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개요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와 아사를 통하여 하나 되는 것이 몸 된 성전의 완성이다.
2) 바라(개간)와 아사(완성)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하나님의 일의 마침이 된다.
3) 바라(개간)는 관사가 없고, 아사(완성)는 관사가 있는 것은 각자 안에서 몸 된 성전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4) 조건 지어져 일어나는 것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땅에 관한 일들이다.
5) 프로 카타볼레스 코스무(율법)에 머물러 있는 한 광야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 본론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창 2:4).” 번역 자체가 잘못되었다.
(‘엘레 톨도트 핫사마임 베하레츠 빼아빠레함 빼욤 아스트 예와 엘로힘 에레츠 베샤마임’ : 바른 해석은 이것들을 야훼 하나님이 땅(地)과 하늘(天)들을 온전케(아사) 하시는 욤(光) 안에서 이미 ‘바라’된 그 하늘들과 그 땅의 자손(후손)들이다.)
신학자들이 한글 성경 번역 과정에서 여호와 하나님(예와 엘로힘)께서 우주(천지)를 창조하신 것으로 오역하였다. ‘바라 된(수동태)’으로 설명한 것은 온전케 하시고자 아사하는 것의 시작인 ‘바라’ 동사다.
1)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와 아사를 통하여 하나 되는 것이 몸 된 성전의 완성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라’와 ‘아사’의 관계를 잘 나타내어 설명하고 있다. 온전케(아사) 되면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이 세워진다. 그리고 엘로힘(남성) 하나님은 쉬신다. 더는 내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을 세우는 일은 끝나게 된다. 내 안에서의 일이므로 엘로힘 하나님은 안식에 들어가시므로 나타나지 않는다. 사라진다. 있을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신약에서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절차다. 모두 ‘히다’와 ‘마샬’과의 관계 속에서 비유로 등장하고 있는 내용이다.
2) 바라(개간)와 아사(완성)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하나님의 일의 마침이 된다.
‘바라’ 동사와 ‘아사’ 동사를 모두 ‘창조하다’ ‘만들다’로 오역하였는데 ‘바라’와 ‘아사’는 한 쌍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다. 하나님은 ‘바라’를 시작하시면 ‘아사’하시기까지 일을 마치신다. ‘바라’는 알파(시작)에 해당하고 ‘아사’는 오메가(마무리)와 같다.
하나님이 한번 시작하시면 반드시 완성하신다. 온전케 하시고자 하는 것은 곧 자손들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몸 된 성전에 거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완성이다.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곧 그리스도 예수다. 우주 천지를 창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바라’와 ‘아사’와의 관계로 나를 살리기 위함ㅂ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곧 후손이 되는 것이다. 내가 겉 사람에서 속사람으로 회복함으로써 새 하늘과 새 땅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 됨이다.
아들 안에는 아버지가 거하신다.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다. 인생들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들의 개념은 ‘아버지와 내가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가능할지는 모르나 몸은 하나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면 아버지도 없어지고 아들도 없어진다. 이것이 무아다.
3) 바라(개간)는 관사가 없고, 아사(완성)는 관사가 있는 것은 각자 안에서 몸 된 성전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비유로 되어 있어서 이 세상의 개념과는 다르다. 앞에 등장하는 땅(에레츠)과 하늘들(샤마임)은 관사가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나타날 그 하늘들과 그 땅의 후손 곧 하나님의 자녀들은 각자 안에서 나타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늘들과 그 땅 뒤에 나타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두 관사가 있다. 이미 ‘바라’하여 온전케(아사) 하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 ‘바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 등장하는 땅과 하늘들에는 관사가 없다. 그리고 하늘(샤마임)보다 땅(에레츠)이 바뀌어서 땅(에레츠)이 먼저 등장한다. 지(에레츠) 천(샤마임)이다. 왜냐하면,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개념(땅)이 먼저 개간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갈애(渴愛)로 가득한 마음의 하늘은 당연히 바뀌게 된다. 샤마임(하늘)은 에레츠(땅)와 온전히 하나님이 거하실 몸 된 성전으로 바뀌게 되면 몸 밖을 향해 있던 갈애(渴愛)을 품고 있는 샤마임(하늘)은 끝이 나서 내면의 세계로 돌아서게 된다.
여기 등장하는 에레츠(땅)는 나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내가 사람이다. 여자(남자)다. 나이가 얼마이고 자손들이 있고 사회에서 직업이 무엇이고 얼마의 부를 이루었고 무엇을 공부하고 무엇을 경험하고 무엇을 취미로 하고 등등 나(겉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겉 사람에게 속한 것들이다.
4) 조건 지어져 일어나는 것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땅에 관한 일들이다.
이 땅(이루어진 것)을 토대로 서 있고, 이것을 토대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들 곧 꿈(하늘)을 꾸는 것에 불과하다. 모두 조건 지어져 일어난 것들이다. 이 개념을 부수는 것이 ‘바라’다. 조건 지어져 나타나는 것은 모두 허상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변한다. 조건에 의하여 변하는 것은 무상하고 고통이며 진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조건에 의하여 변하는 그 하늘과 그 땅을 갈아엎어 해체하여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 곧 옥토 밭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몸 된 성전이 자손들 안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온전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아직 세워지지 아니하였고 다만 세워지는 것을 계획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땅과 하늘 앞에 ‘그’ 관사가 붙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기를 땅(地) 천(하늘)의 자손들이 온전케 나타나길 원하시는 말씀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현재의 일이다.
5) 프로 카타볼레스 코스무(율법)에 머물러 있는 한 광야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창세 전’으로 오역한 ‘프로 카타볼레스 코스무’로 머물러 있는 한, 세상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광야생활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상태로는 결코 휘장(마음)은 찢어지지 않는다.
종교 활동 안에서 예수 믿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원어 성경을 풀어서 파헤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 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에고만 더욱 쌓아갈 뿐이다. 내가 내 마음을 해체하고 분석해 들어가서 그 내면에 있는 마음의 실상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문제를 결코 우리를 대신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다. 대속이 아니라 속죄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하는 과정을 우리에게 기준으로 보여주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 죄는 내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처리하였던 기준을 따라 내가 내 마음 밭을 개간하여 끝내는 그 실상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라(개간)’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처음 말씀하신 ‘아포 카타볼레스 코스무’와 ‘메타노에오’로 말씀하신 것이다.
생명의 빛과 그 안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