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모본왕(慕本王) 하북,산서를 공격하다.
1.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慕本王, ?~53) 기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후한의 우북평 등을 습격하였다가 다시 화친하다 ( 49년 (음) ) 2년(49) 봄에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을 습격하였다. 그런데 요동태수(遼東大守)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의로 대우하므로 다시 화친을 맺었다.
三國史記 卷第十四 髙句麗本紀 第二 >慕本王>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大原, 而遼東大守蔡彤,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모본왕(慕本王)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들로 민중왕(閔中王, ?~48)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한(漢)나라의 산서(山西)와 하북(河北)지역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정벌(征伐)의 치적에도 불구하고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모본왕에 대해 “사납고 잔인하며 신하를 죽이는 상황에 처하자 신하 두로(杜魯)가 왕을 시해(弑害)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서(史書)는 일제에 의해 완벽히 교열된 것이었음을 인지하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태종(太宗)과 세종(世宗)조에 보이는 태조(太祖)의 둘째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姜氏)에 대한 패륜의 이야기는 후손으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상식의 일이거니와
따라서 이 내용은 일제의 간교한 술책에 따라 정화(鄭和)의 하서양(下西洋)을 이루어낸 태종 이방원(李芳遠)과 조선전기 문화의 황금기를 만들어낸 세종 이도(李祹)를 인간적으로 폄하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모멸감을 갖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음을 우리가 간파해 낼 수 있듯이, 삼국사기(三國史記) 또한 일제에 의해 마치 원본인것처럼 꾸미고 다시 만들어진 교열본으로 모본왕(慕本王)의 웅대함을 폄하하고 후손으로 하여금 모멸감과 조소(嘲笑)와 냉대의 비굴함을 갖게 하기 위한 간교함으로 의심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위 삼국사기 모본왕(慕本王)조에 나온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은 하북성과 산서성에 있는 지명들로서, 원래 있던 곳은 현 감숙성(甘肅省)이며 1949년 이후 현재의 위치로 지명이동된 것들이다. 역사상의 백두산(白頭山)과 요동(遼東)이 현 알타이산과 신강(新彊)북부 현 천산(天山)이북의 천리평야임을 고찰해 낸 우리로서는 이 터전이 바로 고조선(古朝鮮)과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의 생거터전임을 알기에 역사속에 나오는 고구려 모본왕의 하북,산서의 공략은 현 친일식민강단사학에서 말하는 서정(西征)이 아니라 동정(東征)이었음을 재고찰해 낼 수 있으며, 북위(北魏)의 역사로 변조된 화북지역 즉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통치했던 역사는 바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394~491)의 정벌역사임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의 외연을 좀 더 확대해 보면 452년초 이탈리아로 진출했다고 알려진 훈족의 아틸라는 바로 세레스 또는 유연(柔然-Jeou-jan-Geougen-주잔,주젠-조선)이라 불리던 고구려 즉 카울리의 일파이며 이들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과 장수왕(長壽王)대에 걸쳐 비단과 모피무역의 시장개척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서역정벌에 나섰음을 우리는 경제사적 관점에서 이를 분석해 낼 수 있다.
세계역사에 경제적 목적없는 전쟁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사실에 근거해 보면 거대한 고구려가 쓸모없는 힘자랑에 국력을 낭비할 어떤 이유도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서유럽으로부터 중앙아시아 그리고 알타이산 너머의 광대한 모피산출지, 한족(漢族)과 백제,신라,왜(倭)의 강역까지 모조리 카울리의 통치권역에 흡수되어 세계최초의 패권(霸權)국가를 건설한 시원국이 바로 고구려-카올리였음을 서역정벌의 역사와 한족(漢族)강역과 강력한 백제를 장강(長江)이남으로 몰아낸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재정립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엄청난 조선민족의 역사를 없애기 위해 일제는 현 알타이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광대한 역사를 현 반도위쪽의 척박한 만주(滿洲)로 둔갑시키고, 카올리를 고구려(高句麗)라는 명칭으로 확정해 서양역사에 등장하는 세레스와 훈족, 아바르족, 유연이라는 명칭과 분리시킴으로써 우리는 지난 일백년간 우리 스스로 위대한 선조를 부인하고 모멸하는 극심한 패륜의 시간을 이어오게 되었다.
고구려의 엄청난 세계화 전략은 이후 몽고의 징기스칸에 의해 새롭게 동서교류의 글로벌리제이션이 이루어졌고, 1405년 태종 이방원(재위1400-1418)의 하서양(下西洋)을 통해 세계화가 다시 부활되고, 근대는 영국이 현대는 미국에 의해 그 세계화 전략은 빛을 발하고 있다.
2. 기원후 49년에 이루어졌다는 고구려 모본왕(慕本王)의 하북(河北),산서(山西) 정벌을 지도를 통해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2023.11.21. 松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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