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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특별시, 휴전선 인근 지역 최대 도시. 2019년 이후로 행정상 도와 같은 위계의 도시가 되어 어느 도에도 속하지 않게 되었다.
북쪽은 황해북도, 동쪽은 북한령 강원도, 서쪽은 예성강을 경계로 황해남도와 접해 있다. 바로 남쪽에 휴전선을 경계로 남한의 경기도 파주시, 연천군이 있으며 한강 하류를 건너 김포시, 인천광역시 강화군과도 인접해 있다. 원래 과거엔 장단군이 동쪽, 개풍군이 서남북쪽에 있었다. 허나 1960~70년대 장단군이 '수복지구 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파주시, 연천군에 임시 편입되어 일단은 지금까지 개성시와 파주시가 맞붙은 형국이 되었다. 물론 파주시청은 한참 아래쪽에 있고, 바로 근처엔 대성동 마을이 있다. 1951년 이전에는 경기도 개성시로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영토였다.
고려 왕조의 전체 사직 474년 중 중세시대 434년간 고려의 수도였다. 초반 1년의 철원 시기(918~919년)가 있었고 몽골침입으로 38년간 피난으로 임시수도였던 강화 천도 시기 (1232~1270년)가 있다. 그리고 고려가 망하던 때 1년간의 남경 임시 천도 시기(1382~1383년, 1390~1391년)가 있지만 우왕과 공양왕대 기간의 날짜를 모두 합쳐도 1년이 채 안 된다.
고려 당시에는 서울(수도) 경(京)자를 써서 개경(開京)이라 불렸다. 과거 소나무가 많아 송악(松岳/松嶽) 또는 송도(松都)라는 별칭이 있다. 송(松)이 소나무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로서 수도를 의미하는 서울(솔)의 음차였다고 보기도 한다. 이는 궁예의 수도 철원(鐵原, 쇠벌, 서라벌)도 마찬가지다.
개성이 1930년 개성부로 개성군에서 분리되기 전까지는 개성군 송도면으로 개성군의 중심지였다. 아무튼 이래저래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 근교의 옛 수도인 톨레도와 거리나 위상이나 모두 비슷하다.
삼팔선 이남이기에 1945년 9월 11일 개성 시내에서 미군환영 대회와 미소접촉이 열리는 등 1950년까지 대한민국이 통치하였지만 6.25 전쟁을 거치면서 속초시, 설악산, 김일성 별장 (화진포&산정호수), 대붕호(파로호), 양구 두타연 계곡 및 펀치볼(가칠봉), 양양 하조대와 낙산사, 금성천 이남의 김화군을 비롯한 철원평야를 되찾아온 대신에 한강&임진강 하구, 연백군, 옹진반도, 함박도와 함께 상실하여 (빼앗겨서) 신해방 지구로 북한에 편입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김포국제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북녘땅까지 직선거리로 30km에 불과할 만큼 서울특별시가 분계선에서 더 가까워지는 문제를 낳게 되었다.
대한민국 통치시절 만월대가 있는 자리에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만약 한미연합이 개성시 & 개풍군을 성공적으로 지켜냈더라면 신도시와 공단 개발로 김포시 + 파주시 (탄현면) + 강화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서울과 인근 지역의 과밀화를 어느 정도 해소하고 송악산에 황해도 지역을 내다보는 통일전망대가 설치되었을 것이다. 물론 한강하구의 자유로운 통행이 가능하여 경인 아라뱃길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삼팔선 시절에도 최전방 지역인터라 시가지에서 대한민국군과 조선인민군 간에 크고작은 무력충돌이 발생하였다. (5.4 송악산 전투) 서울특별시에서 도로편으로 60~70 km면 닿을수 있고 개성공단에서는 우리은행 개성지점이 운영되기도 하였다. 도끼만행에 이어서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에 격분한 군당국이 비밀리에 개성탈환을 검토하기도 하였지만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강하게 중단시켜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남한과 인접한 도시라는 점에서, 남북관계가 진전됐던 2000년대부터 개성관광(2007~2008)이 시행되었고, 개성공단도 설치되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개성이 북한 내에서 잘사는 도시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개성공단은 이명박 정부때까지 계속 가동되다가, 박근혜 정부로 넘어온 2013년 가동중단이 됐다가 다시 복구됐으나, 결국 2016년 다시 가동이 중단된 이후 현재까지 재개가 되지 않고 있다. 이후 문재인 정부 시기에는 다시 남북관계가 진전되면서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의 결과인 판문점 선언에 의해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개성 지역에 설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2020년 6월, 북한은 사무소를 폭파해버렸고 남북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인구는 30~35만 명(2008년 통계)으로 추정된다. 근교의 농촌지대의 인구를 합친 숫자로, 시가지 인구는 15만~19.2만 명(2008년 통계) 정도로 추정된다. 남한의 구리시와 비슷하다. 과거 개경의 면적은 25~30㎢로 추정되며, 1950년 당시에는 17개 동에 면적은 29.95㎢였다.(구리시(33.3㎢)보다 약간 작다) 1950년 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개성시의 시역은 개성 외성과 거의 일치했다. 거의인 이유는 개성시 동쪽 방면(운학동, 덕암동 일부) 쪽은 개성시 영역이 나성 바깥으로 삐져나온 곳이 있어서다.
2. 지리
개성은 북쪽의 송악산(488m)을 중심으로(서울의 북악산이 342m, 북한산은 836m), 시계방향으로 부흥산, 용수산(용백산), 오공산(蜈蚣山, 지네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이 분지 지형이 다시 한강 하류와 연결되는 예성강과 임진강으로 둘러싸인 형태라서 외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측면에서 거의 섬과 같은 지리적 위상을 지녔다. 때문에 상당히 수비하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전란이 있을 땐 단골로 털리는 장소였는데 이는 하필 고려시대의 수도였던 탓이다. 고려시대 한반도 외침이 잦았던 이유는 중원의 송나라가 유독 북방민족을 통제하지 못한 까닭에 있다. 개성이 자주 털린 이유 역시 중원의 왕조가 하필 중국역사에서 군사적으로 약한 제국이었던 송이 있던 시기에 개성이 한반도 수도였기 때문이다.
분지 지형의 중앙에는 자남산(子男山)이라는 언덕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자리에 김일성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만 박연폭포 등이 있는 북쪽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다. 아호비령 산맥의 남쪽 끝 지역으로 1,000m 이상의 산이 있지는 않으나 월양산(576m), 천마산(757m), 묘지산(765m), 자라봉(622m) 등 400~800m 정도의 산들이 줄줄이 솟아 있다. 개성시내에서 박연폭포로 가려면 험준하고 좁은 산비탈도로를 어렵게 달리거나 정명사고개를 넘어야 한다. 개성의 진산인 송악산보다 더 높은 산들이 북쪽으로 줄줄이 이어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후술되는 개성이 대한민국 영토였을 경우에 대한 떡밥이 나온다.
교통 측면에서는 경의선 철도가 지나며, 분단에 따라 개성역이 사실상 평부선의 종점이 되었다. 남한에 남은 서울역~도라산역 구간을 제외한 경의선의 북한 구간을 평양역을 기점으로 반으로 나누어 북쪽을 평의선, 남쪽을 평부선으로 나눈 것이다. 평양역~부산역이라는 의미로 서울역을 지나가는 흔한 중간역 1로 치는 것이다. 한국에서 서울역을 기점으로 경의선/경부선을 나누는 것과 비슷하다. 개성역 외에 손하역이 있다. 또한 개성은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의 종점이다. 신의주시 및 서울특별시, 목포시로 가는 1번 국도, 개성을 출발하여 옹진군으로 가는 50번 국도가 지난다.
3. 역사
3.1. 대한민국 치하의 교육기관
1950년 당시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개성중학교, 개성여자중학교, 송도중학교, 호수돈여학교, 정화여학교, 개성사범학교, 개성상업학교가 있었다.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송도국민학교, 명덕국민학교, 만월국민학교, 선죽국민학교, 동현국민학교, 중경국민학교, 남산국민학교 등이 있었다. 광복 이후 서울대학교 부설 생약연구소가 목청전 건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 학교들은 전후 북한에서도 이름만 바뀐 채 교육 시설로 잘 쓰이고 있기는 하다.
6.25 전쟁 이후 일부 교육기관들은 남한으로 내려와 다시 문을 열기도 했다. 대전광역시에 있는 호수돈여자중학교·호수돈여자고등학교는 개성시에서 개교했고, 인천광역시의 송도중학교·송도고등학교 역시 한영서원에서 출발했던 유서 깊은 개성 지역의 교육기관이었다. 또 서울특별시의 정화여자중학교와 정화여자상업고등학교 또한 개성 정화여학교가 그 전신이다. 심지어 경인교육대학교 역시 원래 송도사범학교에서 출범했으니, 짧은 시간이나마 대한민국에 소속되어서 그런지 개성의 흔적은 우리 주변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위키백과에 보면 대한민국 시절까지 존재하던 옛 학교들이나 흔적들을 더욱 자세히 찾아볼 수 있다.
4. 인문
4.1. 개성상인(송상)
개성은 고려의 수도로서 500년간 작동하며 원래부터 상업이 융성했고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차별을 받아 상업이 융성했다는 주장은 두문동 72현처럼 17세기 이후 지어낸 야사이다.
개성 송상(松商)은 한강과 한성의 시전을 본거지로 한 경강(京江)상인들과 양대 상인 세력으로 대립했다. 덕분에 개성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대신 상업의 거점으로 남게 되었다. 물산이 모이는 곳치고는 문화가 융성하지 않은 곳은 없었으니 서경덕, 한석봉 등의 문사들과 명신 황희도 개성에서 나왔다.
개성 상인들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개성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알 수 있다. 혹자는 조선의 유태인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풍은 지금도 남아있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개성사람들은 깍쟁이"(말이나 행동이 얄밉도록 약삭빠른 사람)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독한 면모 덕분에, 일제강점기 시절 상계를 잠식해오는 일본 자금에 맞서 거의 유일하게 상권을 지킨 것도 개성의 상인들이었다는 후문.
개성상인들이 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덕목은 신용과 정성이었다. 특히 남에게 돈을 과도하게 꾸어서 사업을 할 경우 차후 신용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해 되도록이면 남에게서 돈을 꾸지 않는 '무차입 경영'으로 유명했다. 이는 개성상인의 후예로 알려진 현대의 기업가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개성상인의 DNA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진 대한민국의 기업으로는 OCI와 아모레퍼시픽 등이 손꼽힌다. OCI와 아모레퍼시픽을 각각 창업한 송암 이회림 OCI 창업주와 장원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모두 개성 출신이다. 이회림 창업주는 실제 고향도 개성이었다. 장학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이회림 창업주는 개성 출신이라는 인연을 앞세워 1975년 당시 시가 1억 원 상당의 주식을 송도중, 송도고에 헌납하며 학교 재단인 학교법인 송도학원의 이사를 맡았고 1982년에는 결국 학교재단을 통째로 인수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현재까지도 송도학원은 OCI가 운영하고 있다. 평안도 출신인 서성환 창업주는 개성에서 내려와 사업을 했던 어머니로부터 사업을 배워 개성에서 사업을 시작해 훗날 남한에서 사업을 번창시킨 이들로 유명하다. 이 덕에 현재도 OCI와 아모레퍼시픽은 국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탄탄한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4.1.1. 관련 문서
사개치부법
4.2. 풍속
분단 이전의 기록을 보면 전통적 식문화가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전통 사회에서 식문화가 발달하기 위해선 산물이 풍부하고 풍류 문화가 잘 발달해야 하는데, 잘 발달한 상업을 바탕으로 개성에 그런 기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데 고려의 궁중 음식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개성 음식 중 유명한 것으로는 보쌈의 원조격인 개성 쌈김치, 조랭이 떡국, 개성만두, 개성주악, 개성편수, 개성약과 등이 있다.
개성은 과거 경기도 소속이었다고는 하지만 지리적으로 예성강과 임진강 사이의 섬과 같은 입지였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도 북부지방과 중남부지방의 점이지대에 위치해 있었다. 개성이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경기도였다고는 하지만 서북부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었고 예성강을 경계로 황해도와 이격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임진강을 경계로 서울 중심의 경기도(현 장단 일부를 제외한 남한 경기도)와도 이격되어 있었기에 이러한 독자적인 문화 형성이 가능했다. 특히 개성의 경우 조선시대에는 임진강 이남의 경기도와 같은 권역으로 묶였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패강진, 패서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황해도와 묶이기도 했기에 두 지역이 혼재된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북부지방(북한 대부분)에만 해당하는 풍습과 중남부지방(남한 대부분)에만 해당하는 풍습이 적절히 섞여있는 곳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남한에서 설날에 떡국을 먹는 것과 달리 개성을 포함한 북부지방에선 설날엔 만두국을 먹었다. 본래 이남지역에서는 만두를 먹지 않다가 개성 요리가 남하하면서 만두가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러나 남한이든 북한이든 자신의 지역이 그 지역의 위쪽의 풍습과 남쪽의 풍습의 경계가 되는 일은 많다.
만약 휴전선이 평양과 원산을 잇는 선을 기준으로 이어졌다면 그 남쪽은 쌀농사를 하고 본관이 되는 지역이 있고, 통일신라가 '남한'을 점유하고 발해는 '북한'이 점유한다는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 북쪽에는 본관이 되는 지역이 거의 없다고 했을 것이다. 반면에 중공군이 최대 남하한 경기도와 강원도 남쪽을 기준으로 휴전선이 그어졌다면 설날에 만두도 들어간 국을 먹는가 먹지 않는가, 임꺽정은 '북한'에서만 활동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돌았을 것이다. 충청도도 빼앗겼다면 순대에 장을 찍어먹는 지역이 '남한'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분단 때문에 개성의 풍습이 특이해보이는 것이지 분단 전의 기준으로 보면 폐쇄성을 빼면 평범한 풍습도 많다. 개성까지만 남한 땅이 되었다면 황해도와 경기도를 기준으로 문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아예 분단이 되지 않았다면 중국과의 차이가 부각됐을지도 모른다.
이런식으로 북부지방 대부분은 원래 추어탕을 즐겨먹지 않았는데 개성에서는 옛날부터 먹었기 때문에 현대 북한에서는 추어탕을 개성의 지역음식으로 알고 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함경도에서도 이름은 '추어탕'이 아니지만 추어탕과 거의 유사한 것을 먹으며, 그곳 사투리로 '세치네탕'이라고 부른다. 미꾸라지를 주재료로 하면 거의 추어탕과 비슷한데 남부 지방처럼 배초향을 넣는다고 한다.
개성 사람들에게는 특이한 풍속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우선 개성 사람들은 매우 폐쇄적으로 다른 지역에 나가 사는 것을 꺼리고, 다른 지역에서 개성에 와서 사는 사람도 꺼렸다. 심지어 바깥으로 시집장가를 가도 언젠가는 반드시 개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개성 사람들을 불렀던 별명으로는 개성 깍쟁이가 있다. 서울 사람도 개성 사람과 마찬가지로 깍쟁이라고 불렀다.
5. 정치
크게 보면 개성의 행정구역, 관할 행정기관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56년 이전에도 중앙의 관리를 받은 흔적이 있으나 일치되는 언급을 찾기 어렵다. 자세한 사항은 개성시/역사 문서 참조.
1951년 봄: 북한의 개성 점령.
1951년: 개풍군의 일부지역을 '개성지구'로 편입
1952년 12월: 군면리 대폐합에 따른 '황해도(황해북도는 1954년 10월에 설치) 판문군'의 신설.
1955년 1월: 황해북도의 개풍군과 판문군의 '개성시(개성지구)'로의 편입
1957년 6월: '개성지구'의 도급의 '직할시'로의 승격 (도급 행정구역, 1시 2군)
1960년 3월: 황해북도 장풍군의 개성'직할시'로의 편입 (도급 행정구역, 1시 3군)
2002년 11월: 판문군의 폐지. 관할하던 구역은 인근의 개성시, 장풍군, 개풍군에 편입 (도급 행정구역, 1시 2군)
2003년 6월: 개성'직할시'의 장풍군과 개풍군을 황해북도로 편입 (도급 행정구역, 1시)
2003년 9월: 직할시에서 해제되고 황해북도 관할의 특급시로 격하 (황해북도 산하 행정구역, 1시)
2005년 9월: 개풍군을 완전히 폐지하여 이 지역을 개성시에 편입. (황해북도 산하 행정구역, 1시)
2019년 상반기: 도급의 '특별시'급 지위로의 승격 (도급 행정구역, 1시)
2020년 4월: 개풍구역, 판문구역의 신설 (도급 행정구역, 1시 2구역)
2023년 2월: 황해북도 장풍군의 개성시 편입 (도급 행정구역, 1시 2구역 1군)
분단 이후 본래 남한 지역에 속해 있었다는 문제, 사실상 현대의 수도권이라고 봐도 될 법한 서울과의 거리, 북한의 입장에서도 최전방인 도시라는 이유 등으로 썩 좋은 지방은 아니다. 경기도와 바로 접하고 있다보니 이산가족도 많은 편. 그래서 주민들이 북한에서의 출신성분이 나쁜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 때문에 조선로동당 입당이나 군인의 승진 등에도 영향을 끼쳐 군인들로서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최전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것만 보면 마냥 푸대접 받았을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비록 지형의 한계로 도시 개발에 한계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고려의 수도인데다가 판문점이 위치한 만큼 명분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한강만 타고 넘어가면 바로 남한이라서 특별히 지원해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북한에서도 중시는 받아 상위급 행정구역으로 꾸준히 지정되었고, 평양에서 직통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뚫렸으며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 찾아왔을 때도 배급이 중단되지 않고 이루어진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다. 즉,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는 해도 마구 푸대접할 수 없는 특수한 사정상 당국에게 배려를 받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또한 휴전선과 가깝지만 탈북자들이 굉장히 적은 지역인데, 당연하지만 휴전선 근처는 전부 지뢰밭에 경비가 삼엄해서 탈출하기가 너무 어렵고, 한강과 임진강을 건너야 하는 문제도 있고 그렇다고 중국 쪽 국경까지 가자니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니 출신성분이 나쁜 지역으로 낙인 찍혀 외부로 여행허가를 받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3년 9월에 직할시에서 해제되고 황해북도 관할의 특급시로 격하된 시점에는 법적 지위가 많이 애매해졌었다. 하지만 북한 내부에서도 개성 차량 번호판을 유지하는 등 그 특수한 지위를 알음알음 용인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기사 남포시 역시 평남에 흡수된 이후에도 꽤 특수한 지위를 누리긴 했다. 특히 특급시 격하 즈음에 개풍군을 완전히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조선중앙년감을 참고하여 연합뉴스가 매년 만드는 북한연감에 따르면 개풍군은 2016년판부터 사라졌다. 하지만 연합뉴스 북한연감은 업데이트가 다소 늦는 경우도 있고, 오류도 간간이 보인다. 특히 2008년 유엔이 시행한 인구 센서스에서도 개풍군은 찾아볼 수 없다. 한편 북한 언론에서는 이미 2003년을 기점으로 개풍군이 거의 자취를 감췄으며, 개풍군 산하였던 리들도 모두 개성시 소속으로 적었다. (3일째 되는 날인 21일 개성시 신흥, 령정, 해평, 풍덕, 룡산리를 비롯한 분계연선 리들의 주민들은 놀라운 자연현상을 목격하였다. - 2011년 12월 22일자 조선중앙통신)
2019년에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드디어 남포시, 라선시와 동급의 대우를 회복하게 되었다. 통일부가 2020년 2월에 공식 확인하기는 했으나, 2019년 10월 28일자(아래 사진)부터 조선중앙텔레비죤 오후 8시 '보도' 중 날씨 예보에 표출되는 지도에서 개성시가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볼 때 2019년에 승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보다 앞선 2019년 5월 25일자 로동신문 기사에서도 개성시를 황해북도와 따로 적은 것을 볼 때 실제로는 2019년 상반기에 승격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3월초, 황해남도와 황해북도, 개성시의 100여개 리에 붉은기를 펄펄 휘날리며 전진하는 대오가 나타났다." - "협동전야를 사회주의땅답게 변모시켜가는 미더운 전초병들", (로동신문, 2019년 5월 25일). 구 개풍군 지역 역시 포함되어 승격되었다. 다만 예전 직할시 당시에는 포함됐던 장풍군은 제외되었다.
2020년 4월 경에는 북한 매체의 간접적 언급에 따르면 구 개풍군 지역을 개풍구역, 구 판문군 지역을 판문구역으로 부활시킨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구 개풍군 지역의 개성시내와 가까운 일부는 개풍구역에 속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결과적으로 이런 인문적 풍토와 지리적 배경(삼면이 물), 역사적 배경(접경지역)이 도시를 확고한 "섬"으로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전후 북한 치하의 도시가 되어 결국 도시의 위상 역시 대폭 떨어진 꼴이 되었다.
2023년 2월에는 장풍군이 다시 개성시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개성시는 2003년 이전 영역으로 돌아가면서 위상과 규모를 모두 되찾게 되었다.
5.1. 역대 책임비서
리기혁
리상조
유철목
허학송
오제룡
윤형식
정규회(1969)
리봉운(1972)
장인석(?)(~1980)
김기선(1982~1991)
림수만(1991~1997): 임기 중 사망.
김시학(1998~2005) → 김일성고급당학교장으로 이동.
장창봉(2005~2007)
리상원(2007~2010년 이전) → 량강도 책임비서로 이동.
김영일(2012 이전~2016)
허성호(2016~2019)
리태일(2019~2020)
장영록(2020~현임)
6. 경제
개성은 고려시대부터 6.25전쟁 직전까지 상업이 융성한 도시였다. 그러나 개성이 북한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모든 산업은 국유화되고 90년대 말 경제 위기인 고난의 행군까지 그 영향이 이어졌다. 특산품으로 인삼이 있었는데 남한에서는 파주나 포천에서, 북한에서는 모든 경제권을 장악하려는 노동당이 개성인삼의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경우 인삼을 잘 모르는 당간부들이 6년은 키워야 하는 인삼을 제대로 키우지도 않고 팔아넘기고, 인삼 농장의 인부들에게 제대로 대가를 주지 않아 인삼 재배가 제대로 되지 못한다고 한다. 개성인삼은 현재 오히려 남한이 잘 써먹고 있는 셈이다.
개성공단에 큰 경제적 영향을 받은 도시로, 공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식량만 주는 넉넉하지 않은 도시였다. 공단이 멎은 후에도 가난한 도시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개성공단이 가동되었을 때는 부유층의 도시였다. 우선 개성공단이 존속했을 당시에는 급여 수준이 북한 기준으로 매우 높은 좋은 직장이었다. 물론 이때에도 북한에서 잘나가는 기업에 취직하면 개성공단과 동급이나 높은 대우와 급여를 받을 수 있지만 이런 직장은 소수라 입사자체가 힘들고(...), 해외파견을 나가서 벌목공이나 건설직, 옷 공장 취직하면 개성공단에 나가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북한과 상시왕래가 어려운데다가 3D업종인지라 노동강도가 세고 노동시간마저 길어 몸이 고달프다. 또한 대북재제로 인해 이런 기회를 얻기힘들다. 당시 개성은 물건 공급권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평균적인 경제 사정에 비해서 훨씬 좋은 소비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남한산 과자와 커피믹스, 소시지같은 기호식품이나 재고물량을 가져다가 장마당에 팔아 짭짤하게 부수입을 낼 수 있는 이점 또한 있었으며, 개성 평양간 고속도로를 통해 이들 남한산 물품들이 사리원, 평양으로까지 팔려나가다 보니 자연스레 개성공단 직원들은 북한 기준으로 잘사는 부유층이 되었다. 또한 기준에 주거하던 개성 주민들도 개성공단 직원의 높은 구매력과 남한산 물품 유통으로 번창하는 개성 장마당을 통해 많은 이득을 보았으며, 그 덕택에 북한 기준으로 평양, 라선, 남포에 뒤이은 상류층의 도시가 되었다. 게다가 개성공단으로 인해 개성으로 드나드는 사람들에 대해 관리를 엄격해서 타 지역 북한 인민이 개성에 들어가려면 서류 5장을 기본으로 낸다고 한다. 당연히 치안도 좋아지게 되었다.
또한, 개성공단이 들어오면서 개성 시내 지역에 상수도 시설이 깔리면서 인기도가 급상승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제대로 된 상수도망을 갖춘 도시라고 해봐야 평양이나 남포, 청진 등과 같은 극히 일부의 대도시에 불과하고, 이런 곳도 1990년대 이후로 개보수가 부실하게 이루어진 관계로 수도 시설이 노후화되어 제대로 된 급수가 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개성은 개성공단이 설치되면서 상수도 시설을 새로 설치했고, 용수가 풍부하여 급수 제한 없이 마음껏 물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북한이 잘 나가던 시절의 흔적으로, 상수도 요금이나 상수도 이용상에 제한이 없다.
물론 개성공단 폐쇄 이후 2년간 사정이 달라졌을 게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2018년부터 다시 정수장이 정상 가동되기 시작했다. 개성공단 정수장, 개성연락사무소 개소 맞춰 2년8개월 만에 재가동남한 인력 철수해도 홀로 도는 개성 정배수장 그러나 개성공단이 폐쇄된 이후로 어려웠다는 주장이 많은데, 오청성 같은 개성 출신 탈북자는 생계가 막막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훨씬 잘사는 남한의 지방도 군산 GM 공장이 폐쇄되어 아우성이었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2년 8개월이 지나야 정배수장을 가동한다는 것도 북한의 대처가 늦다고도 할 수 있다. 자유아시아방송 같은 언론에서도 공단이 가동되지 않아 북한 정부 등을 욕한다는 주장이 있다. 주민 스스로 자체적으로 수출할 물건도 약초나 멀리 나가 캐는 금 정도밖에 없어 상당히 쪼들렸다고 한다.
여하튼 개성공단 재가동은 2020년까지는 꿈같은 일이라서 개성은 이전의 부유함은 온데간데 없었지만 코로나 19 봉쇄로 인해 북한의 무역사정이 악화되자, 다급해진 북한 당국에서는 개성공단 일부를 '무단으로' 재가동하였고, 전기밥솥을 비롯한 상당수의 경공업 제품이 생산되고 있는 중이다. 즉, 개성 주민들 입장에서는 먹고 살 길이 다시 열리기는 열렸다는 얘기이다. 재가동 이후로 북한에서 개성산 제품은 인기가 높은 편이라 하는데 남한산 기계로 생산하다보니 북한 일반제품보다는 품질이 높기 때문에 그렇다. 문제는 압력솥의 핵심 안전기술인 폭발방지에 대한 설계 및 관련 부품이 부실한 제품인지라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7. 남북통일 이후
7.1. 통일 이후 행정
개성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있어서 통일 이후에 행정구역 측면에서의 논란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황해북도 소속이었던 건 2003~2019년 단 16년에 불과했기 때문에 황해(북)도로 편입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개풍군과는 통합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거나 명목상의 통합 절차를 거쳐 도농복합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치하에서는 이미 개풍군이 통합되었으므로, 통일 이후에도 기존 개풍군이 통합된 도농복합시로 편성하는 방안이 큰 반발 없이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개성시를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통일 한국의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추진했던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 이 점에서 통일 한국의 수도가 서울에서 새롭게 천도된다면 파주시나 철원군, 고양시보다도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서울특별시에 버금가는 고려 왕조 500년 수도의 역사성, 인지도, 개성공단이나 개성 관광 같은 남북협력 사업을 시도한 역사의 현장도 있는데다, 한때는 대한민국의 관할이었던 점도 있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는 세종특별자치시로의 행정조직 이전을 반대하는 이유로, 서울시장 시절부터 퇴임 전까지 개성시가 남북통일 이후 수도가 되어야한다는 의견을 여러차례 피력하였다. 그러나 유적지 및 문화재의 존재와 부족한 평지로 인해 개발의 어려움이 있으며, 수도권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에 종속될 우려가 크다는 단점이 지목되고 있다.
7.2. 통일 이후 교통
교통적인 차원에서 서울특별시와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문산에서 약 6정거장만 더 가면 개성역이 나오고, 대한민국 최북단 마을인 대성동 마을에서 개성 시가지까지의 거리도 9km이고 서울에서의 거리도 수원보다는 멀지만 평택보다 가깝다. 정확히는 개성공단은 동탄신도시 정도 위치이고, 개성 시가지는 수원역 정도 위치이다. 개풍군은 대충 오산시와 같은 입지. 고속버스도 아니고 지하철로 70분 거리이다. 서울로 치면 홍대입구<->문산 완행전철 55분, 역간거리 수준이 금촌~문산 수준인 점을 감안, 해당구간 수준으로 복선전철화를 완비할 경우 대략 1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와 역 갯수이다. 급행전철로는 50분대 초반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편도 한시간 반 정도면 서울도심 출퇴근은 가능하다. 다만 일부 전문직, 고위급 일자리들을 제외한 대다수가 희망하는 일반사무직은 워낙 강남으로 쏠려있어서 서울도심 접근이 의미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만.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을 기존 경의선을 활용하여 임진강역에서부터 연장하면 된다.
도라산 기점으로 18km 정도 남은 구간을 마저 단선전철화 하면 당장 문산~임진강 셔틀 전철을 연장하여 운행은 할 수 있고, 제대로 하려면 문산 기점으로 27km 정도를 복선화/현대화 개량을 하면 되는데 복선화 부지가 100% 완비되어 있어서 전차선 깔고 시운전만 하면 된다. 실제로는 현대화 과정에서 선형 개량, 직선화 등이 필연적이므로 연장은 문산 기준 20km대 초반 정도로 다소 짧아질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가장 큰 난관이 임진강역 북단의 철교 정도.
게다가 수많은 계획이 이미 대기되어 있다. 이미 남한에서 장기간 개성 지역에 투자를 많이 했으므로, 인프라도 평양이나 라선을 제외한 북한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잘 갖추어진 편이다. 사실 2018년 남북 도로철도 착공식으로 상징적이나마 착공식은 이미 한 상태이다(...) 김대중 대통령 때 계획한 문산개성고속도로도 있고, 인천국제공항과 해상교량을 통해 바로 이어지는 서해남북평화도로 사업 역시 계획되어 있다. 사업 계획이 진행만 된다면 구 북한 지역과 구 남한 지역을 바로 잇는 교통의 요지로 거듭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도로만 준비된다면 광역급행버스나 직행좌석버스 또한 서울과 개성 사이를 잇는 노선이 많을 것으로 전망된다.
개성시에는 공항이 없으므로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을 이용할 가능성이 큰 편이다. 그중 김포국제공항은 국제선 노선 취항에 제약이 걸려 있으므로 인천국제공항이 실질적인 관문의 역할을 할 듯 하다 영종도에서 강화도를 지나 개성까지 서해남북평화도로가 지어질 예정이며, 같은 경로로 제2공항철도가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공항은 활주로 용량이 허용하는 한 한 곳에 뭉쳐 허브가 될수록 좋기도 하고. 또한 철도도 GTX A선[24],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을 개성까지 연장할 수 있고, 경의고속선, 경의고속도로 등의 기점이 될 수도 있다.다만 현재 경의고속선의 기점은 서울의 수색역(혹은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거론되고 있단 점은 감안해야 한다. 개성에서 시작하면 서울역/수색역부터 개성역까진 경의본선을 이용해야 하는데 이는 서울, 고양, 파주시내의 경의선 포화라는 병크를 또 일으키는 셈이 된다. KTX, 일반열차, 화물열차, 수도권 전철 1호선 등을 모두 받아내느라 복복복선인데도 포화 상태인 경부선 서울역~금천구청 구간의 문제가 재현될지도 모른다.
7.3. 통일 후 문화적 가치
개성 특유의 역사 관광 콘텐츠도 빛을 발할 가능성이 높다. 한옥 보존 지구를 비롯한 선죽교, 만월대 등 고려 왕궁 유적 등의 사적들이 나타내듯이 500년 고려 왕조의 수도란 역사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남한에서 이 개성과 맞먹는 역사성을 가진 곳은 고대 백제와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과 신라의 수도 경주시 정도뿐이며 북한에서도 고조선과 고구려의 후기 수도 평양밖에 없다. 공주시와 부여군 등도 있지만 수도였던 기간이 합쳐봐야 185년밖에 안되기도 하고 통일왕조의 수도는 아니었다는 점 때문에 조금 밀린다.
특히나 남한에서는 과반수의 인구가 서울에 집중되어있는데, 문화역사로 유명한 경주는 개성과 비교했을때 서울로부터 비교적 거리가 더 멀기 때문에 경주에 뒤지지 않는 역사성을 자랑하면서도 보다 서울에 더 가까운 개성은 경주와는 다른 장점들로 내세울 메리트가 많은 만큼 보게 될 이득이 상당할 것이다.
개성을 경주처럼 '고려 문화 지구' 같은 것을 만들어 역사 문화/관광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시키거나, 만월대나 보제사 흥왕사등 고려의 건축물 등을 복원할 가능성도 있다. 물론 멀쩡히 남한 땅에 있는 황룡사와 미륵사도 가만히 냅두는거 보면 복원을 미룰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미 개성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어서 발전에 쉬울 것으로 보인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도 이미 개성 관광을 시행했던 선례가 있는데, 아예 통일이 되어서 이 역사 분야를 개발한다면 그 잠재성은 대단할 것이다. 통일이 되면 대성리 대신 개성 (+ 그 주변의 황해도 지역)으로 MT를 가는 대학이 늘어날 듯하다. 옛 고려 개경의 영화를 재현하는 것.
7.4. 통일 이후 발전성
결론적으로 통일 이후에는 북한 지역에서 타지역군보다 빨리 성장할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인구 면에서도 다음과 같은 수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살고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이 이북에 살고 있는 가족들을 지척에 두고 싶어해서 살게 할 가능성이 무척이나 크다.
북한이탈주민들의 직계 가족들 뿐 아니라 북한 주민들 중 남한 지역을 내심 동경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접근성이 좋은 개성에서 살기를 희망하는 경우가 꽤 될 지도 모른다.
게다가 개성공단이 재건되면서 취업 희망자들이 북한 전역에서 모여들어 이들이 이주하게 될 것이다.
덤으로 남한 대기업 파견 직원들을 위한 숙소와 사무실, 여기에 부설될 주거, 교통 및 편의시설까지...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가능성이 높은데, 당장 통일이 이뤄지는 것과 동시에 남한의 자본과 개발이 먼저 투입될 지역이기 때문에 주거용, 상업용 부지로 사용될 토지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 명약관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평양 역시 통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개발 1순위가 될테지만, 남한 자본의 투자 측면에서 평양은 개성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서울과 평양 간의 도로 실태 조사 및 확충내지는 재공사 등의 여부를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난개발과 교통문제가 겹치면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다만 개성시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여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 개성시는 평지 가용면적이 좁은 편이다. 개성뿐만이 아니라 개풍 전체가 산지가 많고 시가지 주변 평지가 넓지 않아서 현대적인 큰 도시를 만들기가 쉽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개성 이전에 수도였던 부여군, 경주시나 남한 도시 중에서 개발 가능한 평지가 좁기로 손꼽히는 부산광역시도 개성과 비교한다면 평지가 넓다. 그나마 동남쪽에 현 시가지보다도 좁은 수준의 평지(구 봉동면 일원)가 있었는데 여기에 들어선 게 바로 개성공업지구이다. 평양개성고속도로 북쪽에 계획된 약 1천만 평 규모의 3단계 확장부지도 평지는 절반도 안 되고 언덕을 타고 올라가는 형태다.
또한 개성시는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려 왕조의 심장부였던 곳이라 경주시처럼 땅 파면 유적이 나올 곳이 아주 많다. 건물 건설이 추진되다가 유물이 쏟아져나와 중단되는 경우가 많을 수 있다. 이미 강화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또한 북안동·자남동·고려동을 중심으로 분포된 수천 채에 달하는 옛 한옥들도 한몫 한다. 개성 남대문 이남 지역은 의외로 한옥이 적은 편이긴 하지만 없진 않고, 그리고 또 어디서 유물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따라서 개성 시가지 북부 지역은 경주시나 부여군처럼 개발제한이 생길 가능성이 높다.
통일 후 개성을 개발한다면 성남시의 구시가지처럼 산을 깎아서 도시를 확장하거나[27], 한옥이 적은 개성 시가지 남부를 중심으로 뉴타운 사업을 시행하거나, 유적지가 몰려 있는 개성의 시가지를 놔두고 산들을 지나 그 옆 개풍군, 장단군 지역을 편입, 개발하는 방안도 있다. 장단군은 역사적으로는 다른 동네지만 서울특별시도 다른 동네였던 곳들(성저십리, 강남, 영등포)을 합쳐서 만든 것이니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8. 만약 개성시가 남한령이었다면?
일단 개성시 주변과 38선 부근에서만 휴전이 이루어졌을 경우와, 예성강이나 멸악산맥 이북에 휴전선이 그어진 경우가 명백하게 나누어 질 것이다.
개성은 38선 이남의 도시로서 6.25전쟁 이전에는 남한 소속이었으며 거리상으로도 서울에서 철도로 78km로 평택역(서울역 기준 75km), 여주역(강남역 기준 71km)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 직선거리로는 58km로서 평택시 송탄, 이천시 부발읍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 또 개성과 휴전선간의 거리는 판문점에서 겨우 12km밖에 안 된다. 그래서 1951년 이후 조금만 더 북진을 했으면 개성을 탈환할 수도 있었다는 전망도 있다.
개성 지역은 모두 미수복 경기도 권역이라 할 수 있는데, 전 경기도 지역을 다 수복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므로 안타까운 이야기일 수 있다. 다만 개성의 서부전선 방면 휴전선이 제대로 유지되려면 개성의 감제고지인 송악산과 예성강까지 획득하여야 할 것이었으므로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송악산 일대까지 해서 개성시 전역을 완전히 회복하였다면 군사적으로 해주시와 황해도까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란 견해도 있다.
실제로 1.4 후퇴 이후에도 국군 대대가 다시 개성까지 진출은 했다. 그러나 북측의 고지대에 위치하는 송악산을 장악하지 못했고, 관측과 방어에 불리한 분지 지형에서 아슬아슬하게 시내에 진입한 상태에서 곧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닥치자 국군은 개성 시가지에서 철수하게 되었고 이후 이 일대가 휴전회담장이 되면서 다시는 수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송악산 봉우리까지는 어떻게 해본다 쳐도, 문제는 그 바로 북쪽에 버티고 서있는 천마산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다시 송악산을 감제하기때문에 현 휴전선을 기준으로 30km 이상을 전진해야 간신히 개성시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지라 여러모로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즉, 개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면 적어도 경기도/황해도의 도계선까지 진출하였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개성을 뺏기면 한미연합군은 서부전선에 예성강 너머 탁트인 연백평야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돌출부가 생기는데다 고도가 평양 하나만 딸랑 남게 되는지라 북한으로서도 개성은 사수해야 하는 도시였다. 또한 빠른 휴전을 원했던 미국을 비롯한 UN 참전국들로서는 개성 수복을 위해 회담을 파토하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였다. 특히 연백평야는 재령평야, 평양평야와 더불어 북한의 농경을 지탱하는 3대 평야이기에 식량 안보 차원에서도 연백의 안정적 영유는 필수적이였다. 참고로 예성강을 기준으로 동서 지형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 예성강 이서의 연백군 일대는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넓은 평야인 반면 이동의 개풍, 개성 일대는 산악 분지 지형이다. 만약 개성 수복이 서울 방위에 필수적인 요소였다면 미국 입장에서도 백안시할 수는 없었겠지만, 일단 서부전선에는 임진강 방어선이 있었고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주공로였던 중부전선은 철원평야까지 확보하면서 서울에 대한 압력이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줄어든 상황이었다.
만약 대한민국령으로 남았다면 개성은 대한민국에서 역사적으로 이름난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역사적인 기념물이 많기 때문에 관광지가 될 수 있는데다가, 딱 개성까지만 확보했을 경우 북한과 가까운 장소다보니 북한 관련 관광도 가능할 것이며, 군사적으로도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도시라는 점에서 주요 군사 요충지로도 가능하기 때문. 따라서 일본의 교토시, 나라시처럼 한국에서는 서울, 경주, 전주, 공주, 부여와 더불어 대표적인 관광도시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개성은 전방과 가까운데다 이미 조선 후기부터 인구가 20위권으로 밀려난 상태였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신의주, 청진, 흥남, 원산, 광주, 대전, 부산 등 신흥 대도시들이 급부상하면서 대도시로서의 입지를 많이 잃은 상태였다. 따라서 휴전선이 예성강이라던가 개성까지만 수복한 상태로 그였다는 가정에서는 개성이 규모나 경제 면에서 남한의 주요 대도시로 발전하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강 하구 연안의 개풍군(구 풍덕군) 정도면 몰라도 개성은 서울에서 60km 가까이 떨어져 있기에 간접 영향권이면 몰라도 베드타운과 같은 위성도시로 발전하기에도 어려웠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딱 경기도의 경주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상징성과 역사성이 강하다 하여도 현재 전방도시인 철원과 십수년전 파주의 이미지를 상상해보면 그렇게 광역시급으로 크게 성장하기는 힘들고 의정부와 비슷한 중소+군사도시와 같은 포지션이었을 것이다. 다만 대동강이나 청천강 또는 멸악산맥 이북에 휴전선이 그어져서 개성 또한 전방에서 벗어났다는 가정에서는 충분히 남한의 대도시로 발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개성 자체가 구릉지대이니 만큼 대규모의 개발을 하기엔 부적절한 면도 있다.
그 외에 대한민국 전체의 관점에서 본다면 개성이 만약 남한땅이었다면 서울이 여전히 군사적 전방이긴 해도 지금보다 휴전선에서 한발 더 멀어졌을 것이다. 딱 개성과 개풍 등 미수복 경기도까지만 수복하고 예성강을 경계로 휴전선이 그어졌다는 가정 하에 군사분계선에서 서울 시내까지는 62km, 서울 시계까지는 48km 정도 떨어지게 되어 현재(서울 시내 기준 38km, 서울 시계 기준 24km)보다는 종심을 많이 확보하게 된다. 다만 여전히 전방이라는 인식을 떼기에는 부족하다. 서울이 전방이라는 딱지를 떼기 위해서는 개성 정도가 아니라 서쪽으로는 최소 황해도 해주 근방, 북쪽으로는 황해도 평산 근처까지는 올라갔어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부전선의 경우 멸악산맥 넘어서 휴전선이 형성되어야 서울이 전방의 지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동부전선도 지금보다 북상하게 되어 강원도의 경우 이천군-평강군-안변군 혹은 통천군이 휴전선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수도 방어의 중요 거점이 되어 개성에도 수방사가 위치했을지도 모른다. 김경진의 전쟁소설 데프콘에서는 통일한국이 수원과 개성에 수방사를 놓고 각각 경기 남북의 중심으로 삼았다는 언급이 있긴 하다. 이 경우 송악산 일대를 1차 저지선으로 삼아 북한의 공격을 훨씬 더 수월하게 막아낼 수 있어서 서울에 대한 보위력이 배로 증가한다. 서울-고양-파주-개성 방향의 경의선 축선 및 서울-김포-개풍-개성 방향으로의 수도권 개발 또한 보다 활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시나리오대로라면 파주는 80~90년대부터 무섭게 성장해서 지금의 고양시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고양시나 서울 서북권은 말 할 것도 없다. 한편 지금의 고양시, 파주시의 군사적 전방으로서의 포지션을 개성이 차지하여 군생활을 하러 개성까지 가야 됐을 것이다. 또한 개성의 한국 영유로 인하여 수도권 집중화가 더욱 심화되어 경기북도가 설치됐을 가능성도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북한 치하에서 직할시나 특급시, 개성시라는 이름으로 분리되어 있던 것과는 달리 한국 영토로 남았다면 경기도 개성시 행정구역으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한 치하이든 남한 치하이든 최전방인 건 마찬가지이지만 남한 영토라면 수도 서울이 더 가깝기 때문에 군사적 리스크가 커 직할시 같은 특별 행정구역으로 성장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남한에서는 1991년부터 지방자치가 시작됨에 따라 도의 인구 축소 문제로 직할시 승격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일례로 경기도 수원시 같은 경우는 울산보다 인구가 많은데도 수도권이라서 광역시 승격을 못 하고 있다.
인천 상륙작전 수복 → 1.4 후퇴로 북한이 점령 → UN군 수복 → 중공군이 점령할 정도로 북한이 개성을 점령하기 위해 목숨건 전투로 매우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던 만큼 관광이나 경제적 가치가 큰 도시이기에 휴전선보다 38선이 경제적으로는 낫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휴전선은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강원도 산악지대를 점령했기에 공산군이 수도로 몰리는 것을 방지하기에 휴전선이 수도 방위에 매우 유리하다. 전쟁 이전 한국군은 지형지물과 상관없이 그어진 38선 방위에 엄청 애를 먹었고, 실제로 북한군의 주공로도 별 다른 장애물 없이 연천부터 서울까지 회랑이 뻥 뚫린 중부전선 3번국도 축선이었지 임진강 방어선이 버티고 있는 서부전선 1번국도 축선이 아니었다.
미군이 있는 한 개성 북방을 북한군이 점유하고 있어도 개성 방위에는 문제가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송악산 5.4 전투가 미군 철수 이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이 꼴을 보고도 미군이 한가하게 철수라는 결정까지 내린 것을 보면 그렇게 안심할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1960년대 말~70년대 초 베트남 전쟁 시기 이어진 북한의 무력도발이 판문점 따위가 아니라 개성이라는 한 도시를 무대로 벌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교통 인프라 측면에서는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개성역 연장 등이 오래 전부터 시행되었을 것이다.
교육 인프라 측면에서는 현재 서울 동대문구의 정화여중·정화여상과 인천의 송도중학교(인천)·송도고등학교, 그리고 대전의 호수돈여자중학교·호수돈여자고등학교가 개성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인구가 특례시 급 이상으로 많아지면 천주교 개성교구가 세워져 교구 내 가톨릭계열의 중고등학교가 개교할 것이다.
이 중 대학 측면으로는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를 통합해 성균관대학교 개성캠퍼스가 국자감-성균관을 정식으로 계승했다고 인정받아 설립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개성사범학교가 개성에 존속해서 개성교육대학교로 이름을 바꿔서 존재했을 것이다. 또한 송도학원에서 1949년에 송도약학대학을 세우고 당시의 개성시 송도중학교 건물 일부를 빌려 1950년 6월 26일 개학 예정이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개성을 수복하면 송도약학대학이 송도대학교로 바뀌어서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택대학교, 수원대학교, 용인대학교처럼 이 지역 이름을 딴 사립대학교도 설립되었을 것이다.
9. 관광
북한내에서도 개성이 수학여행지나 관광지로 이름이 높기도 했고, 햇볕정책의 일환으로 금강산 관광 이후 2007~2008년 잠깐 시행됐으나, 얼마 못 가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을 계기로 중단되어 한국인이 공식적으로 관광할 방법은 없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개성 관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9.1. 명승지
옛 고려 왕조의 오랜 수도였던 만큼 신라의 수도 경주시나 백제, 조선의 수도 서울특별시 못지않게 명승고적이 많다.
2013년에 개성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첨성대,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왕릉, 7왕릉, 명릉, 공민왕릉의 12개 유적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평양 지역의 고구려 고분군에 이어 북한의 2번째 세계유산이다. 자세한 내용은 개성역사유적지구 참조. 교외에는 왕건릉, 흥왕사지, 대흥산성과 박연폭포 등의 명승고적들이 많다.
특히 옛 고려왕궁인 만월대는 남북 공동발굴 종종 진행되었는데, 2018년 10월부터 12월까지 8차 공동발굴이 진행되었고 9차 공동발굴은 2019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남북관계 경색으로 중단되었다.
만월대 - 옛 고려 왕궁.
개성 남대문 - 시가지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내성(內城)의 남대문이기 때문이다. 개성 나성의 남쪽 문은 고남문(古南門).
관덕정 - 자남산에 있는 정자로, 서울의 황학정과 비슷하게 활쏘기에 이용되었다.
개성 성균관 - 조선시대 이후로는 향교이고, 간판만 성균관일 뿐이었다.
개성유수영 문루 - 고려 성균관 부지 내로 건물 이전.
숭양서원 - 정몽주의 제사를 지내는 서원.
선죽교 -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곳으로 유명한 곳.
표충사 - 선죽교 옆에 있으며 정몽주의 충절을 기념하는 비각.
목청전 - 태조 이성계의 옛 집.
경덕궁 터 - 태조 이성계의 옛집으로, 개경으로 잠시 환도했을 당시 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고 터만 남았다.
안화사 - 송악산 기슭의 절.
보제사지
고려왕릉
개성 해선리 고려왕릉
내봉장(來鳳莊) - 구 고려동 396번지에 있던 고급 요정이었는데, 1951년 이 곳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9.2. 근대 건축물
남성병원(南星病院)
개성구남성병원
1901년 선교사 레이드(Reid)가 설립하여 6.25 전쟁 발발 전까지 운영되었던 병원. 특히 아편 환자를 잘 고쳤다. 북한 치하에서는 소아병원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용도는 알 수 없다.
6.25 전쟁 발발 이틀 전에는 이 병원 앞 노상에서 총탄 수십 개와 수류탄이 든 수상한 봉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10. 이북 5도 기준 행정구역
하위 행정구역: 17동
면적: 29.95㎢
인구: 89,000명(1949년)
인구밀도: 2,971.61명/㎢
1950년 당시 기준 17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일본식 동명 개정은 1948년 2월 1일부로 적용되었다. 이북 5도 체계하의 다른 도시들이 일본식 지명이 개정되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과 달리, 개성시는 광복 후 짧은 시간이나마 미군정과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었기에 현재 이북 5도 체계하에서도 일본식 동명이 없다.
수창동(壽昌洞): 이름은 고려의 별궁이자 조선 초기에는 조선의 궁궐로도 쓰였던 수창궁에서 유래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야마토마치(大和町, 대화정)라 불렸다. 개성시청을 비롯해 관공서가 밀집해 있었으며, 개성 제일의 번화가였다. 지금은 개성학생소년궁전이 들어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흥동(東興洞)
서흥동(西興洞)
남안동(南安洞)
북안동(北安洞)
선죽동(善竹洞): 정몽주가 피살된 선죽교, 그리고 숭양서원이 있는 곳. 동네 이름도 선죽교에서 따왔다. 그런데 선죽동이 남북으로 긴 행정구역이라 선죽교는 선죽동 남쪽에 치우쳐 있고, 시가지 북쪽에 있는 개성 성균관과 송악산 기슭까지 선죽동 관할이다.
자남동(子男洞): 이름 그대로 개성의 산인 자남산에서 따온 동네 이름이다.
용산동(龍山洞)
관훈동(冠訓洞)
동현동(銅峴洞)
손하동(孫河洞): 손하역 소재지
고려동(高麗洞): 송악산 바로 남쪽이다. 이름 그대로 고려에서 따온 동네 이름으로 송도고등학교의 원 소재지.
만월동(滿月洞): 고려의 정궁인 만월대가 있는 곳. 동네 이름도 만월대에서 따왔다.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의 원 소재지다.
태평동(太平洞): 개성역 소재지.
사직동(社稷洞):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사직동과 이름이 같다.
운학동(雲鶴洞)
덕암동(德巖洞)
광복 직후 일본식 지명 청산 과정에서 대화정(大和町)은 수창동으로, 지정(池町)을 자남동으로, 원정(元町)을 선죽동으로, 경정(京町)을 관훈동으로, 궁정(宮町)을 동현동으로, 동본정(東本町)을 동흥동으로, 서본정(西本町)을 서흥동으로, 북본정(北本町)을 북안동으로, 남본정(南本町)을 남안동으로, 남산정(南山町)을 용산동으로, 황금정(黃金町)을 손하동으로 개칭하였다.
이북 5도청에서는 북부, 서부, 남부, 동부 4명의 명예동장을 임명하고 있다. 특히 북부는 한옥이 집중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한 곳.
11. 개성 출신 실존 인물
경복흥
김인승
남철
마해송 - 아동문학가.
베니스의 개성상인: 안토니오 꼬레아, 유명훈(실향민이다.)
박완서: 정확히는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출신. 원래 개성군이었다가 1930년 송도면이 개성부로 승격되면서, 개성군의 잔여지역이 개풍군으로 개칭되었다.
양주동: 시인, 평론가, 학자.
오자복: 제21대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원병오: 조류학자
윤여정: 집안 대대로 개성 출신이라고 한다.
왕건을 포함한 고려 역대 국왕 및 왕족 상당수.
이세호
이애리수
민관식
김성환
신불출
임광정: 한국화장품 창업주.
임동균: 아마추어 바둑 기사.
오영수: 단, 성장한 곳은 파주이다.
전원주: 개성 출신이다.
최순우: 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오청성: 2017년 5발의 총알을 맞으며 판문점으로 귀순한 북한 군인. 개성에서 나고 자랐다.
개성댁
서경덕
차천로: 조선 중기의 문신. 서경덕의 제자.
마상원: 조선 중기의 문신.
최립: 조선 중기의 문신.
한석봉: 조선 중기의 서예가.
황진이
황희: 조선 초기의 재상. 흔히 아는 그 황희가 맞다.
12. 대중매체에서의 개성시
복거일의 연속 세계관인 역사 속의 나그네와 파란 달 아래에서는 남북연방 하의 명목상의 수도(파란 달 아래)에서 2037년 진정한 통일 이후로 2078년 '현재'까지 '조선공화국'의 수도가 된다(역사 속의 나그네). 만수대 의사당과 진봉구 유릉동 등의 지명이 나온다.
징기스칸 4에서는 고려의 수도로 나온다. 이슬람 상인이 말을 찾아 주지 않으면 기병 생산이 불가능하며 일본과 중국의 공격을 받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공예소를 지어서 공예 수치를 100 이상 올리면 재정이 넉넉해지고 식량도 금으로 사면 된다는 장점이 있다.
신비아파트 크리스마스 특별편: 할머니의 소원, 북에서 온 밀동귀에서 만식이와 만두집 할머니의 고향이 개성이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2013년 KBS2TV TV소설 은희의 스토리가, 한국전쟁 당시 개성에서 월남한 등장인물 및 2세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3. 여담
원래 경기도 소속 도시였던지라 분단 이후에도 흔히 떠올리는 "북한 억양"(서북 방언, 일명 '평안도 사투리')[36]과는 다른 경기 방언이 사용되는 지역이다. 개성 출신으로 2017년 판문점 귀순한 오청성 군이 방송에서 쓰는 말투를 보면 그냥 경기도 청년이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워낙 서울말이랑 비슷해서 귀순 후 딱히 말투 교정할 필요가 없었다고. 북중국경을 통해 탈북한 한 개성 출신 탈북자는 개성 지역 말투가 남한 말투와 별 차이가 없어서 중국에서 남한 사람으로 위장하고 머무를 수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개성공단이 운영되던 당시 출입증을 내고 공단내로 배송하던 택배, 퀵 기사들이 전하길 "이보라우"식의 북한 사투리를 예상했지만 거의 서울억양을 구사하는 북한 근로자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개성 출신 탈북자가 말하길 개성 출신은 아나운서가 절대 될 수 없다고 한다. 이유는 개성 사람들이 남한 억양을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평안도, 함경도와 다른 중부 방언의 억양을 사용하는 통천군 출신[37] 리춘히가 매우 유명한 아나운서가 되었고, 북한의 공용어인 문화어 자체도 서울말의 영향이 강한 언어이기에 언어적 측면에서 아나운서가 되기는 어렵지 않아 대한민국 정부가 수년 간 실효 통치했다는 등의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평양 출신 선생이 개성의 학교에서 수업을 하면 선생과 학생들이 서로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 강화도 경유 월북 사건 이후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따른 봉쇄 사실이 유일하게 대외 매체에 공개된 지역이다. 봉쇄가 장기화되자 북한 권력 2인자 최룡해가 급파되는 등, 개성시 내 생활고가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이런 봉쇄는 드문 일은 아니며, 11월만 해도 북중 국경의 혜산, 라선, 자강도[38]가 봉쇄되고 남포, 평양까지 봉쇄된 적이 있다고 한다. # 특히 혜산은 중국 전파로 휴대전화를 이용한 연락이 가능하며 사람 모습까지 찍히는 지역이라 11월 1~2일부터 20일 동안 봉쇄해서 주민들이 아우성이었다는 소식을 복수의 매체에서 찾을 수 있다.
평창올림픽 기간 동안 통일부와 경기도, 서울특별시 그리고 강원도가 개성만월대 남북공동 평창특별전을 열었던 적이 있다.
할미넴으로 유명한 배우 김영옥은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 출연했을 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북한의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갔었다." 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당시(1948년)의 상황은 철원 등 현재의 강원도 전방지역이 38선 이북의 북한 지배하에 있었고, 개성이 38선 이남으로 대한민국의 실효지배 영토였기 때문에 수학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6.25 전쟁이 났을 때 김영옥의 나이는 14살이었다고 이야기도 했는데[39]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뒤 불과 2년만에 남북분단으로 인해 개성을 갈 수 없게 된 셈이다. 개성 집에서 서울의 대학교까지 열차로 통학했던 경우도 있었다.
개성 왕씨, 개성 내씨, 해풍 김씨, 덕수 이씨 등이 개성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개성 지방에서 발행되는 신문으로 고려시보가 있었고, 황해도까지 보급되었다. 발행 기간은 1933~1941년, 1945~19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