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곤돌라, 벤프 공원
뉴욕에서 느긋하게 일주일여를 보내고 캐나다 앨버타에 있는 벤프로 간다. 적응이 잘 안 되는 비행기 탑승, 수속과 짐 검사에 기다림까지 만만치 않다. 아침 일찍 떠났는데 캘거리에 도착하니 화사하고 옅어진 오후햇빛이 우리를 맞는다. 캐나다에서는 차를 렌트해서 다닌다고 한다. 면허는 세 사람이 가지고 있지만 국제면허등록은 두 딸만 했다. 경력이 제일 많은 나는 국제면허 신청을 하지 않아 운전할 수 없다. 내 차가 아니면 못하는 게 내 한계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 혼다 8인승 차량을 빌렸다. 모르는 곳이니 차량 길안내가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데 구조가 다르니 어려운가 보다. 스마트 폰으로 확인하고 둘이 열심히 시도해도 잘 안 되어 주변 주차요원에게 부탁해서 간신히 정상화를 이루었다. 앨버타의 벤프 지역 숙소로 간다. 중간에 한인마트에 들렀다. 살 것이 꽤 많다. 딸들은 그곳에 근무하는 한국여성과 이민, 자녀교육 같은 대화를 나누는 눈치다. 살기 괜찮다는 얘긴가 보다.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모르는 길을 잘도 간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완연한 가을 색에 높은 건물이 없고 집들이 비슷비슷하다.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고 산들에는 초목이 자라는 곳과 돌만 보이는 밋밋한 부분이 분명히 구분된다.
어두워서야 사흘간 머물 숙소에 도착했다. 머물 곳이 3층인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승강기는 고장 났고 머무는 동안 내내 그 상태일 거란다. 통로를 찾느라 고생하고 짐을 힘들여 옮겨놓으니 긴장이 풀렸다. 그래도 숙소는 만족스럽다. 창유리로 보이는 풍광이 빼어나고 벽난로가 훈훈함을 더하는데다 넉넉한 공간 큼직한 식탁과 다탁이 느긋하다. 세면장과 화장실도 두 개로 여유롭다. 이 숙소에만 머물러도 기분전환이 충분할 것 같다.
벤프에서의 첫날, 국립공원에 갔다. 오전은 주변을 둘러보고 기념품점도 들르고 식사하는 일정인가 보다. 버스가 몇 대 오고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더니 알록달록한 깃발을 들고 함성을 지른다. 동성애자들이 행진을 벌이는가 보다. 공원이 갑자기 시끌벅적하다. 주변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하지만 언어가 귀에 익숙지 않아 상황이 명확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이곳에서도 한국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난다. 오가는 말들을 한두 마디만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다.
오후에는 호수를 보러 갔다. 벤프에는 호수가 많은 것 같다. 레이크 루이스, 미네완카, 모레인 같은 기억나는 호수도 있고 이름이나 풍경이 떠오르지 않는 호수들도 보았다. 넓은 수면에 녹색의 물결들, 호수를 둘러싼 눈들을 이고 있는 산들이 연상된다. 몇몇 호수는 차를 놓고 호수까지 왕복하는 버스로 오갔는데 때로 어린 중국 관광객들로 시끄러운 여정이 되기도 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중국인들 자부심의 바닥을 본 듯하다. 많은 인구와 오랜 역사, 나름의 문화로, 한 때 굴욕을 당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인 중화(中華)고 다른 민족은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모두 자신들만 못한 오랑캐 야만인들이라는 의식이 가득한가 보다. 그러니 어느 곳에서도 기죽지 않고 저리 떠들지…. 한편으로 슬며시 부러움이 일기도 한다.
해질녘이 되어서 벤프 곤돌라를 타러 갔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이용료가 더 비싸단다. 한 사람에 칠팔만 원 하는가 보다. 나와 아내는 그거 왜 타려하느냐는 마음이다. 한 시간여 머물걸, 그것도 곤돌라는 십여 분 타는데 수십만 원을 들이는 것이 못마땅하다. 곤돌라는 상황을 살펴 다음날 타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진 곳이라 전체적으로 무선통신이 잘 되지 않는지, 우리 숙소만 그런지 조금은 불편하다. 하지만 겨우 사흘을 머문다 해도 안락한 쉴 곳이 있으니 좋다. 그냥 바깥 풍경만으로도 이국적이고 여행의 정취가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을 잘도 달린다. 이번 여행으로 딸들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걱정과 염려가 있었는데 넉넉한 유능함을 보았다. 이제 딸들이 아닌 우리 부부가 걱정이다. 딸들은 시대와 문화에 잘 적응하고 능력 많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한 세대 뒤쳐진 나와 아내에게 힘에 겨운 세상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점점 더 힘이 드는 세상이다. 정보통신에 익숙지 못한 이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풍광이 빼어난 곳들을 돌아보고 해떨어지기 전에 곤돌라 타는 곳에 도착했다. 어제 인터넷으로 예약해 조금 더 싼 가격이 되었나 보다. 딸들은 곤돌라로 산을 오르는 것에 약간은 멀미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나도 아주 조금은 염려스럽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여러 대가 운행되니 기다림의 시간이 짧다. 우리 넷이 탄 곤돌라가 앞뒤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산을 오른다. 아래로는 거리가 있어 다들 내려다보지 못하지만 나는 시력이 안 좋으니 오히려 보이는 게 분명하지 않아 별반 두려움이 없다. 흔들림에 조금 메스꺼움이 있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몇 분 걸리지 않아 정상에 도착했다.
석양, 저녁놀이 붉고 어둠이 서서히 몰려올 듯하다. 더 높은 봉우리까지 가는 길이 만들어져 있다.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관람객들을 위해 설치해 놓았다. 어둠이 밀려오고 날씨가 쌀쌀해 그냥 돌아갔으면 싶은데 아내는 굳이 다녀오잔다. 내 의견에 동의를 얻으려 자녀들에게 물었더니 다 갔다 오잔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스름에 거대한 산맥의 등줄기를 보는 것은 장쾌하고 웅장했다. 그 규모가 놀랍다. 그것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았다. 돌아오는 곤돌라는 어둠속에 오히려 편안했다. 때로는 볼 수 없고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초저녁 어둠속, 평생 기억에 남을 독특한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