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영자 | |
---|---|
대표 작품 1 | 피는 물보다 진하다 |
대표 작품 2 | |
수상연도 | 1991년 |
수상횟수 | 제10회 |
출생지 | 충남 |
[대표 작품]
피는 물보다 진하다
어느 초가을 날 선아 어머니는 싱싱한 청포도를 담뿍 사들고 예고도 없이 날 찾아왔다.
함께 데리고 온 소녀를 보며 내가 어리둥절했더니, "이 애가 바로 둘째딸 선아랍니다. 많이 컸죠?" 한다.
선아는 고개를 까딱 하며 티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선아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반가움에 두 손목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모녀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엄마를 닮았구나 쌍꺼풀눈이며 오똑한 코가 그리고 하얀 피부까지도…"
하는 내 말에 부인은 만족해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큰딸은 제 아빠를 닮고 우리 선아는 날 닮았대서 글쎄 둘이 하나씩 편을 든답니다. 그뿐인가요? 우리 선아는 피아노도 여간 잘 치지 않습니다. 세 살 때부터 쳤는데 아주 영리해서 피아노 선생님께 칭찬을 받곤 하죠" 한다.
얼굴까지 상기되면서 매우 대견스러운 듯 딸의 칭찬에 열을 올렸다. 누가 보든지 두 사람은 한 핏줄을 나눈 친 모녀 같다.
분명 그들은 남남이건만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 앞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다 해도 우리 조상의 한 핏줄임엔 틀림없기에 그들 모녀는 진실된 사랑과 행복 속에 신비의 조화가 형성된 새로운 혈연을 낳았다고 나는 믿고 싶어졌다. 아무런 티도 없는 그들 모녀를 바라보며 5년 전 일이 되살아났다.
그날따라 몹시 바빠 피곤이 온몸을 짓눌러 오는 괴로움으로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해 시달리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아마 새벽 4시쯤 되었을까. 비몽사몽간에 어렴풋이 들려오는 여인의 신음소리에 잠을 깼다. 옷을 급히 갈아입고 2층에 올라가 불을 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살펴보니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두렵고 불안스런 마음으로 나가 보았더니 희미한 달빛 아래 젊은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 신음하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를 진찰실로 옮겨 놓았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이나 되었음직한 남루한 의복차림에 만삭인 임산부였다.
그로부터 두 시간 가량 지나서 여아가 태어났다. 모진 고통에 시달린 산모는 아기를 분만하자 마치 더러운 오물을 배출해낸 듯 아기를 외면해 버렸다.
그리고선 제발 저 애를 없애달라고 사정하는 것이 아닌가. 속담에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면 보따리 내놓으란다는 말과 같이 자기 몸의 고통을 덜어주니 이젠 아기를 처리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산모가 어려 철없는 탓으로 돌리고 아기와 정이 들면 되겠지 싶어 아기를 깨끗이 목욕시켜서 엄마 곁에 뉘어 놓았다.
엄마는 본 체도 않고 반대편 벽을 보고 홱 돌아 누워버렸다. 그런 엄마의 냉대를 알 리 없는 아기는 평온한 얼굴로 쌔근쌔근 잠이 들기에 간호원을 불러 첫국밥을 가져다 주라고 일러 놓고 나는 산모의 속옷을 준비하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것저것 찾다 보니 시간이 꽤 지났을 무렵 갑자기 간호원이 성급하게 나를 불렀다.
산모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이상한 것이 그토록 싫어하던 아기도 함께 없어졌다는 것이다. 허탈한 마음에 일손도 잡히지 않은 채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 어디선가 갓난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게 아닌가. 놀라서 허둥대며 그 소리나는 곳을 따라가 보았더니 2층과 1층 사이에 있는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아기를 뉘어 놓고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었다.
그 아기를 끌어오기 위해 창문 밖으로 긴 장대를 동원시켰다. 꽁꽁 얼어서 새파랗게 질려 있는 아이를 안아다 따뜻한 방에 누이고 얼마 동안 더운물 찜질을 했더니 차차 혈색이 돌고 입을 내돌리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돌리면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어린 생명의 울부짖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머리에 떠올린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선아 엄마였다.
그녀는 첫딸을 하나 낳고 12년이 되도록 아기를 낳지 못했다. 더구나 그 딸마저 소아마비로 늘 앓고 있어 불안해하면서 예쁜 딸아이를 하나 기르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녀간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딴 곳으로 이사를 해서 소식이 끊겼었는데 5년 만에 그처럼 행복한 미소를 짓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과 둘러앉아 청포도를 먹으니 가슴이 뿌듯하였다.
그들 모녀의 가슴속에는 무한한 희망과 행복이 부풀고 있다고 느끼면서 저 두 모녀의 사랑스런 모습을 모든 사람 앞에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라는 말보다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하는 새로운 진리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은가. (1979)
-본 작품은 수상작과는 무관합니다.-
[작가 프로필]
1943년 10월 15일생
충남 부여 출생
현 한영자 가정의학과 의원 원장
- 수상 경력 및 등단년도 -
1989년 의사평론가상 수상
1991년 제7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1993년 제3회 부산여성문학상 수상
1993년 제18회 노산 문학상 수상
1997년 백제 문학상 수상
1998년 열린 문학상 수상
1998년 영호남 수필문학 협회 공로상 수상
1982년 <한국수필>천료 등단
2007년 평론부분 신인상 수상
- 주요 활동 사항 -
부산 문인회 이사
해운대 문인 회장
수필 부산 부회장
한국수필작가회 부회장
부산시 중등교육과 장학사, 사직고 교감
부산 교육연구원 부장
사단법인 부산 한국수필가협회 회장
- 저서 -
협주곡
항아리에그린 얼굴
잃어버린 달빛
푸른계절을위한 대화
2006년 한영자의 문학과 삶 외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