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우리나라 배달국에 있어서 여와(女?)는 소호김천씨의 할머니이며, 중국의 삼황에 해당하는 태호복희씨와는 남매지간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중국신화에서 인류의 창조는 여와라는 여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후한(後漢) 시대에 응소(應邵)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사람은 없었다.
이때 여신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 하나 만들다 보니 나중에는 힘이 들어 많이 만들어 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노끈을 진흙탕 속에 담갔다가 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랬더니 흩어진 진흙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원용국 씨는 그의 저서 <구약사>에서 모세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렁이가 팀나의 성전에서 발굴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두사신이 교미(상기 그림)하는 복희와 여와씨의 그림과 대조적이다.
태호 복희와 여와 (한재규)
여와의 이야기는 고구려의 을파소가 지었다는 '참전계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와가 흙을 빚어 사람의 상을 만든 다음 혼을 불어넣어 7일만에 사람이 되게 한뒤 그들을 모두 전쟁에 사용하니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스타인이 발견한 '복희 여와도'
19세기 초, 영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인 스타인이 신강성 위구르 투르판 분지에서 고분을 발굴하다가 7세기 전반에 멸망한 고창국 귀족의 그림을 발견했는데, 흰 명주에 선명하게 채색된 그 그림에는 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뱀으로 이루어진 남녀가 묘사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복희, 여와도이다.
이 그림속의 두 사람은 손에 규구를 나눠들고있었다. * 規矩 자와 콤파스
'통지'에 '한나라 시대 석각 그림과 벽들 그림 가운데 사람의 얼굴에 뱀의 몸인 복희씨와 여와씨가 교미하는 모양을 흔히 볼수 있다' 라는 기록이 있어서 이 그림이 곧 복희와 여와씨임을 알 수있다.
고구려 제9대 고국천왕 13년 (191)때 재상 을파소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참전계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와가 흙을 빚어 사람의 상을 만든 다음 혼을 불어넣어 7일만에 사람이 되게 한뒤 그들을 모두 전쟁에 사용하니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또한 단기 4281(1948)년에 채록된 함흥지역의 '셍굿'두가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사람이라 옛날에 생길 적에 어디서 생겼습니까.
천지 암녹산에 가 황토라는 흙을 모아서 남자를 만들어놓으니 어찌 생산될까?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어원
'아담'이라는 이름은 수메르어나 히브리어가 아니라 본래는 아카드어AKKAD:아무르족 언어였다고한다.
아카드족은 아모리Amorie으로 아무로Amarru라는 형태로 발음된다.
이 족명은 곧 한Han 족으로 조선chosen족이다.'성서백과사전'
이 아무르에 '아담'은 '붉은 찰흙 인간'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 곧 하느님이 '붉은 찰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이 된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하느님께 제사 지낼때, '붉은 황토'를 그 제단 주변에 뿌렸고, 신위를 만들때도 자단토紫壇土라는 '붉은 흙'으로 만들어 봉안했으며, 옹기와 토기도 '붉은 찰흙'으로 만들었다.
또한 고대 시베리아 에스키모족을 '적이赤夷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곧 동이족 가운데 붉은 피부를 가졌던 종족에 붙인 별칭이다.'
이 적이를 비롯한 고대 시베리아에서 둥지를 틀고 살았던 황인종들은 모두 한국인과 같은 혈통이다. 그래서 시베리아 평야와 만주평야를 하나의 지역명인 동야東野로 일컬었던 것이다.
'성경'의 인간 창조 설화는 우리의 '참전계경' 및 '풍속통의'의 부분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본따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기 1:26~27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우리'라는 복수형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본떠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고 한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유일신이라면 당연히 단수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왜 복수형으로 표현된 것일까?
이 문제는 앞의 나반과 아만의 장에서 이야기했던 가나안의 최고의 신 '이브-아담(인간의 아버지)'의 별칭인 '엘El'을 통해야 풀수있다.
엘로힘의 어원
'엘'은 우리 말의 '얼'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했다.
이 '엘'이 바로 창세기 하나님, 곧 '엘로힘Elohim'의 복수형이다. 곧 '엘로힘'이 우리의 얼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얼'은 고구려에서도 널리 쓰였던 우리의 순수한 고유어로서 '육체에서 솟아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뜨거운 샘물은 땅에서 솟아니고 얼은 육체에서 솟아난다'는 말이 지금까지 전래되고 있는 것이다.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가시적인 것이지만, 육체에서 솟아나는 얼은 불가시적인 것으로, 곧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정신精神'을 말한다.
'정신'은 곧 '마음의 신'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의 인지가 깨이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신(얼)은 누구일까? 바로 하느님이다.
우리 하느님님을 통해야만 비로소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난해한 복수형 문장에 관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우리 하느님이 유일신인 동시에 '조화, 교화, 치화'의 작용을 하는 복수형의 삼신삼신이기때문이다.
제주대학교 안창범 교수는 기독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에서 여호와를 성부 성자 성신의 3위 일체 하나님(하느님)이라고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호와는 우리 민족이 3신, 3신 상제 또는 3신 하느님으로 일컫고 있는 하느님과 비슷하다고 생각할수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용어는 기독교를 우리나라에 보급시키기위해 포교전략상 '영어의 갇 God 또는 히브리어 엘로힘 Elohim'을 우리말의 하나님으로 국역한 것일뿐이다.
곧, 기독교측에서 우리 말의 하느님을 차용해 쓴것이다.
더욱이 서유럽인들의 의식구조에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자체가 없고, 서유럽의 언어에도 하나님에 해당하는 용어가 없다. 이러한 것을 보아도 하느님은 우리말의 차용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신이라는 용어는 바이블에 보이나 이들이 3위 일체라는 용어는 일체 찾아볼 수가 없고, 갇 또는 엘로힘의 어디에도 3위 일체라는 뜻이 없다. 그러므로 3위 일체라는 용어 역시 우리 민족의 3신 일체의 영향을 받아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와의 유래
에덴 동산에서 아담에 이어 두번째로 등장한 인물이 아담의 배필인 '하와'이다.
흔히 하와를 아담의 첫번째 여자로 알고 있으나, 사실 첫번째는 '릴리스 Lilith'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릴리스는 바빌로니아 의 흡혈귀인 릴리스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여하튼 하와는 우리 민족의 조상 '여와YHWH'와 그 이름이 같다.
수메르에서는 '하와'를 '갈비뼈 숙녀' 또는 '생명의 숙녀'로 설명하고 '성경'에서는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었다고 하고 있다. 이는 성경이 수메르의 '갈비뼈 숙녀'를 취해 '아담의 갈비뼈' 곧, '하와'가 만들어진 것으로 상징할수있다.
그런데 주목을 끄는 것은 '여자가 남자의 몸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시베리아 베딜족(Bedil) 타타르족(Tatars)에게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 라는 것이다. 하와Hawwah의 일명은 하바Haba이고, 헬라어로는 유와Eua인데, 이 '유아'는 우리의 '여와'와 동의음이다. '성경' '창세기' 첫장에는 창조할 무렵에 이미 2가지 성(남.녀)의 존재가 인식되고있다. '창세기 1:27'
또한 '이것은 남자에게서 취한즉, 여자라 칭하리라'라는 구절로 남자라는 생명이 여자와 함께 묶여져있다.'창세기 2:25', 이것은 곧 우리 태극에서의 음과 양이 공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원래의 여와는 그의 오빠 태호복희와의 관계 후 나뭇잎으로 부채를 만들어 몸을 가렸다.
이것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친남매끼리의 혼인을 의미하는 것일뿐, 결코 타락의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여자가 외부의 다른 존재에 의해 간음죄를 지은 인간 최초의 원죄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동양의 우주 창조적 신격인 여와를 서양으로 끌고가 상위 개념으로서의 서양과 서양 남성의 사고를 정당화시키기위해 여와를 타락한 존재로 부각시킨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쓰여졌던 그 무렵에 히브리족들이 지녔던 사고방식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와, 문명개척을 위해 서쪽으로 떠나다.
상고대의 동양에서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람을 만든 것으로 널리 알려졌던 여와는 그 무렵 한민족의 서방 진출과 함께 서방으로 건너가 '여호와 신'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태백일사 신시본기'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다.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자리를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마침내 진陣에 옮겨 수인, 유소와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냈다.
그 무렵 복희씨는 누이동생 여와와 함께 신천지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떠났던 것이다.
여와신은 아브라함의 가계 혈통에 따라 이드로까지 내려왔고, 또 그 사위 모세에게 전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가족 신앙에 지나지 않았던 여와신이 세계적 신앙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는 기원전 2166 여년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 1000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여와 신은 종주권을 잃어버리고 히브리 지역의 여러 신들과 혼재되었다가 지방에 따라 두 갈래 모양으로 변화 되었다.
하나는 히브리 지역의 '여와-유와-하바-하와'로 인류의 어머니로 변신되었고,
또 하나는 헬라 지역의 '여와-여호와-야웨'의 창조신으로 변화되었다. 이것은 곧 여와의 육신은 하와로, 여와의 영혼은 여호와로 전혀 다른 존재로 히브리족들의 신앙속에 심어지게 된 것으로 가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기원전 300년경에 비로소 '구약성서'로 편집되는데, 이 때 원래 하나의 존재였던 여와는 영혼과 육신이 나누어져 땅에서는 하와로 등장하고, 하늘에서는 여호와라는 서로 다른 존재로 등장했다.
곧 아브라함이 고대 한민족의 점령군들로부터 받아들인 여와신이 그뒤 이삭, 야곱으로 대를 이어 내려오며 사람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했던 가족 신이 되었으나, 모세 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는 과정에서 여호와 신이 된 다음 완전히 하늘위로 올라가 '질투의 신' '폭력의 신' '전쟁의 신' '공포의 신'등으로 변했다.
여와, 유대족의 민족신 여호와로 바뀌다.
우리는 여와가 '성경'의 여호와로 변했다는 증거는, 본래 자비와 사랑의 어머니로서의 여성이었던 여와가 '구약성서'에서 여성신인 여호와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를 모태표상인 레헴rehem 또는 라하밈rahamim(자비를, 라힘rahim자비를 나타내다 등의 의미로 자주 쓰고 있다. 특히 '구약성서' '예레미아'에서는 '여호와이신 어머니는 비애를 은혜로 바꾼다'는 등 여성적, 모태적 표상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12:5, 30:18
이처럼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여호와가 여성으로서의 어머니로 해석되어졌던 것이다.
본래 하나의 명칭이었던 여와는 '성경'에서 하와와 여호와로 나뉘어 인류사의 첫 여성으로, 그리고 우주 창조신으로서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
한편 기원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지역으로 이주한 동방족과 수메르족은 조상이 같다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세계고대문화사'
문정창, 임승국, 김태영 등의 학자들도 '여와'가 이스라엘 민족신인, '여호와'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문정창은 '기원전 1200년경에 모세가 '창세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신을 '조선피플 chosen people'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곧 그들 사상의 고향을 가리키는 환국, 배달국, 고조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에서 해답을 찾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단기 4327(1994)년에 우리나라에서 전시되었던 진시황릉 병마용갱의 유물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 그래야 이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수 있다.
진시황제의 지하 군단인 병마용들은 7,000명이 넘는 군사들과 말 500필, 전차 130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하군단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명령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생동감으로 가득차 있다. 신체의 비례와 감정표현, 자세의 다양함등을 살펴볼때 오히려 살아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만약 고대에 이런 생동감 있는 조각품에 진짜 사람들을 섞어 놓았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사람으로 착각 했을 것이다. 또한 그 조각품을 만든 사람을 진짜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착각해 그를 추앙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방법을 여와가 전쟁 중에 사용했고, 그래서 후세인들이 여와를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기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런 가능성은 발해 연안의 북부 대퉁하 유역에 있는 우하량 돌무지무덤 부근의 여신교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3500년경의 '소조 여신상'의 세련된 조각 기법을 통해 충분히 제기해 볼수 있다.
지나측의 이러한 여와 이야기의 구성원리는 우리의 나반과 아만 이야기의 구성원리와 거의 같다. 여와가 황토로 사람을 만들고 오색의 돌을 반죽했다는 내용은, 인류 최초의 여인이었던 아만이 아이를 낳고 그 후손이 오색인종 이었다는 것과 같다. 또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과 그 대용품으로 등장하는 거북은, 나반과 아만의 혼례식때 나타난 4신수(주작, 거북, 백호, 청룡) 또는 5신수(곰 포함)과 같다.
원래 신화란 전래되는 과정에서 각색되고 첨삭되기 마련이다. 또한 원형을 좇아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속성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을 여과시켜야 비로소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복희와 여와는 배달국 제5대 태우의 환웅천황의 아들과 딸로서 기원전 3528~3413년의 사람으로 알려져있다.
배달국 태우의 환우의 막내아들 태호복희씨
복희와 여와는 태우의 환웅천황이 낳은 13남매 가운데 막내아들과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 무렵 우사의 직책에 있던 태호 복희씨가 환국시대의 '천부경'을 바탕으로 역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환역桓易이다.
이 환역이 나중에 주나라에 전해져 '주역'이 되었다. 이 환역의 또 다른 명칭이 복희팔괘 또는 선천팔괘로, 태극기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태호 복희씨
환역을 만든 태호복희씨는 역사에 역리의 원조로 큰 자취를 남겼으며, 또한 그의 천天사상과 어진 인仁가르침은 뒤에 공자가 이어받아 유교를 창시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기원전 3418년 맏형 다의말이 아버지 태우의의 뒤를 이어 배달국 제 6대 환웅천황으로 등극하자, 앞에서 이야기 한바와 같이 태호 복희씨는 누이동생 여와씨와 함께 배달국을 떠나 서쪽의 진陣에 이르러 터전을 잡고 계속 서쪽 진출을 꾀하여 메소포타미아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그러나 영민했던 태호복희씨도 천명은 어쩔 수 없었든지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여와씨는 오빠이자 남편인 태호복희씨의 유지를 받들어 메소포타미아에 지속적으로 선정을 베풀었다. 바로 이러한 여와씨의 덕교德敎가 그 무렵 사람들의 의식 속에 '여와 신'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성경'에 수록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태호복희씨의 성은 원래 새중의 새인 봉鳳과 같은 의미인 풍風씨였는데, 이것이 인류 최초의 성이다. 그러나 15대 만에 대가 끊겨 '풍골 좋다, 풍채 좋다, 풍신 좋다'는 등의 용어만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 2순위에 있던 염제 신농씨의 강시성이 되어 그 자리를 차지하여 다시 인류 최초의 성으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권오석은 스타인이 복희 여와도를 발견한 옛 고창국에 대해 "여와의 신화는 중원의 원주민이 지나인이 아니었음을 시사한다. 그 원주민이란 오늘날 지나의 서남 변경에 자리한 산악지대의 소수 민족인 묘족이나 야오족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곧 고창국이 옛날 동이족의 일파였음을 시사했다.
또한 이일봉은 고창국의 지명인 투루판을 삼한의 하나인 번한 (또는 변한)으로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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줴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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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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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되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진실은 진실이 아닐수가 있습니다.
성경 오직 성경으로 나타나는 여호와에 대하여 아시길 바랍니다.
설교한편 올립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난번에 공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야말로 믿을 수 있는 책이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입니까?
참으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사람들이 써놓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무조건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런 질문들은 이유 있는 질문들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디서 들어야 할까요? 단연코 성경에서 들어야 합니다.
대답할 수 있는 유일의 권위인 성경
그러나 독자들 중에는 이 대답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이 믿을 수 있는 책인가를 성경에서 물으면 응당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이 외의 누구에게 물어서 확인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이론은 아주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히 6:16).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히 6:13)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면, 그 가리켜 맹세한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외에 가리켜 맹세할 무엇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그와 같이 "성경은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성경 이 외의 것에게서 대답을 구하는 것은, 성경이 그만큼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단연코 성경이 대답할 수밖에 없고, 마땅히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언으로 증명하시는 하나님
오늘날 사람들이 잘 믿고, 쉽게 믿어버리는 것은 자연과학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자연과학이, 실험으로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실험하여 증명되는 것을 쉽게 믿고, 또 믿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 생겨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의 심리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연 믿을 수 있는지 과학적 방법으로 실험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를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 가지 측면으로 사람들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첫째, 창조의 하나님으로서 만유의 주.
둘째, 예언의 하나님으로서 역사의 주.
셋째, 구원의 하나님으로서 생명의 주.
이중에 죄인으로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는 생명의 주로서 구원의 하나님이 가장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구원의 하나님이신 사실만 충분히 계시하시면 될 것인데, 이렇게 세 가지 측면을 계시하신 것은 전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구원의 하나님인 것을 어떻게 믿겠습니까?"라는 인간의 질문에,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고자 하는 사랑의 대답으로써 역사의 주로서 예언의 하나님으로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즉, "너희들이 의심이 많은데, 그러면 나를 믿을 수 있는지, 못믿을 존재인지 실험을 해 보고, 믿고 구원 얻어 생명 있는 자들이 되어라"는 사랑의 요청을 역사적 사건을 예언하심으로 실험 할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역사의 현장을 시험관으로 삼고, 예언을 실험 재료로 삼아 실험하여, 그 예언이 역사적 사실로 성취되면, 예언하신 하나님은 참으로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증명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요 14:29, 13:19).
그러므로 하나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사 46:10)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예정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계 역사의 시작과 진행과 종말을 한 눈에 다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역사의 현장에서 성취될 때, 그것으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언하는 능력을 참 하나님 되심의 한 증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을 일으키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의 어떠한 것도 고하라 우리가 연구하여 그 결국을 알리라 혹 장래사를 보이며 후래사를 진술하라 너희의 신 됨을 우리가 알리라"(사 41:21∼23).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우리로 하나님을 믿어서 영생에 이르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을 성경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록된 말씀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언을 주신 것입니다. 물론 성경 예언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이 구원의 경륜을 확실히 믿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이 살피면 분명히 알 수 있는 역사의 진행을 미리 예언하여 그것이 역사의 현장에 명백히 성취되는 것을 봄으로 성경의 다른 기록들도 믿을 수 있는 사실임을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연 믿을 수 있는 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을 듣기 위하여 우리는 성경의 예언을 연구해야만 합니다. 이런 연구로 확증을 얻지 못하면, 성경은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하나의 자의적(恣意的) 주장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삼대 째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훈을 받고 아무런 의심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성하면서 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에 합리적인 대답을 들려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성경에 나타난 역사에 대한 예언을 연구함으로 성경이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얻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예언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별히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세상 역사의 진행을 집중적으로 예언한 책입니다. 17이 책을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을 경탄하면서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짧은 지면을 통하여 이 두 책의 내용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다만 몇 가지 예언과 그 성취를 적어봄으로 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인가라는 질문에 대답을 확증해보려고 할뿐입니다.
예언의 성취로 증거함
다니엘서 8장은 바벨론 왕 벨사살 3년에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입니다. 벨사살 3년은 기원전 551년에 해당됩니다. 그때 다니엘은 계시 중에 두 마리의 짐승을 보았는데 먼저 본 짐승은 수양이었고 나중 것은 수염소였습니다. 이 짐승들과 그 생김새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했을 때, 천사는 "네가 본 바 두 뿔 가진 수양은 곧 메대와 바사 왕들이요 털이 많은 수염소는 헬라 왕이요 두 눈 사이에 있는 큰 뿔은 곧 그 첫째 왕이요 이 뿔이 꺾이고 그 대신에 네 뿔이 났은즉 그 나라 가운데서 네 나라가 일어나되 그 권세만 못하리라"(단 8:20∼22)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메대와 바사는 서양사에서 메디아와 페르시아로 기록되는 고대 제국들입니다. 이 나라는 형제국으로 처음에는 페르시아가 메디아의 봉신국(封臣國)이었으나 페르시아에 고레스라는 영명한 군주가 일어나면서 도리어 메디아가 페르시아의 봉신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들은 바벨론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을 때는 작은 나라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페르시아가 세계적 제국이 될 것이라고 그 국명을 분명히 밝혀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바벨론이 고레스에게 정복당하고 고레스 대왕에 의하여 페르시아가 세계적 제국이 된 것은 기원전 538년입니다. 그러므로 대제국 페르시아가 건국되기 12년 전에 그 사실을 예언한 것이며, 과연 그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겨우 12년 후쯤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정세에 눈이 밝은 사람은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대제국 헬라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하여 건설되었습니다. 그것은 페르시아를 정복함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정복한 것은 기원전 331년입니다. 다니엘이 계시를 본 기원전 551년보다 무려 220년 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220년 전에 헬라라는 이름의 나라가 세계적 제국이 될 것을 예언했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이 예언을 하던 그때는 220년 후 미래의 사건이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언과 역사를 대조하면서 실험하고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이 헬라에 대하여는 좀더 자세한 예언적 묘사가 있습니다. "두 눈 사이의 큰 뿔은 그 첫째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뿔이 꺾이고 네 뿔이 나는 것은 헬라가 네 나라로 나뉠 것을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헬라 역사를 보면 틀림없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첫 왕은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그가 33세의 나이로 죽을 때, 임종을 지켜보며 누구를 후계자로 세울 것을 묻는 막료들에게 그는 "강한 자가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고 유언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후에 장군들은 나라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나뉘어 싸웠고 마침내 카산데르, 셀류쿠스, 리시마쿠스, 프톨레미 등의 네 장군이 각각 영토를 나누어 나라를 세우므로 이 예언은 한 오리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미심쩍은 사람은 자세히 기록된 서양사 책을 읽어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레스에 대한 예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기원전 750∼680년 경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말년을 두고 말할지라도 고레스가 출현하기 150년쯤 전입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는 고레스의 이름을 그의 예언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서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사 45:1∼4).
이사야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 예언을 하실 때에 아직 고레스는 태어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그가 하나님을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칭호 곧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24그리고 그를 이끌어 열국을 치게 하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자로 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기이하지 아니합니까! 이뿐 아닙니다.
헤로도터스의 증언
고레스가 어떻게 바벨론을 쳐서 점령할 것인지도 예언하였습니다. "깊음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마르라 내가 네 강물들을 마르게 하리라 하며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사 44:27, 28). 먼저 인용한 말씀과 이 말씀 중에는 고레스가 바벨론을 점령하는 전략적 방법에 대한 예언이 있습니다. "깊음에 대하여 마르라 강물들이 마르게 하리라"는 예언이 그것입니다. 바벨론 성은 이중 성벽이 두른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레스의 군사가 강하였어도 함락시ㅗ킬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결국 고레스는 바벨론 성벽 아래로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을 돌려서 성벽 밑으로 뚫린 강바닥을 따라 군사들을 성내에 들여보냄으로 바벨론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깊은 강물이 마른 것입니다. 이때의 상황을 헬라의 역사가 헤로도터스는 그의 역사책 페르시아 전쟁기에 다음과 같이 적어놓았습니다. "시간은 경과되고, 그 성에 대한 진격을 시도할 수 없게 되자, 고레스는 커다란 당혹 가운데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번민 중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이 그에게 제안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궁리한 것인지 모르는 한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강이 성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에 그의 군대를 배치시켰고, 강이 성 저편으로 흘러 나가는 지점에도 군대를 배치하여 놓고, 물이 건너기에 족하리 만큼 얕아지자마자 강바닥을 통해 진군해 들어가라고 명령을 해 놓았다. 그런 다음 그 자신은 그의 군대 중에 비전투 인원들을 데리고 철수하여 전에 니토크리스가 이 강을 위해 파 놓은 웅덩이를 향해 진군했는데, 거기서 그는 니토크리스가 한 것과 똑 같이, 수로를 통해 당시 늪지였던 그 파 놓은 분지로 강물이 흘러 들어가도록 유프라테스를 돌려놓아서 본래의 강바닥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물의 수위가 낮아지게 하였다. 이쯤 되자, 이 목적을 위해 바벨론의 성벽 밑에 배치되어 있던 페르시아 군사들은 강물이 사람이 넓적다리 중간쯤에 이를 만큼 잦아지자 강물도 들어섰으며, 그리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헤로도터스, 페르시아 전쟁 제 1권, 190, 191장). 적어도 150년 전에 이것을 예언하였는데 얼마나 정확히 문자대로 성취되었습니까? 물론 고레스는 이 예언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으니까 이사야의 예언을 읽었을 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종말을 보이시는 하나님이 장차 고레스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바벨론 성을 점령할 것을 미리 아신 고로 예언하신 것이며 고레스는 예언대로 바벨론을 점령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훗날 고레스가 이사야의 이 예언을 읽었을 때 얼마나 놀랐겠으며 또한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자기가 승리한 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섭리에 의한 것을알았을 때에 그는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27"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이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스 1:2, 3)고 조서를 내림으로, 고레스는 여호와 하나님이 이 모든 권세를 자기에게 허락하신 것을 솔직히 시인했습니다.
너무 정확한 예언 때문에
너무나 정확한 예언과 그 성취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기록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진 다음에 어떤 사람이 예언적 형식을 취하여 기록한 것이므로 그처럼 정확히 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처럼 정확히 기록할 수 있겠는가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시는 분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한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은 일이 이루기 전에 예언하셨습니다.
태어나기 오래전에 이름을 예언하고 그가 할 일을 예언한 것은 고레스가 그 첫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할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시야에 대한 예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북방 왕국의 첫 왕인 여로보암이 벧엘에 단을 쌓고 분향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배도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왕상 13:1, 2)라고 예언하였습니다. 30여로보암은 기원전 931년에서 910년경까지 재위한 왕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기원전 640년에서 609년경까지 왕입니다. 그러니까 요시야가 태어나기 300년 전에 그 이름이 주어졌고 그가 할 일을 예언하였는데 과영 요시야는 그 예언된 일을 성취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왕하 23:15, 16).
다니엘서 12:4에는 마지막 때에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할 것이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때가 언제부터인지 알기 위하여 다니엘서를 자세히 연구하면 1798년부터가 마지막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누리는 대부분의 문명의 이기들은 1798년 이후에 발견 발명된 것들이며, 특히 교통 수단의 대량화와 속도화는 더욱 그러하여 눈부신 발달이 아닙니까?
과학자 뉴톤이 다니엘서를 주석한 사실은 유명합니다. 그는 다니엘 12:4절을 해석하면서 앞으로 사람이 지상을 50마일의 속도로 달릴 때가 올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불란서의 어떤 무신론자가 성경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책이다 그렇지 않고야 뉴톤 같은 과학자가 이런 엉터리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엉터리 소리를 하게 하는 성경은 아마도 100년 내에 지상에서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빈정거렸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속 50마일로 달리면 그것을 보는 소는 풀을 뜯을 수 없을 것이며, 닭은 알을 못 낳게 될 것이며, 임신부는 유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십시오. 오히려 뉴톤의 안목이 짧았던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에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였음이 틀림없습니다. 뉴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성경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살아 있으며 아직도 역사합니다(히 4:12 참조).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고등비평과 그 패배
성경은 과연 믿을 수 있는 책입니까? 결단코 믿을 수 있는 책입니다. 따질 것 없이 처음부터 당연히 그랬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것이 생리가 되어 있는 불신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성경 자체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절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를 주저하였습니다. 특히 문예부흥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그때까지 믿어오던 많은 고대 세계에 대한 기록들과 지식에, 잘못된 것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어 고대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신뢰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그런 풍조는 자연스럽게도,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왔던 성경도 잘못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지면서 그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마땅히 비평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래서 소위 고등비평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풍조가 불신자에게 있다면 그럴 수 있다고 이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의 말씀이라는 것을 거부하는 공격이 소위 신학자들에게서 나올 때는 교회 자체가 얼마나 당황하게 될 것입니까?
18세기에 쟝 오스트뤼크(Jean Astruc 1766 사망)에게서 싹이 터서 조금씩 자라던 고등비평은 19세기에 율리우스 벨하우젠(Julius Welhausen 1844∼1918)에 이르러서 "이스라엘의 역사 서설"이 출판되면서(1878, 2판 1883), 그래도 그때까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던 기독교계에 정말 원자탄 같은 파괴적 이론을 빈틈없는 조직적인 연구로 내놓았습니다. 이 책의 출판으로 그 이전에 쓰였던 구약성경 관계 책들은 모두 쓰레기로 처리 될 수밖에 없을 정도였습니다. 온 신학계가 그의 주장을 따라 흥분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연구의 치밀하고 과학적인 주장에 압도된 보수적인 학자들은 이론으로 반박할 말을 잃고 망연 자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구약성경 특히 모세 오경과 여호수아(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여호수아까지 포함하여 육경이라 함)는 모세가 기록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기원전 6세기경에 어떤 종교적 천재가, 이리 저리 굴러다니는 종교 문서들을 모아서 역사적 줄거리가 서도록 편집한 소설적인 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같은 인물은 결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창세기에 나타난 역사적 배경은 기원전 6세기경의 역사적 배경이며, 거기다가 기원전 2000년경의 인물들을 등장시켜서 꾸민 이야기라고 극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편에 서서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적행위를 하는 학자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언필칭 진실을 진실대로 밝혀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실보다도 정함이 없는 인간의 소위 학문적 진실을 믿기를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신학자라는 이름의 인간학자들일 뿐인 것입니다.
하여튼 성경은 큰 위기를 만난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계시의 말씀이라고 믿는 학자들은 글 싸움을 하는 대신 성경의 권고대로 땅에게 물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욥 12:8) 그래서 "돌들이 소리 지르"(눅 19:40)도록 하였습니다. 즉 성경 고고학에 의하면 그런 고등비평의 허구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옛날 역사들이 고고학자들의 삽에 의하여 깊이 묻혔던 땅속에서 빛을 보게 되었을 때 성경이 빛이라는 사실을 온 세계에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실제 인물이고 성경에 기록된 그들이 살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 기록은 틀림없다는 것이 훤히 드러난 것입니다. 고등비평가들이 역사적 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던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고대의 역사적 사건 기록들이 성경 고고학에 의하여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확인된 것들은 지면관계로 여기에서 기록할 수 없습니다. 알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성경 고고학에 관한 책들을 구하여 읽으면 유익할 것입니다. 고등비평가들은 그런 고고학적 증거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증거가 나타나지 아니한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는 적어도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에불라의 발굴로 종언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발굴된 점토판에는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창 14:2)이 성경에 기록된 차례대로 나타나 있고 그 나라들(도시 국가)이 경제 강국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고모라 왕은 성경에 기록된 이름(창 14:2)과 같은 철자로 구성된 이름인 것까지도 발견되었습니다. 과연 땅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으로 이 시대에 소리치고 있습니다. 고고학의 돌들은 성경의 확실성을 웅변하고 있습니다. 그 확실성에 압도된 벨하우젠 학파의 고등비평까지도 "우리는 족장들의 이야기의 배경이 기념비들에 의하여 증거된 바와 같이, 문제시되고 있는 그 시대의 고대 동방 문화와 환경과 하나 하나의 세목에 이르기까지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보았다. 벨하우젠은 족장들의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로부터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지금은 족장들의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아브라함이 정말 생존하였다면 성경에 묘사된 조건과 환경 아래서만 가능하였을 것이다. 역사적 연구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알프레드 예레미아스, 고등비평가)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만일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면 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이 못됩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실은 성경 때문에 고고학이 빛을 보게 된 것뿐입니다. 성경은 다른 것의 증거에 의하여 그 믿을 수 있음을 증거하는 책이 아닙니다.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명백히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책입니다. 성경을 믿을 수 있다는 증거는 사실 성경 자체가 가장 확실하고 권위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역사적 기록으로도 진실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의 예언적 성취로서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것이 증명되었고 지금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과연 믿을 수 있는 책입니까? 너무나 확실히 그렇습니다.
사해사본의 증언
그래도 혹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랬더라도, 지금은 원본이 하나도 없지 않는가. 성경이 사본되어 내려오면서 원래의 순수성을 많이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런 말은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경을 사본하는지를 알면, 그런 걱정은 기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1947년에, 성경은 사본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를 증명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947년 2월 3일 무하맛 아드 디버는 자기가 돌보는 주인의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리고 걱정이 되어 친구와 함께 잃은 양을 찾으러 사해 근방 굴들이 많은 산비탈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떤 굴 앞에 이르러, 혹시 양이 그 안에 들어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굴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본 후에 굴속을 탐색하려고 굴속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그랬는데 굴은 얕았고 굴속에서 오지그릇 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들은 조심스럽게 굴속에 들어가 깨어진 독을 발견하고 그 속에 들어 있는 두루마리들을 갖고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20세기의 성경 연구를 위한 최대의 수확이라고 하는 사해사본 발견의 시초였습니다. 그때 발견된 것 중에 온전하게 보존된 이사야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발견되기 전의 이사야서 사본의 가장 오래된 것보다도 거의 천년이나 오래된 사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천년 세월동안 사본해 오는 중에 얼마나 많이 틀렸을까 하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현재의 이사야서와 면밀히 대조하여 그 다른 점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극히 지엽적인 것들(토씨나 접속사 등)외에는 내용상의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과연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입이 명하고 그 신이 모은"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하나님이 지켜 오셨습니다. 결코 오류가 없는 정확 무오하게 보존하신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성경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극심했던 것을, 이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다 알 것입니다. 19세기에 일어난 소위 고등비평은 교회 안에서 신학을 한다는 사람에 의하여 성경은 믿을 수 없는 책이라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성경 고고학의 발달과 함께 그 주장의 거짓됨이 드러남으로 성경의 신뢰성을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이 오늘과 같이 보존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을 믿을 수 있는 많은 증거를 성경이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0, 21)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 신이 모으신"것입니다.
성경은 "짝이 없는 것이"없으므로 그 짝을 찾아 읽을 때 서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 해석에, 사람의 견해나 해석이 끼어 들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뜻을 행하려는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줄 알게 되어 있습니다(요 7:17 참고).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행 17:11, 12)았습니다. 참으로 성경은 믿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롬 10:17)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청한 실험을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마 5:18)어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성경은 참으로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인하여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믿을 수 있다 하고 "왜 사람은 꼭 하나님을, 예수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장에서는 이 문제를 연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시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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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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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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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
"개성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은 그 아드님 속에 자신을 나타내셨다. …죄가 인간과 그 창조주 사이를 분리시킨 이후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개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