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복李山福 1545 ~ 1587 묘지명 –백사 이항복
선교랑(宣敎郞) 행(行) 수성금화사별제(修城禁火司別提) 이공(李公)의 묘지
중씨(仲氏)의 휘는 산복(山福)이고 자는 중고(仲高)인데, 가정 을사년에 태어나서 만력 정해년에 작고하였다. 글공부를 하여 진사가 되었고, 벼슬은 별제(別提)에 그쳤다. 1남 1녀는 난리를 만나서 죽은 곳을 알 수 없게 되었고, 나머지 1녀는 봉사(奉事) 이천준(李天駿)에게 시집갔다. 측실에서 낳은 한 아들은 주남(宙男)이다. 중씨가 작고한 지 17년 뒤인 계묘년에 그 막내 모(某)가 비석을 세워서 묘(墓)를 표하고 인하여 그 유허(幽墟)에 몇 마디 말을 기록하여 묻어서 후인들로 하여금 그곳을 알게 하는 바이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 휘 모(某)는 우리 선군(先君)인데, 청렴하고 검소하고 관후하고 화락한 인품으로 중종ㆍ명종의 조정에서 이름이 있었고, 전주 최씨(全州崔氏)인 결성 현감(結城縣監) 모의 딸은 우리 선비(先妣)인데, 정숙하고 유순하고 인자하기로 종당(宗黨) 사이에 추앙되었다.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 휘 모는 우리 선조(先祖)이고, 안동 판관(安東判官) 휘 모는 우리 증조이다. 우리 이씨는 경주(慶州)에서 나왔는데, 신라의 처음에 휘 알평(謁平)이란 분이 있어 혁거세를 보좌하여 익대(翊戴)한 공훈이 있었고, 신라ㆍ고려를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훌륭한 사람이 있었다. 중씨는 막 나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7세에 서사(書史)를 읽었고 9세에는 글 지을 줄을 알아서, 입을 열고 말을 내놓기만 하면 광채가 사람을 경동시켰다. 그때에 안군 여경(安君汝敬)은 재물이 풍부함을 자부하였는데, 딸 하나를 대단히 사랑하여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 거드름을 떨며 태학의 제생(諸生) 가운데서 배우자를 고르다가, 공의 글을 보고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어 마침내 위금(委禽)을 하였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서로 하례하면서 이르기를, “공명(功名)을 조석 사이에 턱 밑의 수염 뽑듯이 쉽게 취할 것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공은 약관 시절에 비장(脾臟)을 상하여 다시 학문에 힘쓰지 못한 관계로, 누차 응시하였으나 끝내 급제하지 못하고, 늦게야 공거(公擧)에 의하여 벼슬길에 진출하였다.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진솔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宣敎郞行修城禁火司別提李公墓誌 仲氏諱山福。字仲高。生於嘉靖乙巳。卒於萬曆丁亥。治書成進士。仕宦止別提。男女二人。遭亂失死所。餘一女。適奉事李天駿。廁室生一子。曰宙男。後十七年癸卯。其季某竪石表墓。仍坎辭幽墟。俾後人識其所。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諱某。吾先君也。以淸儉寬和。有名中,明朝。全州崔氏結城縣監某之女。吾先妣也。以貞淑順仁。見推宗黨間。成均進士諱某。吾先祖也。安東判官諱某。吾曾祖也。吾李氏。出慶州。新羅之始。有諱謁平。佐赫居世。有翊戴勳。羅麗迄今。聯世有人。仲氏生而穎悟。七齡。誦書史。九齡。知屬文。開口吐辭。燁然動人。時安君汝敬。自負財饒。奇愛一女。偃蹇其偶。擇對於庠諸生。見公文大異之。遂委禽焉。士大夫相賀。謂爲功名可朝夕頷髭摘矣。弱冠傷脾。不復力學。累擧卒不第。晩以公擧進。性怛率不爲表襮。其孝友天至也。
|