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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엔진
검색은 엔진이 있는데 생각은 엔진이 없다. 검색은 알고리즘이 있는데 생각은 알고리즘이 없다. 전쟁은 전략이 있는데 생각은 전략이 없다. 바둑은 포석이 있는데 생각은 포석이 없다. 수학은 공식이 있는데 생각은 공식이 없다. 일은 도구를 사용하는데 생각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다. 집배원은 주소를 보고 빠른 길을 찾는데 생각은 그냥 머리를 쥐어짠다.
개는 배회법으로 길을 찾는다. 마구잡이로 가다가 냄새가 끊어지면 방향을 바꾼다. 이 방법은 성공 확률을 높인다. 인간은 그냥 점을 친다. 미로를 찾는 생쥐는 길이 막히면 다른 길로 간다. 인간은 길이 막히면 엄마를 쳐다본다. 인간도 나름의 기술은 있다. 인간은 피아를 구분하고 무조건 상대가 가는 방향의 반대로 간다. 정치판의 프레임 걸기 기술이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있다. 생각은 자연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복제해야 한다. 자연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에너지는 차원이다. 차원은 매개의 집적이다. 생각은 매개를 사용해야 한다. 자연은 유체로 강체를 통제하고 인간은 집단이 개인을 통제한다. 자연은 동력을 쓰고 인간은 권력을 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집단의 권력에 문제를 떠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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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거리를 돌아다녔지만 현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아고라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고개를 돌리고 대화를 피했다. 답답한 일이다. 나는 인간들을 관찰해 봤지만 체계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지식은 체계가 있어야 한다. 체계는 체 둘을 연결한 계다. system은 쌍sy으로 선다stand. 석가는 이것이 일어서면 저것이 일어선다고 말했다. 이것과 저것을 연결하여 한꺼번에 움직이게 하는 것은 메커니즘이다. 물레방아는 물레가 돌면 방아가 돈다. 시계는 태엽이 풀리면 바늘이 돈다. 베틀은 북이 움직이면 바디가 움직인다. 메커니즘에 에너지를 태우면 시스템이 작동한다. 세상은 시스템이다. 사유는 시스템을 복제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알게 된다. 하나와 열 사이에 시스템이 있다. 무릇 안다는 것은 근본이 되는 이것을 알고 저것을 연결하여 단계적으로 확장해 가는 것이다. 이것에서 출발하여 저것으로 나아가며 계속 연결해야 한다. 거기에 방향성이 있다. 인간들은 객체 중심, 단위 중심, 원소 중심, 원자 중심의 개별적 사고, 분별적 사고에 빠져 있다. 이것은 아는데 저것은 모른다. 자동차는 아는데 운전을 못한다면 아는게 아니다. 지식의 연결고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수평적 연결을 넘어 수직적 연결로 도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법적 사고가 아니면 안 된다.
세상에 인간이 이렇게 많은데 이것에서 저것으로 나아가는 인간 하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다들 프레임이라는 쥐구멍에 숨어 자신을 방어하고 있다. 슬픈 일이다. 디오게네스가 대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헤매던 이유를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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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생각할줄 모른다. 도구를 써서 체계적으로 사유하지 못한다. 사유의 출발점을 찍고, 에너지를 태우고, 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자발적인 사유를 못한다. 세상을 향해 쳐들어가지 못하고 이것에서 저것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것과 저것의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방어적 사고다. 방어는 연결고리가 필요없다. 내가 가만 있어도 적군이 다가와서 연결해 준다. 에너지는 필요없다. 적군의 힘을 역이용하면 된다. 기생충은 숙주의 에너지를 빼먹으면 된다. 자체 동력이 없는 생각은 한계가 있다. 마차와 자동차를 구분할줄은 아는데 운전하지 못한다.
방어적 사고를 하므로 프레임에 갇혀서 집단에 예속되고 환경에 종속된다. 수평에서 교착될 뿐 수직으로 타개하지 못한다. 적을 물리치고 원위치로 돌아올 뿐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우주는 팽창하고, 생명은 진화하고, 문명은 진보하는데 인간의 사유는 3천년 째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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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팀내'라는 말이 있다. 문제는 확률적으로 나타나는데 에너지 총량이 부족하여 팀의 뎁스가 두껍지 않다. 강팀은 유망주를 키워서 문제를 해결하지만 약팀은 결국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귀신같이 제 자리를 찾아간다. 스토브리그에 유명 선수를 데려오지만 문제가 발생하고 유망주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해결책은 없다. 팀은 문제의 발생을 불운의 탓으로 돌리고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
객체 중심, 단위 중심, 원소 중심의 사고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과 저것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하고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생각한다. FTA 영입과 유망주 손실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평면적인 사고를 할 뿐 입체적인 사고를 못한다. 단편적인 사고를 할 뿐 에너지 총량 위주의 사고를 못한다. 아예 생각 자체를 못한다. 전략이 없고 사유의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함정에 빠지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며 조금이나마 생각을 한다. 강대국은 언제나 라이벌과 동맹국이 있다. 경쟁하며 교대로 함정에 빠지고 구해준다. 유럽은 경쟁구도가 유지되는데 중국은 경쟁자가 없고 동맹국도 없어서 생각하기를 잊어버렸다. 경쟁자 없이 자체 엔진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사유의 전략이 필요하다. 특별한 도구와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
직관의 철학
구조론은 직관의 이론이다. 에너지는 한 곳에 몰아주는 성질이 있다. 에너지가 계를 이루면 밸런스가 전체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직관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배후에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있다. 동력원이 있다. 동력을 조절하는 스위치를 장악하면 직관이 가능하다.
전쟁은 공세종말점에서 멈추고, 자동차는 주유소 앞에서 멈추고, 인간은 식당 앞에서 멈춘다. 사건은 에너지의 연결로 시작되고 에너지 고갈로 끝이 난다. 더 이상 싸울 병사가 남아있지 않을 때 전쟁은 종결된다. 중간에 간섭되어 복잡할 뿐 사건의 시작과 끝은 단순하다.
주인공이 위기에 몰려도 관객이 당황하지 않는 것은 상영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은 정해져 있다. 나무의 가지가 많아도 뿌리는 하나고 물은 결국 바다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중간의 간섭을 제거하고 구조를 단순화 하여 에너지의 본질을 짚는 것이 직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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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슬은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 그곳에 에너지가 집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에는 세 가지 맹점이 있다. 사유의 약한 고리가 된다. 첫째, 인간은 에너지를 보지 못한다. 둘째, 인간은 언어를 잘못 사용한다. 셋째, 인간의 행동은 동물의 본능에 지배된다.
의사결정의 주체는 인간이고, 객체는 자연이고, 둘 사이의 매개는 언어다. 자연의 존재 뒤에서 붙잡아주는 매개는 에너지다. 인간은 개인 뒤에 붙잡아주는 집단이 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둘을 연결시켜주는 매개는 언어다. 항상 붙잡아주는 것이 있다.
자동차가 천천히 가면 방향이 틀어지고 빠르게 가면 방향전환을 못한다. 자연은 에너지의 도움을 받고, 인간은 집단의 도움을 받고, 지식은 언어의 도움을 받는다. 돕지 않으면 비뚤어지고 도와주면 경직된다. 만유의 붙잡혀 있음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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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을 숭상하지만 위태롭다. 이성은 부분을 보되 전체를 보지 못한다. 객체를 볼 뿐 주체를 보지 않는다. 보여지는 것을 볼 뿐 보는 자신을 보지 못한다. 자신의 집단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다. 무의식과 호르몬에 붙잡혀 있음을 보지 못한다.
사이코패스가 냉철한 판단으로 경영 수완을 보이거나 정치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 그러하다. 이성은 부분의 해결에 강한 대신 집단에 리스크를 떠넘긴다. 공격은 하는데 방어를 못한다. 담대한 의사결정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는 집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출산거부로 망하는게 이성주의 리스크다. 개인의 이익추구가 집단을 파멸시킨다. 극단적 이성주의는 영화에 나오는 사이코패스 과학자의 상호확증파괴와 같다. 인공지능이 이성적 판단으로 지구에서 인류를 삭제하고 우주를 구한다면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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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은 집단의 정보 공유다. 개인은 빠르지만 약하고 집단은 느리지만 강하다. 공격은 이성의 순발력이 필요하고 방어는 감성의 응집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감성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인간이 이성주의로 가면 공격에 치중하고 방어에 소홀하여 멸망할 확률을 높인다.
공격은 하나만 뚫어도 이기고 방어는 하나만 뚫려도 진다. 공격은 빠를수록 좋고 방어는 뭉칠수록 좋다. 공격은 돌파구를 여는 한 명의 용사가 필요하고 방어는 팀플레이가 필요하다. 이성은 뛰어난 개인이 돌파구를 열어 최선을 구하고 감성은 집단이 협력수비로 최악을 막는다.
이성 - 상대의 약점을 찾아 성과를 얻는다.
감성 - 집단이 정보를 공유하여 리스크를 방지한다.
직관 - 집단의 에너지로 판단하여 이성의 한계를 극복한다.
감성의 흥분은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절차다. 인간은 집단을 의식하므로 흥분하게 된다. 물에 빠진 아기를 구해주려는 이유는 집단의 무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집단을 의식할 때 에너지가 끓어오른다. 에너지로 판단하는 것이 직관이다.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직관은 막강하다.
직관의 원리
직관은 우연한 행운에 기대는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뉴턴은 직관으로 중력을 발견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도 직관의 성과다. 아인슈타인이 열렬한 직관의 신봉자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상대성이론은 직관으로만 알아낼 수 있다. 수학적 아이디어는 원래 직관이다.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
구조론은 직관의 성과다. 정확히 말하면 언어감각이다. 사람들이 말을 어색하게 한다는 느낌에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언어는 전제와 진술의 형식이 있는데 사람들의 말은 그렇지 않다. 대개 핑퐁식 떠넘기기 언술을 구사한다. 서로 말대꾸를 하며 미완성된 문장을 함부로 투척한다. 말을 똑바로 하려고 의사결정 메커니즘을 언어의 근거로 추적한 것이 구조론이다.
사건의 시작과 끝은 단순하다. 태어날 때는 오류가 없다. 아기는 잘나고 못나고 없이 평등하게 태어난다. 죽음도 오류가 없다. 잘죽고 못죽고 없이 평등하게 죽는다. 직관할 수 있다. 중간의 간섭 때문에 복잡해진다. 반복되면 중복이고 끼어들면 혼잡이다. 간섭을 제거하고 에너지의 전달경로를 따라 단계적으로 밸런스를 집적하여 한 점에 모으면 직관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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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은 일원론이다. 관점의 차이다. 머리와 꼬리를 각각 보면 이원론이고 둘을 통합하여 에너지 전달경로를 보면 일원론이다. 우주 안에 1은 있고 2는 없다. 2는 1의 변화다. 어둠은 빛의 변화를 설명하려고 도입한 가상의 개념일 뿐 별도의 존재가 아니다.
사물로 보면 주체와 객체 2가 있지만 사건으로 보면 의사결정 메커니즘 1이 있다. 2는 대칭이고 1은 축이다. 둘은 밸런스의 부속품이다. 밸런스는 에너지가 의사결정하는 방식이다. 우주는 균형 1에 의해서 작동하고 2는 인간이 변화를 인식하는 방식이다.
의사결정 메커니즘은 스위치 하나로 계 전체를 통제한다. 유체의 압력이 밸런스를 도출하면 축을 이동시켜 의사결정한다. 동력원을 통제하고 전달경로를 장악하면 단순화 된다. 복잡은 중간의 간섭 때문이며 시작과 끝은 간섭이 없으므로 직관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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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직관을 못하는 이유는 에너지 전달 경로를 모르기 때문이다. 트리구조와 같다. 단계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면서 목적지에 도달한다. 어려운 것은 목차가 없고 분류가 없기 때문이다. 디렉토리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직분류를 하는 차원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평의 경로는 아는데 수직의 경로를 모른다. 주소는 수평으로 범위를 좁히지만 에너지는 수직으로 범위를 좁힌다. 에너지는 4차원 유체로 출발하여 3차원 강체 > 2차원 방향 > 1차원 경로 > 0차원 목적지에 전달된다. 차원은 동력을 전하는 존재의 디렉토리다.
원소가 모여서 집합이 되는게 아니라 관계의 변화가 원소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이 모여 하루가 되는게 아니라 태양과 지구의 관계가 변한다. 수평에서 교착되는 객체지향적 사고, 단위중심적 사고, 원자론적 사고를 버리고 수직에서 타개하는 구조적 사고를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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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프레임 없이 생각을 못한다. 프레임으로 자신을 대칭에 가두고 압박하여 방향을 제시하고 에너지를 끌어낸다. 그냥 동전이 있을 뿐인데 앞면과 뒷면이 따로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세상을 대칭으로 이해하지만 자연에는 변화가 있을 뿐 대칭이 없다. 대칭은 인간의 관념이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은 변화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맞대응 행동이다. 빛은 광자가 있고, 선은 사회가 있고, 진보는 문명이 있지만 반대편에 대응되는 무엇이 없다. 인간이 밝기 조절에 어둠을 도입하고, 집단 조절에 악을 도입하고, 문명 조절에 보수를 도입한다.
자연은 대칭 이원론이 아니라 균형 일원론이다. 변화가 균형에 의해 조절될 때 프레임은 깨진다. 진보와 보수의 통일은 문명의 변화, 선과 악의 통일은 사회의 변화, 빛과 어둠의 통일은 빛의 밝기 변화다. 수평적 사고는 프레임에 갇혀서 교착되고 수직적 사고는 교착을 타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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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은 한 명이 돌파구를 열지만 방어는 협력수비를 필요로 한다. 집단이 협력하려다가 프레임에 갇힌다. 프레임은 적의 공격에 맞서는 방어논리다. 사람을 구조에 가둬서 인질로 잡는다. 사람을 통제하는데 쾌감을 느끼고 흥분한다. 집단의 권력에서 개인의 에너지를 조달한다.
에너지를 구하다가 프레임에 갇힌다. 동력원을 장악하지 못하므로 집단에 의지한다. 권력이 집단을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는다. 고립되면 불안하므로 집단의 권력에 동력을 연결한다. 개인이 자기만의 도구를 획득하면 별도의 동력원을 얻어서 프레임을 이기고 자유로워진다.
상부구조와 연결하면 동력을 얻는다. 무사는 칼이 있어야 편안하고 작가는 펜이 있어야 편안하다. 강체가 유체의 압력을 느끼면 편안하다. 에너지 방향성을 느끼면 편안하다. 한 발 앞서 변화를 미리 내다보면 편안하다. 흐르는 강물에 배를 띄우고 순풍에 돛을 올리면 편안하다.
직관의 원리
구조의 원리는 밸런스다. 밸런스는 O 아니면 X다. 밸런스의 축은 하나다. 밸런스는 하나가 전체를 결정한다. 전부 아니면 전무다. 중간이 없으므로 이론적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직관하려면 틀에 가두어야 한다. 항상 배후에 붙잡아주는 것이 있다. 매개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더 높은 차원에 있다.
총알의 배후에는 총이 총알을 붙잡고 있다. 총의 배후에는 킬러가 총을 붙잡고 있다. 킬러 배후에는 의뢰인이 있다. 압박이 걸려 있다. 에너지가 걸려 있다. 화살 배후에는 활이 있다. 활의 배후에는 궁수가 있다. 항상 배후가 있고, 최종보스가 있고, 압력이 걸려 있다. 붙잡아주는 매개가 결정한다.
공 위에 투수, 투수 위에 감독, 감독 위에 구단, 구단 위에 관객이 있다. 관객의 압력이 최종보스다. 0차원 위에 1차원, 1차원 위에 2차원, 2차원 위에 3차원, 3차원 위에 4차원이 있다. 4차원은 계 내부의 압력이다. 모든 것의 배후에는 압박이 있다. 압력은 하나가 전체를 결정하므로 직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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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직관으로 판단하면서 자신이 직관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다. 사람들이 한 번은 직관으로 잘 맞추는데 두 번째는 실패한다. 과거의 경험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직관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우연한 직관은 되는데 의도적 직관은 못한다. 직관을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직관은 밸런스 감각으로 에너지 방향성을 파악하여 사건의 다음 단계를 예측한다. 밸런스는 반대쪽에 먼저 조치해야 한다. 자전거는 오른쪽으로 기울였다가 왼쪽으로 핸들 꺾는다. 황소는 달려가기 전에 뒷걸음질친다. 반대쪽에 조치하고 그것을 지렛대 삼는다. 동물도 아는데 인간이 모른다.
역설은 4차원에 작용한다. 닫힌계를 걸고 압력을 가하면 4차원이 된다. 전문가와 정치인이 오판하는 이유다. 성난 유권자와 그냥 유권자는 다르다. 그냥 바람은 제멋대로 불지만 압력이 걸리면 일체히 한 방향으로 간다. 유체는 가라는 데로 안가고 미리 정해놓은 길로 가므로 예측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