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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리스 정부 소속 과학자들이 그리스 남부 #펠로폰네소스반도 에서 '테네아'라는 #고대도시 유적을 발굴했어요. 테네아는 트로이전쟁으로 트로이가 멸망한 뒤 생존자들이 도망가서 세운 도시라고 해요.
#트로이전쟁 은 서양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 (Ilias)의 소재입니다. 10년에 걸친 트로이전쟁 중 마지막 해에 약 50일 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파리스 등 쟁쟁한 영웅들이 등장하는 흥미로운 전쟁 이야기로 유명하지요.
#트로이목마 로 유명한 트로이전쟁은 신화냐 역사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어요. 지금은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고 있지요. #테네아 가 #발굴 되면서 트로이전쟁이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사실 이었다는 증거가 하나 더 늘어난 거예요.
트로이의 존재가 증명된 건 19세기 #독일 고고학자 #하인리히-슐리만 (Schliemann · 1822~1890·작은 사진 ) 덕분이에요. 그는 유년 시절 읽은 '일리아스'를 그대로 믿고, 직접 트로이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어요.
◇ 호메로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슐리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잠깐 먼저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 '일리아스'에 대해 알아볼게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Odysseia)의 #작가 #호메로스 는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입니다. 기원전 8세기 말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지만, 정확히 언제 태어나 언제 숨졌는지는 알 수 없어요. 그가 정말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썼는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정리한 건지도 확실치 않죠. 호메로스가 여러 명이라는 주장도 있어요.
트로이전쟁은 호메로스가 살던 시대보다 수백년 앞선 기원전 1300~1200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해요. 하지만 호메로스 이전에 이 전쟁에 대해 기록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아요. 짐작하건대 트로이전쟁은 여러 #음유시인 의 기억과 #노래 를 통해 #구전 된 것 같아요. '일리아스'라는 제목은 #일리온 (Ilion)의 노래'라는 뜻이에요. 일리온은 트로이의 다른 이름이랍니다.
▲ #터키 동부에 남아있는 #트로이유적 .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가 진짜라고 믿고 19세기 이곳에서 트로이 #유적 을 발굴 해내요. 허구인 줄 알았던 트로이가 역사였다는 게 확인된 거죠. 트로이 문명 유적은 1998년 #유네스코세계유산 으로 #등재 됐어요.
터키문화관광부
다만 우리가 흔히 아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일리아스'에 나오지 않아요. 트로이전쟁을 다룬 여덟 편의 #그리스서사시 를 #에피코스키클로스 라고 부르는데요, 그중 두 번째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랍니다. '일리아스'는 #바다 의 #여신 #테티스 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그리고 있지요.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는 다섯 번째 서사시인 #일리오스의함락 에 나옵니다. 이건 호메로스가 아니라 #아크르티노스 라는 시인이 썼다고 알려져 있어요.
'일리아스'와 함께 호메로스가 남긴 또 다른 작품이 일곱 번째 서사시 '오디세이아'랍니다. #그리스 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역경을 딛고 10년 걸려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죠.
사실 슐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하기 전까지 대다수 사람은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문학적 허구라고 생각했어요. 슐리만의 발굴로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지요.
◇ 슐리만의 트로이 발굴
슐리만은 1822년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 태어나,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자랐어요. #고대사 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가 어린 슐리만에게 #그리스·로마이야기 를 들려주곤 했지요. 어린 슐리만은 어딘가에 트로이 유적이 묻혀 있을 테니, 발굴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는 14세에 식품점 직원으로 일하게 돼요. 어느 날 가게에 술 취한 손님이 들어와 '일리아스'의 일부를 그리스어로 낭송하는 걸 듣고, 잠시 잊고 있던 꿈을 다시 떠올렸지요. 이후 슐리만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회사에서 일하게 됩니다. 일이 잘 풀려서 1845년 러시아에 무역회사를 세웠어요. #러시아 와 #오스만제국 이 #크림전쟁 (1853~1856) 을 벌일 때 군수물자를 팔아 큰돈을 벌었죠. 돈을 충분히 모았다고 판단했을 때 그는 사업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고고학발굴 에 뛰어들었어요.
그때까지 많은 사람은 터키의 부나르바시 마을이 트로이가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슐리만은 그보다 북쪽에 있는 #히사를리크 일 거라고 봤어요. 그쪽이 호메로스가 묘사한 지형에 더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했죠. 히사를리크는 에게해와 마르마라해를 잇는 다르다넬스 해협 서쪽 끝에 있어요.
슐리만은 1871년 히사를리크 발굴에 착수했어요. 놀랍게도 이 지역은 한 시대의 유적 위에 다음 시대의 유적이 층층이 쌓여 있는 곳이었어요. 무려 아홉 층이 쌓여 있었지요. 그는 그중 두 번째로 오래된 층(기원전 2500~2200년 추정)에서 성벽과 성문 유적을 발견했고, 트로이 유적이라고 확신했어요.
지금까지 나온 연구 성과를 종합하면, 진짜 트로이 유적이 묻힌 층은 슐리만의 생각과 달리 그보다 1000년 뒤에 형성된 일곱 번째 층(기원전 1275~1100년 추정)이었어요. 슐리만은 커다란 업적을 세웠지만 안타깝게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고고학자 가 아니었어요. 그는 오로지 트로이 발굴에 몰두했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 까지 써가며 성급하게 땅을 파헤쳤어요. 그 바람에 일곱 번째 층에 있던 진짜 트로이 유적 상당 부분이 #파괴 되어 버렸지요.
그런 이유로 "슐리만은 #아마추어 였을 뿐"이라는 비판이 나와요. 발굴한 유물 일부를 빼돌린 탓에 #도굴꾼 이라는 욕도 먹지요. 하지만 그의 열정으로 수천년 잠들어 있던 유적이 빛을 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요. 지금도 #고고학의선구자 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출처: 프리미엄조선|[윤서원]이대부고 역사교사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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