수 있다. 광대역 초고속 통신망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자가 전형적인 사례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인터넷으로 유통되는 정보에 대해서 실질적인 편집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따른 구분으로, 오늘날 외국 법제는 이상과 같은 구분에 따라 각 사업자의 법적 책임을 묻고 있다. 예컨대 명예훼손적 내용을 담고 있는 정보가 유통되어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이 문제되었을 때, 정보 제공자에 대해서는 당해 정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전적으로 물을 수 있지만, 정보매개자는 당해 정보의 내용을 알았거나 알 수 있었고 또한 기술적으로 차단을 할 수 있었던 경우에만 법적 책임을 물으며, 단순히 인터넷에 접속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에 대해서는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인터넷 사업자의 법적 책임 문제는 인터넷 사업자로 하여금 자율 규제의 중요한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 중 하나가 된다. 왜냐하면 인터넷 사업자는 가능한 한 정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자체로 정보에 대한 통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개별 사업자 차원보다는 사업자 협회나 사업자 단체가 공동으로 표준적인 기준이나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법적 책임의 예측가능성 확보라는 차원에서 필수이기 때문이다.
신문이나 방송과는 달리 사이버공간에서 개별 정보제공자나 표현 행위자의 책임이 아닌 인터넷 사업자의 책임 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논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인터넷 사업자에 엄격한 책임을 추궁하면 인터넷사업자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사적 검열을 강화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결국 정보 제공자나 표현 행위자에 대한 위축 효과(chilling effect)를 유발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종합 정보 제공 사업자의 책임 판례
개념적으로 보면 인터넷 포털 사업자는 인터넷 콘텐츠 매개 서비스 제공자라 볼 수 있지만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인터넷 포털이 제공하는 서비스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터넷 콘텐츠 매개 서비스 제공자가 법적 책임을 지는 ‘알았거나 알 수 있었고 또한 기술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을 경우’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대법원은 전원 합의체 판결을 통해 포털을 의미하는 인터넷 종합 정보 제공 사업자의 법적 책임 요건을 제시한 바 있다(대법원 2009.4.16. 선고 2008다53812 판결 [손해배상(기)등]전원 합의체 판결[공2009상,626]). 먼저 대법원은 인터넷 종합 정보 제공 사업자가 보도 매체로부터 기사를 전송받아 자신의 자료 저장 컴퓨터 설비에 보관하면서 스스로 그 기사 가운데 일부를 선별하여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뉴스 게시 공간에 게재하였다면, 이 뉴스의 내용에 대해 법적 책임을 진다고 보았다. 기사를 선별하는 기능이 편집통제권이라 본 것이다.
대법원은 이 판결에서 인터넷 종합 정보 제공 사업자의 명예훼손 게시물에 대한 삭제와 차단 의무의 발생 요건을 제시하였다. “인터넷 종합 정보 제공 사업자가 제공하는 인터넷 게시 공간에 게시된 명예훼손적 게시물의 불법성이 명백하고, 위 사업자가 위와 같은 게시물로 인하여 명예를 훼손당한 피해자로부터 구체적·개별적인 게시물의 삭제 및 차단 요구를 받은 경우는 물론, 피해자로부터 직접적인 요구를 받지 않은 경우라 하더라도 그 게시물이 게시된 사정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거나 그 게시물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음이 외관상 명백히 드러나며, 또한 기술적, 경제적으로 그 게시물에 대한 관리·통제가 가능한 경우에는, 위 사업자에게 그 게시물을 삭제하고 향후 같은 인터넷 게시 공간에 유사한 내용의 게시물이 게시되지 않도록 차단할 주의 의무가 있”다고 하였다.
이 판결은 인터넷 포털의 법적 책임을 넓게 인정한 것이다. 피해자로부터 삭제 요청이 없었다고 해도 불법성이 명백한 게시물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관리·통제가 가능한 경우라면 차단의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적으로 인터넷 포털이 모니터링을 하고 불법 게시물을 차단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업자 행동 강령에 의한 자율 규제 의미
인터넷 사업자들의 법적 책임과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담보할 수 있는 수단이자 사업자의 자율 규제 장치가 바로 사업자 행동 강령(codes of conduct)이다. 사업자 행동 강령은 자율 규제의 기본 프레임워크 역할을 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업자 행동 강령은 특정 산업에서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한 표준 담보 장치로 개별 사업자들이 합의해 만들어지고, 이들 개별 사업자들이 또한 집단으로 참여해 이를 준수하는 ‘사업자’에 의한 자율 규제 장치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사업자 행동 강령에는 사업자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행동을 정의 내리거나 이에 관한 일련의 원칙과 규범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업자 행동 강령은 단순히 일반적인 의미의 윤리 선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업자 행동 강령은 정부와 사업자들의 상호 협력과 자율 규제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에 기초하는 보다 구체적인 규범을 그 내용으로 하며, 그러한 강령의 준수 과정에서 어느 정도 강제력과 그 준수를 담보할 수 있는 장치를 갖게 되는 ‘제도적 의미의 사업자 행동 강령’을 의미한다. 결국 행동 강령의 내용들은 개별 사업자들이 준수함으로써, 개별적 차원이 아닌, 관련 산업 차원의 사업자 자율 규제가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사업자 행동 강령에 의한 자율 규제는 국가에 의한 법적 규제의 합리화를 도모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즉, 사업자 행동 강령의 자율 규제는 규제 기관 권한 행사의 예측 가능성 확보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사업자 행동 강령에 의한 자율 규제가 원활하게 작동하는 경우에는, 국가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법적 규제 권한을 발동할 필요가 없게 된다.
사업자 행동 강령의 기본 모델
사업자 행동 강령의 내용과 관련하여, 서구에서 이미 개발된 인터넷 사업자 행동 강령들은 주로 다음과 같은 점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① 법 집행 기관과 협력, ② 사업자의 책임 문제의 명확화, ③ 사생활 보호와 개인 정보 처리에 관한 접근 방법, ④ 이용자에 의한 이의 제기의 조사, ⑤ 불법 및 유해 콘텐츠의 처리 절차, ⑥ 이용자의 정보 통제 능력을 강화시키는 기술적 수단의 개발 등이다.
인터넷 사업자 행동 강령 모델에 따르면, 강령의 집행에 관한 기구(제1장), 강령의 적용 범위(제2장), 공공의 자문에 따른 강령의 재검토(제3장), 불법 콘텐츠에 대한 처리 절차(제4장), 청소년 유해 콘텐츠에 대한 처리 절차(제5장), 필터링 제품 및 유사 기술의 지원 및 정보 제공에 관한 사항(제6장), 개인 정보 보호에 관한 사항(제7장), 이의제기 처리 절차(제8장), 사법 기관과의 공조(제9장), 집행기구의 결정의 구속력 및 제재에 관한 사항(제10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업자 행동 강령의 제정
사업자 행동 강령은 자율적인 준수를 전제로 전적으로 사업자가 그 형식 및 내용을 결정하는 자율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율 규제라는 것은 ‘개별 사업자’가 아닌 ‘사업자 전체’에 의한 자율 규제를 의미하므로, 사업자 행동 강령을 자발적으로 제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별도의 사업자협회 내지 자율 규제 기구를 구성해야하고 또한 사업자 행동 강령의 제정 이전에 우선되어야 한다.
물론 사업자협회 내지 자율 규제 기구는 관련 사업자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대표성을 확보하여야 하며, 그 구성에서 민주적 절차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업자협회 내지 자율 규제 기구가 행동 강령을 제정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업자들의 대표뿐만 아니라 외부 전문가 예컨대 소비자 대표, 관련 단체의 대표, 법률 전문가, 관련 규제 기관의 대표를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사업자 행동 강령의 제정과 관련하여, 정부 영역에서 그 제정을 유도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우선 이러한 방법 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업자의 행동 강령 제정에 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든지 아니면 사업자의 행동 강령 준수 의무를 법제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업자 행동 강령 (인터넷자율규제와법, 2014. 4. 15., 황승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