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서예
이완재 명예교수 / 철학과
1. 나의 유년 시대와 서예
나는 유가(儒家)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가 어릴 때 겨울이 되면 동네 젊은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와서 우리 할아버지에게 한문도 배우고 글씨도 쓰고 해서,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분들을 본받아 붓글씨도 쓰고 한문도 배웠다. 일제 강점기인 9세에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그때는 교과과정에 서예시간이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집에서 서예를 익혀온 까닭에 학교 서예시간에 선생님으로부터 붓글씨를 잘 쓴다고 칭찬도 받았고 내 붓글씨는 교실 뒤에 붙어있기도 했다. 해방이 되고 의성(義城)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중학교 2학년 때 전교생 학예전시회가 있었다.
나는 일정춘초운생지(一庭春草雲生地) 반야서성월재천(半夜書聲月在天)이라는 액자 한 폭과 세자(細字, 가는 글씨)로 중용(中庸)에 나오는 박학지(博學之) 심문지(審問之) 신사지(愼思之) 명변지(明辨之) 독행지(篤行地) 장(章) 두 폭을 제출해서 전교 1등상을 받았다. 이것이 나의 서예생활 중 유년기의 추억이다.
2. 봉강서도회와 나의 서예
해방 후 우리의 전통문화가 장려되면서 서예도 크게 활발하게 되었다. 내가 대학에 다닌 당시 대구에서는 서예가로 소헌(素軒) 김만호(金萬湖, 1908~1992) 선생이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를 열어서 후진들을 많이 양성하고 계셨다. 나도 봉강서도회에 회원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서예를 공부하게 되었다. 1968년 5월에 제1회 봉강서도회서예전을 개최하게 되었는데, 선생께서 “전시를 하려면 호(號)를 써야 되는데 자네는 호가 무엇인가”라고 물으셨다. 어른 앞에 내 호가 뭐다고 하는 것은 실례가 되기 때문에 “제가 무슨 호가 있을 수가 있습니까” 했더니, 선생께서는 “아니야, 자네들은 아마도 자네들끼리 하는 호가 있을 거야. 사양하지 말고 이야기 하게”라고 다시 재촉하며 물으셨다.
당시 나는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을 읽다가 “군자포일(君子抱一)하야 위천하식(爲天下式)이라”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포일(抱一)의 일(一)은 도(道)를 의미하여, “군자는 도를 간직해서 천하의 법이 된다”는 이 말이 좋아서 ‘내 호는 포일(抱一)이다’하여 친구들 사이에는 내 호는 포일(抱一)로 통했다.
내가 이 사실을 소헌 선생에게 말씀드렸더니, 선생께서 “자네의 호는 한 일(一)자와 집 헌(軒)자로 하여 일헌(一軒)이라 하게”하시고 그 후 한문으로 장문(長文)의 일헌기(一軒記)를 써주셨다.
그 내용을 여기 모두 옮길 수는 없고 대체로 나의 사람됨을 지나치게 칭찬하시고 장래의 대성(大成)을 기대하시면서, “이(李)군이 일(一)을 좋아하여 일(一)을 따고 나와 헌(軒)을 같이 하고자(與我同其軒)하여 일헌(一軒)으로 하노라”고 밝혔다.
봉강서도회(鳳岡書道會)의 그 수많은 회원들이 모두 선생님으로부터 호(号)를 받았으되, 호기(号記)를 받은 사람은 아마 나 한 사람만이 아닌가 싶다. 소원선생의 그 간절하신 기대와 격려에도 나는 아무런 보답을 드리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두 차례 외유(外遊)와 나의 서예
나는 영남대학교 교수로 근무 중 대만과 미국에 교환교수로 갈 수 있는 행운이 있었다. 1972년에는 臺灣文化大學, 1975년에는 美國 세인트 존스(St.Jonson's) 大學의 Asian Study Center에 각 1년간 교환교수로 근무했다. 이 두 번의 外國행과 나의 서예에 대한 관심에는 지극히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처음 대만에 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거리의 商號, 간판의 글씨 가운데도 너무나 훌륭한 글씨가 많아 마치 名筆 전시장에 온 듯한 황홀한 기분이었다. 1년 동안의 대만 생활 동안 名筆들의 글씨를 자주 접하게 되고 따라서 본받고 싶은 충동도 있어 붓을 잡는 기회가 잦아 아마도 내 글씨에 상당한 향상을 가져 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美國生活 1년은 臺灣 생활과는 정반대였다. 나는 미국에 갈 때 筆墨을 가지고 갔다.
그런데 New York의 번화한 거리에 내리고 보니 나의 생각이 근본적으로 확 바뀌고 말았다. New York 생활 1년 동안 나는 가지고 간 筆墨 보따리를 풀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지고 왔다. 文化 쇼크란 참 이상한 것이었다. 美國에서 돌아온 후에도 붓글씨를 써보고 싶은 생각이 영 나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그렇게 열심이던 봉강서도회에도 상당 기간 출석도 아니하고 서예와는 영 담을 쌓았다. 아마도 그 기간이 3~4년이나 지속되지 않았나 싶다.
4.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사당(祠堂)의 벽서(壁書) 이야기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은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대유학자로서 주자학(朱子學)의 선하(先河)를 이루는 연년생(年年生)의 친형제 학자이다. 이들의 출생지인 중국 낙양(洛陽)의 정촌(程村)에 이 두 분을 기념하는 사당(祠堂)이 있다. 그 사당에 나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여기 그 이야기를 적어보고자 한다.
1995년도 중국 남개대학의 교환교수로 있을 때 장남 상린이 찾아와서 관광을 하러 낙양(洛陽)에서 조금 떨어진 정명도 정이천 사당이 있는 정씨(程氏) 집성촌 정촌(程村)이라는 곳에 구경을 갔다. 아들이 마침 그곳 벽에 쓰여 있는 문구를 중국 안내원에게 물었는데 그가 답을 못하길래, 내가 대신하여 설명해주었더니, 옆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한 중국인이 인사를 청하면서 자기가 이 사당을 관리하는 정명도 정이천 42대손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사당 지하실로 인도하였는데 거기에는 4면 벽에 정명도 정이천 사당을 방문한 사람들의 수많은 시판(詩板)이 4면 벽에 빽빽이 걸려 있었다. 그 중 한 시 가운데 팔룡(八龍)이란 문구가 적한 시판을 가리키면서 이 팔룡이 무슨 뜻인가를 물었다.
그 시를 읽어보니 팔룡도 이천(伊川) 앞에는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그 팔룡(八龍)은 후한(後漢)의 학자인 순숙(荀淑)의 아들 8형제를 뜻하는 글이었다. 순숙의 아들 8형제가 모두 훌륭하여 당시 사람들이 팔룡(八龍)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주역에 밝은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천(伊川)이 원래 주역에 밝았으므로 이천 앞에 오면 무릎을 꿇을 것이라는 뜻임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랬더니, 아 그러냐고 하면서 안에 들어가더니 두툼한 오래된 방명록(芳名錄)을 가지고 와서 방명(芳名)을 해달라고 청하였다.
방명록에 그냥 한국교수 이완재라고 쓰려니 멋쩍은 것 같아서, 계왕개래(繼往開來) 위재기공(偉哉其功), “지나간 과거를 계승하고 장래할 학문을 열었으니, 위대하도다 그 공이여”라는 뜻의 문구를 쓰고 아래 대구 영남대학 교수 이완재라고 써줬다. 그러고서 한국에 돌아온 후 몇 해 지나서였다. 중국에서 커다란 봉투가 왔다. 열어보니 탁본(拓本)한 큰 글씨로 종서(縱書)로 繼往開來 偉哉其功이라고 쓰고, 그 옆에 嶺南大學校 敎授 李完栽라 적혀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싶어 동봉한 정명도 42세손의 편지를 읽어보니, 「선생이 우리 할아버지 사당에 와서 방명(芳名)한 글 내용과 글씨가 좋아서 크게 확대를 하고 세로로 배열해 사당 벽에 석각(石刻)해놓았다」는 사연이었다. 참 천만 뜻밖의 일이었다.
그리고 늘 궁금했는데 2012년 봄 내가 출강하던 경북여성개발원에서 중국관광을 간다면서 동행을 원해서 낙양에 들러 그 벽서를 직접 목도할 수가 있었다. 정명도 정이천 사당의 한쪽 벽면에 중국 사람 네 사람, 일본 사람 한 사람, 그리고 나, 여섯 사람의 글씨를 나란히 한 벽면에 새겨두었음을 볼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내 일생에 있어서도 가장 영광되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망백삼인전(望百三人展) 이야기
2022년 5월 소헌미술관 관장 장경선 여사가 봉강연서회 회장 박재갑씨와 협의하여 망백삼인전(望百三人展)을 열기로 하였다. 봉강연서회(鳳岡硏書會) 회원으로 90세를 넘긴 회원이 세 사람이었다. 소봉(素峰) 백낙휘(白洛輝) 선생이 당시 94세이고, 향산(香山) 변정환(卞廷煥) 선생과 내가 91세였다. 이 세 사람을 위해서 백세(百歲)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전시회라는 뜻으로 망백삼인전을 기획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각각 10폭의 글씨를 내어 그 해 2022년 5월 28일부터 6월 5일까지 소헌미술관에서 전시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동안 서예 전시회는 무수히 열렸지만 이와 같이 90세를 넘긴 노인들만의 망백전(望百展)은 극히 희귀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래 인공지능의 발달로 우리의 생활이 극도로 과학화되면서 우리의 전통예술인 서예는 많이 위축된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때 평생 서예에 관심을 가져온 나로서는 늘그막에 이 망백전을 가지게 된 데에 흐뭇한 감을 금할 수 없다.
※ 편집자의 요청에 따라 “나와 서예”라는 글을 정리해 보았으나 뜻과 같지 않았다. 나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마저도 나의 후배 박호상 군의 협조가 컸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첫댓글 교수님의 글을 받고,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께는 사실 젊어서부터 해오신 서예, 그리고 국선도의 원고를 청탁드리고 싶었습니다. 그중에서 올해는 먼저 서예를 부탁올렸습니다. 눈도 어둡고 잘될지 모르겠다고 하셨는데, 며칠 전, 교수님께서 후배님께 글을 보라고 하시면서 작성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진도 인쇄의 해상도를 고려하셔서 원본 파일을 구해서 보내셨습니다. 그 마음이 와 닿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신 박호상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이글과 글씨로 <<늘푸른나무>>14호가 빛나지 싶습니다. 예쁘게 편집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리며 오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