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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전경
중국 원순제의 딸은 매우 아름다운 미인으로 평판 높은 공주였다.
그러므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나 미관말직에 있는 사람이나 모두 그를 보고 연정을 품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어떤 한 관리가 궁전을 거니는 꽃 같은 공주를 보고 홀딱 반해서 짝사랑을 하다가 상사병에 걸리게 되었다.
아무리 약을 쓰고 침을 맞고 하여도 헛고생 만 더할 뿐 병은 낫지 않았다.
“어머니 나 공주 좀 보게 해 주세요. 공주가 아니면 나는 죽습니다. 어머니”
아들이 애원하였으나
“나라에서 이 소식을 들으면 5족을 멸할 거야,
감히 그런 생각일랑 갖지 말고 다른 규수에게 장가 들거라“
그러나 관리는 공주를 잊지 못하고 죽으면서 맹세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이니 죽어서라도 몸을 바꾸어 그를 사랑하리라“
이렇게 맹세하고 죽은 그 젊은 관리는 죽어서 상사뱀이 되었다.
하루는 공주가 낮잠을 자고 났는데 아랫도리가 이상해서 만져보니 난 데 없는 뱀이 몸을 칭칭 감고 있었다. 기겁을 한 공주는 황후에게 알리었다.
황후는 몰래 사람을 사 그것을 떼어 버리기도 하고 또 떼어다 죽여 버리기도 하였건만 그것은 종내 소용이 없었다.
머리는 배꼽 밑에 대고 꼬리는 하체에 붙어 잠시도 떨어지질 않았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공주는 마침내 궁을 버리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차라리 세상 구경이나 하고 산천경계나 자유롭게 구경하다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지복색을 하고 이 산 저 산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다가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봉변도 당하고 겁탈도 당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사람들은 그의 몸 가운데 감겨 있는 뱀을 보고 기겁을 하고 도망쳤다.
황하 양자를 몇 번씩이나 건너고 중원제국을 다 돌아다녔으나 공주를 살려줄 사람은 없었다.
그는 어쩌다 금강산 생각이 났다.
기암절벽이 만불산(萬佛山)을 이루고 4계의 산색이 각기 달라 가히 천하 명산이라 알려진 금강산, 한번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배를 타고 고려국으로 건너왔다.
그런데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영동에서 배를 내리기는 하였으나 영서로 빠져 춘천 땅에 이르고 말았다. 춘천에서 들으니 청평천(淸平川) 건너 청평사(淸平寺)가 유명했다.
이왕에 온 것이니 절 구경이나 하자며 공주는 발길을 옮겨 청평천을 건너려 하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몸속에 감겨진 상사뱀이 요동을 하면서 가려 하지 않았다.
참으로 이상했다.
공주는 말했다.
“내가 너와 상종한 지 십년, 내가 두어 번 너를 떼어본 뒤로는 한 번도 너의 마음을 거슬려 본 일이 없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좋아하는 절 구경을 하지 못하게 하느냐?
만일 싫거든 잠깐만 여기에 떨어져 있어라, 그러면 내가 속히 절 구경을 하고 돌아와 너와 함께 가리라“
뱀은 그 말을 듣고 곧 풀려 나와 넓은 바위 아래 또래를 틀고 않았다. 십년 만에 처음 홀몸이 된 공주는 하늘을 나는 듯 마음이 기뻤다.
영천에 들어가 몸을 깨끗이 씻고 절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밥 때가 되어 스님들은 다 큰 방에 모여 있는데 가사불사(架裟佛事)를 하던 방에는 아름다운 비단조각이 바늘과 함께 널려 있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비단들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바늘로 몇 땀을 떴다. 그때 스님들이 나와 호통을 했다.
“어디서 빌어먹는 여자가 들어와 신성한 가사불사를 망쳐 논는담.”
하고 스님들은 노발대발 여간 나무라지 않았다. 공주가 꾸중을 듣고 절문을 나와 다시 개천을 건너려 하는데 뜻밖에 비와 바람이 몰아치며 뇌성벽력이 내려쳤다.
천왕문(天王門) 어귀에 의지하여 비와 바람을 피하고 간신히 물을 건너 먼저 뱀과 약속한 자리에 이르니 신기하게도 그 뱀은 벼락에 맞아 새까맣게 타 죽어 있었다.
어찌나 즐거운지 이 거지 여자는 미친 듯이 뛰어 들어가 청평사 부처님께 천배(千拜) 백배(百拜) 절을 하였다.
“오로지 이것은 부처님의 영험하신 신통력에 의하고 스님들이 입는 무상복전의 (無上福田衣)를 만진 큰 공덕이다. 아무쪼록 이 은혜에 보답토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고 다시 절 안으로 들어가 주지 스님을 뵙고,
“이 절에 종노릇이라도 하고 싶으니 스님께서는 자비로 허락하여 주십시오.”
사정 하였다.
그러나 처음은 완강히 거부하던 스님도 그의 말, 행색 등을 낱낱이 뜯어보더니 이는 필시 보통 여자가 아니리라 간주하고 쾌히 승낙하였다.
그래 그는 그 절에서 밥도 짓고 찬도 만들고 또 밭에 나가 김도 매었다.
하루는 대중스님들이 가사불사를 마치고 공사를 하는데 서로 화주를 맡지 않으라 하였다.
공사의 명목은 퇴락된 큰 법당을 중수하는 일이었다.
후원에서 듣고 있던 공주는 단정히 옷깃을 여미고 들어갔다.
“그 화주는 제가 맡겠습니다.
비록 소녀 미약하오나 부처님의 은혜가 지중하므로 이 불사는 소녀가 홀로 맡아 하겠습니다.”
하고 먹과 벼루를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는 떨리는 손끝으로 춘천부사와 강원감사에게 각각 한통씩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곧 전했다.
이 편지가 닿자마자 춘천부사와 강원감사가 일족준마(一足俊馬)로 달려와,
“공주마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공주님이 내국(內國)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수소문하던 참인데 잘 되었습니다.”
하고 곧 조정에 알려 절 고칠 돈과 미곡노역을 나라에서 맡아 새 절을 잘 지으니 이것이 현재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청평리에 있는 청평사인 것이다.
6·25전란으로 소실된 절을 다시 복구하여 그 때의 모습을 볼 수는 없으나 우람한 경내가 옛 성사(聖寺)를 짐작케 한다.
참고문헌 : 한국사찰사료집/ 사진:밴드장
청평사지(淸平寺址) 강원도 기념물 제55호
고려 광종 24년(973)에 당나라 승려인 영현선사가 이곳에 절을 세우고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얼마 뒤 문을 닫았는데 문종 22년(1068)에 이 지역에서 벼슬을 살던 이의가 절을 고치고 새로 열면서 이름을 보현원(普賢院)이라고 바꾸었다.
선종 6년(1089)에는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많은 건물을 새로 짓고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이라고 하였다.
이후 조 선 명종 때 보우대사가 절을 고쳐 지으면서 이름을 청평사(淸平寺)로 바꾼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평사는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 건물과 고려 최고의 명필가인 탄연이 쓴 문수원기가 전해 내려왔는 데 한국 전쟁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이들은 1975년과 2008년에 각각 복원되었다.
그 밖에도 회전문(보물 제164호), 삼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진락공 이자현 부도, 환적당 부도 등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있다.
또 절 주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한 고려시대의 정원 양식을 보여준다. 직사각형의 연못인 영지, 기암괴석, 폭포 등이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에 이끌려 이제현, 김시습 등 많인 문인이 찾아 머무 르거나 글을 남기기도 했다.
회전문, 보물
회전문(廻轉門) 보물 제164호
1557년경 보우대사가 청평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할 당시에 세운 사찰의 중문(中門)으로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의 형태로 대들보가 3개인 3량식 가구(架構)이며 주심포(柱心包)계의 익공 건물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매우 귀중한 건축물이다.
회전문의 중앙부 위쪽에는 홍살을 첨가해서 홍살문의 기능도 함께 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영암 도갑사의 해탈문과 같은 양식이다. 사찰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으로, 가운데 칸을 출입문으로 좌우 한 칸씩은 사천왕의 조각상을 세우거나 그림을 걸도록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름은 청평사 창건설화인 공주설화와 연계되어 윤회를 한다는 의미로 회전문이라고 불린다. 또한 불교의 경전을 두었던 윤장대(輪藏臺)를 돌린다 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추정된다.
불전사물(佛殿四物) 가운데 범종(梵鐘)만을 봉안하여 범종각이라 부른다.
범종은 청정한 불사(佛寺)에서 쓰이는 맑은 소리의 종이라는 뜻이지만 지옥의 중생을 향하여 불음을 전파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 고 있다. 1994년에 범종각 신축과 범종을 주성하였다.
경운루(慶雲樓)
회전문을 지나 회랑과 동일한 축선인 동-서로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춘 2층 누각(樓閣)이다.
보통 산지 사찰에서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누각의 아랫부분을 지나 법당 앞마당으로 나아가는 방식인 누하진입 (樓下進入)으로 회전문-경운루-대웅전으로 연결된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강선루(降仙樓)라고 불렀는데 복원하면서 경운루로 고쳤다 누각의 옆으로는 회전문과 같이 회랑으로 복원되었다. 경운루를 중심 으로 동-서로 각 4칸씩 건축되었다.
대웅전은 현세불인 석가모니를 봉안하므로 사찰에서 중심을 이루는 건물이며 가장 중요한 곳으로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로는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셨다.
문수보살은 '지혜'를, 보현보살은 '행을 실천'하는 보살이며 두 보살의 손에 든 연꽃 위에는 문수 동자와 보현동자가 두 손 모아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일반사찰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후불탱화로 석가모니께서 제자들에게 설법한 모임을 묘사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와 불단 좌우로 모든 곳에 부처가 존재한다는 다불사상에 근거하여 천불을 묘사한 천불탱화(千佛幀畵),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의식에 사용된 감로탱화(甘露幀畵),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중 대예적금강신(大穢跡金剛神)을 주축으로 묘사한 신중탱화(神衆幀畵)를 봉안하였다.
1990년대 초에 중건된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의 형태이며 1980년대 발굴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활주가 확인되었다는 것으로 보면 팔 작지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당을 오르는 7단의 대형계단이 있는데 계단의 옆을 마무리한 소맷돌에는 태극문양과 연화문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는 양주 회암사지의 계단과 매우 유사하다. 이 는 청평사와 회암사를 중창한 보우대사의 설계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극문양은 왕실과 관련 있는 건축물에서만 새기는 것을 감안하면 청평사는 왕실과 연관이 있었음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에는 대웅 전과 의미는 같지만 능인보전(能仁寶殿)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