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베레쉬트(근원) 안에는 기쁨의 눈물이나 슬픔의 눈물이 없다.
2)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현상으로는 ‘베레쉬트’를 알아볼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 마음 너머에 있는 ‘베레쉬트’를 알 수가 있는가?
3) ‘베레쉬트’와 하나 되었을지라도 휘장에 나타난 천사 곧 엘로힘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된다.
4)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죄의 개념 안에 있으므로 만들지 아니하신다.
5) 구약의 엘로힘은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다.
나. 본론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라(계 21:4).”
1) 베레쉬트(근원) 안에는 기쁨의 눈물이나 슬픔의 눈물이 없다.
우리의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느끼고, 생각하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모든 알음알이들 이 모든 현상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영원히 죄과 만나지 아니한다.
2)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현상으로는 ‘베레쉬트’를 알아볼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 마음 너머에 있는 ‘베레쉬트’를 알 수가 있는가?
바로 엘로힘(하나님)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창 2:4 이후에는 야훼 엘로힘(여호와 하나님)이 등장한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휘장 너머에 있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때 휘장을 반드시 거쳐서 들어간다.
그런데 이 휘장 안쪽에 천사의 그림이 나타나 있다. 비유다.
지성소 안에서 대제사장이 제물이 된 짐승의 따뜻한 피를 들고 들어가서 지성소에 뿌리기 전에 반드시 향을 먼저 피우는데 그 향을 지성소 안에 휘장에 나타난 천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향을 피워야 한다. 향을 피우고 나서 이때 휘장에 있는 천사의 그림이 대제사장의 눈으로 들어오면 그는 죽게 된다.
3) ‘베레쉬트’와 하나 되었을지라도 휘장에 나타난 천사 곧 엘로힘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된다.
‘베레쉬트’는 어떠한 반응도 없는데 휘장에 나타나 있는 천사 곧 엘로힘 하나님을 보면 죽게 된다. 지성소 안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휘장(마음)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눈에 보였다는 것은 마음이 생겼다는 비유다. 생각하고 인식하고 반응하고 하는 알음알이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대제사장을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이때 사람이 지성소 안으로 못 들어가니 대제사장의 몸에 묶고 들어간 끈을 잡아당겨 지성소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마음(휘장)이 있는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은 고난의 과정 안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비사와 비유로 되어 있다. 천국에는 마음이 없다.
모두들 천국에 대한 개념을 잘못 알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는 대단한 기쁨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런데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
4)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은 죄의 개념 안에 있으므로 만들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만들지 아니하였다. 나타난 시공과 물질의 세계를 우리에게서 모두 물러가게 하신다.
비유로 되어 있는 여기에 답이 있다.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과 맞대면 하고 있다. ‘베레쉬트’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결코 만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애원해도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런데 엘로힘(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
이 엘로힘(하나님)의 역할은 오직 ‘베레쉬트’에게로 안내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일곱째 욤까지 이 일을 하신다.
5) 구약의 엘로힘은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다.
이 분(엘로힘)이 신약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베레쉬트’ 곧 내 안의 몸 된 성전의 지성소 안에 계시는 아버지에게로 인도하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창 1:1, 요 1:1에서 ‘태초로’ 오역한 ‘베레쉬트’ ‘엔 아르케’를 새 언약에서는 근본 곧 그리스도라고 정의한다. 이를 알려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 세상(코스모스) 안에 오셨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