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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7
⊙ 3년 차 맞는 대통령들, 정국 타개 위해 승부수 던졌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아
⊙ 박근혜, 남북관계 개선, 이명박 때리기로 국면 전환 시도할 수도
⊙ 내각과 집권당 배려하는 리더십 변화 필요
2015년은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집권 3년 차가 시작되는 해이다. 5년 단임제(單任制)에서 집권 3년 차는 대통령 임기 반환점을 맞이하는 해이기 때문에 정치적 비중이 자못 크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성공 여부는 집권 3년 차 때 어떤 정치 씨앗을 뿌리느냐에 달려 있다. 박 대통령은 “내년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해”라며 “정말 꼭 지금 해야 하는 정책이 제대로 역할을 해낼 수 있도록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이론과 방법으로 박근혜 정부 집권 3년 차를 전망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역대 대통령들의 집권 3년 차를 비교·분석하고 현 정부가 처한 상황에 대입해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권 3년 차의 성공과 실패 요인을 발견할 수 있다. 〈표〉는 역대 정부 집권 3년 차의 특징을 요약한 것이다.
盧泰愚의 실패한 승부수
▲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 3년 차인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통해 국면 전환을 꾀했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은 집권 3년 차에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1990년 1월 22일 내각제 개헌(改憲) 밀약(密約)을 조건으로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제2야당 통일민주당,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合黨)해 민주자유당을 출범시켰다.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석을 가진 절대다수(絶對多數) 정당이었지만 지역주의 정치와 보스정치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많았다. 호남을 배제하고 영남과 충청이 보수 대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3당 합당 이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은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유력한 차기 대권 후보는 비주류의 김영삼(金泳三) 대표최고위원이었다. 힘의 균형이 YS에게 급속하게 쏠렸다. 노 대통령의 지지도는 3당 합당 이후에도 20%대에 머물렀다. 또한 야당에는 김대중(金大中) 총재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정국은 자연스럽게 ‘YS 대 DJ 대결 구도’로 굳어졌다. 다만 경제 성장률은 집권 3년 차에 9.2%를 달성할 정도로 좋았다. 이것이 YS의 1992년 대선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집권 3년 차의 시작은 어수선했다. 민자당 내 주류인 민주계는 1994년 말부터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워 비주류인 공화계의 수장(首長) 김종필(金鍾泌) 대표위원의 일선 후퇴를 요구했다.
결국 JP는 1995년 1월 민자당 대표위원직을 사임한 데 이어 2월 민자당을 탈당하고 3월 30일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자민련은 그해 6월 27일에 실시된 제1회 지방선거에서 충청 돌풍을 일으켰다. 15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충남, 대전, 충북, 강원 등 4곳을 석권했다. 기초단체장 선거(총 230석)에서도 23석을 획득했다.
반면, 집권당인 민자당의 성적표는 초라했다.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5곳(33.3%)에서만 승리했고,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70석(30.4%)만 얻는 데 그쳤다. 특히 수도권(66석)에서 민자당은 20석(30.3%)밖에 얻지 못했다. 그야말로 참패했다.
지방선거 이후 압승에 힘을 얻은 김대중은 그해 7월 17일에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9월에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 95명 중 65명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신당에 참여했다.
이후 정국 주도권이 김대중과 김종필로 쏠리자 YS는 승부수를 던졌다.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분으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내란 음모죄로 구속했다. 이것은 1996년 4월 총선 승리를 위한 포석이었다.
여하튼 YS는 집권 3년 차에 유력한 대권 후보가 집권당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발휘했다. YS는 JP 축출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DJ 정계 복귀의 빌미를 제공하면서 궁지에 몰렸지만 집권 3년 차 막판에 위기를 기회로 반전(反轉)시키는 데 성공했다.
金大中, 새천년민주당 창당
▲ 2000년 4월 총선에서 야당에 패한 김대중 대통령은 그해 6월 남북정상회담이라는 빅카드를 던졌다
김대중 대통령 집권 3년 차는 창당으로 시작됐다. 1997년 대선 승리의 디딤돌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를 해산하고 2000년 1월 20일에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했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승부수였다.
2000년 4월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115석(지역구 96석 + 비례구 1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야당인 한나라당이 133석(지역구 112석 + 비례구 21석)으로 1당이 되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를 DJ는 남북정상회담 카드로 돌파했다. DJ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김정일과 회담했다. 회담 결과로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DJ는 집권 3년 차를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정치적 빅카드로 정국을 완전히 주도했다.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집권 3년 차의 시작은 그야말로 무질서의 극치였다. 집권 2년 차인 2004년 ‘4대 개혁법안’ 처리 실패로 촉발된 열린우리당의 리더십은 새해 벽두부터 혼미 상황으로 치달았다. 천정배 원내대표 사퇴에 이은 이부영 의장과 상임중앙위원들의 2005년 1월 3일 동반 사퇴로 당은 소용돌이에 직면했다. 지도부 개편 회오리는 결과적으로 개혁이냐 실용이냐의 치열한 노선 투쟁의 양상으로 전개됐다. 결국 노 대통령은 정치로 풀어야 할 일을 정치로 풀지 못함으로써 국정이 표류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 3년 차 때 지지도가 가장 낮았던 대통령이다.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1분기 33%, 2분기 34%, 3분기 28%, 4분기 23%까지 추락했다. 경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정부 집권 3년 차 때 경제 성장률은 4.0%였다. 이 수치는 같은 시기 노태우 9.2%, YS 9.2%, DJ 8.5%와 비교해 반 토막 수준이었다.
이런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 대통령은 느닷없이 2005년 8월 소위 대연정(大聯政)을 제안했지만 대실패로 끝났다. 한마디로 노무현 대통령 집권 3년 차는 지리멸렬(支離滅裂)이었다.
李明博, 세종시 수정안 내놓았지만…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집권 3년 차 시작을 세종시 수정안에 올인했다. 정운찬 총리는 2010년 1월 11일 교육과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도시를 건설한다는 구상이 담긴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했다. 당내 유력한 대권 후보인 비주류 박근혜 전 대표와 친박 세력은 세종시 원안을 사수해야 한다면서 똘똘 뭉쳐 대항했다.
그해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고 세종시 수정안은 물거품이 됐다. 특히 2010년 6월 29일 본회의장에서 정부가 마련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해 대립각을 세웠던 박 전 대표가 직접 반대토론에 나섰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세종시 수정안은 부결됐다. 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 야당 의원들과 박근혜 전 대표 등 친박계 의원들은 대부분 반대표를 던졌다.
대통령의 권위는 그야말로 참담하게 추락했다. 집권당 내 비주류가 야당과 연대해 대통령 어젠다를 무너뜨렸는데 대통령은 “유감이다”는 말 한마디밖에 하지 못하는 초라한 신세가 됐다. 대통령이 효율성을 내세우면서 정치로 풀어야 할 일을 정치로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집권 2년 차 때 0.3% 성장을 집권 3년 차 때 6.3%까지 끌어올림으로써 MB는 상처 난 권위에도 불구하고 ‘공정 사회 구축’이라는 핵심 어젠다를 제시할 수 있었다.
역대 정부의 집권 3년 차가 주는 교훈은 명료하다. 첫째, 민심 이반을 막고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승부수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일시적으로 대통령 지지도 상승이라는 반짝 효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 경제가 최대 변수이다. 경제가 무너지면 그 어떤 처방책도 속수무책이 된다. 셋째, 집권당 내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 간의 충돌은 결국 정치 불안정을 가져오고 대통령의 권위에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넷째, 대통령 인식과 통치 스타일의 변화 없이는 새로운 국정 동력을 만들어낼 수 없다.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2월 7일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 지도부 및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대통령의 個性과 社會化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만기친람(萬機親覽), 독선, 불통(不通)으로 집약된다. 그렇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 방식이 바뀔까? 쉽지 않을 것 같다. 대통령은 지난 새누리당 지도부와 함께한 오찬에서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의 자기 확신이 강하다는 뜻이다. 자기 확신이 강하면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바꾸기 어렵다.
대통령학을 연구한 미국의 조지 알렉산더 교수는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대통령의 개성(personality)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개성은 대통령이 어떤 사회화(socialization)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유신(維新) 시대에 정치를 배웠다. 유신 시대는 한마디로 행정이 정치를 압살한 시대였다. 대통령의 인식에 정치는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보니 정치로 풀어야 할 일을 정치로 풀지 못하고 모든 것을 대통령이 처리하려고 하는 독선과 만기친람에 빠지기 쉽다.
박근혜 대통령은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직후 청와대에서 나와 18년간 은둔의 세월을 보냈다.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어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끊고 홀로 사고(思考)하고 결정하는 데 익숙한 것 같다. 대통령의 이런 인식과 사회화 과정이 원칙과 신뢰를 강조하는 리더십으로 발전한 면도 있지만 집권 이후 몇몇 측근에 의존하는 국정 운영 방식으로 고착화된 면이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때 특유의 위기 돌파 능력을 보여준 적이 종종 있다.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가 9월 10일에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유신시절 사법살인(司法殺人)으로 불리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개의 판결이 있다”고 말해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자신의 발언이 논란이 되자 박 후보는 11일 “대법원의 판결은 존중한다”고 한발 물러서는 입장을 밝혔다. 그 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자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예상을 깨는 강도 높은 사과를 통해 위기를 수습했다.
이번에 비선(秘線) 실세 개입 의혹과 관련 검찰 수사 결과가 나와 야당과 언론에서 상설 특검과 국정조사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국회가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면 대통령이 통치 스타일의 변화 선언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할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의 카드는?
▲ 2014년 11월 6일 새정치민주연합은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갖고 자원외교 등에 대한 국정조사 실시를 새누리당에 촉구하는 결의대회를 가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정치적 카드는 그리 많지 않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도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경제 혁신 3개년 계획, 공무원연금 개혁, 규제 개혁 등 핵심 국정 어젠다가 표류하고 지지부진하게 되면 국정 운영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이 있다.
정치적 상상력을 동원하면 그것은 ‘통일 대박론’에 기반한 ‘남북 신뢰 프로세스 구축’이 될지도 모른다. 경직된 남북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고(高)강도 방안으로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반 총장이 남북한을 교차 방문해 남북 정상들의 구상과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호 신뢰를 쌓을 수도 있다.
이런 상상력의 근거? 김정은이 반 총장에게 친서를 보냈고, 박 대통령도 수차례 반 총장과 만난 인연이 있지 않은가?
우리 정부가 5·24 조치를 해제하면서 물꼬를 틀지도 모른다. 이는 야당도 찬성하고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의외로 여야(與野) 합의로 추진될 수 있다.
물론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일관성 있는 남북관계’가 항상 우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갑작스러운 5·24 조치 해제는 대통령의 핵심 지지층인 보수(保守)세력으로부터의 강한 저항에 시달릴지 모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 전에 지지도가 38%에 불과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지지도가 54%로 수직 상승했다. 하지만 정상회담 4개월이 지난 후에 다시 30%로 급락했다. 그 이유는 6·15 남북공동선언문에 적시한 통일 방안이 격렬한 남남(南南)갈등을 일으키면서 DJ 정부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특히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는 제2항을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 여야가 극한 대립을 했다.
대북 문제는 항상 이런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현 정부는 다른 정치 승부수로 ‘이명박 때리기’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국민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실제로 여당은 이명박 정부 대표 사업인 자원외교 국정조사에 야당의 요구를 들어줬다. 주목해야 할 것은 야당이 이 조사특위 위원장을 맡기로 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과 측근인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자원외교에 나섰기 때문에 조사특위의 활동 여부에 따라 상당한 파장이 일어날 수도 있다.
人的 쇄신 가능성은?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이 담긴 청와대 문건 파문 이후 2014년 12월 7일 새누리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대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에 대해 “그들은 일개 비서관이고 심부름꾼일 뿐이다”라고 두둔했다.
이 말은 문고리 3인방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내는 것이다. 1998년 정계에 입문 이후 어렵고 외로울 때 줄곧 곁을 지켜온 이들에게 박 대통령이 가족 이상의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문제는 대통령은 문건 내용이 맞는지 사실관계에만 관심을 두고 있지만 국민들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인과(因果)관계를 알고 싶어 한다. 베일에 감춰진 대통령 행보, 투명하지 않은 의사 결정, 민심과 동떨어진 인사, 청와대 3인방의 눈치를 보는 장관과 청와대 비서실. 이런 비정상적이고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비선 의혹이 불거졌다는 것을 대통령은 간과하고 있다.
단적으로 대통령은 “언론이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보도를 했다” “문건은 터무니없는 얘기다”라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는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유출된 문건은 청와대에서 작성해 비서실장에게 보고됐고 공공기록물로 등록된 것이다. 문건 내용을 확인할 책임은 언론이 아니라 청와대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비서실장과 청와대 3인방을 경질하는 것은 “찌라시(사설 정보지)에 나오는 얘기”를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인적 개편을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비선 실세 의혹 보고서로 인한 혼란 정국을 마무리 짓고 국정 쇄신을 단행하기 위해선 김 실장 교체가 불가 피할지 모른다. 만약 비서실장 교체가 이뤄지면 그 시기는 내년 초에 예상되는 개각(改閣)과 함께 이뤄질지 모른다. 규모와 폭에는 차이가 있지만 역대 정부에서는 늦어도 집권 2년 차 상반기에는 쇄신용 개각을 단행했다. 따라서 개각 시기는 2015년 1월 12일부터 2주간 진행되는 부처별 업무보고에 앞서 단행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르면 2014년 안에 인적쇄신을 마무리한 후 집권 3년 차를 맞이할 가능성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신뢰하는 김기춘 비서실장을 정윤회 문건 파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명예롭게 퇴진하는 길을 열어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변수가 있다. 검찰 수사 발표 이후 야당이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상설 특검 또는 국정조사를 요구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김 실장 보호 차원에서 오히려 자리를 보전시킬 가능성이 있다.
‘무대’의 반격?
▲ 2014년 12월 5일 열린 새누리당 ‘대한민국 국가대혁신을 위한 국민대토론회’에서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김문수 보수혁신위원회 위원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가 2014년 10월 상하이에서 “정기국회 후 봇물처럼 터질 개헌 논의를 막을 수 없다”는 ‘개헌 봇물’ 발언에 대해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실수로 언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 후 김 대표의 언행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김무성 대표는 ‘무대(김무성 대장)’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할 말은 하는 대표가 되겠다”고 약속한 김 대표가 청와대 고위 관계자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리고 “대통령과 싸우지 않겠다”고 항복 선언한 것을 무대가 스스로 무대를 무너뜨렸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다.
대통령이 최근 김무성 대표, 이완구 원내대표, 주호영 정책위 의장, 김재원 원내수석 부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회동한 자리에 이들 4명 앞에 메모지와 연필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당 대표를 마치 받아쓰기 하는 장관이나 청와대 수석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그렇다면 집권 3년 차를 맞아 ‘무대’의 반격은 시작될 것인가? 대통령은 2016년 총선에서도 공천권을 행사하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이다. 대통령 퇴임 이후 자신을 지켜줄 친위(親衛) 세력을 만들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이를 아는 김무성 대표는 어느 누구도 공천에 개입할 수 없도록 상향식 공천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는 박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다. 대통령한테 차기 공천에 손을 떼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분명 내년에는 공천 방식을 둘러싸고 무대와 친박 간의 대혈투가 예정되어 있다. 무대가 자신의 라이벌인 김문수 전 지사를 혁신위원장으로 영입한 것은 다목적 포석이다. 우선 남의 칼을 빌려 일을 처리하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의도가 있다. 개혁 성향의 김문수를 통해 대통령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또한 김무성(MS) 대표는 김문수(MS), 정몽준(MJ)과 함께 ‘3M 비박 연대’를 구축해 대통령에 대항하려는 복안이다. 혼자의 힘으로는 ‘무서운 대통령’을 대적할 수 없다는 현실적 고민이 담겨 있다.
올 8월은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도는 시점이다. 만약 이 시점을 전후해 친박 세력이 김무성 대표 체제를 흔들어 당직을 접수하려고 하면 새누리당은 깊은 갈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지 모른다. 대통령의 힘은 빠지고 경제는 어려워지고 친박이 당권을 장악하려는 순간 집권당은 ‘대통령+친박’ 대 ‘3M+친이’ 간의 치고받기 혈투가 전개될 개연성이 크다. 이것이 박 대통령 집권 3년 차의 최대 위험 인자가 될 것이다.
30%대로 떨어진 지지율
청와대 유출 문건이 ‘찌라시 내용’에 불과한 것이라는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거듭된 해명에도 불구하고,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6할 진실’ 주장과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 장관의 박 대통령의 인사개입 확인과 맞물려 ‘의혹’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대통령의 지지도가 30%대로 급격하게 하락했다.
실제로 ‘리얼미터’가 실시한 조사 결과(2014년 12월 7~8일), 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39.7%로 나타났다. 이는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 중 박 대통령 취임 이후 최저치다. 박완주 새정치연합 원내대변인은 “국민들은 우려스럽고 걱정스럽게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 농단 사건을 바라보고 있는데, 박 대통령은 찌라시나 진돗개 운운하며 국민의 시각과 동떨어진 발언을 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만약 대통령의 인식과 통치 스타일이 바뀌지 않으면 비선 의혹은 또다시 불거지고 지지도는 더욱 추락할 것이다.
경제 변수도 대통령의 향후 국정 운영 지지도에 결정적인 변수이다. 박근혜 정부 집권 1년 차 때 경제 성장률은 2.8%에 불과했고, 2014년은 3.4%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KDI는 2015년 한국 경제 성장률 전망을 3.5%로 낮췄다. 정부가 발표한 2014년 3분기 실질 국민 총소득(GNI)이 전 분기보다 겨우 0.3% 늘어나는 데 그쳐 2년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증가율을 기록했다. 국내 총생산(GDP)도 4개 분기 연속 0%대 성장에 머물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경제전문가 38명을 대상으로 ‘저성장 탈피를 위한 중장기 정책 과제’를 조사한 결과, 2015년도 우리 경제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할 핵심 키워드로 응답자의 44.7%는 ‘구조적 장기 침체(secular stagnation)’를 꼽았다. 만성적인 수요 부족 때문에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투자와 고용이 위축되는 구조적 침체 현상이 우려된다는 설명이다. KDI는 “경기 부양을 위한 정부의 확장적 경제 정책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2015년 하반기부터 성장세가 급속도로 꺾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여하튼 ‘초이노믹스’로 상징되는 현 정부의 경제 활성화 대책의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박 대통령의 지지도는 30%대에서 고착화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먼저 변해야
박 대통령이 청와대 문건 유출로 불거진 위기를 극복해 ‘정치적으로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나?
첫째, 대통령의 인식과 통치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새누리당 초·재선 모임이 청와대 문건 유출 사태의 원인으로 국정 운영의 불투명성과 대통령의 소통 부족을 들면서 내놓은 청와대 인사와 인사시스템 혁신, 공적 소통시스템 강화 등 혁신 방안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몇몇 측근에 의존하는 기존의 국정 운영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 비서실장과 문고리 권력 3인방을 바꾸는 것은 해답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을 바꿔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바뀌지 않으면 대통령 주변에 보이지 않는 실세가 있다는 의혹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박 대통령은 모든 것을 자기가 직접 결정하는 ‘만기총람의 리더십’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역대 정부에서 집권 3년 차가 되면 아무리 민주적인 대통령이라도 참모는 없고 대통령만 보이는 이른바 ‘1인무(一人舞)’ 정권의 ‘독단형 리더십’이 등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문건 유출로 초래된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폐쇄주의적 국정 운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어야 한다.
국정 운영의 중심을 청와대 중심에서 내각 중심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2월 9일 “국무위원의 직책은 국민을 대신하고 또 그 실행이 나라의 앞날을 좌우하기 때문에 모든 언행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을 바라보고 행하는 그런 사명감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관이 청와대 눈치 보고 부처 국장급 인사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국민을 바라보고 사명감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장관들과 수시로 만나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부처 인사는 장관 책임하에 이뤄지도록 권한을 줘야 한다.
집권당을 배려해야
둘째, 섣부른 정치 승부수를 던지지 말아야 한다. 역대 정부는 집권 초기에 추진했던 정책들이 성과를 내지 못해 민심이 이반하면 예외 없이 집권 3년 차에 정국(政局)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 실험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로 귀착됐다.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집권당이 집권당답게 행동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배려해야 한다. 여당이 대통령의 눈치만 보면서 하명을 기다리는 초라한 존재로 전락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집권당은 주저 없이 할 말은 하고 청와대는 당의 아픈 말도 과감히 받아들이는 수평적 당·청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룩하라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청와대의 비정상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넷째, 실추된 대통령의 권위를 다시 세워야 한다.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윤회씨 부부의 개입으로 대통령이 문체부 국·과장 교체를 지시했다고 발언했다.
전직 장관의 이런 발언은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것이다. 권위는 강제하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권위 없는 권력은 위험하다. 모든 것을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면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통령의 권위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출하는 것이다. 권위의 시작은 권위주의를 깨는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 따라서 민심을 이끌어낼 줄 아는 자가 법령을 제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자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집권 3년 차를 맞이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깊이 음미해 볼 만한 말이다. 박 대통령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의혹과 불만이 분노와 지긋지긋한 혐오로 바뀌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제 박 대통령은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만들려고 하는 ‘국민이 행복한 시대’가 ‘국민이 두렵고 불안한 시대’로 바뀌지 않도록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할 것이다.⊙
김형준 / 명지대 교수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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