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 “우아한 세계”(한재림 감독, 2007년, 15세)-
자연의 아름다움을 접할 때마다 부르는 찬송가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때의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다섯 식구의 가장으로서 행복한 가정을 생각하면서 그것에 이르는 길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절감하던 시기에 필자는 창세기를 묵상하며 문득 이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말씀 한마디로 만들어내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실까?” 일상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나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절감하고 있던 때라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필자의 특별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됨을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겠는지를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히브리 민족은 어떻게 세상의 생성을 그렇게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세상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신화를 접할 때마다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노력과 행복은 항상 비례하는 것이 아니고, 행복은 하나님의 선물로만 주어진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이지만, 이 진리를 인정하고 나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사실 하루하루의 삶을 꾸려가기에도 버겁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운운하는 것조차 사치요 딴 나라 이야기로만 들린다. 굳이 극단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도, 지금까지 역사를 거쳐 오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얼마이며, 그 대가로 얻은 세계는 어떠한가? 환경오염과 파괴의 현실은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고, 빈부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편견과 차별 속에서 신음하는 사회적인 소수자들은 얼마나 많고, 테러와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가!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이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상의 구원을 위해, 변혁을 위해, 혹은 개혁을 위해 노력했지만, 도대체 언제쯤이나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오게 될 것인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오직 말씀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하나님의 전능성에 더욱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다시 회복될 세상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에 비해 인간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지만, 반드시 되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면 사람들은 서로 힘을 모으려고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될 경우, 자신들의 운명으로 알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리수를 사용한다. 때로는 위법과 불법으로, 때로는 편법으로, 심지어는 폭력을 불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이 꿈꾸는 세계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세계의 모습은 과연 자신들이 꿈꾸고 원하던 대로의 모습일까,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세계일까? 그 결과에 대해 상당한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데,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는 이런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주는 것 같다.
출근길 교통 신호등 앞에서 깊은 잠에 빠질 정도로 몹시 피곤한 삶을 사는 사람, 강인구(송강호), 아내와 1남 1녀의 자녀와 함께 사는 평범한 삶을 꿈꾸며 살아가는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그는 아내 미령(박지영)과 딸(김소은)에게 심지어 ‘깡패’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가장으로서의 할 일은 폼나게 해보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다. 아니, 가족의 행복을 위해 매우 적극적인 40대 가장이다. 청과물 도매상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아파트 시공 사업권을 따내기 위해 협박하고, 그게 통하지 않으면 폭력도 불사하는 것이다. 조직에서 3인자인 그는 분명 조폭의 한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깡패에 가깝다는 것이 역할 분석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그러니까 강인구는 수압이 낮아 물이 잘 나오지 않는 아파트에서 벗어나 물 잘나오고 전망이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들이 꿈같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기 위해 피눈물 나는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는 그의 피곤함은 가족의 우아한 삶을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일 뿐이다. 정상적인 가장의 자리로 돌아가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엄습해오는 피곤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마음은 여느 남성들의 경우처럼 조직 내에서의 승진이 아니라 온통 가족의 행복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계획이 성취될 때까지 직장으로 가는 길은 늘 피곤할 수밖에 없다. 가족의 행복에 가장 큰 의미를 두고 있기에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 앞에서, 한편으로는 가족을 위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잘 알면서도 자신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고 따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주변을 과감하게 정리하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 일이 그렇게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조직 내의 경쟁자와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수감된다. 새로운 인생을 살 것 같은 상황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아들은 유학을 접어야 하고, 현재보다 더 좋지 않은 집으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을 예상한 인구는 갈등한다. 인구는 처음부터 꿈꾸었던 가족의 우아한 삶을 위해 조직폭력배인 친구에게 도움을 청함으로써 어쩔 수 없이(?) 또 다시 조직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전원주택을 구입하고, 이제는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우아한 삶을 기대했지만, 험한 삶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힘겹게 마련한 그 넓은 전원주택은 단지 인구의 독차지가 될 뿐이다. 아내와 딸이 아들이 있는 캐나다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조직의 일을 깨끗이 정리하지 못한 인구에게 불만을 품은 아내의 선택이었다고 여겨진다. 캐나다로부터 배달된 비디오테이프에 담겨진 가족의 우아하고 행복한 삶,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가족의 그 우아한 삶을 보면서 인구는 혼자 흐느끼며 라면을 먹어야 한다. 영화는 가족의 행복이라는 이름 뒤에 아버지들의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이 있어야 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이렇게 역설하는 것 같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회자되어 잘 알려진 일이지만, 비평가들과 여론은 인구에게서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인구의 깡패생활은 한국 남성들이 가족의 우아한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직장에서 겪어야 하는 조직사회를 은유한다는 것이다. 힘들다고 해서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직장에 충실하면 할수록 가족으로부터 점점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40-50대 가장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감독이 말한 대로 대한민국에서 가족은 팜므파탈(거부할 수 없는 묘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이용해 남자 주인공의 운명을 예기치 않은 나락으로 빠뜨려 헤어날 수 없게 만드는 악녀를 가리킨다.)임에 분명하다. 어떻게 시대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모르겠다. 가장의 수고는 가족 모두의 행복과 비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열심히 일하면 일할수록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게 되는 현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이게 된 것일까? 이것은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모습인가?
한편,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은 다른 대답을 얻게 된다. 영화라는 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의 스토리를 두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어설픈 일이 되겠지만, 영화가 말하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는 말이다. 먼저 한 가족에게 있어서 우아한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강남지역에 사는 것이고, 전망 좋고, 시설 잘 갖춘 전원주택에 사는 것이고, 자녀들이 유학에 가서 원하는 삶을 준비하는 것, 그것으로 가족의 삶이 우아하다고 볼 수 있는가? 작금의 대한민국은 자기 집이 있고, 자녀들이 대학입시로 인해 고민하지 않고 공부하며, 노후가 보장된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구가 꿈꾸는 ‘우아한 세계’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우아한 삶에 대한 잘못된 기대가 빚은 결과였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오늘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문제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좀 더 다른 차원의 우아한 세계를 꿈꿀 수는 없었던 것일까? 또한 우아한 삶을 위해 처음부터 선택한 직업은 아니겠지만, (불법과 위법으로 가득한 직장생활을 비유하는) 조폭의 일원으로 깡패짓을 해가며 우아한 가족을 꿈꾸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겠는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게 된 잘못된 방법은 가족을 부당하게 팜므파탈로 전락시키게 만들뿐이다. 그래서 인구의 아내와 자녀는 본의 아니게 악역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 해도 최소한의 윤리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기야 “쏜다”(박정우 감독, 2007, 15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 사회에서는 법을 지키며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 역시 직장과 가정에서 외면당하기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다. 법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이나 그것을 어기며 사는 것이나 가족을 팜므파탈로 만드는 일이라는 현실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된다. 도대체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족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삶에 대한 희망이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가족으로 돌아가려는 과정에서 만난 불의의 사고에 연루되어 범죄를 범해 인구는 수감된다. 수감 전과 수감 중에 손을 씻겠다는 말을 믿은 아내는 아들의 유학을 포기하게 할 생각을 할 정도로 정상적인 가족을 꿈꾼다. 아내를 통해서 사회 한 구석에 조금은 남아 있는 양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구는 오히려 그 일로 인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인구는 자신만이 빠져 있는 가족의 우아한 세계를 보면서 흐느껴야만 했다. 단지 영상 속에 있는 가족의 행복한 듯이 보이는 삶, 곧 그가 꿈꾸던 우아한 세계는 단지 이미지로만 존재할 뿐임을 말해주며, 우아한 세계에 대한 잘못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의 현실을 폭로한다.
이쯤 되면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해진다. 다시 말해서 감독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아버지를 비유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의 행복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가장들이 가정과 직장에서 겪는 모습을 인구의 삶에 비유해서 보여주면서 우아한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으며, 가족의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 무엇을 지켜야 할 것인지를 제시해 준 것이다. 대한민국(비록 모든 사람에 해당되는 말은 아니지만)의 다수가 꿈꾸는 우아한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를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첫째, 우아한 삶은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아한 삶을 위해서는 가족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 셋째, 우아한 삶은 결코 넓은 주택과 물질적인 풍요로움의 이미지와 동일시 될 수 없다. 우아한 세계에 대한 바른 비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한 우아한 세계를 위해서는 정당한 노력이 기울여져야 한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깨닫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과 관련해서 모든 인류가 꿈을 꾸는 행복한 세상이 어떠한 곳인지를 고민한 히브리 민족은 그 대답으로 창조론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곧 세상 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졌다고 고백한 것인데, 달리 말한다면, 우아한 세계에 대한 비전이나 그것을 위한 노력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요, 의지이며, 미래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관철된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대로 된 것이며, 하나님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의 기준을 갖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게 삶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먼저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관철되었을 때 얻어질 수 있는 선물이다. 결코 무리수를 써서 획득될 수 있는 결과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운 세계를 평가하는 기준이 나온다. 곧 세상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미학적인 관점에서만 평가될 수는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힘겨운 수고와 노력이 기울여졌다고 해서, 보고 듣는 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이 있다. 하나님은 세상을 결코 말씀 한 마디로 새롭게 창조하시지는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있든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이곳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그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 “우아한 세계”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떠한 것이며, 그러한 세계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들의 우아한 세계’를 위해 하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의 능력만으로 가능할 수 있었지만, 아들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길을 택하신 하나님의 그 깊으신 뜻을 헤아려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것을 시사하며, 우아한 세계를 위해 우리가 어떠한 고난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암시해준다. 하나님의 세계는 불법이나 위법, 혹은 편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 부름을 받은 자들의 희생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경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출처: 기초신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최성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